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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순전麴醇傳
임 춘林椿
국순의 자는 자후子厚이며, 그 조상은 농서隴西 지방에 살았다. 그의 90대조 모牟(밀)는 후직后稷1)을 도와 백성들에게 곡식을 먹게 한 공이 있었다. 《시경》에 노래로 전하기를 “우리에게 밀을 전하여 주었네” 라고 한 구절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모牟는 처음에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직접 밭을 갈아 스스로 먹는 것을 장만 하겠네” 하고는 계속하여 밭고랑 사이에 살았다. 임금은 그가 장래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수레를 보내 초빙해서 만나 본 뒤에 그의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신하들을 내려 보내 그를 방앗간杵臼 사이에서 사귀게 하였다. 그러자 모에게는 숨어 사는 자의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임금의 은혜를 받아 점점 명예를 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훈훈한 인정미와 아울러 온화하고 너그러운 기풍이 풍겨 나게 되었다.
모가 말하기를,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준 것은 벗들이다. 내 어찌 그대들을 믿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의 청덕淸德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임금은 그가 사는 마을에 정려旌閭(술집을 표시하는 기)를 세우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그는 임금을 따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壇에도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공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산후中山侯에 봉해져서 1만 호의 백성을 거느리는 수장이 되었고, 국씨麴氏라는 성도 얻게 되었다.
그의 5세손은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社稷(토지신과 농사신)을 성기게 되니, 그의 힘은 천하를 통일한 시대에 태평을 누리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 뒤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그는 조정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임금의 명령으로 금고형禁錮刑(벼슬을 못하게 하는 형벌)을 받게 되어 영원히 조정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세에 뚜렷이 알려진 자가 없고 그 자손들은 모두 민간民間에 숨어 살았다.
위魏나라 초기에 비로소 국순의 아버지 국주麴酎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2)이 그를 조정에 데리고 들어가 입이 닳도록 칭송하니, 한 신하가 임금에게 탄핵하기를, “서막이 국주와 사사로운 교분을 빌미로 조정의 기강을 점점 어지럽힙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가 나서 서막을 불러 나무랐다.
서막이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 “신이 국주를 따르는 것은 그에게 성인의 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 뒤 진晉나라가 왕통을 이어받자 국주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유령劉伶. 완적阮籍 같은 죽림칠현들과 어울려 죽림竹林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국순은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기상이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이 없었다. 그는 깨끗하면서도 맑지는 않았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아 그에게서 풍기는 멋이 일세를 휩쓰니 사람들이 그의 성품에 감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엽법사葉法士와 함께 온종일 담론하여 좌중에 앉았던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로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의 호를 ‘국처사麴處士’라고 하여 공경대부로부터 신선이나 방사方士(마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백정이나 목동, 오랑캐와 외국 사람까지 그의 향기로운 덕성에 감동한 자는 누구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제 어느 곳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국순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들 허전해 하며 이르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하였으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대위大尉 산도山濤(죽림칠현 중 한 사람)는 장래를 점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다. 일찍이 국순을 보고 이르기를, “어떤 늙은 여인네가 이와 같이 향기로운 자식을 낳았는가? 그러나 장래에 천하의 백성들을 반드시 그르칠 자도 이 국순이 아니라고는 못 할 것이다.” 하였다. 나라에서 그를 불러 청주淸州 종사從事로 삼았다가 다시 평원平原 독우督郵로 삼았다. 얼마쯤 뒤에 그는 혼자 한탄하기를, “나는 이 적은 봉급을 받으며 남에게 허리를 굽혀 아부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시골의 젊은 사람들과 술동이 앞에 마주 앉아 담론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당시에 관상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그의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자네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니 뒷날 반드시 귀히 될 것일세. 분명히 천종록千鐘祿를 누릴 터이니, 많은 녹을 주려고 하거든 벼슬길에 나가게.” 하였다.
진陳나라 후기에 양가良家 자제의 추천으로 주객원외랑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임금이 그를 보고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여 앞으로 높은 자리에 등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어서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광록대부 예빈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군신들이 회의하는 자리에는 임금이 몸소 그를 잔에 받쳐 들었는데 그의 행동거지가 임금의 마음에 꼭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칭찬하기를, “경을 일컬어 청淸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열어 주고 또한 나의 생각을 살찌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였다.
국순이 임금 곁에서 하는 일은 손님을 접대하는 일과 늙은이들을 위로하는 일, 귀신을 섬기고 종묘에 제사하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임금이 받에 잔치를 베풀면 궁녀들 외에 어떠한 근신近臣도 참여할 수 없었으나 그만은 늘 참여하였다. 이 때부터 임금은 그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국순은 입을 다물고 간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법을 지키는 선비들은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늘 그를 총애하였다.
국순은 또 재물을 증식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은 그러한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임금이 그에게 묻기를, “경은 무슨 취미를 가졌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날 두예杜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연구하는 취미가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에 대한 취미가 있었는데, 신에게는 돈을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웃고 그에 대한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국순은 본래부터 입 냄새가 많이 났었는데, 어느 날 임금 앞에 나아가 무슨 말인가를 아뢰자 임금은 그의 입 냄새가 싫어서 이르기를, “경은 나이가 늙고 기운이 모자라서 내가 맡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네.” 하였다. 국순이 관을 벗고 아뢰기를, “신이 벼슬을 주는 대로 받고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것 때문에 집안이 멸망하는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고향의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만족하면 그칠 줄 아는 분수를 알게 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좌우로 하여금 그를 부축하여 나가게 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목이 마르는 병을 얻어 하룻밤 사이에 죽었으니,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국순의 족제族弟 청淸은 뒤에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벼슬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고 그 자손들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국씨의 조상은 백성에게 공이 있어서 청백淸白한 것으로써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주나라의 울창주 같은 것은 그의 향기가 위로 하늘에까지 닿았으니 가히 그 조상의 품격이 남아 있다고 이르겠다. 국순은 병 속에 담길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며, 항아리에서 나와 일찍이 재상으로 선발되었고, 술동이 앞에서 담론하면서도 능히 간쟁하지 못하여 왕실을 어지럽히고 멸망시키는 데 이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거원巨源(산도山濤의 자)의 말이 족히 믿을 만하다.”
- 《서하집西河集》
▪ 옛날 밀로부터 술이 되어 내려온 역사와 역대 제왕들의 취향에 따라 부침하는 술의 운명과 계통을 전기문 형식으로 쓴 픽션.
▪ 임춘林椿 : 고려 의종~명종 년간, 호는 서하西河.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으나 그의 문명文明은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일컬어진다. 유고집《서하 선생집》에 가전체 소설로 알려진 〈국순전〉, 〈공방전〉이 실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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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직后稷 : 주周나라 시조. 당나라 요임금 때 강원이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았다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마구간에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밟지 않았다. 얼음 위에 던졌더니 새들이 와서 품어 보호하였다. 그리하여 아이를 도로 데리고 와서 이름을 기棄라고 하고는 길렀다. 그가 자라자 요임금이 그를 농정장관인 직稷에 임명하였으니, 그가 곧 후직이었다.
2) 서막徐邈 :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금주령을 어기고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의 동료가 술에 대하여 물으니 그는 ‘중성인中聖人’이라고 하였다. 조조曹操가 그 소리를 듣고 화를 냈더니 ‘선우보’라는 신하가 이르기를, “취객들은 청주를 ‘성인’이라고 이르고 탁주를 ‘현인’이라고 이릅니다” 하였다.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이 규 보
현부玄夫(거북)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어떤 이는 그의 조상을 신神이라고도 한다. 현부의 조상은 형제가 열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몸집이 크고 힘이 세어 오산五山1)을 바다에 빠지지 않게 붙들고 있으라고,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은 점점 왜소해지고 또한 힘센 것으로도 이름난 자가 없어졌다. 다만 다른 사람의 점(卜筮 : 거북의 등을 구워서 점을 침)이나 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때로는 풍수 사상을 익혀 지리에 대한 이해를 살펴 주었다.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 고향이나 세계世系(혈통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다.
그의 먼 조상 문갑文甲은 중국 요堯임금 때에 낙수洛水가에 숨어 살았는데, 임금이 그가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흰 구슬을 가져가서 그를 초빙하니, 그는 기도奇圖를 등에 지고 와서 받쳤다.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그를 낙수후洛水侯로 봉하였다.
그의 증조는 스스로 ‘하느님의 사자使者’라고 하며 그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홍범구주洪範九疇》(통치 철학서)를 가져와 우禹임금에게 바쳤다.
그의 할아버지는 백야白若2)인데 하夏나라 때에 옹난을翁難乙을 도와 곤오昆吾에서 솥[鼎]을 주조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버지는 중광重光이며 태어날 때 왼쪽 옆구리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씌어 있었다.
‘나는 달의 아들 중광인데, 나를 얻은 자는 평범한 서인이면 제후가 될 것이고, 제후이면 제왕이 될 것이다(月子重光 得我者 匹夫爲諸侯 諸侯爲帝王).’ 그리하여 그 옆구리의 글씨에 따라서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현부玄夫는 도량이 원대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요광성瑤光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임신했다고 하였다. 그가 태어나자 관상쟁이가 이르기를, “이 아이는 등에 평평한 언덕을 지었는데, 여러 별을 문채로 그렸으니 반드시 신성하게 될 상이오.” 하였다.
그가 어른이 되자 역서曆書와 점치는 일에 밝아 천지의 음양, 추위와 더위, 비와 바람, 그믐과 보름, 재화와 행복 같은 천지 기운의 변화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또 신선들이 행한다는 호흡법을 익혀 죽지 않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호랑이를 좋아하여 늘 갑옷을 입고 다녔는데 임금이 그의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부르니, 현부가 오만스럽게 그 사자를 대면조차 해주지 않고 노래를 부른 뒤에 웃으며 떠나갔다.
진흙 속에 놀아도
그 즐거움 한이 없구나
임금의 건사巾笥3)에 갇히어 사랑받는 것이
나의 소원은 아니라오.
그 뒤 송宋 원왕元王 때에 예차豫且4)가 그를 억지로 임금에게 데려갔다. 임금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수레를 타고 와서 아뢰기를, “나는 청강사자淸江使者인데 곧 임금님을 뵈려고 합니다.” 하였다. 그 다음 날 예차가 현부를 데리고 와서 임금을 뵙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현부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현부가 말하기를, “신이 예차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였고, 또 임금님의 훌륭하신 덕을 흠모하여 이렇게 오기는 왔지만, 벼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래도 임금님께서는 신을 놓아 보내지 않으시렵니까?” 하니, 임금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위평衛平의 간언으로 그를 붙잡아 두고 수형승水衡丞을 시켰다가 도수사자都水使者로 옮겨 주고, 또 대사령大史令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라의 인재를 등용한다거나 큰 행사를 행한다거나 그 밖에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여 시행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자네는 신명神明의 후예이고 또 앞날에 대한 점도 잘 치는데, 어찌하여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치지 못하고, 예차 같은 어부의 꾐에 빠져 과인의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니, 현부가 대답하기를 “아무리 눈이 밝은 자도 못 보는 것이 있고, 아무리 남다른 지혜를 가진 자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귀족들은 그의 덕을 흠모하여 황금으로 그의 형상을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현부의 맏아들은 원서元緖인데, 사람들이 붙잡아 삶아 죽였다. 그는 죽을 때에 이르기를, “길흉을 점쳐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가 이렇게 붙잡혀 삶겨 죽는구나. 그러나 남산에 있는 저 나무들을 다 모아다가 불을 때도 나를 태우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의 뱃심 좋기가 이와 같았다. 둘째 아들은 원저元佇인데 중국의 남쪽 지방인 오월吳越 땅을 떠돌아다니면서 스스로 ‘동현선생洞玄先生’ 이라는 호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몸집이 너무 작고 점도 칠 줄 몰랐으며, 오로지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매미나 잡는 것으로 생활하다가 역시 사람에게 잡혀서 삶겨 죽었다.
그 종족들 중에는 간혹 도道를 깨우쳐 천 년 동안을 죽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에는 상서로운 푸른 구름이 덮이기도 했고, 더러는 관리에 등용되기도 하여 세호世號가 ‘현의독우玄衣督郵’라 불린 자도 있었다.
“지극히 작은 것을 살펴보고 앞으로 일어날 징조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성인들도 간혹 어긋날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현부와 같이 지혜 있는 자가 예차 같은 어부의 꾐에 빠져 임금의 수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또 두 자식이 삶겨 죽는 액운도 미리 피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옛날 공자는 광匡이라는 곳에서 액운을 당하였으며, 또 그의 제자 자로子路는 젓 담겨 죽는 횡액을 면치 못하였으니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거북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열전列傳 형식으로 기술했다.
▪ 이규보李奎報 : 1168년(고려 의종 22)~1241년(고종 28년).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호부낭중 윤수允綏의 아들. 22세 되던 명종 1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 급제. 그의 호탕 활발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시호는 문순文順.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 소설 〈백운소설〉,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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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산五山 : 《열자전列子傳》에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사는 다섯 개의 산이 있다고 했다(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州, 봉래蓬萊).
2) 백야白若 : 거북 이름. 하후夏后 개開가 산과 시내에서 금을 캐어 곤오에서 큰 솥을 주조하는데 옹난을을 시켜 백야에게 점을 쳐 보도록 했다.
3) 건사巾笥 : 《장자》에 있다. 초나라에 신비스러운 거북이 있었는데 죽은 채 3,000년 동안이나 상자 속에 담긴 채 종묘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4) 예차豫且 : 《장자》에 나온다. 춘추시대 송宋나라 어부. 그물로 거북을 잡아 가두어 두었더니 거북이 임금의 꿈에 나타나 “나는 흰 용인데 천지의 조화를 싫어하다가 지금 예차에게 잡혔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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