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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딸린 음악이나 그림 등, 원문을 확인하시려면, 가브리엘신부님께서 사목하셨던 아래의 옥계본당 홈페이지를 방문하셔서 자유게시판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옥계본당 홈페이지 주소 http://www.o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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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속된 수도회 예수고난회는 십년에 일년씩 안식년을 갖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신서원을 한 후 서품 받고 몇 년간 사목생활을 하다가 수도회 장상들의 식별에 따라 국내 계속교육이나 국외계속교육을 다녀옵니다. 장소,기간이나 전공과목도 장상과 협의해 결정하지요. 계속교육 후 10년 일하면 일 년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구요. 본래 안식년은 7년에 1년이지만, 각 교구나 수도회의 형편에 맞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계속 말해야 하고, 가르쳐야 하는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재충전의 기회가 없으면 그야말로 고장 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되거든요^^
저도 로마 유학후 십년이 지나 모처럼 2001년에 안식년을 얻어, 소위 중년의 위기라고 하는 기간을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고비는 넘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젊은 청년의 열의도 세월이 지나며 빛이 바래질 수 밖에 없겠지요. 마흔이 된 사람이 19세 때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주책이 될테니까요. 나이에 걸맞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테고, 그에 따라 자신의 성소도 재해석되어야 하니까요.
저는 2001년 1월 3일 하도 눈이 많이 퍼부어 비행기가 뜨려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공항으로가, 다행히 예정대로 미국의 샌. 프란시스코로 갔습니다. 샌. 프란시스코 위의 오클랜드에 있는 버클리에서 한 학기동안 사목신학을 공부하고, 안식년 후반기는 예루살렘에서 성서 고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버클리에서 공부할때는 모두가 저보다 한참 선배여서 제가 안식년을 누리는것에 대해 죄의식까지 생길 판 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영계였다니까요. 대충 60이 다 넘은 분들이었으니까요. 뒤돌아보니 알게 모르게 수도자로서도 성직자로서도 한참 선배였던 그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도움도 많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사목신학전공반의 거의 70%가 아이리쉬 들이어서 제가 아이리쉬 마피아라고 했었지요. 우리나라는 아이리쉬인 골롬반 신부님들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지요. 지금 이 옥계본당의 건물도 그분들이 지은것이잖아요. 안식년 후반기는 미국 시카고 CTU(시카고신학대학) 에서 조직한 성서 고고학팀의 일원으로 성서사적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체 인원이 20여명 정도 되었던가 다들 저보다 훨씬 연장자들이었습니다. 인원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어쩌면 외국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저정도의 나이때 안식년을 얻으면 공부하지 않고 놀러가나봐요^^여하튼 전부 외국인이었고, 미국인이 상당수 되었고, 영국, 호주, 아일랜드등 주로 영어권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예루살렘을 본거지로 갈릴레아나 요르단, 터어키등 성서의 사적이 있는 곳을 답사하고 수업을 병행하는 코스였습니다. 그 당시 지인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썼던 저널을 연재할까 합니다. 간혹 전문적인 내용도 나오는데, 형편에 따라 삭제하던가 하겠습니다. 혹시 그런부분이 나오더라도 흥미있는 분은 읽으시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은 그냥 뛰어넘고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서 고고학 프로그램이 그리이스로 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신약성서 시대가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조류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금의 세계가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무시하고 이해될 수 없듯이, 신약성서의 저작연대를 전후한 시대의 이해를 위해서는 헬레니즘을 반드시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반미운동을 하더라도 청바지 입고 햄버거 먹고 코카콜라 마시면서 할수밖에 없거든요. 좋아서라기 보다 제일 접하기 쉽고 경제적으로도 싸기 때문이지요. 삶을 지배하는 많은 시스템이 그들에게 맞게 이미 짜여져 있는 틀속에서 우리가 게임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그리스도교의 태동을 둘러싼 헬레니즘도 당시에는 이런 아메리카나이제이션과 같이 그레꼬 로망사회의 일원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구도 자체였습니다.
또한 서양문명 자체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종합이라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그리스도교의 태동을 전후한 헬레니즘의 이해는 그레꼬 로망사회를 이해하는데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필수입니다. 그리이스의 과거이름은 헬라였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이란 말이 나온거지요.
모든 코스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프랑크프르트로 가는 날 새벽 1시에 예루살렘에서 전체 팀이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에서 출국하기 위해서는 무려 4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거든요. 얼마나 철저하게 몸수색과 짐수색을 하는지요! 예루살렘에서 고고학 코스를 마무리 짓는 미사를 집전했던 레슬리 교수는(구약 시편전공-프란치스칸 신부님) 참 마음에 남는 강론을 하셨지요.. 지금도 저에게는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의 요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에게는 책상이 제대입니다. 컴퓨터, 그리이스어 사전, 히브리어 문법책 등은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저는 이 제대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을 섬깁니다” 학자로서 참 훌륭한 자기이해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약 3달 넘게 걸린 여정동안 총 39통의 편지를 썼더군요. 날자 순으로 게재하려고 합니다. 당시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문체의 변경이나 첨삭은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성서와 성지에 대한 교우 여러분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아쉽게도 사진은 지금 제 컴에 없습니다. 수도원의 컴에 내장되어 있어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한꺼번에 올리려고 합니다.
성서사적지 저널 1
제목 아테네
보낸날짜 2001년 08월 24일 금요일, 오전 10시 16분 12초 -0400
시카고 오헤어 공항을 4시 반에 떠나서 대서양을 건너 아일랜드 상공에 다다른것이 11시입니다.
지금은 11시 20분(시카고 시간) 도버해협을 건너고 있어요.
태평양은 여러 번 건넜지만 대서양을 건너기는 처음입니다. 태평양이 정말 큰 바다인가 봐요. 대서양은 기껏해야 7시간이면 넘는데 말입니다.
프랑크프르트에 12시 30분에 도착했는데, 독일인들에 대한 인상은 별로 입니다. 여러 국적의 비행기를 타보았지만 루프트 한자처럼 비좁은 좌석은 처음이구요, 음식도 대단히 정성이 없고.... 독일인답게 무엇이나 근검절약하는 것이 여기도 반영된 듯 합니다. 우리가 이 항공사를 선택한 이유도 제일 싸기 때문이거든요. 공항에 접근하면 인터네셔널 에어라인이니까 당연히 로컬 시간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그런 서비스도 없네요. 술취한 독일인들이 비행기안에서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프랑크프르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테네에 도착한 시간이 이곳 시간으로 12시 40분, 아직 시계를 고치지 않아서 제 시계는 시카고 시간으로 오후 4시 40분 이군요.
그리이스의 첫 인상은 Barren, 메마른 황무지 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산들도 거의 벌거숭이인데다가, 나무라고 있는 것은 볼품없는 올리브등의 키작은 관목들만 듬성듬성 있어서요.
오늘은 긴 여행 끝이라 일찍 쉬고, 아마 내일부터 아레오파고 광장등 우선 아테네 근처의 성서사적을 돌아본다고 합니다. 다시 소식 전하지요.
성서사적지 저널 2
제목: 아테네-아크로폴리스
날짜: Sat, 25 Aug 2001 10:24:08 -0400
2001. 8. 25 아테네
아침 8시 반에 묶는 호텔을 떠나 Acropolis 로 향했지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오로가 아레오파구스에서 선교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아테네에서 실라를 기다리다 지친 바오로는 아테네 시에 수많은 이교신들이 있는것을 보고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었나봐요. 그래도 그곳이 적진 한가운데라서 십자가라든가 그런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고 무척이나 온건한 이야기만 했더군요. 하긴 뭐 누울 자릴 봐가며 누워야겠지요. 그런걸 요즈음은 Inculturation(토착화)라고 하잖아요.
가는 길은 시장을 통해 있는데, 생선가게랑 과일 가게등이 서울의 남대문 시장 비슷했습니다. 지중해는 문어가 유명하지요.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마피아를 문어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삶아서도 판다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초고추장을 들고 가면 되겠다 싶군요.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약 170 미터, 아테네 도시보다는 약 100미터 높은 언덕입니다.
Acro 라는 희랍어자체가 언덕, 높은 곳을 뜻하고 폴리스는 나라나 도시등을 의미하지요. 한군데의 완만한 접근로를 빼고서는 모두 거의 절벽이고 또 성으로 둘러쌓여서 외적을 방비하기에는 안성 맞춤이었을겁니다. 게다가 물도 나왔다고 하니까.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신전이라고 하면(temple) 우리들 개념으로는 오늘날의 교회를 떠올리기가 십상이지만, 기원전 5c 파르테논 신전이 건축될 당시 에는 Temple 의 개념이 아주 달랐다는군요. 교회는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서 신께 통교하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란 목적을 지녔지만, 고대의 신전은 사람들이 바깥에서 보면서 경외심을 갖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파르테논의 뜻은 "하느님의 집" 입니다. 보통 신전(성전)은 첫째 종교적인 경외를 드리는 목적 , 둘째 정치적인 목적 세째는 경제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지요.
이스라엘도 바빌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586. BC 한참후에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개혁때 다시 아주 작은 규모로 성전을 짓게 되지만, 유대인들이 이 성전건축에 열의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왕도 없었고 정치적인 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대단히 정치적인 헤롯이 집권하면서(BC 20경) 처음으로 시작했던 대 건축이 성전의 재건 이었을겁니다. 혜롯대왕은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인물이었으므로, 당연히 성전의 화려한 재건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정치적인 이익을 고려했었겠지요. 또 사제들에게도 경제적인 혜택을 제공하면서 이니시어티브를 쥘 수 있었을테고요. 이곳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클때는 한 번에 100 마리의 소를 희생으로 바쳤었답니다. 그런 날은 도시 전체가 고기를 먹는 축제였겠지요.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부속 건물로 지어진 신전이 하나있는데 승리의 신인 Nike의 신전이라고 합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마라톤의 시초) 아테네 시의 자유가 보존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니키(나이키가 아닙니다. 영국인들은 제멋대로 이름도 갈아버리니까요. 예를 들어 피렌체는 플로렌스, 베네찌아는 베니스, 로마는 롬등) 신은 날개가 있었다는데, 조각상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우스갯말로 전쟁에 이기고 난 다음 아테네 사람들이 니키신이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잘라 버렸다고 하지요. 맨날 이기려고^^
파르테논 신전은 터어키의 지배하에 많이 손상됐습니다. 게다가 영국인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국주의자,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날강도들이 신전기둥위의 조각판들을 다 훔져갔어요. 그래 중요한 파르테논 건축을 보려면 대영박물관에 가야된답니다. 로마유학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유럽여행중에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갔을때 한 관광객이 하던 말이 기억납니다. 자기가 이 파르테논신전을 보러 아크로폴리스까지 갔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중요한 것은 다 영국인들이 훔쳐다가 대영박물관에 가져다 놓았다" 고하더래요. 그런데 진짜 대영박물관에 와보니 여기 다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이스 당국은 2004년 올림픽을 앞두고 이런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는데, 물론 영국은 들은 척도 않하고 있지요. 그래 그리이스정부는 이 문화재를 빌려달라고 하고 있다는군요. 정말 웃지 못할 코미디지요. 세상에 자기 것을 돌려받지도 못하고, 빌려야 하는 심정, 그것도 사정사정 해가면서. 우리나라도 사정이 비슷하거든요. 프랑스인들이 강화도에 침입해서 훔져간 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저자세로 그들의 고속전철까지 사주면서, 프랑스 놈들은 반환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나요. 세상에 원! 힘있는 도둑놈은 장물을 반환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빌려줄 것을 고려한답니다! 그것이 현실을 지배하는 질서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꼭 계셔야 합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를 내려와 Greek Agra 를 둘러 봤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Foro Romano 같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아테네 도시인들의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던 시장, 의회, 재판소, 감옥, 토론하는 곳, 또 다른 신전등등 이 몰려 있던 유적지입니다. 안내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담소했다는군요. 하긴 뭐 대단히 무능한 남편이라 부인인 크산티페에게 바가지 긁히다 피할 곳이라고는 이런 그늘 밖에 더 있었을라구요. 여기서 빈둥빈둥 지내면서 젊은이들과 이야기나 했겟지요. 그러니까 대단히 훌륭한 철학은 이런 빈둥거림, 좋게 말해서 여유와 여백에서 나오나 봅니다. 그런데 그가 젊은이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시켰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갇혀있었을 감옥자리도 이즈음 발굴이 되었다는군요. 아마 여기도 로마랑 비슷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못도 한 세트럭 정도 나올겁니다(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고 로마에는 없는게 없거든요. 그래 저는 이런 말도 생각하게 된거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던 못도 구하는 사람만 있으면 몇 트럭이라도 발견될 거라구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오후에 돌아오면서 점심도 먹고 시장구경도 했지요. 생맥주 500 cc 2잔, 양고기 소시지와 빵, 치즈를 곁들인 사라다 한 접시 - 다 합해서 4500 드라크마. 17000원 정도 지불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혼자 다 먹은게 아니니까. 다른 두명의 동료와 함께 갔었지요. 아마 다른 곳은 더 물가가 쌀것 같아요. 이곳은 아크로폴리스 근처라서 관광객들이 많거든요. 과일시장에 가서 올리브, 복숭아, 무화과도 샀구요. 올리브는 여러종류가 있는데 저는 1 키로에 800 드라크마 주었지요. 무화과는 아주 비싸고. 조그만 것 5개에 2000 드라크마입니다. 1달러당 370 드라크마의 환율이구요.
오후에는 자유시간으로 박물관에 가려고 했었는데, 그냥 쉬기로 했지요.
내일은 하루종일 고린토와 첸케레에서 지낼겁니다. 이곳은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화씨로 90도를 오르내립니다. 30도가 넘지요. 그래도 습도가 낮고 바람이 불어 그리 더운지는 모르고 지냅니다. 호텔에서는 인터넷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인터넷 까페를 이용하라고 하는데 저같이 한글을 쓰는 사람은 그림의 떡이지요. 인터넷 까페에 한글 폰트가 있을리 없을테니...
나중에 연결할 수 있을때 한꺼번에 보게 될겁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군요. 그럼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