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사 직원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원의 핀잔을 받을 정도로 보도 자료 그대로 캐릭터를 소개하던 김승우가 다른 질문만 받으면 예측 불허 발언을 보따리 풀 듯 풀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현장은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어요.
매니지먼트 측에서 시킨 대로 ‘우리 열심히 했으니까 재미있게 봐주세요’ 하는 식의 말은 너무 무책임해요. 내 얼굴 나오는데 누가 책임지겠어요. 어차피 총대 메는 건 주연 배우인데 솔직해야 하잖아요. 어떤 느낌인지 알겠죠?”
김승우라는 사람이 변했나? 그건 아닐 거다. 한 번도 흥행 배우,
연기파 배우로 불리지 못했던 그는 영화를 선택한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가 이런 독설을 내뱉은 배경에는 영화라는 쇼 비즈니스 산업의 비정한 게임의 룰이 있다.
<역전에 산다>에서 김승우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부분은 ‘흥행’이다. “철저하게 관객들의 재미를 위해 변경하고 포기한
부분이 많았어요. 관객들만 많이 찾아주면 난 오케이. 그럼 후회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만일 관객들에게 외면받는다면 상처를
많이 받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얻은 게 하나도 없어요. 개런티 받은 거 빼고는.”
사실 배우로서 김승우는 영악하지 못하다. 그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에는 모두 ‘도와주세요’라는 유혹의 도장이 찍혀 있다. 김승우는 쉽게 ‘아니오’라는 말을 잘 못한다. 스스로도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자가 진단을 내린다. <라이터를 켜라>의
박정우 작가는 김승우에게 “왜 작품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자꾸 밀리느냐”라는 지적을 한 적이 있었다. <라이터를 켜라>와
최근 <불어라 봄바람>에서 함께 작업하고 있는 장항준 감독도
언젠가 농담 비슷하게 김승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제작사에서도 모두 등 돌릴 때 형만큼은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해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관객들에게는 픽픽거리는 웃음으로 코드 전환되던 희열의 순간이
있었다. 300원짜리 라이터 하나에 무식하게 목숨 거는 <라이터를 켜라>의 봉구를 보고 관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김승우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라이터를 켜라> 시사회 때 관객들이 웃어 젖히는 데 너무 흥분되더라고요. FILM2.0에서도 모두 '썸업'해주고, 하하. 제가 <라이터를
켜라> 이후에 연기가 늘면 얼마나 늘었겠어요. 하지만 그 작품이 터닝포인트인 건 맞아요.” 어깨와 목소리에 힘을 쫙 뺀 김승우의 코미디 연기는 뒤집어 보면 <신장개업>의 실패를 딛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장개업> 촬영 당시 스탭들이 난리가 날
정도로 웃더라고요. 그래서 과욕을 좀 부렸죠. 감히 개인기를 시도했거든요.” <신장개업>을 통해 김승우는 자신에게 ‘개인기’가 없다는 뼈아픈(?) 좌절을 경험했다.
김승우는 웃기게 생기지도 않았고 하물며 목소리가 특이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때는 ‘밀키 보이’라 불리며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던 멜로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박중훈이나 송강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배우가 박중훈이나 송강호를 연기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그의 코미디에 관객이 반응하는 건 왜일까? 그의 표현대로 “멀쩡하게 생긴 놈이
망가지기 때문”일까? 그건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보여주는 시치미나 엄살로 봐도 좋을 듯하다. 아마 김승우조차도 자신이 어떻게 코미디 배우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지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물론 <역전에 산다>에서도 김승우는 자신의 외모를 배반한다.
한 번 한 얘기 두세 번은 해줘야 하는 인간, 혼자 눈치 없이 회사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인간, 속도 없이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인간, 같이 엮이면 내 인생도 꼬일 것 같은 인간, 바로 그가 연기한 강승완이란 인물이다. 그러나 어기적어기적 상황에 휩쓸려가면서 끊임없이 깨지는 주인공이 밉지는 않다. 전날 새벽까지
<불어라 봄바람> 촬영을 하고 유난히 쾡한 모습으로 나타난 김승우도 마찬가지다. 스튜디오에 놓인 화이트 보드에 로보트 태권 V를 그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진다. 서른
중반에 놓인 이 배우, 정말 계산할 줄 모르는 걸까. 하긴, 뭐 그게 중요한가.
사진 이준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