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m급 연봉 속에서도
독야청청한 봉우리
브라이트호른 고개 ~ 남서릉 ~ 정상 ~ 서측면 루트
지난 여름, 브라이트호른 고개(Breithorn Pass·3,824m)의 눈밭에서 5일간 묵으며
알프스의 4,000m급 봉우리 7개에 올랐다. 그 중 마지막으로 오른 봉우리가 폴룩스(Pollux·4,092m)였다.
체르마트(Zermatt)가 있는 발래(Valais) 산군의 남측 경계선,
즉 스위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의 국경선을 이루는 4,000m급 주능선에 위치한 이 봉우리는
우리가 앞서 오른 카스토르(Castor·4,226m)와 브라이트호른(Breithorn·4,164m) 중간에 있다.
브라이트호른에서 몬테로자(Monte Rosa·4,634m)까지 이어진 거대한 국경능선 상에 위치하지만,
베라(Verra) 빙하에서 보는 폴룩스의 모습은 브라이트호른 능선상의 4,000m급 다섯 봉우리들과는 달리
설원 위에 홀로 우뚝 선 단일 봉우리다.
어디서 보든 의연한 4,000m급 봉우리의 위엄을 갖추었으며,
등반 또한 어렵지 않아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상부 설릉을 오를 즈음 동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틀 만이었지만 캠프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체르마트에 다녀온 남동건 선배의 쾌활함이 주원인이었다.
캠프에 남은 이들에겐 무엇보다 그의 보급품이 반가웠다.
싱싱한 과일에 군침이 도는 빵과 고기들이 텐트 바닥에 펼쳐졌다.
그리고 잠시나마 잊고 지냈던 세상 소식들로 캠프에는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텐트 속에서만은 마치 학창시절 동계 설악산의 어느 골짜기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남서릉 루트 택해
텐트 밖 설원에는 여전히 바람이 심했다.
칼바람에 알궁뎅이가 베일까봐 볼일까지 미적일 정도였다.
그러나 부지런함이 몸에 밴 임덕용 선배는 눈삽으로 텐트 바람막이 공사에 분주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맑았던 전날과는 달리 하늘에는 구름이 자욱했다.
마지막 등반이라 미룰 수는 없었다.
이미 폴룩스를 오른 임 선배만 빼고 우리 셋(남동건 선배, 필자, 후배 나현숙)은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캠프를 출발했다.
후배는 두 번째 오르는 셈이었는데, 기꺼이 우리와 동행했다.
희뿌연 새벽 대기를 가르며 베라 빙하 상단의 눈밭을 가로질렀다.
날씨가 좋았던 전날에 비해 빙하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1시간쯤 빙하 위 눈밭을 걸었다. 곧 폴룩스 어귀에 닿을 즈음.
이제껏 잘 걷던 남동건 선배의 발걸음이 무겁게만 보였다.
천천히 느긋느긋 걷고 또 걸었다. 이제 태양이 떠 남쪽의 이탈리아 쪽 낮은 산들에 햇살이 닿고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던 베라 빙하는 동쪽의 카스토르에 가려 태양이 뜨려면 1~2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1 남서릉의 크럭스 바위구간에는 이렇게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다.
2 베라 빙하를 가로질러 전방에 보이는 폴룩스로 향하고 있는 일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변 풍광의 변화에 남 선배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급기야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자신이 계속 따라 붙으면 시간이 너무 지체될 테니 포기하겠다고.
알프스 등반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그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게 미덥지 않아
재차 함께 오르자 권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없이 필자와 후배는 그와 헤어졌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남 선배의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능선 어귀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등반채비를 했다.
워킹용 폴을 접어 넣고 피켈을 집어들었다.
배낭에 자일은 넣어왔지만 안자일렌은 하지 않기로 했다.
PD+급 루트라 충분히 확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서로간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은 설사면으로 이어진 작은 안부로 올랐다.
이윽고 바위들이 드러난 암릉에 올라섰다.
잡석이 여기저기 얹혀 있는 바위들을 올랐다.
등반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뒤에는 60세가 넘은 듯한 노등반가 셋이 자일 확보를 하며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등반자세가 굼뜨긴 하지만 차분히 서로를 확보하며 오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 너머로 베라 빙하 아래의 이탈리아 아오스타 계곡이 아침 햇살에 깨어나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바위구간을 계속해서 올랐다.
피켈이며 아이젠이 바위면을 할퀴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에 폴룩스가 깨어난 듯 어느덧 햇살이 능선에 닿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 세 산악인이 안자일렌을 하고 내려오고 있었다.
가이드 한 명이 손님 둘을 데리고 하산 중이었다. 그들은 영국인이었다.
전반부는 쉬운 암릉, 후반부는 칼날 설릉

노등반가 셋이 남서릉 초입을 오르고 있다. 뒤로 아오스타 계곡이 펼쳐져 있다.
능선상의 어렵지 않은 바위지대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루트는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제부터 외길이다.
앞서 오르는 두 명의 산악인이 있지만 그들을 앞질러 가파른 바위구간에 설치된 쇠사슬을 움켜잡고 올랐다.
뒤따르는 그들은 중년의 부부 산악인이었다.
가만히 보니 전날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설사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등반이라 뒤따르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프랑스인인 그들은 리옹 인근에 살며 휴가차 등반 중이라 했다.
전날 밤은 로치아네라(Roccia Nera·4,075m) 아래의
로치에볼랑 비박산장(Rossi e Volante Bivouac Hut·3,750m)에서 자고 왔다고 했다.
가파른 바위구간 군데군데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둘은 서로 자일 확보를 철저히 했다.
쉽다며 자일 확보 없이 따로 오르고 있는 우리에 비해 안전의식이 높은 셈인데,
이것은 유럽 산악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분명 본받을 점이지만 좀체 지켜지지 않는다.
이제 가파른 바위구간을 통과해 약 4,000m 지점의 바위언덕에 이르렀다.
동쪽 바위절벽 위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 키보다 훨씬 큰 4~5m 높이의 청동상이다.
남쪽인 이탈리아의 아오스타 계곡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게 분명해 보인다.
짙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카스토르의 정상 능선을 배경으로 한 성모 마리아상 앞에 서니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신자가 아닌 필자가 기도할 내용이라곤 그저 무사등반을 기원하는 정도였다.
아마 이곳을 오르는 거의 모든 이들도 그런 마음일 터.
아직 정상은 멀었다.
이제부터 눈 덮인 능선길이다.
많은 이들이 오르내린 발자국이 설사면에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렵지 않았다.
차츰 정상에 다가가며 시간이 흐르자 동쪽에서 짙은 구름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나빠질 조짐이다. 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묵묵히 뒤따르는 후배도 서둘렀다. 큰 눈언덕 두 개를 오르자 드디어 폴룩스 정상이다.
체르마트 계곡과 고르너그라트 빙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동쪽인 카스토르나 리스캄(Liskamm·4,527m)은 구름에 완전히 가려 있다.
곧 폴룩스의 남서릉 아래에 도착했다.
남서릉은 폴룩스를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다.
물론 이 능선 좌측의 서측면도 비교적 쉬워 이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남서릉에 비해 등반 중에 대하는 주변 풍광이 못하다.
그리고 서면은 눈이 많이 내린 후에는 눈사태 위험마저 있기에 남서릉이 안전하다.
차츰 구름이 정상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침 정상에 함께 오른 마농씨 부부와 등정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모른 11번째 봉우리다.
알프스 4,000m급 우리가 오른 알프스 4,000m급 11번째 봉우리다.
마농씨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건네주면서
혹 리옹 쪽으로 여행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자신의 집에 방문해줄 것을 부탁했다.
흔쾌히 답한 필자는 그의 등반사진을 보내 주리라 약속했다.
잠시나마 함께한 사이였지만 우리는 마치 오래 사귄 듯한 산악인의 우정을 느끼며 굳은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정상에서 좀 더 머물겠다는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 먼저 하산을 서둘렀다.
정상부 설릉을 내려서는데, 두 팀이 더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칼날 설릉이라 조심스럽게 길을 비켜주며 그들에게 행운을 빌었다.
산악인들이면 으레 나누는 반가운 인사였다.
잠시 후 우리는 무사히 설릉을 내려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절벽 모서리에 닿았다.
대여섯 명의 산악인이 하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씩 가파른 바위벽에 설치된 쇠사슬을 잡고 하산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보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소요될 듯해 우리는 서면으로 길을 잡았다.
그쪽으로 하산하는 이들은 우리뿐이다.
남서릉에서 한참 기다리며 하산하느니 서측 사면을 내려가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4,000m 지점의 절벽 모서리에 세워진 아기 안은 성모 마리아상.
간간히 얼음 드러난 서측면으로 하산
초입부의 오목한 설사면은 경사가 세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측면에 접어들자 경사도가 최소한 50도 이상은 되었다.
아이젠을 신은 발걸음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칫 잘못해 한 발이라도 헛디뎠다간 300~400m는 추락이었다.
앞서 내려가는 후배의 모습을 보니 필자보다 안정감이 있다.
물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걸로 보아 녀석 또한 자신의 발걸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차츰 설사면이 가팔라지고 간혹 몇몇 구간은 단단한 얼음이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저 아래에 한쪽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지대만 없어도 마음이 놓이겠지만
혹 슬립이라도 하면 분명 추락의 가속도에 뼈도 못 추릴 것이라 생각하니 할 수 없었다.
한두 강빙 구간에선 프런팅포인트 자세를 취하며 하산했다.
위험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상책일 터.
이윽고 튀어나온 바위구간을 지나 남서릉 아래쪽으로 길게 설사면을 횡단했다.
설사면의 경사가 한결 완만해져 마음이 놓였다.
곧이어 남서릉으로 오르는 설사면과 만나 빙하의 편평한 사면에 닿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고비를 다 넘긴 후의 기쁨이 넘쳐났다.
이제 베라 빙하를 건너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캠프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배낭을 벗어 이마의 땀을 훔치고 빙하 트레킹 복장으로 고쳐 입었다.
후배 또한 배낭을 벗고 헬멧을 벗었다. 바로 그 때였다.
배낭 옆 설사면에 놓은 후배가 헬멧이 미끄러져 내렸다.
슬슬 흘러내리는 헬멧을 향해 후배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헬멧을 따라 뛰어가던 후배가 곧 잡을 것 같았지만 가속도를 받은 헬멧은 끝내 후배의 발걸음보다 빨랐다.
50m 이상 헬멧을 뒤쫓던 후배는 계속해서 따라갈 낌새였다.
한데, 저만치 아래에 크레바스와 세락지대가 있었다.
아마 후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녀석은 미련이 남았던지 계속해서 달리는 것을
필자가 평소에는 입에 담아보지 않던 욕지거리를 해대며 그를 제지시켰다.
헬멧 하나로 위험을 자초할 순 없었다.
끝까지 헬멧을 따라가고픈 유혹은 등반 중의 어떠한 위험보다 컸다.
헬멧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우리는 빙하를 가로질렀다.
기온이 높아진 빙하 위의 눈길은 질퍽이기 시작했다.
1시간 후 브라이트호른 고개로 이어진 오르막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체력을 다해 걸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마침 저만치 앞서 걷는 이가 있었다.
천천히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왠지 낯익다.
가만히 보니 남동건 선배였다. 곧이어 그를 따라잡았다.
“아니, 형! 이제 가시는 겁니까?”
“아, X헐!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약을 잘못 먹었어.
근육이완제를 먹었거든.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문어마냥 흐물거리는 것 같아.”
“이런! 쥐약 드셨군요. 그래도 이만해 다행입니다.”
쥐나지 말라고 먹었다는 쥐약 사건에 얽힌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우리는 캠프에 남아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임덕용 선배와 합류했다.
곧이어 5일간 머문 캠프를 철수해 7개의 4,000m급 봉우리를 오른 추억을 간직하고서 체르마트로 하산했다.

정상에서 프랑스인 마농씨 부부와 함께 한 후배. 뒤로 체르마트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등반정보
1864년 8월 1일에 J. 자코트 일행이 초등한 폴룩스는 알프스에서 비교적 접근이 용이하고 등반도 쉬운 4,000m급 봉우리다.
등반난이도 또한 PD+급이라 알파인 등반 초중급자들도 무난히 오를 만하다.
일반적인 루트는 우리가 오른 남서릉(PD+/III급)이며,
우리가 하산한 서면도 종종 이용된다.
서면 루트는 정상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여름철에는 얼음이 드러나기에 가파른 구간에서는 아이스하켄의 확보가 필요하다.
물론 여름철 성수기에 남서릉에 사람들이 붐빌 때는 종종 이용할 만하다. 평균 경사는 약 50도.
잠자리는 우리처럼 브라이트호른 고개의 눈밭에 캠핑해도 되며
로치아네라 아래의 비박산장(Rossi e Volante Bivouac Hut·3,750m·비상전화 없음)을 이용해도 된다.
12명이 묵을 수 있는 이 비박산장에는 침상과 담요밖에 없으니
취사도구는 따로 준비해야 하며, 여름성수기엔 붐빌 가능성이 있어 일찍 도착하는 게 바람직하다.
허긍열 한국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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