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는 달리 정원에는 상당한 수의 야쿠자들이 집결해 있다. 그들의 경직된 표정에서 그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가미소리-김두한을 단호하게 응징하셔야 합니다, 오야붕.
씬 동 거실
하야시가 기모노에 팔짱을 낀채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아사히마찌의 야쿠자1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 한 쪽에 가미소리가 계속해서 분노를 떠뜨린다.
가미소리-김두한이 아사히마찌에 난입한 것은 우리 국수회 전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전면전을 불사하더라도 반드시 보복을 해야 합니다.
하야시-...
야쿠자1-도와주십쇼, 하야시 오야붕.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하야시-...명예라 명예... 우리가 대신 보복을 해준다고 해서 그 명예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야쿠자1-...예?
가미소리-...?
하야시-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야쿠자1-...(당황)...
하야시-그리고 이 일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덮어야 할지도 모른다.
야쿠자1-그... 그게 무슨...?
하야시-그렇게 생각이 짧단 말인가? 우리 국수회가 아편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라도 할 생각인가? 잘못하면 우리 국수회 전체의 명예는 물론 도오야마 미쯔루 어른에게도 큰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야쿠자1-그건... 그렇지만...
하야시-이런 일일수록 소리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아편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솔직히 아사히마찌의 궁극적 목표는 아편이 아닌가?
야쿠자1-...
하야시-어차피 종로패들에게 아편은 무용지물이다. 이야기가 잘되면 아편을 되돌려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야쿠자1-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도와주십쇼, 하야시 오야붕..
하야시-아사히마찌와의 우정을 어찌 저머리겠는가?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야쿠자1-...
하야시-더 할 말이 있나?
야쿠자1-...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쿠자1이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간다.
가미소리-다나까 오야붕이 섭섭해 하지 않겠습니까? 체면 불구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요.
하야시-나 역시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전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이) 종로와 협상을 하도록 해.
씬 종로 거리
두한과 김영태들이 길 한가운데로 몰려 오고 있다. 행인들이 그 위세에 눌려 힐끔힘끔 쳐다본다. 그 앞을 지나던 김이수가 두한의 모습을 보고는 다가간다.
김이수-이게 누구신가? 종로의 주먹황제가 아니신가?
두한-...?
김이수-날세. 비너스 사장 김이수... 모르겠나?
두한-(그제서야) 아, 예... 제가 한눈에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이수-아니야, 아니야... 자네 같은 사람이 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하하하. 그래, 물론 잘 지내고 있겠지?
두한-예...
김이수-그래야지. 동렬군은 꽤 걱정하는 눈치지만 난 자네가 잘 해나가리라고 믿네.
두한-...
김이수-그럼 수고하게. 다음에 보세.
김이수는 그렇게 사라진다. 잠시 그곳에 서있던 두한들도 우미관 쪽으로 향한다.
씬 우미관 사무실
두한과 김영태, 김묵옥, 문영철들이 모여있다. 탁자에는 아편가방이 놓여 있다.
김영태-지금쯤 청계천 너머 남촌 일대가 발칵 뒤집혀 있을 걸세. 일본 주먹패들에게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두한-...
문영철-아사히마찌 애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저 아편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김무옥-가만 안 있으면 지들이 어쩔 거여? 그렇게 혼이 났으면 정신들을 차렸겄제..
김영태-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문제는 혼마찌야... 혼마찌가 나선다면 일이 꽤나 복잡해질 수가 있어.
두한-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닙니까? 저들이 원한다면 싸우면 그만입니다.
김무옥-그려... 아 내 말이 그 말이랑께.. 어제 보니께 야쿠자 애들도 별 것 아니더구만..
김영태-자만은 금물이야. 혼마찌는 아사히마찌와는 비교도 안되는 조직이야.
김무옥-...
김영태-와싱턴 자네도 퇴원을 했구만..?
와싱턴-...면목없네... 그리고 여러 아우님들, 모두 고맙소.
김영태-일단 다들 앉지.. (앉으면) 우선 진영이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구만.. 앞으로 우리와 한 식구로 지내기로 했다. 다들 인사해라..
김무옥-잉? (진영에게) 아니 언제 그렇게 된 거여?
두한-그렇게 됐다.
정진영-...
김무옥-하여간에 앞으로 잘 지내보드라고잉..
문영철-반갑다.. 잘 지내자..
정진영-그래.. 앞으로 많이 가르쳐줘..
두한-...
김영태-그리고 와싱턴이 왔으니 하던 얘기 마저 하도록 하지. 와싱턴...
와싱턴-으 응..
김영태-이 가방 자네 거 맞나?
와싱턴-(그제서야 보고는) 이, 이것두 찾아왔나? 맞네.. 내 가방이야..!
두한-어제 그 자들 말로는 와싱턴 선배님이 훔쳐 간 것이라고 하던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와싱턴-...? (당황해) 아, 아닐세... 이 가방은 분명히..
김영태-솔직히 털어놔야 해. 그래야 우리가 도울 수 있어.
와싱턴-그게... 그러니까...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겠나? 사실은...
씬 아사히마찌 사무실
눈주위가 시퍼렇게 멍든 다나까가 노기등등해 있다.
다나까-뭐, 이 일을 덮을 수도 있다? 하야시가 정말 그랬단 말인가?
야쿠자1-예...
다나까-이런 자를 보았는가? 명색이 국수회 조선지부의 오야로서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쿠자1-하야시 오야붕은 아편에 연관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나까-저 혼자만 깨끗하겠다..?
야쿠자1-아편을 되찾는 일엔 협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노여우시더라도 일단은 참고 지켜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나까-...그래...?
야쿠자1-김두한이란 놈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나까-...
씬 우미관 사무실
와싱턴-(한숨) ... 영태 자네와 아우님들에게 미안하게 됐네.. 다 내 잘못일세..
김영태-(두한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내 생각엔 이 아편은 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두한-...글쎄요..
번개-돌려주다뇨? 이제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건 우리 겁니다.
개코-야가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하네.. 아 이걸 내다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다지 않습니까?
정진영-그건 안돼.
모두의 시선이 정진영에게로 쏠린다.
정진영-내가 이야기를 해도 될까, 두한아?
두한-그럼.. 너두 이제 우리 식군데.. 얘기해봐.
정진영-아편은 인민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고 했어. 중국이 저렇게 몰락하게 된 것도 다 서양에서 들여온 이 아편 때문이었어. 이건 저들에게 돌려줘서도 안되고..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안된다고 생각해..
김영태-(끄덕이며) 일리가 있네.. 내가 미처 그 생각은 못했구만..
두한-그렇다면 태워버리십시오.
모두들-...?
두한-형님이 보시는 앞에서 불살라버리십시오.
와싱턴-두한 아우님, 이게 얼마짜린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걸 처분하면 우미관 식구들이 한 십년 동안은 놀고 먹어도...
두한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와싱턴은 스스로 자신의 입을 막고 다시 구석으로 찌그러진다.
김영태-알겠네. 당장 태워버리겠네.
두한-그리고 와싱턴 선배님.. 선배님도 상처가 회복되면 하루 빨리 경성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와싱턴-떠, 떠나라니...?
두한-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와싱턴-한 번만 봐주게.. 타향살이는 이제 지긋지긋하네..
두한-그렇게 하십쇼.
와싱턴-두한 아우님.. 아니 두한 오야붕.. 제발 이 불쌍한 놈을 좀 받아 주십시오. 예? 제발 절 살려주십시오.
두한-진영아, 오늘은 그만 집으로 들어가봐라.. 어머니가 많이 기다리실 거다.
정진영-알았어..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일을 보자..
개코-혼자 갈 수 있지?
정진영-그럼...
정진영이 나간다. 와싱턴이 다급한 마음에 두한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는다.
와싱턴-살려주십쇼. 여길 떠나면 난 죽습니다.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칼침을 맞을지 모른다구요. 나는 못 떠납니다. 오야붕의 명령이라도 나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김영태도 어이없는 듯 미소만 지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김무옥-(만류하며) 아따 참말로 왜 이러씨요? 나이드신 양반이 체신머리 읎이...
와싱턴-이거 놓게. 두한 오야붕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네..
김영태-그만하고 일어나게.. 아우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탠가? 내가 오야붕께 잘 말씀드려 볼 테니 어서 일어나게..
와싱턴-정말인가? 정말이야? 고맙네... 고맙네, 영태..
김영태-영철이하고 무옥이가 이 친구 묵을 방 좀 구해주도록 해라. 며칠은 쉬어야 할 거야.
문영철-예, 형님. 가시죠.
와싱턴-(마지못해 붙들려 일어나며) 그럼 자네만 믿겠네... 부탁하네...
문영철과 김무옥이 와싱턴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김영태-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구.. 갈곳도 없다니 밑에 두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보게.
두한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도리질을 친다.
씬 우미관 밖
문영철과 김무옥이 와싱턴을 부축해 나오고 있다. 와싱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잖을 빼고 있다.
와싱턴-어디로 가는 건가?
김무옥-영태 형님 야그 못들었소? 두한 오야붕이 묵고 있는 관철여관으로 가는 거요.
와싱턴-이렇게 화창한 날에 나더러 방구석에 쳐박혀 있으라는 건가? 아우님들,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세.
김무옥-뭐시요? 커피라고라우?
와싱턴-저 쪽에 내가 잘 아는 까페가 있네. 자네들도 가봤는지 모르겠구만.. 사쿠라라고 아주 근사한 곳이지.. 거기 일본 마담이 죽여준다네. 아주 몸살이 난다구.
김무옥-지금 사꾸라라고 혔소?
와싱턴-왜, 그 동안 문을 닫기라도 했나?
문영철-거기가 어딘 줄이나 알고 가자고 그러는 거요? 제발 정신 좀 차리쇼.
와싱턴-도대체 왜들 이러는 줄 모르겠구만.. 차 한 잔 하자는데 왜 화들을 내고 그러는지...
문영철-모르면 입 다물고 어서 가기나 해요.
와싱턴-허 이거야..
그들 그렇게 가면...
씬 거지촌
진영모가 정진영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다.
진영모-(울며) 진영아.. 정말 우리 진영이가 왔느냐?
정진영-예, 어머니.. 그 동안 걱정 많이 하셨죠? 죄송해요, 어머니.
진영모-아니다, 아니야.. 에미는 개코랑 다른 아이들 덕분에 잘 지냈단다.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정진영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귀한 아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정진영-...(눈물)...
진영모-진영아.. 이 에미에게 약속을 해다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말이다. 에미 곁에서 예전처럼 공부만 하겠다고 말이야..
정진영-...
진영모-왜 대답이 없느냐? 진영아...
정진영-어머니 저 실은... 공부를 잠시 접을까 해요.
진영모-그게 무슨 소리냐? 공부를 접다니...
정진영-두한이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을 했어요. 앞으론 돈을 벌어서 어머닐 좀 더 편히 모시고 싶어요.
진영모-아니다. 그건 안된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구...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다고 해서 포부를 잃어서야 되겠느냐?
정진영-최선을 다했지만 무모한 도전이었어요. 어머니, 허락해 주세요. 두한이도 처음엔 말렸지만 제 결심을 듣고 순순히 허락했어요. 어머니, 두한이 믿으시죠?
진영모-...
정진영-허락해 주세요, 어머니..?
진영모-못난 에미 때문에 네 꿈마저 접게 되는구나.. 다 내 탓이다.
정진영-아니예요, 어머니... 일본이 물러가고 좋은 세상이 오면 다시 공부를 할게요. 약속드릴게요, 어머니...
진영모-... 내가 어찌 네 뜻을 꺾겠느냐? 어려서부터 너는 무엇을 한다고 마음 먹으면 누가 뭐래도 하고야 마는 아이였어.
정진영-...고맙습니다, 어머니..
진영모-(한숨) 결국은 너도 두한이를 따라가는구나. 그래 가거라.. 아무려면 이 곳만 못하겠느냐? 가서 마음껏 살아보거라...
정진영-...
씬 사쿠라 별실
나미꼬와 시바루, 그리고 미우라가 와 있다.
나미꼬-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김두한을 잘 구슬려서 아편을 되돌려 받아오라 이 말씀이군요?
미우라-예. 종로의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이 적임일 것 같아서 시바루군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머뭇거린다) 그리고...
나미꼬-그리고 뭔가요?
미우라-나미꼬양께서 시바루와 동행을 해주시겠습니까?
나미꼬-저두요? 그것두 형부의 지시인가요?
미우라-아닙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나미꼬양께서 가시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는...
나미꼬-(미소)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하지만 내게 너무 기대는 마세요. 나 역시 혼마찌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니까요.
미우라-어쨌거나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미꼬-...
씬 명동 어느 레스토랑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군과 박인애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박인애의 접시에는 음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박인애가 건성으로 포크질을 하다가 내려놓고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는다.
이군-다 드신 겁니까? 더 드시지 않구요.
박인애-...
이군-오늘도 한 말씀도 안 하시는군요. 웃지도 않으시구요. 하긴 제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죠.
박인애-...
이군-혹시 영화 좋아하십니까? 식사 마치고 극장에라도 갔으면 하는데요.
박인애-...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군-예, 말씀하십시오.
박인애-전.. 이 결혼 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이군-(조금은 당황스러운)허허허..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라 무척 당황스럽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결혼을 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말입니다.
박인애-(단호히) 예.
이군-... 그게 뭐죠? 너무 궁금하군요.
박인애-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군-...?(웃으며) 하하.. 그랬군요. 요즘 전문학교 학생들 사이에 자유연애가 유행이라는 소리를 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애씨도 그런 거군요?
박인애-...
이군-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새 같은 세상에.. 더구나 인애씨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신식 풍조에 물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 개의치 않습니다. 풍조나 유행 따위는 곧 사라져버리는 것이니까요.
박인애-죄송합니다.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일어나면)
이군-(동시에 일어나) 전 인애씨가 곧 청춘의 방황을 끝내리라고 믿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박인애는 아무런 대답없이 돌아서 그곳을 나선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던 이의 표정이 조금 싸늘하게 변한다.
씬 종로 거리
행인들 사이로 박인애가 무작정 걷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깊은 수심에 잠겨 있다.
부친(E)-지체 높은 집안끼리의 혼사다. ... 혹여나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이 아비의 말 무슨 뜻인지 알아 듣겠지?
박인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저 멀리로 보여오는 우미관의 간판. 박인애는 발길을 옮기지 못한채, 망설이고 있다. 혹시나 두한의 모습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박인애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데, 거짓말처럼 두한과 김영태들이 우미관에서 나온다. 박인애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지만 두한은 그녀를 보지 못한 듯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태-선약이 있다고?
두한-예. 최기자 아저씨께서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김영태-그랬군. (개코에게) 자네가 두한이를 따라가게.
개코-제가요?
김영태-오야붕은 혼자 움직이는게 아니야. 앞으로도 두한이가 어딜 가든 지 개코 자네가 항상 따라 붙도록 해.
개코-헤헤헤. 알겠습니다. (장난스럽게) 가시죠, 오야붕.
박인애는 차마 두한 앞에 나서지 못하는데 최동열이 그 쪽으로 다가오다가 그런 박인애를 발견한다. 몸을 숨긴 채 여전히 두한을 쫓아 시선이 움직이는 박인애의 쓸쓸한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최동열은 그런 박인애의 마음을 눈치챈 듯 한 발 다가선다.
박인애-아... 안녕하세요?
최동열-종로에 무슨 볼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박인애-예...
최동열-어쨌거나 잘 만났다. 점심은 먹었느냐?
박인애-...
최동열-아직 안 먹었다면 함께 가자꾸나. 요 앞에서 점심을 먹을 참이었거든.
박인애-아.. 아닙니다.
최동열-사양할 거 없다. 자 따라 오너라.
박인애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최동열은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다. 박인애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붙는다.
씬 한식집 어느 방
두한과 개코가 앉아 있는 그 방으로 최동열이 들어선다.
두한-(일어나) 오셨습니까?
개코-안녕하세요?
최동열-그래. 개코도 오랜만이로구나.. 내가 오늘 귀한 손님 한 분을 모셔왔다.
두한-손님... 이라니요?
최동열-(밖에 대고)어서 들어오너라.
박인애가 들어오자 두한이 깜짝 놀란다.
두한-인애씨...?
박인애-(역시 놀라며)...?
최동열-허허허. 두한이 네가 반가워하는 걸 보니 손님을 제대로 모셔운 것 같구나. 자, 다들 앉자꾸나.
모두들 앉는다.
최동열-그래.. 그 동안 두한이 너한테 일이 많았다지? 풍문으로 소식은 듣고 있었다.
두한-...
최동열-너를 믿기에 그 일들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겠다. 내가 오늘 너를 보자고 한 것은 네 큰어머님과 조모님 때문이다. 며칠 전에 네 큰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걱정이 많으시더구나.
두한-예... 그러셨군요..
박인애-...?(의아한)
최동열-쉽지는 않겠지만 자주 찾아뵙도록 하거라. 어려울수록 자꾸 만나뵈어야 조모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하니 내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으마.
두한-...
개코-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최동열-말해보게.
개코-내 생각엔 말이야 두한아. 너희 어르신들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뭣이냐면...
모두들-...?
개코-빨리 장가를 가는거여. 그래서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턱 안겨드리면 만사가 그냥 해결되는 거라구.
두한-개코...
최동열-허허허. 그 녀석..
개코-헤헤헤.. 안 그렇습니까? (박인애를 향해)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인애씨?
박인애-예? .... (얼굴이 붉어진다)
씬 삼청동 마당
조모가 마당을 거니는데 오씨가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조모-오, 이제 오는 게냐?
오씨-예, 어머님.. 한데 바람도 찬데 왜 나와계세요?
조모-방안 공기가 탁해서 잠시 바깥바람을 쐬러 나왔다.
오씨-그러다 고뿔이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구요?
조모-이만한 추위로 고뿔이라니 당치도 않다. (짐을 받아들며) 그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좀 듣고 왔느냐?
오씨-예. 온통 전쟁 얘기들 뿐입니다. 왜놈들이 벌써 북경을 넘어 남경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조모-대국이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다니.. 왜놈들이 모질기는 모지나 보구나.. 중국에 있는 우리 독립투사들도 적지 아니 고생을 하고 있겠구나.
오씨-...
조모-헌데 이것은 무엇이야?
오씨-예, 이 동네 아낙 하나가 잔치 음식을 싸주었습니다. 어머님 갖다 드리라구요.
조모-(의아해) 이 동네 아낙이 말이냐?
오씨-그래도 아직은 우리네 인심이 각박하지는 않은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 동안은 왜놈 경찰들 눈초리 때문에 . 아범이 누구인지도 다들 알고 있다면서 어머님께 드리라며 준 것입니다.
조모-이런... 이렇게 고마울데가... 그래, 아무리 땅을 짓밟는다 해도 어디에선가는 어머님과 저에게 제대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새싹이 터오르는 법이지. (사이) 자, 그만 들어가자.
오씨-예.
씬 한식집 앞
두한과 박인애, 최동열 개코가 밖으로 나온다.
개코-잘 얻어 먹었습니다, 아저씨. 음식맛이 아주 기가 막힌데요.
최동열-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구나. (시계를 보며) 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만해 스님게 또 꾸지람을 듣겠구만.. 미안하구나.. 차도 한 잔 했으면 했는데 바빠서 이만 가봐야 겠구나. 그럼 다들 다음에 또 보자꾸나..
두한-예. 살펴가십쇼.
개코-안녕히 가세요..
박인애-(목례)....
최동열-그래... 또 만나자꾸나..
최동열은 그렇게 사라진다. 잠시 두한과 박인애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
두한-차 한 잔 .... 하시겠습니까?
박인애-...차보다는... 제가 그런 곳은 좋아하지 않아서요.
두한-...그럼...?
씬 우미관 사무실
나미꼬와 시바루가 와 있다. 김영태가 그들을 맞고 있다.
김영태-식사를 하러 가셨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무슨 일입니까?
나미꼬-그렇다면 기다릴게요. 여기 앉아두 되죠?
나미꼬는 마치 제 사무실인 양 당당하게 의자에 앉는다.
김영태-(미소)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나미꼬-고맙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우리가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거 잘 아니까요.
김영태-...(쓴웃음)
나미꼬-그보다... 김영태씨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김영태씨는 현명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와 김두한 오야붕과의 사이가 소원해지지 않도록 말씀을 잘 드려주세요.
김영태-저는 그저 오야붕을 보필할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군요.
나미꼬-역시 김영태씨다우시군요. 듣던대로에요.
그때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던 개코가 나미꼬를 보고는 멈춰선다.
김영태-왜 혼자 들어오는 거냐? 오야붕은?
개코-예? 저, 그게... 박인애라는 여자분이 오셔서 잠시 바람을 쐬러가셨는데요.
김영태-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도 오야붕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야!
개코-저도... 몇 번이고 따라 가겠다고 그랬습니다만... 차마 두 분이 연애를 하는데 낄 수가 없어서...
나미꼬-...?
김영태-우미관에 있는 애들을 전부 풀어서라도 무조건 찾아! 어서!
개코-예..
개코가 부리나케 뛰쳐나간다. 나미꼬는 묘한 표정이 되면서
나미꼬-연애..?
씬 뚝섬
강가에는 물결치는 갈대밭. 불어오는 바람이 박인애의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고 있다. 두한도 박인애도 그 바람에 몸을 내맡긴 채, 그저 걷고만 있다. 바람이 더욱 세차진다.
박인애-너무 좋아요. 이곳에 나오기를 정말 잘 한것 같아요. 경성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데가 있는 줄도 몰랐다니...
두한-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어쩐지 그런 거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