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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동 라오스 오지 자전거 여행”
여행!!
이 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마음이 떨리고 설렌다. 여기에 의미와 얻어지는 깊이가 있다면 더한 즐거움이 아니 되겠는가? 나에게 어떻게 떠나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자전거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자전거 여행은 위험하고 힘이 든다고들 한다. 왜 나는 이런 고달프고 위험한 일을 사서 할까? 이렇게 긴 연휴에는 그냥 편히 집에서 뒹굴면서 티브이 보며 집 사람과 차 마시며 함께 나들이나 다니면 이쁨이나 받을 텐데.
자전거 여행은 참 우리네 인생과 참 많이도 닮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스릴과 괴로움이 함께한다. 그리고 볼 거리가 있다. 또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야기하고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아닌 나를 볼 수 있다.
자연을 접하고 풍물을 보고 그리고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나도 모르게 때 묻고 볼썽사나워진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차나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지구 어디나 갈 수 있다는 해방감 및 쾌감이 있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험한 곳이든 편한 곳이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인생, 바로 그것이 아닌가.
또한 무엇보다 건강에 더 없이 좋다. 나는 꽤 이전, 젊었을 때는 책을 읽을 때나 일을 할 때 돋보기를 썼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보기만 해도 칙칙하고 젊음의 기운을 뺏어갈 것만 같은 돋보기를 벗어 던졌다. 그래도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볼 때보다 지금 더 잘 책이 눈에 들어 온다 .
이번 여행은 베트남 중부 도시 다낭에서 버스로 국경까지 이동하여 라오스 국경 BO Y 부터 자전거를 타고 7세기-13세기까지 동남 아시아를 호령했던 크메르인 유적지 왓푸 신전이 있는 Champasak 을 둘러 보고 라오스 남부 도시인 Pakse 를 지나 동 북부 산악 지대 도시 Salavan 을 지나 베트남 국경 La Lay 를 넘어 호지민 루트를 내려가다 A Luong 에서 Hue 를 거쳐 Da Nang 으로 다시 돌아오는 약 950km가 넘는 일정을 7박 9일 코스를 하노이 자전거 동호회 (이하 하자동) 회원 5명이 좌충우돌 함께 구정 연휴 기간 동안의 여정이다.
하자동이 태동한지 2년, 그 동안 하노이 근교와 베트남 국내 위주로 짧은 기간 동안 하자동 회원들과 함께 라이딩한 적은 많았지만 해외 원정 라이딩은 이번이 처음이다. 회원 모두가 장거리 라이딩 경험들이 그리 많지 않아 선두에 선 나로서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시작 전부터 잠도 설치고 묘한 흥분으로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베트남 국경에서 라오스 땅에 들어 서면서부터 아타푸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급경사와 꼬부랑 길들은 잘 다듬어 지지 않았던 한국의 60년대 강원도 도로들을 연상케 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아름답다. 생긴 모양 그대로, 놓아둔 그대로, 바람이 불고 천재 지변으로 변화된 자연 그대로의 모습들이 너무 좋다. 변형되지 않은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 라오스의 진정한 멋이라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오지의 라오스로 들어 가면 들어 갈수록 말이다.
정수리로 뙤약볕이 사정없이 내리 쪼이는 오르막 길을 두 시간째 땀을 흘리며 페달 질을 하고 있다. 오르다 지쳐 나무 그늘 속 땅 바닥에 그대로 들어 누워 하늘을 쳐다 본다. 하늘은 푸르고 스치는 바람 결에 이마에 흐르는 땀이 속수무책으로 날려간다. 얼마나 올랐을까? 아직도 정상은 멀기만 한데 벌써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어제 오후 국경에 도착하여 베트남 국경 출입국 창구에서 회원 한 분의 여권에 베트남 입국 허가 스템프가 없다고 출국을 거부해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상황 설명과 신분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정황을 확인하고 하노이 출입국 관리 사무소까지 연락하는 Bo Y 국경 직원들의 협조로 천신만고 끝에 아침 10시가 넘어 겨우 출발 할 수 있었다. 잘못했으면 이 오지의 타국 땅에서 그 회원과 기가 막히고 허무한 이별을 할 뻔했다.
휴, 출국 문제로 너무나 많은 힘과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높은 급 경사도를 오르려니 다른 때 보다 힘이 배는 더 드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다. 벌써 30여 키로는 올랐고 저 앞 산 봉오리 위로 중계 탑이 보인다. 지금껏 민가 하나 보이지 않는다. 60여 키로 이전까지는 민가가 없다는 확실한 정보의 위력을 보는 것 같다. 벌써 오후 한시가 넘어서고 있다.
어디 물가를 찾아 라면이라도 끓여 점심을 먹여야겠다. 모두가 지친 표정이다. 출국 문제 때문에 하루를 통째로 허비하는 바람에 아직도 온길 보다 갈 길이 더 멀리 남아있다.
내리막길로 접어 들면서 볕은 따갑지만 바람은 맑고 상쾌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은 자연이 만든 가로수다. 그 계곡과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른다. 물이 있는 곳에는 쉬어가는 나그네들을 위해 움막이 지어져 있다. 워낙 민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일하다 쉬는 이들이 필요에 의해 지어 놓은 듯하다. 끝없이 이어진 산 밀림이 있는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라면으로 해결해 보려고 계곡물을 받아 라면을 끓였다. 라면 일곱 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다섯이서 해치우고 길을 서둘렀다.
띠엄 띠엄 길가에 민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라오스 국토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 1.5배나 된다고 하지만 인구는 칠백만 명에 불과하다. 70년대에 왕권 정치에서 벗어나 공산 사회주의 체제로 변하면서 많은 인구가 태국으로 이주를 했단다. 국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다 보니 먹을 것도 그리 풍부하지 않고 잠자리 또한 쉽게 찾을 수 없다. 잠자리를 찾아 계획대로 정해진 곳까지 갈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지리적으로 베트남과는 이웃인데다 정치 체제 또한 베트남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거의 비슷하다. 라오스 정부 기관 산업 특히 자연 자원 산업 쪽은 베트남이 관련되어 더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아간다고 한다. 국경 접경 지대에는 양국 도보상 들의 왕래가 빈번하며 실제로 많은 베트남 인들이 라오스로 이주해 살고 있고 특히 라오스 중부지방은 어디를 가나 베트남어가 조금씩은 통한다.
냉장고도 없는 민가 상점에서 미지근하게 데워진 콜라 한잔으로 땀을 식히고 길을 재촉했다. 해는 서산에 걸려 있는데 아직도 길은 멀고 또 오르막 길이다. 중턱에 올라 숨을 고르면서 산 너머로 내달리는 석양이 산마루의 어둠을 재촉하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아직도 첫 귀착지 아타푸에 도착하려면 40여 키로나 남았는데 이렇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걱정부터 앞선다. 벌써 저녁 6시가 되었는데 이 초보 회원들을 라이트에 의지해 오르막 내리막을 달리려면 속도도 나지 않고 위험하기도 하고 또 내일 라이딩은 어쩌지? 내일은 이번 라이딩에서 최대 고비인 아스팔트가 없는 임도 길인데..
한참을 생각하다 회원들과 함께 합의하여 이 구간은 건너 띄기로 결정했다. 마침 지나가는 스포츠 UV 승용차를 잡았다. 친절하면서 깔끔한 라오스 인은 사례하겠다는 우리의 말에 몹시 화를 내는 통에 사례도 못했다. 사정 사정하여 겨우 음료 한 켄을 손에 쥐어 줬을 뿐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고마움 표시도 못했다. 껍 짜이(라오스 말로 감사합니다)만 연발했다. 살아 오면서 제대로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어디 한 두 번 인가? 아타푸 호텔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고 아무런 보수도 없이 그냥 떠난 저 신사는 분명 축복 받아 마땅하리라.
이튿날은 새벽 일찍 출발했다. 임도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간간히 승용차와 화물 트럭 오토바이들이 다니기는 하지만 차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달리는 것이 험난한 폭풍 속에서 높은 파도를 헤치고 어렵사리 앞으로 나아가는 돗단 배의 힘겹고 안쓰러운 모양새이다.
이 길이야 말로 밀림 속 목재를 나르는 말 그대로 임도 이다. 채벌하고 남은 아름드리 나무 둥치 군락들, 껍질이 벗겨져 고사목이 된 나무들과 그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갑다. 길은 패여 웅덩이가 생기고 그 사이로 삐죽 삐죽 화산 석이 칼날처럼 서 있다.
밀림 속 임도 길을 접어 들기 전에 세콩강가 리조트 같은 분위기의 음식점에서 이른 점심을 시켜 먹었다. 오늘 아침은 그 흔한 찹쌀밥 한 주먹도 먹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배들이 고팠을까? 마침 주인 새댁이 베트남어를 잘했다. 베트남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낭에서 라오스로 이주한 3세대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직전 의 보트 피풀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남편은 라오스 인이란다. 베트남어는 어떻게 배웠냐니까 초등하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베트남어 수업이 있다고 한다. 태아를 품은 예쁘장한 새댁의 얼굴에서 오래 전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온 우리 이웃 같은 내음이 풍긴다.
밀림 속 동네들은 몇 가호되지 않으면서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이산 저 산에 흩어져 사는 산 동네처럼 적막하다. 개울이 없는 민가에는 우물을 깊이 파 물을 길어 먹고 그곳에서 빨래도 한다. 바가지로 물을 길러 머리 꼭대기부터 몇 바가지를 내리 부었다. 정신이 맑아진다. 해는 밀림 저 너머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데 갈 길은 아직도 반이 넘게 남아 있다. 종일 자갈밭 길과 파헤쳐진 웅덩이를 헤매느라 속도가 나질 않았다. 떠나면서 헤드랜턴을 모두 준비했다. 이 험한 길이 끝이 나거나 좋아지지 않는 한 오늘 밤중이 넘어야 호텔 숙소가 있는 Thang Beng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띄엄띄엄 보이던 지나가는 차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오던 트럭을 총무님이 잡더니 돈을 지불 할 테니 탕벵까지 함께 가자고 통 사정을 해보았지만 길이 너무 멀다고 고개를 흔들며 지나 간지도 오래다.
어둠이 깔리면서 밤 하늘에는 주먹만한 십자성 별이 우리 앞길을 인도하고 수없이 많은 별들과 회 뿌려 놓은 것 같은 은하수가 달리고 있는 내 정수리 위로 쏟아진다.
맑은 개울 물이 흐르는 이 계곡 저 계곡 사이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벌목하는 산판 인부들이 잠자리로 만들어 놓은 움막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이 밀림에서 우리도 함께 야영하고 내일 새벽에 갈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 모기 많은 곳에서? 농담인데 모두가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서인지 가벼운 농담 한마디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만약 민가가 보인다면 운반 기구를 마련하여 이 오지의 밀림을 탈출하여 모든 회원들을 안전하게 탕벵까지 모셔야겠다고 마음 먹고 칠흑같이 어두워진 밀림 속을 달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휙 지나가는데 길 안쪽으로 자동차 세워둔 것이 보인다. 다시 돌아서서 보니 길 안쪽에 민가 한 채에 자동차가 한대 서있다. 집 모퉁이에 모깃불 이라기에는 큰 불 기둥이 타오르고 집 마루턱에는 부부가 막 저녁을 끝낸 기척이 보인다.
사이바디(라오스 인사)를 외치며 텁석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순박하고 웃음 끼 가득한 얼굴에 함께 사이바디로 답하는 부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마루턱에 걸 터 앉으며 여기서 탕벵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40키로 쯤 된단다. 이 차로 함께 가자고 남편에게 애기해 봤다. 그랬더니 아내에게 얘기하라며 손 사래를 친다. 허허 이곳의 주권도 아내에게 있네? 아내에게 다가가서 얼마면 가겠소? 백만 킵을 달란다. 아하 돈만 주면 갈 의사는 있구나. 아내의 손을 텁석 잡고 삼십만 킵에 가자고 너스레를 떨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펄쩍 뛰면서 말도 하지 말라며 저만큼 자리를 피한다. 차라리 여기서 자고 가란다. 나도 그러고 싶지요. 저 수 많은 별들을 보면서 모기에 물리고 모닥불 연기 내음을 맡으며 숲의 향기에 취하고 칠흑의 어둠에 취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싶소.. 하지만 나는 혼자 몸이 아니라오 ㅎㅎ.
그렇게 펄쩍 뛰던 아내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육십만 킵에 가잖다. 그렇게 밀고 당기고 웃다 를 반복하다 오십만 킵으로 낙찰을 봤다.
자동차는 70년대씩 자동차인 듯 양쪽 창문 유리도 없는 낡은 고리짝 같은 차다. 금방이라도 시동이 꺼져 더 이상 못 간다고 내리라고 할 것만 같다. 라이트의 불도 가다가 가끔씩 꺼진다. 꺼지면 차를 세우고 후레쉬를 비추어 뭘 만지는지 다시 연결하고 달린다. 달린다기 보다 기어간다는 표현이 낫겠다. 그래도 얼마나 행운이고 감사한 일인가? 불안에 떠는 회원들을 데리고 무사 귀환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여 마음 속으로 껍 자이를 외쳐본다.
얼마 남지 않은 탕벵 가는 길은 험하고도 힘들었다. 무려 세시간을 차 옆구리에 매달려 왔다. 모두가 임도 라이딩에 지치고, 캄캄한 밀림에 놀라고, 바위덩이투성이인 개울을 건너면서 덜컹거리는 차에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 가운데 차가 멈추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우리 모두는 숨을 죽이며 차 난간이 부서져라 움켜 잡고 있어야 했다. 진흙 먼지로 온통 빨갛게 물든 옷 차림새 들과 짐들, 먼지로 뒤범벅이 된 고물로 변한 자전거들 모두의 모습은 거지중의 상거지다. 숙소에 도착해서 씻는 둥 마는 둥 허기를 채우고 자정이 넘어 파 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여기까지 어찌 온 것인가 걱정했던 순간들이 아득 아득 꿈 나라로…..
셋 째날 크메르 인들의 문화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의 뒤안길을 보려 오늘은 왓푸 신전이 있는 참파삭으로 간다. 그러고 팍세에서 하루를 머문다. 신전으로 가는 길은 편했다. 푸시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엄마 품 같은 메콩 강이 느릿 느릿하게 흐른다. 앙카라 왓 신전보다 3세기 전에 건립되었다니 어쩌면 크메르인들의 영화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신전은 흰두교 최고신을 지칭하는 시바신과 참파 꽃 문양을 주축으로 해서 건립되었고 앙카라 왓 신전처럼 돌의 주 재료는 라테 라이트란 돌이었다. 이곳을 먼저 보고 앙카라 왓을 본다면 더 많은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
1세기 전쯤 대 지진이 나면서 신전 대부분이 무너졌다고 한다. 세월의 억겁을 더하면서 사람들 손에 파헤쳐 졌고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위대한 크메르 왕을 접견할 때는 서서 오르지 말고 네발로 기어 오르라는 뜻으로 돔이 있는 크메르 신전 어디에나 계단들은 높고 가파르다. 돔 문턱에 걸터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멀리 산 아래에서 흐르는 메콩강을 내려다 보며 땀을 식혔다. 언뜻 고려가 폐망하고 새로운 왕조에 합류하지 않은 길재 대감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인가 하노라
흘러간 역사의 뒤안길은 언제나 이렇게 허망하고 꿈 같은 것인가? 특히 영화를 더 했던 왕조 일수록…
볼 거리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볼 거리가 없어도 고생하고 부딪치는 그 맛 하나 만으로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가 보지 않은 길은 누구나 두렵다.
우리들은 지나고 나야 용기를 얻고 미래를 설계한다. 미래는 곧 지난 과거를 거울 삼아 우리들이 살아 있는 증거이고 증표 같은 것이다. 떠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팍세에서 차를 타고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갑자기 떠난 여행이라 준비도 너무 부족했고 정보도 너무 없어 예상치 못한 길들이 너무 험난했다. 자전거 타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포기하면서 까지야 할 수 없지 않은가? 일상의 활력소 역할만 해 준다면 더 할 나위 없지 않은가.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회원들 모두 힘들고 끔찍했던 시간들과 힘들었기에 더욱 추억이 되어 버린 시간들을 생각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그래서 벌써 그 시간들이 그리워지고 아쉬움이 밀려 오고 …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찰라를 벗어나면 평상심이 되는걸..
다 지나 가 리라 !!
하지만 그 미련의 표정도 잠시인 듯 하다. 다시 한번 이 길에 도전하고픈 객기가 발동을 한다.
이 못 말리는 객기로 다시 회원들의 눈빛이 반짝 반짝해 진다.
이래서 나는 우리 하자동이 너무 좋다. 너무 사랑해 늘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모두가 한솔 밥을 먹는 가족 같아서…
아, 길 위의 내 팔자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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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
체험기 읽고 나니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확오는데요. ㅎㅎ
라이딩에 참가한 회원님들 수고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달려보자고요. ㅎㅎ
하자동 화이팅~~~~~~~~~~~ ㅎ
최 대장 갑시다 !!
지금도 그 초롱 초롱하던 별빛과 어릴 때 뿌려 놓았던 은하수가 손에 잡히는듯,
그 별밤을 보러 우리 함께 갑시다.
하자동 화이팅~~~~~~~~~~~ !!!
모두들 너무 고생한 것 같아 안쓰럽네요.~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체력을 길르고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차로 건넜던 강을 잔차가지고 한번 건너보고 싶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님아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체력이 아니라 맴이 문제 엿당께 ㅋㅋ
시적인 수기에 지난라딩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네요. .수고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