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주, 전북의 민주화 운동은, 70년대 후반 유신정권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저항으로부터 이어지는, 앞선 과정이 있다.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 활동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지나칠 수 없으며. 대학생들의 시국관이 어떻게 모아지고 실천됐는가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일련의 상황을 누가 계획하고 주도한 게 아니듯,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볼 수는 없다. 다만,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전주에는 몇 개의 일정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 큰 흐름이 교회를 근거로 하는 양심 세력이다. 전북대학교를 비롯해 당시 전주의 중요 사건에 관련된 인물 대다수가 이 범주에 포함돼 있거나 영향권 안에 있다. 대학 내에서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로, 교계에서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KNCC 즉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맹 교단별 청년회 연합회)로 활동해 온 젊은이들이 이들이다. 이들의 조직력과 신,구 교회의 양심세력, 대학 내에서 이어져 오던 의식 있는 동아리조직의 힘이 합쳐지면서, 80년 민주화의 봄은 나머지 양심적인 개인들을 하나로 모아 뿜어내는 분화구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 교회를 근거로 하는 양심세력이 그 중 크게 형성된 데에는 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의 시대적 상황이 큰 원인이다. 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의 충격은 한동안 모든 저항세력의 기를 꺾어 놓은 듯 하였다. 그러나 이 침묵의 기간에, 오히려 교회는 조직과 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저항집단의 중심으로 성장했고, 자연스레 유신말기 민주화운동 전개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당시 카톨릭 센터에서는 신,구교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이 매주 모여 월요기도회를 연다. 기도회를 통해 NCC가 발행하는 인권소식과 김지하의 오적 따위 유인물이 전달되고 읽혀진다. 75년 10월 21일에는 문정현 신부 등 신구교성직자 4명이 김지하 양심선언을 배포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사건도 있다. 당시에는 교회의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교단을 통해, 강연장을 통해 시국문제를 거론하며 외친다. YH사건 뒤에는 교회에서 김경섭(전주 성광교회), 백윤석 목사(전주 신상교회)가 각각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한다. 기도회는 79년까지 계속된다.
70년대 중반까지 대학은 낭만과 지성을 추구하던 젊은 지성의 모습 그대로여서, 학생들이 사회현실과 역사인식을 같이 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당시 대학은 시국에 관한 입장 표명이나 행동도 학과 별로 이뤄지고, 화장실과 건물 벽에 낙서를 통해 자신들의 시국관을 표출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탄압이 강해짐에 따라 상처도 심했다. 저항 세력에 대한 유신정권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정상적인 동아리 활동이 어려워질 만큼 상황이 나빠진다. 사회의식에 눈을 뜬 진보적 학생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실천할 통로와 기반이 절실했다.
KSCF는 75년 이전에는 합법적인 대학내 동아리였으나, 긴급조치 9호 이후 대학에 등록할 수 없게 된다. KSCF가 신앙활동과 신학연구 목적임에도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활동 때문에 이념동아리로 분류된다. 이후 KSCF는 학내에서 비공식 활동을 하며, 주로 교회에서 모인다. 전북대 외에 개정간호대와 원광대, 한일신학교는 물론 신흥고와 전주고, 기전여고, 전주여고 등 고교생 조직(KSCM)도 활동한다. 69학번 백남운(전주 효자동교회 목사), 71학번 허종현(신부)이 선배 세대다. 이후 74학번 최인규, 박종훈, 문정숙, 진창덕, 75학번 손인범, 한일신학교 배정희, 76학번에 전북대 이송재, 조용민, 신일섭, 77학번 김운주, 김남규, 윤성모 등이 활동한다. 이들은 독서 모임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간다. 많게는 삼, 사십 명까지 모이기도 한 이들은 아침 6시면 학교 식당에서 모여 공부를 한다. (70년대에 이렇게 형성된 독서 모임은 훗날 80년대에 전북대 내 운동권 그룹 '1집'으로 이어진다.)
커리큘럼은 신학 사상과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주를 이룬다. 사울 알레스키, 파올로 프레이리, 에리히 프롬의 저서, 브라이덴슈타인목사(한국명 부광석)의 '학생과 사회정의' 같은 당시의 불법 도서, 현대신서 문고판 등이다. 78년 들어 각 대학은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 제약을 하며, 이른 아침 강의실 문을 굳게 잠근다. 이후 독서모임은 교회로 이동하고, 전주에서는 주로 남문교회, 성광교회가 기지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투쟁이란 그다지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수련회 등을 통해 결의를 다지고, 조악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정도다. 당시 KSCF 활동의 중심인물이던 최인규씨(전북대 74학번, 현 전주 갈릴리교회 목사)는, 서울의 KSCF 사무실에서 청타를 쳐서 원통형 인쇄기(당시에는 값싼 등사기, 이른바 '가리방'이 많이 쓰였다)로 뉴스레터를 찍어내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경찰에 잡혀가 보니, 경찰서에서는 육필로 조서를 꾸몄고, 검사들이나 4벌식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우린 고급 기기를 쓴 것"이라고 회상한다. 이들은 방학이 되면 EYC와 기청(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회원으로 서울의 빈민촌에서 합숙을 하거나 농촌활동을 한다. 77년 4.19 기념일, 최인규(당시 전북대 기계공학 4)와 손인범(전북대 체육 3), 최갑선(전북대 영문 2) 등은, '고난동참투쟁 선언문'을 재등사해 전주시내 교회 등지에 뿌린다. 원본은 일주일전 서울 한신대에서 뿌려진 유인물이다.
유신 정권은 저항세력의 축이던 대학생들을 강제에 군대에 보내는 변칙을 통해 학생운동을 끊임없이 탄압한다. 당시 전북대 내에서 3, 4학년 선배 위치이던 박종훈과 최인규, 손인범 등도 희생자다. 78년 전북대 학생과는 박종훈에게 77년 EYC 성탄절 기도회에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며, 휴학할 것을 제의한다. 박종훈이 거절하자 학생과장이 기관원과 함께 박종훈의 집을 방문해 부모에게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고 협박하지만, 거절당하자 일방적으로 학적을 변동시켜 병무청에 조기현역입영을 요청, 징병검사 수검통지를 발부하게 한다. 박종훈은 당일 신체검사를 받고 이튿날 입대한다. 전북대 76학번 조용민 등 2명도 역시 학적변동으로 강제입대한다. 이후 79년 3월 손인범이 강제 입대한다. 최인규는 79년 긴급조치위반 투옥자로 강제 입영을 거부한 '병역대책위'수배자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구속된다. 선배들이 수난을 겪는 사이 자연스레 전북대 KSCF활동은 76학번 과 77학번 몫이 되고, 이것이 80년 민주화의 봄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당시 2명이 사건에 연루돼 학교에서 나가게 되면 나머지 한 명이 남아 지키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 간다. 김남규 등은 주로 대학 내에서 활동에 매달리고, 이송재(남문교회), 이광영(중앙교회), 이복순, 배정희(금암교회) 등은 교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편다. 79년 8월에는 해성고등학교 종교감실에서 독서 모임을 하던 것이 발각돼, 윤성모, 김운주, 김남규가 연행된다. 구속은 면하지만 윤성모, 김운주는 퇴학, 김남규는 무기정학을 당한다.
흥사단 아카데미 역시 70년대 전북대 내에서 활동해 온 학생 조직의 하나다. 79년 전북대 학내 시위와 집회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74학번 이광철(현 개혁국민정당 전북도준비위원장)도 전북대 흥사단아카데미 회원이다. 이광철이 군대를 마치고 79년 복학할 무렵,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는 이념 동아리에 대한 탄압에 의해 학내 동아리로서 활동이 중단돼 있다. 당시 대학 동아리는 지도교수가 없으면 동아리 등록도 못하고 불법이 되던 상황이다. 이광철 등은 당시 전북대 사학과 곽천식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재개한다. 흥사단 아카데미는 다른 대학과 함께 연합 활동도 전개한다. 전북대 흥사단 아카데미가 발간한 소식지 '참빛'과 연합회 소식지 '두레'는 미 대통령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 당국의 검열에 걸려 문제를 빚기도 한다. 당시 삼엄한 시국상황에서도 초청강연회와 토론회 등에는 2백여 명씩이 몰려들어, 유신말기 사회현실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도를 보여준다. 79년 10.26 이후에는 대학 내에서 이어져 오던 학생운동 세력이 서서히 조직화한다.(2003.5.14. 전민일보)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