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D 의료조력사망
같은 아파트에 사는 K씨가 어제 갑자기 돌아갔다고 한다. 며칠 전에도 보행기를 끌고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병원까지 걸어가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동행했던 사람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심장마비나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것이 아니라 미리 죽을 날자와 장소를 정해서 예정대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건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비록 의사의 도움으로 법적으로 허용된 죽음일지라도 ‘자살’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4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금기 시 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나 한결같은 계명으로 여기고 있다. 자살은 내가 나의 목숨을 죽이는 행위로 살인과 같다고 여긴 때문이다. 동양사상에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으로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지인이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의 마음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죽으러 병원을 향해 가던 K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시달리며 의학적으로 별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결국 완치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 섰을 때 그런 사람의 심정을 멀쩡한 사람이 혜아리기는 어렵다. 전쟁터에서도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상을 입고 극도의 고통을 받을 때 동료 병사에게 제발 총으로 쏘아 죽여달라고 했다는 참혹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무슨 이유에서든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죽고 나면 지금의 고통이 멈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죽음을 원하게 된다. 죽고 나서 지금보다 몇 갑절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된다면 죽을 사람이 있겠는가. 죽어본 적도 없고 죽으면 고통이 사라진다고 배운 적도 없는데 사람들은 죽음과 고통의 단절을 동일 시하며 죽기를 원한다. 경험한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데 하는 행동은 본능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죽음을 체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는 2016년부터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를 합법화하였는데 이는 심각하고 회복 불가능한 질병을 가진 사람이 극도의 통증으로 시달리면서도 의학적으로 완쾌될 가망이 없는 경우에 한해 환자 개인이 직접 신청할 수 있다. 이것은 가족이나 보호자의 동의 없이 환자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약물 주사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뜻한다.
2023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인의 61%가 현행 법안을 지지하는 반면, 31%는 정신 질환으로 안락사를 확대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제까지 MAiD 관련 사망 사례가 60,301건 보고 되었다 . 2023년에는 캐나다에서 MAiD 관련 사망 사례가 15,343건 보고되었으며, 이는 캐나다 전체 사망자의 4.7%를 차지한다. 이 수치는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23년 BC주에서는 2800명이 의료조력죽음을 택했고 2017년 677명에 비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 국가에서 오히려 의료조력죽음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유럽에서는 스위스와 함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오스트리아가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캐나다 역시 기독교인이 65%나 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이다.
살인은 죄악이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은혜로운 생명을 제 마음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부모님을 통해서 물려받은 육신을 마치 제 것 인양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사상이다.
그런데도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듯이 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이는데도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네덜란드는 2002년 4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안락사를 허용할 근거로 인정하고 있다. 그 대신 환자는 개선될 가망이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는 점과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수차례 설명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생명의 존엄성도 소중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또한 귀중하다는 판단으로 극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의 고통을 단절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배려인 셈이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다보니 도저히 완치할 수 없는 불치의 병도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무한정 극도의 통증을 참으며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죽기보다는 오래 사는 것이 오랜 인류의 소망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장수시대를 맞이하여 이제는 죽음마저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주사액을 정맥주사하고 10-15분이면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조용히 아무 고통 없이 잠을 자듯이 자기도 모르게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 앞에서 나는 과연 나의 생명에 대해 최선을 다했나, 더 이상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의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고 본다.
또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신 분의 명복을 빌고 이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참혹한 통증에서 해방되어 평안함을 누리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