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이후의 파리의 레스트란 (백인수 - 15)
지금부터 대략 100년 전이라면 나포레온 3세의 제2 제정시대이다.
이때의 유명한 미식가 퀼논스키(Curnonsky)가 그의 저서 Gaietes et Curiosites Gastronomique(미식 기담)에 재미있게 쓴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유명한 레스트란 이 많이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큰 거리라고 부르는 les Grands-Boulerards 의 양쪽에 또는 그 큰 거리에 가까운 곳에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그 큰 거리에는 les Dames Blanches(백의부인=白衣婦人)라고하는 승합마차가 사람의 통행도 많지 않고, 가로수도 많지 않으며, 야간에는 개스등이 어둡게 비치는 거리를 달리고 있고. 그 거리에는 승용차의 통행조차도 드물었는데 당시에는 파리시가의 동쪽인 탠플(Temple) 근처가 환락가의 중심 이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명 레스트란 으로 바레-로와이얄 에 있던 붸리(Very)는 이미 사양길에 있었고 후레르-프로봔소(Freres Provenceaux)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당시 미식의 중심은 이미 그란-부르보와르 로 옮기고 듀그레레(Duglere)가 주방장 이였던 카페-앙그레(Cafe Anglais), 카페 데 파리(Cafe de Paris) 등이 나타나고 붸르디에(Verdier) 형제의 메죤 도레(Maison Doree), 카페 릿츠(Cafe Riche), 카페 알디(Cafe Hardy), 카페 브레반(Cafe Brebant)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또한 동쪽편의 류-몬틀그이유 에서는 로체 드 칸카르(Roches de Cancale)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고객들은 필맆(Philippe)으로 모이게된다.
또한 서쪽의 샨제리제 거리에서는 르도와이엔(Ledoyen)이 알려지고 아베뉴-단탄(Avenue d`Antin)에서는 에스코피에가 초보시절에 있었다는 르 프티 무란루즈(Le Petit Moulin Rouge)가 식도락가와 환락자(歡樂者) 들을 모으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카페 알디(Cafe Hardy)는 1848년에는 La Maison Doree로 변하고 말지만 1830년 경에는 크게 번성했으며 르 카페 리치 와 함께 [알디 에서 식사를 하려면 부자라야 하며 릿치 에서 식사 하려면 대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사람들이 말 했다고 한다.
Parie 에 진짜 Resturant 다운 요리점이 생긴 것은 1865년 경Consomme, 계란요리, 가금요리(예를 들자면 Volaille au gros Sel) 등을 손님께 제공한 부란즈(Boulanger) 의 요리점인 듯 하며 그 이후부터 레스트란이 파리에 많이 생겼다고 한다.
참고로 앞서 말한 르 카페 리치, 르 카페 알리 의 근처에는 톨트니(Tortoni)라는 식당이 있었고 당시의 유명한 작가 빅톨 유고 파와 로오만 파의 작가들의 모임의 장소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당시에는 이미 르 카페 듀란(le Cafe Durand), 르 브프 아라 모드(le Boeuf a la Mode,) 붸훠르(Vefort), 라 뜨르 달쟌(La Tour d`Argent) 이라는 식당도 있었다. 그 중의 듀란 은 옾띠 듀란 으로 붸훠르 는 르 그란 붸훠르 로 바뀐 이름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1920년 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라서 전쟁 때문에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고 그 당시의 레스트란 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Larue(라류우), Lucas(류카), Maxim`s(맥심), Prunier(프류니에), Volsin(붜와산), Drouant(두류안), Viel(뷔엘), Emil`s(에밀즈), Paillard(파이얄), Le Boeuf a la Mode(브프 아라 모드), Montnu(몬따뉴), Le Caneton(르 카네톤), Genot(제놀), Escargot(에스칼고), Le Cabret(카바레), Le Doyen(르 도와이얀), Foyot(포와이요), Laperouse(라페루스), La Tour d`Argent(라 뜨르 달쟌), La Cafe de Paries(카페 드 파리), Laurent(로오란), Hotel Ritz(오텔 릿트), 등이다.
이 중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은 르 카페 드 파리, 르 도와이얀, 르 브프 아라 모드, 라 또르 달쟌 정도이다.
그리고 오늘날(1960년 말경)에 와서는 붜와잔느, 에밀즈, 바이얄, 르 브프 아라 모드, 몬따뉴, 쥬노우, 훠와이욘, 카페 드 파리 등은 이미 그 모습이 사라지고 예부터 지금껏 르까르톤, 도누우완, 라베루우즈, 로오란, 류까(Lucas-Carton), 그리고 맥심, 릿트, 라 또르 달쟌느, 르 캬바레, 레스까르고,후우켓트(fouquet), 라류우, 브류니에, 카페 드 라베에, 르 드와이얀 등이다.
1970년대에는 일류라 할지라도 그다지 맛이 없는 곳도 있으며 [식당은 훌륭하고 손님도 많고 가격도 높은데 그다지 맛은 없다]라는 식당도 더러있고
또 1970년대에 새롭고 큰 식당으로서 Grand V`efour(그란드 붸후르) 같은 곳은 음식이 대단히 좋다는 평이 있기도 했지만 다만 당시에는 [진정한 미식가라면 안내서나 간판에 현혹되어 나중에 비싼 요금에 불쾌함만 느끼는 별로 맛없는 식당도 더러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변화였을까? 내가 1970년 말 1980년대 초 일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일본 양식계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느끼면서 들은 이야기로는 [불란서요리의 본바탕인 불란서보다 일본속의 불란서요리가 앞서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랬을까? 그때 불란서에는 신 프란스요리 인 누벨 퀴진느 가 한참 유행하고 있었다, 맛있게 먹고 살 찌지 않는 요리, 남쪽 태양의 나라 프로봔스의 요리, 로완느의 요리인들, 그리고 구르메를 위한 미식요리, 유명한 요리장 밋셸 게랄, 폴 보큐즈, 트로와그로 형제 기타...
근대의 많은 레스트란 과 유명 요리장 들의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하기로 하고, 내가 1980년에 파리에서 유명한 식당 맥심에 갔다가 예약이 없어 식사를 못하고 기왕에 간 파리에서 그 당시 유명했던 Bisque de Homard 나마 맛보려고 세느강 건너의 한 레스트란 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데 슾(Soup)이 너무 짜서 수프 한술 먹고 빵 한 조각 먹고 물 한 먹음 마시고를 거듭하여 겨우 식사를 마친 경험이 있는데, 대체로 그곳 음식은 우리에겐 짜다는 평이 있다. 나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반찬을 부식으로 먹는데 서양 사람들은 요리를 주식으로 해서 빵과 와인을 부식처럼 식사를 하여 우리와는 반대적인 맛의 섭취 법을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은데...?
.
참고로 나의 경험담 하나
독일 세계 요리 올림픽에 참가했던 1980년 Swiss Canadian (당시 프라자호탤 조리부 수석)인 Chef Fred Staherry 와 함께 듓셀돌프 에 둘렀다가 역앞의 식당에서 Pizza Pie를 주문해서 먹는데 너무 짜서 나도 Mr Staherry 도 4분의1도 못 먹고 식당을 나오다가 Mr Staherry 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보이며 내어 뱉은 말...... “갓 데에ㅁㅁㅁ”....... ㅋㅋㅋㅋㅋ......
첫댓글 100년 전 정도 부터 서양요리가 발전하기 시작했군요 . 체계가 잡히구요. 근데 저도 동감이지만 서양음식 특히 유럽쪽에 음식이 우리입맛엔 짜고 시고 자극적인 입맛이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세지는 너무 짠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선배님이생각하시는 우리나라 프랑스요리 100년사를 적어주시면 후배들한테 도움이 많이 될것같습니다.연구소장 최수근 배상 1950년부터 호텔, 일반집등등 알고 계시는 사실만을 기록해 주시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프랑스 요리 100년사라면 역사적인 기록을 찾이 학자들이 할 일이고..1950년대면 6,25전쟁 시점인데 당시에는 너무 가난하여 식당에서 외식을 해본 경험이 없으므로 별 도움이 않될 것 같습니다. 그냥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되로 글을 올릴께요.
안녕하셔요.최 수근입니다. 봄인가 했는데 벌써 여름 이네요.항상 건강하십시오. 생각나시는 글을보내주십시요.대선배님을 글을 읽을수있는행복을 주시는 향원선생님의 노고에 항상 감사하지요.최 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