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인혁당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그동안 인혁으로 불리는 활동가 그룹에 대한 관심은 박정희정권의 무단적 탄압에 의한 ‘희생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민청학련을 ‘용공 덧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조작되었다는 관점이 중심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혁그룹과 그 개인 활동가들의 ‘운동성’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 사법부에 의해 최종 조작되었다고 판단되고 유족과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이 거의 종료되어 가고 있는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은 명백히 조작이다. 그러나 인혁그룹은 4월혁명에서 부터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에 이르기 까지 ‘민주주의 운동그룹’으로서 전국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한 조직이었으며, 이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 목표라 할 수 있다.
3장에서는 인혁그룹이 4월혁명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밝히고 5.16쿠데타로 좌절된 4월혁명의 정신을 이어나가는 것임을 밝힌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인혁그룹은 여타의 지하전위조직과는 달리 실질적 지도성과 대중 활동력을 가진 조직임을 밝히고자 한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정치와 경제와 문화 뿐 아니라, 운동의 절대적 중심 공간이 서울로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과거사에 대해서도 이러한 현재의 구도를 투영하는 경향을 가진다. 인혁그룹이 활동했던 시기에 대한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편견이 작용할 여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혁활동가들의 지역 연고지 분석을 통해 당시 주도적 운동의 지역공간이었던 ‘영남권’운동을 설정하고 그 역사적 배경을 아주 부분적으로나마 제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인혁그룹이 영남권과 서울권이라는 두 개의 공간에 대한 지도적 활동을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전국적 지도력을 가졌음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분절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억압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가장 크게는, 민주주의운동이 과거 민족민주운동과 분리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 동력과 과제가 다르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운동 조차 민족 민주적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단순한 민주의식으로 출발한 운동과 거기에 참여한 운동가들이 신속히 민족민주운동의 영역으로 발전, 심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근현대의 제 운동이 우리 민족의 근대사적 요구, 즉 민족 민주적 요구의 ‘계기적 표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역사의 전개를 ‘내적 동력의 자기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2.28, 4.19 역시 예외일 수 없으며 인혁그룹이 전개한 절차민주주의운동 역시 그러한 범주에 있는 것이다. 즉 인혁그룹의 투쟁을 4월혁명의 연속으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적 요구인 민족 민주적 요구의 계기적 표출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입증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민중운동, 시민운동 등 제반 진보적 운동의 영역을 ‘발전적 과정’, ‘확장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대구, 경북 지역의 정치적 보수성은 구체적인 정치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언급하고자 한다. 즉 박정희의 집권전략에 의한 것이며 인혁당사건도 그 일환임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기술하고자 하는 경북, 대구의 지역운동사는 ‘지역 분리적 사고’나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역운동의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설정함으로써 전국운동사를 제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60년대 이전의 운동이, 외형적으로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어떻게 그 이후로 이어지는가를 밝히는데 있어서 초점이 되는 것은 4월혁명의 성격과 그 주도력을 제대로 밝히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4월혁명의 주도 지역인 영남권 및 그 중심인 대구의 운동적 위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즉 4월혁명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영남권의 지역운동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설’적 형태로 제기한다. 이를 입증하는 노력이 앞으로의 과제로 놓여 있다.
2. 인혁당의 실재 여부
1) 인혁당이라는 명칭은 실재 하는가
인혁당이라는 명칭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인혁당사건의 허구성, 조작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위’라는 말을 인혁당 앞에 붙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명칭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진실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진실위는 당시 공판조서와 관련자 면담조사를 통해 당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나) 판단
=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당명 논의 과정을 보면
- 1962. 1 우홍선 집에서의 모임과 1962. 8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모임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한 도예종, 우홍선, 김영광의 당시 진술내용을 살펴보면, 1962. 1 모임에서 여러 가지 이름이 제시되었고 ‘인민혁명당’은 제시된 이름 중에 하나였는데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일관된 진술이고“
이것으로 볼 때, 인혁당이라는 명칭은 중정의 완전 조작은 아니며 그룹 내부에서 제기된 것이다. 다만 그 명칭이 합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동시대 활동가인 김세원은 인혁당 핵심그룹들이 모여 명칭을 정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검찰수사와 김세원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명칭에 관한 논의가 분명히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인혁당 이었다는 것이다. 검찰에서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다른 이름은 적시되지 않고 인혁당 이라는 명칭만 제기되었다는 것은 이후 이 조직이 인혁당 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도 있다. 더구나 고문조작에 맞서 전면부인전술을 썼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훨씬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
또 하나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인혁당 이라는 명칭이 극히 소수에 의해 합의되어 점차 동의를 구해가는 과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세원은 명칭이 있다고 증언하였으나 강력히 부인하는 다른 동시대 활동가의 증언도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최초 합의를 본 소수 외에는 이를 알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지하조직의 생리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웠을 것이며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법정진술에서는 최초의 합의자들은 전면부인전술의 일환으로 부인하였을 것이고 나머지는 사실 그대로 부인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인혁당 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이름 짓기 차원이 아니라 제3세계민족해방운동이라는 세계사적 흐름과도 맞물려 있어 시대적 적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당시 월남, 콩고, 쿠바 등에서 민족해방운동이 활성화되었고 특히 월남에서는 반미자주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전면화 되어 있었다. 월남의 NFL은 효과적인 저항운동을 위해 NFL을 지도할 인민혁명당을 만들었다. 인민혁명당은 반미자주와 조국통일 그리고 반독재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였는데 그 운동적 상황과 목표가 우리 남한 실정과 매우 유사했다. 당시 월남의 민족해방투쟁이 제3세계운동의 모범이었던 만큼 그 명칭을 따왔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하겠다.
명칭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특별히 다른 명칭이 제기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혁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 여겨진다. 다른 명칭이 있었다면 최소한 그것이 밝혀질 때까지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명칭이 있다는 것은 조직과 조직 활동이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아래에서 기술할 것이다. 이후부터는 1964년 사건화 된 소위 제1차 인혁당 사건을 ‘소위’없이 인혁당 이라고 부를 것이다.
2)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서의 1차 인혁당의 실재 여부
1964년 한일회담반대시위의 배후로 도예종 등 57명의 활동가들이 구속, 수배된다. 1차 인혁당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 조작하려고 하자 활동가들이 중정의 조사와 기소과정에서 전면부인전술로 대처하여 조사 기록상으로는 진실 여부를 가리기가 어렵다. 담당 검사가 상부의 기소방침을 거부하여 사표를 내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중정과 검찰 고위층의 압력으로 결국 도예종 등 12명이 국가보안법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한 반공법만 적용하여 기소되어 그 중 도예종 3년, 양춘우 2년으로 두 명만 유죄 선고되고 나머지는 무죄 석방된다.
당시 활동가들이 중앙정보부의 북한지령에 의한 반국가단체라는 용공조작 음모에 맞서 전면부인전술로 대처한 것은 고문조작을 서슴치 않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는 유일한 선택이다. 당시 관련자들은 이후로도 이 사건에 대해서 함구하였다. 또한 동시대활동가들도 이 사건에 대해 사실을 밝히는 것은 금기시하였다. 이 때문에 1차 인혁당의 진실은 밝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의 진전으로 조국통일과 민주주의운동이었던 인혁그룹의 활동을 밝힐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도래하였으나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핵심인사들의 사망으로 정확한 사실 규명은 불가능해졌다. 거기다가 막연한 금기심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더욱 사실 규명이 어렵다.
흔히 1차 인혁당사건을 중정의 조작일 뿐, 실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서 담당검사들의 기소거부를 든다. 담당검사조차 기소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소를 거부한 검사들도 ‘조직운동’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였으나 이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기소할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즉 검사들의 기소거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서의 인혁당은 근거가 없지만 인혁그룹의 활동은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혁그룹의 존재는 관련자나 동시대 활동가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동시대 활동가였던 김세원은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인혁그룹의 조직 활동에 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내가 일정한 조직의 존재에 대해 사전적으로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은 1962년 2, 3월 경에 우동읍으로 부터 5.16 당일에 우리가 정한 이름을 사용하여 그때 약속한 장소로 편지가 왔을 때였습니다. 내용은 “주식회사 설립을 위해 주주 4, 5명이 논의 중이다. 앞으로 같이 회사에서 보아야 하니 건강 회복에 노력 해 달라”는 것이었고 서울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 있더군요. 나중에 내가 들은 바로는 서울에서 피신활동을 하면서 사회당, 민자통 세력을 재규합하던 이복민, 도예종, 우동읍이 사회당 당수 최근우의 비밀 아지트에서 상봉하여 1961년 10월, 지하조직활동을 합의하고 민자통 통일정책심의위원인 L교수를 영입키로 했다고 합니다. 5. 16 군사파쇼통치의 장기화가 예견됨에 따라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비공개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겠지요. 4인은 사회당의 강령, 규약을 지하수준에 맞게 약간 수정하고 서약, 맹세를 함으로써 형식을 갖추었던 것 같습니다. 조직명은 그때 정했고 물증을 남기지 않는다, 외자(북한의 자금)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하더군요. 도예종이 조직을, 이복민이 교양 선전을, 우동읍이 총무(당무)를, L교수가 대표 겸 재정을 각각 맡아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조직이 드러난 이유는 조직담당자가 만나지 말아야 할 학생 쪽 휴즈선을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학생조직에서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4월혁명 공간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구심체였던 민자통의 청년활동가그룹인 민민청과 통민청은 5.16쿠데타로 공개 활동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김세원이 증언은 이를 적극 뒷받침한다. 다만 그 조직의 성격, 위상, 결집 정도가 어떠하냐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운동적 성장과정과 주객관적 조건으로 미루어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 진다. 우선 민민청과 통민청은 공개적 대중조직이었으며 활동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는 사실상 공개적 대중조직이라 할 수 있는 민자통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즉각적으로 전위 조직적 지향으로 전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필요성은 절실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략 그 중간 정도의 조직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이하게 말한다면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구조는 강령과 규약을 가진, 서클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종합하면 ‘서클적 수준을 상당 정도 넘어서는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 정도가 그 시점의 주, 객관적 정세에 조응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인혁그룹의 이후의 활동의 작풍으로 미루어볼 때 주체적 역량을 뛰어넘는 무리한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떤 조직의 지도에 의해 임의적으로 훈련된 성원’들이 아니라 대중운동에서 성장하였고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는 혹은 이와 동떨어진 무리한 조직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인혁당 재건위사건의 관련자인 전창일은 최근 회고록에서 인혁당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도예종의 법정 진술을 인용하면서 “주범 도예종의 설명에 의해서도 인민혁명당이란 실체는 없었다. 하지만 시국관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모임 즉 서클은 있었다. 그 서클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며 굴욕외교를 성토하는 운동에 참가하는 의로운 학생운동을 지지 성원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고 하였고 인혁당 재건위사건에 대해서는“...이러한 실체 없는 인민혁명당을 그 누가 어떻게 재건하려 한단 말인가? 나는 묻고 싶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라고 하면서 혁명정당이 갖추어야 할 핵심적 요건을 원론적 차원에서 거론하면서 “혁명정당이란 몇몇 선각적인 지식인만으로, 또 학생들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라고 강변한다. 즉 당시 운동역량이 혁명적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 듯 보면 두 사람의 증언이 매우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상호 충돌하는 증언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의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김세원은 어떠한 조직 활동이 있었다는 것이고 전창일은 서클적 수준의 조직은 있었지만 (중정이 조작한)혁명적 정당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혁당은 혁명정당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서클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라는 앞서의 결론과 상충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박정희정권이 모략한 ‘북한의 지령’과 ‘반국가단체’로서의 제1차 인혁당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64년 1차 인혁당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발표한 인혁당 사건개요는 이러하다.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우동읍의 집에서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민청 중앙 위원장이던 우동읍과 동맹간사 김배영, 김영광, 민민청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작, 전 진보당원 김한덕,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다. 인혁당은 창당 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이 발표문의 핵심은 인혁당이 첫째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둘째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 셋째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였다는 것이다.
첫째, 간첩 김영춘에 관해서는 국정원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 내용에 상세히 나온다. 김영춘은 본명이 김상한인데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으로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인혁당에 지령을 전달한 김영춘은 육군첩보부대 요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정원진실규명위원회의 판단을 인용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한다.
“ [ 판단 ]
- 김상한이 1962. 7. 12.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의 임무수행을 위해 월북했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고
- 반면 ‘인혁당 창당결과 보고’라는 목적수행을 위해 육군첩보부대의 공작원으로 위장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진술이나 자료로서 입증된다고 보기 어려움으로
- 결론적으로 ‘김상한의 월북’에 대한 발표문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의 모든 사실들이 1964. 8. 14. 이후에 확인된 것이라는 점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발표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임.”
둘째,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였다는 점을 검토해보자. 인혁당의 강령과 규약에 관해서는 앞서 김세원의 증언에 의하면 “...사회당의 강령, 규약을 지하수준에 맞게 약간 수정하였다...” 한다. 인혁당 구성원들이 4월혁명 공간에서 사회당이 주도하여 만든 민자통의 청년그룹들이었으므로 지극히 자연스럽다하겠다. 그렇다면 뜬금없이 제기되는 북괴로동당 강령은 중정의 용공조작에 불과하다. 강령에 관한 김세원의 증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 ...우리의 노선은 자주(반미). 민주(반파쇼). 민족통일이며, 이 노선은 8. 15이래 일관된 노선이요, 노선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강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1차인혁’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당. 민자통의 강령을 그대로 한다는 것이 묵시적인 합의였습니다...”
셋째, 북괴 중앙당의 지령에 관한 부분이다. 김세원은 이렇게 증언한다.
“1960년대에는 ...북에서 많은 공작원이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남한의 운동가들을 위축시켰고 따라서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들은 활동가들의 생존과 앞으로 재건해야 될 비합법운동과 반합법운동 조직의 보안과 예비를 위해 북과는 일정기간 연계를 갖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우리 동지 중 불가피한 사연으로 인해 북과 연계된다면 그는 우리 주위에 접근하지 않고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을 현 단계 통일운동의 조직노선으로 하자는 것이 활동가들의 공통된 견해였습니다” 김세원은 인혁당 결성과정에 대해 증언하면서 북한과 관련된 증언을 한다. “ ...외자(북한의 자금)는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하더군요...”
당시 남한의 혁신계들은 해방 정국에서 함께 활동한 북쪽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본의든, 본의 아니든 간에 직, 간접적인 접촉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런 관계로 남한의 혁신계들이 오해를 피하고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북쪽 인사와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분위기가 강하였다고 한다.
증언자인 김세원은 소년시절 빨치산 출신으로 북쪽의 인사들과 상대적으로 친화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 경우에조차도 북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주로 한국전쟁 이후에 혁신계운동에 본격적으로 결합한 활동가들이나 학창시절을 한국전쟁 이후에 보낸 젊은 활동가들의 경우는 북과의 연계에 대해 훨씬 더 강력한 반대 입장을 가졌을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중심인물인 서도원, 도예종의 후배인 류근삼의 증언에 의하면 “선배들이 북쪽 사람들을 절대로 만나서는 안된다”고 수차례 교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별 증거도 없이 제기되는 ‘북괴중앙당의 지시’라는 수사발표는 역시 중정의 전형적인 용공조작 수법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북괴중앙당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서의 인민혁명당은 중정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학생시위의 배후 지도력인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를 제거하고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용공덫칠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인혁당은 4월혁명 공간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전개한 민자통의 청년조직인 민민청과 통민청의 조직통합에 의해 기본적 조직관계가 형성된, 민족민주운동의 잠재적 지도부의 위상을 갖는 남쪽 혁신계의 독자적 조직일 뿐, 북한과 연관된 조직이 아니다.
3)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서의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사건)의 실재 여부
인혁당 재건위사건은 실체적 진실에 관해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사건 자체가 박정희독재 시기의 최대의 인권탄압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사건의 핵심관련자들이 요식적인 사법절차를 거쳐 즉결 처분식으로 살해됨으로써 사건 증언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 역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관련자들이 전면부인전술로 대처함으로 인해 조사기록, 재판기록으로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박정권의 ‘조작성’과 ‘인권탄압’이 중심적으로 제기되어 있으며 그것이 지나쳐 ‘활동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들’, ‘지방인사들’을 민청학련을 용공 덫칠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로 조작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견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거기다가 민청학련의 일부 지도부들이 관련성 없음을 강조하고 민청학련 관련자 출신 학자가 서울대엘리트주의를 내세워 당시 서울대가 주도하는 학생운동과 인혁 재건위가 무관함을 강변하는데 이르러서는 서글픔마저 느끼게 한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인혁그룹이 대 타격을 받았지만 공공연한 탄압과 일상적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한다. 박정희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정권교체운동을 전개한다. 1967년에는 윤보선 후보로의 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운동, 1971년에는 김대중 후보로의 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운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 인혁그룹은 민주대연합을 통한 정권교체운동을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주요한 전략의 하나로 정착시킨다.
인혁그룹은 1971년 9월에 1차 인혁당사건 당시의 조직에 이어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를 결성한다. 이것이 ‘경락연구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모임 참가자 중 한사람인 김세원의 상세한 증언이 있다.
“...내가 중정에 끌려갔다 나온 직후인 1971년 5월 하순에 우동읍이 광주로 찾아왔더군요. 그는 현재 전국 규모의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시기인가, 적합한 회사의 형태는 무엇일까, 설립이사는 몇 명으로, 누구누구와 하는 것이 좋은가 등을 구상하다가 나와 상의하기 위해 내려왔답디다. 나는 회사설립에 찬동했고 다만 사람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우동읍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동업자의 경력과 근황을 검토해본바 야간업태의 회사 이사를 맡길 수 있는 친구는 10명 미만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우동읍은 대구, 부산 쪽 동지들의 의견을 타진하였고 6월과 8월에 나와 다시 만나 회사업종 선택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1971년 9월 우동읍의 연락을 받고 상경했습니다. 그는 이사를 5인으로 하기로 했다고 하면서 그 중에 한 명은 내가 모르는 부산 사람이라며 동의를 구했습니다. 나와 우동읍은 ‘회사’의 목적은 민족전통의학과 자연건강식품 재배 및 요법을 통한 범민족건강. 교양사업으로 전민족의 보건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전민중이 과학적인 인식과 민족전통의학으로 건강해지기 전에는 민족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전통의학과 자연건강에 대한 민족 교육 간부 양성을 우선 사업으로 한다. 영업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책임 하에 하되 원리원칙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이사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다는 등의 회사설립 취지와 목적 운영방침에 그동안 논의 합의한 사항을 재확인했습니다. 몇 시간 후 우동읍, 서도원, 이수병, 부산의 이사장 그리고 나는 최초로 회동했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자유토론시간을 가진 다음 우동읍의 사회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우동읍은 우리가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은 재확인할 필요가 없으므로 기본적인 문제는 생략하고 실천에 관한 실무문제만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동읍의 개회선언과 1분간의 묵념이 있었습니다. 우동읍이 그 자리의 좌장으로 서도원을 추천했고 이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회사의 명칭은 경락연구회로 정해졌습니다. 경락(=신경)은 육체전부를 조정하는 것이므로 ‘경락연구회’라는 이름은 - 어떤 ‘과학적 명칭’을 부여하는 대신으로 - 우리들 모임의 취지에 걸 맞는 것이었습니다. 우동읍이 계속 사회를 보면서 우리 5인이 전원 모이는 것은 년 2회(3, 9월)로 하고, 각기 다른 지역의 3인이 만나는 것은 3개월에 1회, 2인이 만나는 것은 매월 1회로 하는 것이 어떤가 제안하여 통과시켰습니다. 각자는 자기 지역의 전통의학과 민속의학을 주체적으로 적극 연구하여 지역민의 보건건강 발전에 기여해야 하며 ‘회’는 그 연구진행을 총체적으로 연구, 교환, 지도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우동읍은 이 모임을 ‘모든’ 것에 우선하고 ‘모든’ 것의 우위로 하여 우리의 희망이 성공할 때까지 전력을 다하여 발전, 번영시킬 것이며 종국적 결실이 영글 때까지 발전, 강화 할 것을 다짐하자고 했습니다. 서도원 동지는 우리에게 부과된 막중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건강하고 자중자애 하자는 말로 회의를 끝냈습니다.
밝힌다), 광주(김세원), 학원・문화(이수병) 쪽을 대표했다. 각자는 자신의 지역과 부문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각자의 활동의 결과를 가지고 검열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1차 인혁당’이 “형식은 갖추되 물증은 남기지 않는 점조직 방식”이었다면 ‘경락회’는 “형식도 갖추지 않고 물증도 남기지 않는 점조직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김세원의 증언으로 볼 때 인혁그룹은 경락연구회라는 형식으로 결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락연구회는 전통의학으로 위장한 민족민주운동의 잠재적 지도부였다. 이 조직이 당을 예비하는 조직이라고 할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즉 조직의 형식적 수준은 서클이었으나 단순한 서클이 아니라 당시 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직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이 조직은 인적 구성에 있어서나 운동의 연결성의 측면에서 볼 때 인혁당의 후속 조직, 재건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64년 인혁당과는 달리 71년 결성된 경락연구회는 당적, 단일 조직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지역 연합적, 협의체적 성격의 조직으로 판단된다. 서울,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광주, 부산지역의 지역조직이 대표자를 통해서 협의적으로 결속된 형태이다. 중정이 인지한 조직 활동은 대구와 서울의 지역 활동이었다. 그러나 지역 간의 협의적 조직인 경락연구회는 인지하지 못하였으며 평소 활동과정과 조사과정에서 인혁그룹은 치열한 투쟁으로 보안을 지켜냈다. 이 때문에 광주와 부산의 인혁그룹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중정이 경락연구회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인혁그룹의 치열한 투쟁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경락연구회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경락연구회의 조직적 중심성이 매우 높았다면 그 존재를 숨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정남이 민청학련 지도부에 결합하는 과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경북대 학생운동과 매우 긴밀했던 대구인혁그룹이 내부의 일정한 논의를 거쳐 여정남의 서울행을 돕고 서울그룹은 이수병과 김용원이 중심이 되어 여정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즉 경락연구회가 중심이 된 결정과정이 아니라 지역 간의 협력적 방식으로 사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차 인혁그룹은 이미 나름의 조직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굳이 지도조직 구축이라는 과제에 집중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이들 사이를 보다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 일정한 논의구조를 구축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인혁그룹은 투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활동가 그룹이며 경락연구회 활동은 지역 간 의사소통을 위한 그들 활동의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지도의 통일, 자금의 집중, 조직의 체계화를 내포하는 지하지도조직의 의미가 포함된 ‘예비적 지도조직’의 개념은 일부 참가자의 증언과 무관하게 과도하다 할 것이다.
중앙정보부 역시 인혁그룹을, 특히 대구그룹을 관찰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활동력과 의제생산력, 학생과의 연계성, 야당과의 민주연합, 특히 박정희의 정치적 고향 대구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반 유신 시위를 제압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로의 조작을 기도했던 것이며 그들의 의사소통구조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인혁그룹이 이미 잘 연결되어 있으므로 굳이 그들의 내적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직 조작에만 열을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협의체적 성격의 경락연구회의 사업내용도 정세를 공유하고 사업의 기본방향을 토론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역 간 정보를 교류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즉 이미 존재하는 지역 활동을 ‘인위적 조직성’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인혁그룹이 그 당시의 다른 지하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지역 대중 활동의 토대 위에 굳건하게 서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다른 조직은 중정에 의해 사건화 되면서 모두 소멸하지만 인혁그룹은 탄압을 당하였을 때도 지역대중운동에 토대하여 지속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핵심인사들을 죽이거나 장기형을 선고하지 않고서는 인혁그룹의 활동을 중단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경락연구회는 중정이 혁신계의 씨를 말리려한다는 우홍선의 보고에 대해 보안을 더욱 철저히 하기로 한다. 그러나 서도원, 도예종을 비롯한 많은 혁신계 인사들이 무차별 연행되어 고문수사를 받게 된다. 중정이 이들을 전면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연행한 것은 경락연구회에 대한 정보를 인지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정은 경락연구회의 존재를 사건이 종결된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당시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서 겨우 알았을까? 중정이 사전에 인지한 것은 인혁그룹이 끊임없이 학생시위를 지도하고 야권후보단일화와 선거운동을 통해 정권교체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인혁그룹을 이번 기회에 고문조작을 통해 살해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지는 최고통치권자인 박정희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수립을 기도했다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발표한다. 박정권은 1차인혁에 이어 또다시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에 대한 대 탄압을 획책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1차와 다른 상황이었다. 첫 번째 차이점은 1차 때와는 달리 박정희가 입법, 행정, 사법,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점점 증대하여 이를 억압할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혁그룹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천인공노할 탄압이 가해진 것이다.
인혁그룹은 박정희의 음모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동 사건으로 사형된 우홍선은 인혁그룹의 회의를 소집한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중앙정보부가 지난 6. 3사태 때 처형하지 못한 혁신세력을 이번에 학생데모를 구실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답니다. 기관 쪽을 잘 아는 친척으로부터 들은 것이니 신빙성 있는 정보로 평가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이러한 정보에 대한 대책을 내오기 위하여 긴급 제안된 자리입니다.” 이들은 이틀에 걸쳐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하면서 ‘전진국면론’과 ‘후퇴국면론’(남민전)으로 심사숙고하다가 대략 절충적인 결론을 내리고 보안을 철저히 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중정은 상상할 수 없는 고문으로 인혁당 재건위사건을 조작한다. 하지만 그 조작의 내용 즉 검찰의 공소내용은 너무나 형편없는 것이었다. 피의자의 진술 외에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이미 1차 인혁당사건 당시 고문조작에 맞서 전면부인전술로 법정투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는 관련자들은 아마 이번 재판은 훨씬 더 쉽게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끝까지 경락연구회를 지켜낸 자신감은 이들을 더욱 고무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법정에서 전면부인으로 일관하였다. 박정희 학살권력에 맞선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혁그룹 제거에 혈안이 된 박정희는 중정을 시켜 검찰, 사법부를 압박하여 마침내 유죄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3. 인혁그룹의 형성과 조직활동
8․15해방정국에서 활성화되었던 민족민주변혁운동은 미군정의 단정수립정책에 맞서 투쟁하다가 대 탄압을 받게 되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다. 북진통일이 국시로 되면서 통일 논의는 얼어붙고, 친일매판세력은 귀속재산불하와 원조에 참여하여 경제적 지배력을 장악하고 민중수탈을 자행하여 우익반공세력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연일 계속되는 반공시위와 민중탄압으로 민족민주진영의 진출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조경제의 파탄과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촉발되어 마침내 학생을 주력으로 4월혁명이 발발한다. 4월혁명의 승리로 조성된 해방공간에서 변혁운동이 부활한다. 인혁 관련자들의 정치적 성장과 결속은 바로 이 4월혁명에서 비롯된다.
1) 4월혁명과 운동의 성장
이승만 독재정권의 경제파탄, 부정부패, 불법적 집권연장음모에 맞서 온 국민이 저항운동에 나선다. 2. 28을 출발점으로, 3. 15부정선거에 저항한 3. 15마산시위를 촉발점으로 하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4월 18일, 4월 19일 서울에서 정점에 이르면서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물러난다. 이는 친미, 반공, 반통일, 매판독점, 독재정권의 퇴진이며 민주세력의 승리였다. 약화된 지배 권력은 장면정권으로 잠정 교체되고 국민대중은 열려진 공간에서 대중적 참여를 통한 개혁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선다.
4월혁명의 대중적 열기는 반미자주화운동으로 발전한다. 초기에는 신생활운동을 통해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이 양담배․외래 밀수품 배격운동을 벌이다가 1961년 2월 8일에 체결된 굴욕적인 한미경제협정을 계기로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반미자주화운동을 일으킨다. 민통련은 국민계몽대와 제휴하여 전국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2․8협정을 예속적․식민지적 불평등협정이라고 규정하고 투쟁하였으며 이때부터 학생운동에서 민족 해방론적 관점이 제기된다.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두려워한 장면정권은 ‘데모규제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정․보강하고자 하였다. 이에 혁신계와 학생들이 반대투쟁에 나섰으며 이 투쟁으로 혁신계가 대중 투쟁력을 가지게 된다. 2대 악법반대투쟁은 경남북 특히 혁신계 세력이 강한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4월 2일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궐기대회에는 3만 군중이 참여하여 4․19이후 최대의 긴장상태를 자아냈다.
4월혁명은 통일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킨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한국전쟁의 교훈과 핵의 등장, 미소간의 세력균형으로 남침통일이나 북진통일은 완전히 막혔으므로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북진통일론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처럼 꽉 막힌 통일논의는 마침내 4월혁명의 공간에서 부활한다. 통일논의는 먼저 대학가에서부터 시작된다. 11월 1일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이 발기되고 마침내 1961년 5월 5일 18개 대학과 경북고등학교민통련이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결성준비대회에서 역사적인 남북학생교류를 제안하게 된다. 혁신계와 진보적 청년들은 민자통을 결성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민족자주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때 서울에서는 5월 13일 대회에 서울에서 개최된 4․19 이후 최대 집회 규모인 3만명이 운집한다. 한편 대구에서도 대구역, 달성 공원에서 3만명이 참여하는 통일촉진궐기대회가 열렸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0년 8월 남북연방제를 제의하였던 바, 연방제 통일안은 남북대치의 현실을 인정하는 새로운 방안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장면정권은 선 경제건설 후 통일을 내세워서 사실상 반통일적인 주장을 했다. 혁신계에는 크게 민자통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자주통일론과 통사당이 주장하는 중립화통일론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중립화통일론은 소수의 주장으로 그치고 혁신계와 학생들은 쿠바, 베트남, 콩고 등 제 3세계 민주민족혁명과 궤를 같이 하는 민족해 방론적 관점에서 자주․민주․통일을 한국사회의 기본 운동 방향으로 정립한다. 한국사회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나 현 단계에서는 민족문제가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다는 것이다(민주, 민중, 민족의 총체적 요구로서의 자주통일).
2) 인혁그룹의 지향과 형성 과정
인혁그룹의 모체는 4월혁명 당시 진보적 청년조직인 민민청(민주민족청년동맹)과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이다. 양 조직은 민자통에 가입하여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두 조직의 통합논의를 통해 5.16쿠데타 이전에 통합을 거의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인혁그룹의 형성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민청, 통민청은 물론, 민자통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1) 민자통에 합류
4월혁명 시기가 4. 19봉기, 이승만 퇴진, 민족자주화운동의 고양 등 일련의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제한된 정치공간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주도할 전략지도부가 부재하였다. 정당에 참여한 혁신세력은 의회진출을 당면과제로 삼고 7.29 총선에 참여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패로 나타났다. 각 정당은 통일사회당을 제외하고는 의회 내 의석이 없는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혁신계정당의 통합논의는 지지부진하였다. 그러자 정당의 통합 대신 다른 방법과 형태를 통한 혁신세력의 재결집이 요구되고 있었다. 즉 범민족적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여 민족자주화운동에 매진하자는 주장이다.
정세를 살펴보면, 인도, 미얀마,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의 중립노선, 그리고 쿠바, 베트남 등의 반제민족해방전쟁에 의해 제3세계에서 민족자주화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남한에 있어 미국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남북통일의 달성 없이는 결코 경제적 사회적 병폐를 시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크게 대두하였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장면 정권은 사실상 반통일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민간통일운동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마침내 4개정당 13개 사회단체가 결집하여 1961. 2. 25. 민자통이 결성된다. 이때 민민청과 통민청도 참가하였으며 청년들은 실무 간부직을 맡아 실질적으로 민자통을 이끌어간다. 새 세대 청년세력은 민자통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것으로 파악된다. 도예종(조직위부위원장), 김상찬(조직부장), 하상연(선전출판부장), 김달수(조사부장), 박중기(청년부장), 우홍선(조직위간사), 김득수(농어민부부장), 김배영(조직부차장) 등 부차장급 실무선을 모두 민민청, 통민청 계열의 청년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민자통의 통일방안 등 이론적인 문제에서부터 상층지도부에 명망가들을 안배하는 조직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기여도는 지대한 것이었다. 민자통 실무지도력의 면면으로 볼 때, 미래의 인혁그룹은 바로 4월혁명 공간의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조직적 구심인 민자통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4월혁명의 정통세력임을 알 수 있다.) 민자통은 처음에는 대중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 상층통일전선이었으나 2대 악법반대운동, 통일촉진궐기대회 등을 통하여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전체 운동을 주도한다.
민자통은 사회당 등에 의해 주도된다. 사회당은 해방정국에서 중도좌익이었던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계열이 주도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물론 보다 급진적인 남로당, 빨치산 출신도 다수 있었지만 최소공배수로 중도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들은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여 매우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족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당시 혁신계의 이러한 분위기가 이후 인혁그룹의 모태인 민민청과 통민청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 민민청과 통민청 그리고 양 조직의 통합논의
민민청은 1960. 4. 12.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결성되었으며, 그 주도세력은 부산대학교 정치학교 교수인 이종률과 그의 제자그룹인 김상찬, 하상연 등이었다. 민민청은 이종률이 기본 강령을 제시하면서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민민청은 부산지역 고교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이념서클인 암장그룹(이수병, 김용원 등)과 대구경북지역의 진보적 인사그룹(도예종, 서도원 등) 등이 가세하면서 경남북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민민청은 전국화되면서 이종률의 서민성자본주의 노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어 결별하게 되었고 암장그룹과 대구경북그룹이 주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념수준이 높고 연령적으로 선배 위치에 있었던 대구경북그룹의 도예종, 서도원의 역할이 매우 컸다.
“민민청에 비해 통민청은 사회당의 청년조직으로서 직업적 운동가들이었다. 주요인물은 김배영, 우동읍, 김낙중, 김영광, 이재문, 진병호, 이규영, 배근식 양춘우 등이었다. 사회당은 1960년 7.29선거 이후에 결성되었으며 당시의 혁신정당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력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창당선언문에서는 ‘수탈과 억압이 종식되는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할 것을 궁극적 이념으로 한다’라고 주장하고 중요산업의 국유화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물론 이때의 ‘사회주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당 및 통민청은 민민청과 달리 호남출신 인맥이 많았으며 좌익 전력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활동하거나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민민청과 통민청은 민자통의 청년그룹으로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통합논의를 진행하여 5.16쿠데타 직전에는 내용상으로는 거의 통합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주요 쟁점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에 관한 문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합의한 내용은 한국사회에서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현 단계에서는 민족문제가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 과제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통합에 반대한 세력도 있었으며 대체로 민민청 내 암장그룹, 대구, 경북그룹, 통민청 청년그룹을 주축으로 통합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논의는 차세대 운동의 중심 형성이라는 조직 운동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주로 해방정국에서 형성된 혁신계 인사가 주도했던 50년대에서, 1960년을 기점으로, 60, 70년대의 운동을 담당할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후 군부를 앞세워 훨씬 강화되고 포악해진 새로운 지배세력인 박정희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연합전술을 펼치면서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한다. 민자통 활동은 해방정국에서 형성된 선배 세대의 운동관이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에게로 전수되는 과정이었다.
(3) 4월혁명 공간의 와해와 인혁당 조직
4월혁명 공간에서 민주개혁운동의 활성화와 자주통일운동의 급성장은 미국과 지배 블럭에 심각한 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미국은 한일관계의 개선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한, 미, 일 삼각 안보 동맹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는데, 이를 추진할 강력한 지배력을 지닌 친미반공정치집단을 필요로 하였고 일제잔재미청산과 왜곡된 귀속재산불하 그리고 원조경제에 기생한 국내 기득권집단들은 그들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친미, 반공, 반통일, 독재정권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후진국 일반에서 이러한 역할은 군부가 맡았다. 이것이 바로 5.16 군사쿠데타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4월혁명의 해방공간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세력에 대해 대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혁신계를 대량 검거하여 진보인사 약 3천여명을 투옥하였다. 당시 민주, 통일운동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진보언론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으며 대표적으로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 등 주요 간부 8명이 구속되었다.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켰고 민민청, 통민청, 민통련, 민자통 역시 해산되었다. 1961년 11월 21일 서대문교도소에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의 사형이 집행된다. 이로써 4월혁명의 해방공간은 무너지고 우리의 민족사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군사정권의 무단통치 하에서, 4월혁명 공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었던 민민청과 통민청의 주요 활동가들은 민자통을 운동적으로 계승하여 지하운동을 전개한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먼저 운동의 지도부를 구축하여 분산된 활동가를 재규합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4월혁명의 좌절의 원인을 평가하면서 대중운동을 지도할 보다 강력한 지도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었을 것이다. 또한 민자통과 같은 연합운동, 통일전선운동의 경험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전선을 지도할 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의 필요성이 곧 현실성으로 나타날 수는 없음을 잘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성장 속에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성장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조직형식이나 교조적 조직이론에 매이지 않고 현실적 필요성에 맞는 조직노선을 펼쳤을 것이다. 인혁그룹은 이론 수준도 높았지만 교조에 빠지지 않고 매우 실천적이었다. 필자는 이들이 군사정권 아래서 만든 조직이 전위조직이니 뭐니하는 원론과 조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당장 실천적으로 절실히 필요한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를 구축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964년 인민혁명당사건으로 구속, 조사받은 사람을 살펴보면, 민민청 내 암장그룹, 대구, 경북그룹(김금수, 도예종), 통민청그룹(우동읍, 김배영, 김영광,박현채)이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4월혁명 공간에서 학생민통련 활동을 했던 대학생출신그룹(김승균, 황건 등), 서울문리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일학생회담반대운동그룹(김정남, 김중태, 오병철, 현승일, 김도현 등)도 관련된다. 여기서 학생그룹은 지도의 대상이라고 볼 때, 인혁당은 4월혁명 공간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함께 했던 민민청, 통민청, 학생민통련의 지도적 활동가들의 결집체임을 알 수 있다.
(4) 인혁그룹의 지역성과 대중 활동성
4월혁명의 좌절과 평가를 통해 지도조직, 전위조직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4월혁명 공간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진보적인 청년, 학생활동가의 결집체인 인혁그룹은 스스로를 지도조직의 위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들이 시도한 조직은 그때 혹은 그 이후, 동일한 인식에 기초해 만들어진 여타의 전위조직적 시도와는 분명한 차이성을 갖고 있다. 그 차이를 조직을 구성하는 조직인자, 조직이 형성된 조직과정, 조직 활동의 토대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인혁을 구성하는 조직인자들은 대중운동의 직접적인 활동가들이며 각 활동조직의 실질적이고 중심적인 활동가들이다. 때문에, 여타의 전위조직적 시도에서 드러나는, 활동성이 낮은 인자나 활동조직에 속해 있으나 중심적이지 않은 인자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미래의 중심적 활동을 예상한 상태로, 조직형식주의, 조직보위 중심적 활동에 빠지는 한계를 갖지 않았다. 인혁은 당시 사회운동 수준에서 가능한 당면한 운동적 과제, 정권교체운동 등 절차 민주주의적 과제에 충실했으며 이 운동의 중심지도력이었다. 결국 조직형식과 활동목표는 거창하지만 당해 시기 대중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한 경우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둘째, 인혁그룹의 이러한 특징은 조직과정에서 기인한다. 인혁그룹은 4월혁명의 가장 진보적인 청년, 학생활동가들의 자연스러운 결집체이다. 이들에게는 조직형식이 많이 부여되지 않아도 이미 대중 활동 속에서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를 지도 조직화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강령은 별도로 만들지 않고 4월혁명 때의 사회당, 민자통의 강령을 그대로 하기로 하였다. 실천적으로 결집된 이들은 많은 관념적인 결점을 지닐 우려가 있는 ‘강령논쟁’ 없이도 실질적 활동의 경험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조직체계는 활동조직에 맞게 매우 단순했다. 지역과 분야별 활동가들의 연합적 성격이었다. 북한, 더 정확하게는 ‘북한과 관련된 활동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대중적 정서에 맞게 분명한 선택을 했다. 즉 전술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방침이었다.
셋째, 인혁그룹은 조직 활동의 토대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일단의 활동가들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폐쇄되고 제한된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혁그룹은 대구, 서울, 부산이라는 지역 활동의 토대를 갖고 있었다. 김세원의 증언으로는 전남과도 일정 정도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계급적 성격의 운동이 등장하지 못하는 시기이어서 운동의 중심이 도시의 개혁적 소시민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적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운동의 주동력이었던 학생운동과도 끊임없이 연계하거나 이를 예상한 조직 활동을 하였다.
지역연합체적 성격을 가지는 인혁그룹의 조직의 전형성과 주도성은 대구에 있었다. 대구지역의 활동가들은 야권후보단일화운동 등 도시 소시민의 개혁성에 바탕을 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활동과제를 생산하여 전국화 한다. 지역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도 지대하였으며 이를 확장하여 전국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정남의 서울 파견’이다.
인혁그룹이 펼친 현실적 대응투쟁, 특히 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운동,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활동은 박정희의 집권전략과 정면충돌하는 지점이며 이는 ‘추상적’ 수준의 ‘과격한 사상운동’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타의 전위조직운동보다는 더 ‘실질적 위협’이라는 사실을 박정희는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유신독재의 불안정성이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어서 그 불안 요인을 강하게 억제해야 할 정세적 필요성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없는 사실을 전적으로 지어내어’, ‘파격적 절차를 거쳐’, ‘다수’를, 그것도 ‘집권전략이 충돌하는 대구지역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살해한 것은 ‘실질적 위협’과 연관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5) 인혁그룹의 사상적 지향
인혁그룹은 민족민주변혁을 통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이는 당시 인혁그룹만 아니라 민족민주운동의 보편적 인식이었다. 이는 일제하에 나라 없는 설움을 겪고, 해방정국의 혼란과 대립,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박정희 쿠데타에 의한 수많은 정치탄압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다만 인혁그룹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토대로 매우 굳건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민주․민족문제는 부르주아들의 임무이지만 매판자본이 주류를 이룬 우리에게서는 그 임무가 민중세력에게로 넘겨진다는 면에서 민족민주세력이 자유주의 사상보다는 사회과학사상을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때문에 우익정권은 국민들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왜곡된 대결관계로 몰아가려고 하였고, 민족민주진영은 사대․매판․파쇼세력 대 자주․민주․통일세력으로 전선을 구축하고자 한다. 이 구도에서 투쟁해온 인혁그룹의 사상이 자주․민주․통일인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먼저 인혁그룹의 모태인 민민청과 통민청이 참여했던 4월혁명 당시의 민자통을 살펴보자. 민자통은 사회당 등에 의해 주도된다. 사회당은 해방정국에서 중도좌파였던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계열이 주도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물론 보다 급진적인 남로당, 빨치산 출신도 다수 있었지만 최소공배수로 중도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들은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여 매우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족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당시 혁신계의 이러한 분위기가 이후 인혁그룹의 모태인 민민청과 통민청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재일은 “민자통을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 혁신세력은 그 원류를 해방정국의 중간파에 두고 있다. 이들 원류는 해방직후 국가형성노선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틀 안에서 반봉건적 요소를 청산하고 일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함으로서 좌우익 독재를 배격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할 것으로 삼고 있었다. 또한 이들 원류의 1세대인 진보당은 신식민지분단국가의 합법적인 정치틀 내에서 피해대중을 동원시켜 자본주의 모순을 수정하고 평화적 민족통일을 달성할 것을 정치노선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김세원은 “...이전에는 동지들이 모였을 때, (변혁)노선문제는 토의안건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노선은 자주(반제), 민주(반파쇼), 민족통일이며, 이 노선은 8.15 이래 일관된 노선이요, 노선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강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1차 인혁’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당, 민자통의 강령을 그대로 한다는 것이 묵시적인 합의 였습니다”라고 술회한다.
류동민은 “제1차 인혁당사건의 관련자들의 면면을 보면 민민청과 통민청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던 청년그룹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4.19공간에서 등장하였던 통일운동의 흐름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술한다.
3) 조직 활동
인혁그룹의 조직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용어를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먼저 ‘인혁당’이라는 용어는 1962년에 조직되어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지도하다 중정에 검거되어 와해된 지도당을 지향한 민족민주운동의 지도부을 지칭한다. 이 조직은 중정에 의해 1차 인혁당사건으로 탄압 받는다. 그동안 ‘소위 인혁당’이라는 표현으로 중정의 조작성을 강조하였으나 앞으로는 ‘소위’를 떼고 능동적 활동성을 강조해야 한다. 다음 ‘경락연구회’라는 용어는 1971년 9월에 결성되어 반유신독재국민운동을 참여, 지원하고, 학생시위를 지도한 조직을 일컫는다. 분산된 학생시위를 전국적으로 연결시켜 힘을 집중시키고자 했던 민청학련 조직화에 이르러서 그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정황을 인지한 박정희정권에 의해 인혁당 재건위사건으로 조작되어 살해당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용어, 인혁당, 경락연구회로 이들의 조직과 활동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혁당, 경락연구회라는 조직이 없을 때에도 항상 무형으로 연결되면서 조직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조직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활동을 함께 했던 활동가들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혹한 탄압 하에서 보안적 효율성이 최우선시 되었기 때문에 노출이 많이 된 사람들은 조직 가입은 삼갔지만 활동은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활동의 전시기를 망라하기 위해서는 유형, 무형의 조직을 모두 포함하는 ‘인혁그룹’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즉 인혁그룹이란 인혁당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할 때와 무형의 조직으로 활동할 때와 경락연구회로 활동할 때를 모두 포괄하며, 이들이 펼쳤던 민주대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활동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했던 활동가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혁당사건, 1차 인혁당, 2차 인혁당 혹은 인혁당 재건위사건이라는 용어는 중정이 조작한 사건의 명칭이므로 그러한 용도에서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중정이 조작한 부정적 용어는 가급적 용도에 맞게 그 사용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용어인 인혁그룹, 인혁당, 경락연구회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은 인혁그룹에 대한 인식의 변화, 즉 ‘단순 희생자’에서 ‘능동적 활동가’로의 역사 정립의 요구에서 비롯된다.
인혁그룹의 활동은 대략 인혁당기, 무형의 조직기, 경락연구회기로 시대구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주객관 정세가 특별한 단층을 이루고 있지 않으므로 시대구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기별로 활동을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먼저 한일협정반대투쟁에 인혁그룹은 적극 참여하여 자기 역할을 한다. 원래 인혁당 조직이 드러난 것은 한일협정반대운동 당시 서울대생 김정강의 일기에 도예종 등 선배들을 만난 기록이 노출되어 이를 근거로 조사를 확대하다가 사건화된 것이었다. 이 당시 인혁그룹은 학생서클을 만드는 것을 지원하고 학생지도자를 직접 접촉하여 운동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인혁그룹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반독재민주통일전선 즉 민주대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운동이었다. 강창덕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제 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해 2월 대구에서 ‘반독재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참가자 면면을 보면, 위원장 류시벽, 부위원장 조용만, 대변인 강창덕, 섭외담당 이재문, 운영위원 류한종,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이태환, 전재권, 정만진, 조만호, 나경일, 안민생, 박삼세, 김호일, 도혁택, 김종도, 권오봉, 이복녕 등 약 20명이 참여하여 조직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운동은 신민당 경북도당 기타 진보적 정치세력과 연합하여 전선체 형태로 구성되었고, 당시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로 단일화를 성취하였다. 마지막에는 대중당 서민호 후보까지 사퇴하였다. 이 운동은 대구에서 출발, 중앙무대에서 완결되었다.”
1969년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중임제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3선 개헌을 시도하게 되며 이에 재야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다. 대구에서 인혁그룹은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 결성대회에 재야세력에서 연합전선 형태로 참여하였는데, 류한종 대표를 선두로 강창덕, 이재문, 정만진, 백정호.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이태환, 나경일 등 30여명이 참여하였다.”(강창덕) 또한 인혁그룹은 경북대학교 학생지도자 이재형, 여정남 등을 통해 학생시위를 지도한다. “그 당시 경북대 3선 개헌 반대투쟁은 전국에서도 유별났다. 박정희의 고향에서 3선개헌을 더욱 더 반대하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하였다. 늘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격렬하게 3선개헌 반대투쟁에 적극 참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인혁그룹이 중심이 되어 민족통일촉진회에 참여하여 이 조직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창일의 증언을 인용한다. “민족통일촉진회는 5.16쿠데타에 의하여 구속되었다 나온 혁신계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1960년대 후반에 조직된 통일운동단체이다. 시내 삼각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미미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통촉은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전국에 흩어진 혁신계 동지들의 운동참여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나는 우홍선, 이성재, 이수병, 박중기, 이석준, 강무갑 등과 자주 만나면서 부진한 통일운동에 대하여 자주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통촉을 강화, 발전시키기로 합의하고, 대구, 부산, 광주 동지들의 동의를 구하기로 하였다. 모두가 긍정적이었다. 우홍선과 이수병, 박중기는 나에게 사무총장 자리를 맡으라고 권유하였으나, 나는 직장관계를 이유로 사양하고 결국 이석준이 맡게 되었다. 우리는 매달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석준을 도우며 격려 후원하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인혁그룹과 혁신계의 선거전술은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국민당 대통령 후보가 윤보선으로 기울자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 단일화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막상 선거가 시작되자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원하는 민심은 수구적 이미지의 윤보선보다 진보적 공약을 내세운 김대중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진보세력도 여러 달 논의 끝에 선거에 진보적 공약을 반영하고, 향후 통일운동에 연대해줄 것을 전제로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세원은 “...1971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 단일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윤보선의 사퇴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단일후보 추진과 그의 선거공약에 우리들의 희망사항을 포함시키고 향후 통일운동에 우리와 연대해줄 것을 전제로 해서 혁신세력이 김대중에게 지원을 주자는 합의가 여러 달 동안의 논의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윤보선 사퇴교섭은 류한종씨가 맡았습니다...” “그런데 선거에 인박한 국민의 당은 박기출(전 진보당 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발표하였다. 이수병과 나(전창일)는 김정규 선생을 위시하여 우홍선, 이성재, 서도원, 김세원, 이병일 등 동지들을 소집하여 박기출의 후보사퇴를 강권하기로 결정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결국 박기철 후보는 사퇴했다. “김대중과 협상 중이던 진보진영의 이기홍, 김세원은 프락치의 제보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후보단일화를 위해 국민당과 접촉 중이던 혁신계 인사들 10여명도 중앙정보부에 구금되어 협박을 당하였다.”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중앙조직이 1971년 4월 19일 창립된다. 이 단체는 진보적 자유주의 이념을 지닌 개별명망가, 지식인 연합체적 조직이며, 인적, 이념적으로 변혁적 전통과는 단절된 인사들로 구성된다. 이때부터 재야 민주주의 투쟁의 대중적 명망성이 혁신계에서 재야민주인사, 양심적 종교인, 지식인에게로 넘어간다. 이는 “민주화운동의 지도조직이라기보다는 학생, 청년의 투쟁이슈를 대중화하는, 혹은 대중과 유리되지 않도록 하는 매개적인 역할에 두어 진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여전히 혁신계가 주도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대구 혁신계의 역량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그만큼 진보적 자유주의 이념을 지닌 재야 민주인사들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구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 촉진의 방법으로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는 선거전략 밑에서”4월 22일에 민주수호경북협의회가 창립된다. 지도위원으로 류한종, 최해청, 박삼세, 김순택, 주병환(전국회의원, 신민당 도지부장), 실무진으로는 총무위원장 강창덕, 선전겸 대변인 이재문, 청년위원장 정만진이었다. 운영위원으로는 김증도(노동운동가), 이백희(전 대구시장), 김순택(인권변호사), 강창덕, 김호일(전 대구일보 편집국장),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이재형, 백정호, 우종수(한의원), 나경일, 권오봉, 이태환, 이재문, 정만진, 도혁택, 류근삼, 임구호, 여정남등이 참석했다. 4월 26일에는 ‘민주수호경북협의회 공명선거감시단’을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감시하였다.(강창덕) 이 조직 구성원의 특징은 인혁그룹과 경북대학생시위 지도자의 관계가 지하에서 이루어져 오다가 이때 공식적 관계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룹이 이후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대구지역 희생자가 된다. 인혁그룹과 민청학련과의 관련성은 여기서 공식적으로 입증된다. 바로 이 그룹이 민청학련사건 당시 여정남을 서울로 파견하여 전국적 연계를 구축하였고, 서울의 인혁그룹은 이수병과 김용원을 중심으로 여정남을 통해 민청학련을 지원한다. “우리는 여정남과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극비리에 모금을 행하기도 하였다. 학생운동관계 작업은 이수병과 김용원이 맡고, 모금된 돈은 이수병에게 전달되었다.”
4. 인혁 활동가의 연고지 분석
4월혁명의 개방적 공간은 각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인맥을 맺어 활동을 해오던 활동가들이 전국적으로 연계되는 기회로 작용한다. 이들은 사회당 등 각종 정당과 민자통 등 대중 운동체에서 결집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과거활동 전력이 큰 사람은 비공개적으로 활동을 돕는다. 4월혁명에서 활동한 활동가 중 가장 급진적이고 젊고 활동력이 높은 부분이 결집된 것이 인혁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룹은 박정희군사정권 아래에서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전국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이 그룹의 연고지를 분석하면 운동역량의 전국적 판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운동 연고지를 찾기 위해 두 가지로 사건관련자들을 분류해보자. 하나는 의식형성지역이다. 의식의 형성은 성장지, 그중 교육을 받은 지역에서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항목은 출생지와 교육을 받은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인텔리 활동가들은 아주 어릴 때 의식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80년대 이후의 인텔리 활동가들이 대체로 대학교 학생운동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아마 이때의 활동가들은 운동적 상황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는 사건 당시의 활동지역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형성지역과 활동지역을 분석하여 사건관련자들의 운동 연고지를 찾아 본 바 아래와 같다.
1) 연고지
성명
의식 형성지
사건당시 주 활동지
도예종
경북, 대구
대구
박현채
전남
서울
정도영
경북
서울
김배영
부산
부산
우동읍
경남
서울
김영광
경남
서울
김용원
경남, 부산
서울
김금수
경남, 부산
서울
이재문
경북, 대구
대구
임창순
충북, 대구
대구, 서울
이영호
부산
부산
김한덕
부산
부산
허 작
부산
부산
김병태
경남
서울
강무갑
경남
경남
이영석
부산
부산
박상홍
경남
대구
전무배
경북
서울
김영한
경북
서울
도혁택
대구
대구
박중기
경남
서울
송상진
대구
대구
김배균
부산
부산
오병철
경남
서울
박영섭
부산
부산
양춘우
경남
서울
박익수
전남
서울
(1) 1차 인혁(27세 이상)
서정복
경북고
서울대
황 건
평양
서울대
하일민
경남 하동
부산
김정강
부산
서울대
김정남
대전고등
서울대
김중태
경북고
서울대
정만진
대구
대구
김도현
경북고
서울대
백승진
경북고
서울대
김승균
경북, 전라도
성균관대
현승일
경북고
서울대
(2) 1차 인혁(26세 이하, 대개 대학생)
(3) 인혁당 재건위사건
이 름
의식 형성지
사건당시 주 활동지
서도원
경남
대구
도예종
경북
대구
우홍선
경남
서울
이수병
경남, 부산
서울
송상진
대구
대구
하재완
경남
대구
김용원
경남, 부산
서울
여정남
대구
대구
이태환
대구
대구
전재권
대구
대구
유진곤
경남, 부산
서울
정만진
대구
대구
이재형
대구
대구
조만호
대구
대구
장석구
서울
서울
이성재
서울
서울
전창일
서울
서울
김한덕
경남
서울
나경일
대구
대구
강창덕
경북, 대구
대구
김종대
경남, 부산
서울
이창복
황해도
서울
황현승
충남
서울
임구호
대구
대구
이재문
대구
대구
2) 연고지 분류
이들의 출신지와 활동지를 분류해보면 아래와 같다.
의식 형성지
주 활동지
출신지역
활동가
활동지역
활동가
경북, 대구
7인
경북, 대구
5인
경남, 부산
17인
서울
14인
전남
2인
경남, 부산
8인
충북
1인
(1) 1차 인혁(27세 이상)
1차 인혁 관련자들은 대개 영남지역 출신이며 서울과 부산과 대구에서 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차 인혁 관련자들이 4월혁명의 중심적인 청년활동가들 중 가장 진보적 부분의 전국적 결집이었다고 본다면, 이 당시 전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영남권운동의 주도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경남, 부산 출신으로서 서울 지역에서 활동한 활동가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는 경남, 부산 출신인 암장그룹의 서울 지역 대학진학과 관련이 있다.
의식 형성지
주 활동지
출신지
활동가
주활동지
활동가
경북, 대구
6인
대구
1인
경남, 부산
2인
서울
9인
충남
1인
부산
1인
전남
1인
평양
1인
(2) 1차 인혁(26세 이하)
1차 인혁은 64년 한일회담반대시위와 연계된 사건이었으므로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자들이 대거 포함된다. 이들은 주로 영남 출신으로서 서울에 진학하여 학생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그 중 대구 출신이 다수인 것은 경북고 출신이 서울대학으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4월혁명의 중심지인 대구, 2.28의 중심이었던 경북고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60-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서울대의 학생활동가들이 주로 대구의 경북고 출신이며 5.18광주항쟁 이후 광주일고 출신이 다수를 이루었다는 속설은 근거가 있으며, 이는 지역운동의 활성화 정도가 서울 학생운동 활동가의 구성과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식 형성지
주 활동지
출신지
활동가
활동지
활동가
경북, 대구
12인
경북, 대구
14인
경남, 부산
8인
서울
11인
서울
2인
함남
1인
황해도
1인
충남
1인
(3) 2차 인혁
2차 인혁 활동가들의 출신지역 역시 영남권이 대부분이며 활동은 서울과 대구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당시 운동의 중심이 서울과 대구였으며 4월혁명에서 양성된 활동가들이 여전히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부산이 활동지역에서 빠진 것이 특징적이며 이는 당시의 운동역량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구의 인혁그룹은 민주대연합에 의한 정권교체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 활동의 성과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분석의 대상에 민청학련을 포함시킨다면 서울 운동의 주도성이 보다 분명하게 들어날 것이며 활동가 역시 전국적으로 분포되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이는 80년대 이후 서울이 확고하게 운동의 중심이 되고 운동이 전국화 하는 것과 연관성을 가진다.
3) 연고지 분석을 통해서 본 운동적 특징
활동가의 중심 출신지는 과거 운동의 중심지일 수 있다. 활동가들의 현재 중심 활동지는 미래 운동의 중심지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혁활동가에 분석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인혁활동가들의 출신지가 주로 경남, 부산과 경북, 대구 즉 영남권인 점은 이 지역이 10월항쟁의 중심지이며, 전쟁 미 점령지역 그리고 4월혁명의 중심지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기에 보태서 대구는 10월항쟁, 이승만 정권 하의 선거활동, 4월혁명 과정에서 영남권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고 이 점은 대구가 인혁 활동가의 중심이 되는 것과 연관성을 가진다.
인혁활동가의 출신지가 서울이 소수인 이유는 논리적으로 과거 운동의 중심지가 아니기 때문 일텐데, 이는 사실적으로도 그러하다. 서울은 전통적으로 지배 블럭이 압도적이었으며 산업활동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정치, 행정, 교육, 문화, 금융의 중심지였고 농업을 비롯한 산업 활동은 주로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울이 현재와 같은 전영역에서의 중심지가 된 것은 박정희의 경제개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해방정국 이래 제반 활동과정에서 대중 활동의 중심은 지방이었으며 서울은 중앙적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인혁활동가들의 중심 활동지는 서울과 대구이다. 이는 서울지역이 4월혁명 이래로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가고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대학생운동으로 옮아감으로써 대학밀집지역인 서울이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 중심활동지인 서울이 미래 80년대 이후 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함께 중심활동지였던 대구가 미래의 중심활동지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해명되어야 하겠다. 결국 그 중심활동지의 활동과 활동가를 와해시키는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박정희의 대구, 경북지역장악 전략과 연관을 가지며 그 중 하나가 인혁당 고문, 조작사건인 것이다.
박정희는 영남권을 자신의 집권 기반으로 삼기 위해 영호남차별화정책을 쓴다. 경제개발의 중심을 영남권에 두었다. 그리고 대구를 비롯한 영남 출신 인재들을 중앙에 등용하여 지역의 여론을 장악한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4월혁명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저항적인 대학이었던 대구대, 청구대를 강제 통합하여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자신이 교주가 된다. 이 과정에서 대구지역의 여론 주도층이 박정희 정권에 줄을 서게 되고, 이 세력은 독재정권이 거듭되면서 TK라는 속어로 정착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장악 과정에서 결코 회유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벌린 세력이 바로 인혁그룹이다. 결국 박정희는 이 비타협적인 그룹을 제거하게 된다.
5. 지역운동사적 배경
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23명 중 13명이 대구 출신이며 사형자 8명 중 5명, 무기수 7명 중 3명이 대구(경북) 출신이며, 수사의 주체도 중정과 함께 경북도경에서 중정으로 파견된 경찰들이 담당했다. 대구지역 관련자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이 사건이 전국적 사건이면서도 대구 지역적 사건임을 의미한다.
아래에서는 대구가 그 중심이 된 원인을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재 대구지역의 정치적 보수성으로 인해 과거 대구가 민족, 민주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대구사람들 조차도 쉽게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해방정국에서의 경북, 대구지역운동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해방 전후(1943-46) 시기의 도별 현대화 지수를 제시한다. 도로, 인구이동, 공업, 문자습득 등을 기준으로 분석하면서 경남, 경북을 단연 1, 2위로, 3위 경기, 4위 전남을 꼽고 있다. 또한 같은 책에서 경상도 지역에 저항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를 “...경상도는 반항적 기질로 유명했는데, 예를 들면 1919년의 독립 시위에도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이 가담했었다.(프랭크 볼드윈) 이 지역은 또한 일본에 가장 근접되어 있으므로 식민 통치자들과의 교류가 보다 뚜렷했다. 경남 부산과 경북 대구는 적어도 일본인이 보기에는 일본의 도시들과 똑같다고 생각되었다. 가장 많은 접촉과 교류가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상도는 또렷한 방언과 더불어 분리주의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
대구는 일제 시대 때 조선의 3대도시(서울, 평양, 대구)라 할 만큼 중심도시였다. 전체 인구는 약 20만(당시 서울 66만, 평양 20만)정도로서 인구의 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당시 경북의 주요 군의 인구는 10-15만) 공업발달과 함께 행정과 교육과 문화가 집중된다. 특히 교육기관이 집중되어 삼덕동 일대는 학원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학원가에 경상도의 인재들이 모여든다. 일제 말기 민족문화 압살정책 하에서도 삼덕동 일대 학원가에서는 대구사범, 대구고보 등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비밀공부모임이 만들어졌고 이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학생조직사건이 된다. 대표적으로는 박광세, 장적우가 지도한 1928년 8월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 현준혁이 지도한 ‘대구사범사회과학연구사건’이 있다. 일제 중기까지 진보적 사상을 지닌 청년 운동가들은 주로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었지만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국내 학원가에서 학생출신 활동가가 양산된다. 이후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운동의 중심세력을 형성한다. 대구 역시 삼덕동 학원밀집지역에서 많은 학생활동가들이 양성되었다. 이들은 대구출신만이 아니라 칠곡, 영천, 성주, 달성, 의성, 밀양, 창녕 등 대구 인근의 경북, 경남 출신이었으며 이렇게 양성된 활동가들은 다시 경상도 전역으로 번져나가 대구 및 경북, 경남 지역의 운동의 중심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경상도는 일제의 식민지자본이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이 지역은 일찍이 계급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런 만큼 계급 간 갈등도 컸고 항일운동을 비롯한 저항운동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구의 경우는 교육의 중심지였던 만큼 학생 운동가들이 양산되어 지역 내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결합하여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발생한 1946년 10월 1일의 경찰 발포에 의한 노동자 사망은 대구지역의 저항정신에 불을 붙여놓았다. 다음날 바로, 노동자, 삼덕동 학원가, 빈민을 중심으로 하여, 전 시민이 저항에 나서 (친일)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고 항쟁을 인근 군으로 전파한다. 대구가 10월항쟁을 촉발시킨 것이다.
당시 대도시는 미군 전술부대가 주둔하여 미군정과 친일세력들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확고하였다. 10월항쟁 당시를 보더라도 지배 권력의 중심지와 일정한 거리를 둔 농촌지역에서 주로 항쟁이 발생하였고 대도시로서는 대구가 유일하다. 대구의 이러한 저항적 특성은 이후 한국전쟁 미 점령지역으로 남게 되면서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전략적 가치를 갖게 되며, 이는 박정희가 이 지역을 강권에 의해 보수의 도시로 만들 때가지 지속된다.
2) 한국전쟁 미 점령지역
경북, 대구지역 운동사의 특수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전통의 연결성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용의 글을 인용해보자.
“인혁당을 비롯 지하 조직운동의 인적 기반이 대구에 치중되었던 것은 대구지방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가로놓여 있다. 대구지방은 근래 조심스럽게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1946년의 10월 민중항쟁의 주무대였던 만큼 그 희생 또한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대구, 영남지방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하조직이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지 않았고, 따라서 타 점령지역의 지하조직이 공개 노출되어 이후 혹독한 탄압을 받고 파괴되었던 데 비해 대구, 영남지방의 지하 저항세력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자본가들도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대구지역의 특수한 조건은 해방 직후 좌익운동과 민족운동이 공공연했던 시기의 민중운동과 4월혁명 이후의 운동이 상호 이질적으로 단절되지 않고 개인적 연관으로 이어져 내려온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관 속에서 역사적 경험의 계승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해서 대구지역은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하고 지역운동이 큰 타격을 입기까지 지하 저항운동의 중요한 인적 기반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한 영토로 남아 있는 휴전선 이남 지역 중 북한군과 남한군이 번갈아 점령했던 지역에서는 오직 승자만이 남게 된다. 진보적인 부분도 자의 혹은 타의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해야 했고, ‘적’과 ‘아’ 외에는 어떤 중립지대도 존재할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구 이남의 미 점령지역 내에서는 교전이 없었던 대신 민간인학살이 대대적으로 자행된다. 4월혁명 당시 피 학살자유족회가 국회에 신원을 요구한 민간인 학살자 숫자는 경남, 경북이 압도적으로 많다.(주-) 형무소 수감자, 보도 연맹원을 학살하는 등 정치학살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미 점령지역 역시 점령지역과 동일하게 운동가와 운동적 분위기가 소멸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미세’하게 살아남은 운동성은 이후의 정치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은 60, 70년대 민주주의운동, 통일운동에 있어서 영남권운동의 중심성과 그 중핵으로서의 대구운동의 주도성으로 나타난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대구가 만년야당도시이었던 점, 4월혁명의 시발인 2.28과 3.15가 영남권에서 이루어졌던 점, 4.19로 열린 공간에서 대중적 개혁운동과 자주, 통일운동의 중심이 대구를 비롯한 영남권이었던 점, 70년대, 박정희정권에 반대해서 투쟁한 인혁그룹과 그 외의 운동그룹이 주로 영남권 출신이었던 점은 ‘미세’하게 살아남은 지역의 ‘운동성’과 연관성을 가진다.
미 점령지역의 활동성에 대한 인식은 4월혁명을 올바로 이해하게 한다. 4월혁명의 동력이 과거의 연결선상에 있으며, 4월혁명 과정에서 전기의 운동, 즉 절차민주주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운동과 후기의 민주개혁과 자주, 통일운동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적인 것이고 보다 심화되는 과정임을 밝히는 것이면서, 이 모든 것이 근대화과정에서 미해결된 민족 민주적 요구를 실현시켜 가고자 하는 역사의 정방향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운동의 내인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매시기의 운동이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며,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이며, 총체성을 지닌 것이며 그 동력이 내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요구가 오늘까지 이어져 현재의 진보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 만년야당도시 대구
대구경북은 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만년야당 도시’라고 불렸다.
1952년 발췌개헌파동의 결과 제2대 정・부통령의 직접선거가 실시되었고 대통령으로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으로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유권자의 약 73%가 투표에 참여하여 대통령에서는 이승만이 최다득표를 하였지만, 부통령에서는 조병옥이 이승만의 지지를 받은 함태영을 누르고 최다득표를 하였다. 또한 1954년에 실시된 제3대국회의원선거의 경우...선거의 결과 전국적으로 자유당이 114석을 획득함으로써 압승하였지만, 대구에서는 민주국민당의 2명과 무소속1명이 당선되어 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1956년에는 이승만에게 종신집권의 기회를 제공한 사사오입 개헌파동에 이어 제3대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각 당의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가던 중 5월 5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의 급서는 선거양상을 급변시켰으며, 민주당은 자연스럽게 부통령후보의 당선에 주력하였다. 5월 15일 대구시내 투표소에서는 대구시 유권자의 84%가 투표에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선거의 결과는 대통령에는 이승만, 부통령에는 장면이 각기 당선되었지만, 대구의 경우 투표의 결과는 대통령 후보에서는 조봉암이, 부통령에서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다수표를 획득하여 야당에 대한 높은 지지를 나타내었다.
제3대 대선(56년) 지역별 득표 자료
지역
총투표
조봉암
이승만
계
9,067,063
2,163,808
5,046,473
서울
608,741
119,129
205,253
경기
1,058,971
180,150
607,757
강원
789,673
65,270
644,693
충북
499,744
57,026
353,201
충남
900,571
157,973
530,531
전북
875,210
281,068
424,674
전남
1,286,178
286,787
741,623
경북
1,398,722
501,917
621,530
경남
1,538,337
502,507
830,492
제주
110,916
11,981
86,683
(조봉암 지지가 경북에서 특히 높았다)
제3대 대선, 경북 경산지역
이승만
11,614
이기붕
8,229
조봉암
34,212
장면
38,833
(경북 경산군에서 조봉암후보가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다)
“이 선거에서는 부통령선거 개표과정에서 우리 선거사상 초유의 개표중단사건이 대구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서 의도적으로 자유당 후보를 위해 연출된 개표부정 시비로 개표장은 혼란스럽게 되어 개표업무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개표부정시비에 의해 개표업무가 중단된 동안 대구를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이미 개표를 완료하여 장면이 이기붕을 8만 7천여 표 앞지르고 있어 대구시의 개표결과에 따라 제4대 부통령의 당락이 결정되는 단계였다. 자유당의 방해로 개표부정시비가 가려지지 않다가 19일 오후 장면의 당선을 시인하는 대통령의 담화발표와 함께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자유, 민주 양당대표간의 연석회의가 진전을 보여, 결국 민주당 측이 제의하였던 요구조건을 자유당 측이 수용함으로써 사태는 호전되어 20일 상오부터 개표업무가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구시민의 입장에서 5일간의 주권수호투쟁이었다. 이기붕의 당선을 위한 자유당의 선거음모가 대구시민에 의하여 저지되고 실패되고만 것이다. 5.15 정・부통령선거를 통해서 대구시민이 보여준 자세는 불의와 탈법에 대한 저항정신의 발로이었다.
1956년 5월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는 6개의 선거구로 나누어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되었으나, 개표과정에서 도처에서 말썽이 생겼다. 갑구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무효표가 쏟아져 피아노식 개표라는 말이 나돌았으며, 병구와 기구에서도 개표부정이 드러났다 하여 일시 개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의 결과 민주당에서 3명이, 자유당에서 1명이 그리고 무소속 2명이 당선되어 여전히 야당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56년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민주당에 패배하였다는 사실과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비록 원내의 안정 세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야당 특히 민주당의 괄목할만한 성장으로 자유당의 원래 목표였던 개헌선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자유당은 초조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고령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대통령직 계승권이 반대당인 민주당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그 사주를 받은 행정부는 집권의 연장을 위하여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고, 이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선거운동에 저항하여 대구의 2.28운동이 발생한다.”
4) 4월혁명의 중심지 대구
10월항쟁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민주세력은 초토화된다. 전쟁과정에서 형성되는 ‘적과 아’라는 철저히 이분화 된 사고가 세상을 지배하고 상대를 잔혹하게 학살하는 상황이 전개되어 한편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다른 편이 철저히 배제된다. 거기에는 당연히 적이 아닌 세력, 즉 중립적 지대에 있거나 덜 적극적인 지지자들조차 적으로 간주되고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는 천인공노할 상황도 거침없이 전개된다.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연일 반공궐기대회가 열리고 자신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무마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세력 및 그 경향성을 빨갱이와 동일시하도록 강요한다. 즉 전쟁시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평화 시에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종료 7년 만에 마침내 민주주의운동이 시작된다. 대구의 삼덕동 학원가가 궐기한다. 그것이 2.28이다. 이 운동은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로 번지다가 마침내 마산 3.15시위로 발전한다. 2.28과 3.15는 영남권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영남권에서 달구어진 시위가 마침내 서울로 번져 4.18, 4.19로 발전하여 마침내 이승만은 퇴진한다. 이는 미 점령지역 영남권이 가지는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운동을 계기로 대구에는 민주공간이 활짝 열린다. 4월혁명은 4.19를 기점으로 하는 이승만 퇴진 민주화운동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으로 신속하고 넓게 확장된다. 대구에서는 2.28, 4.19뿐만 아니라 신생활운동, 학원민주화운동, 반민주세력 및 부패세력 척결운동,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2대 악법반대운동, 통일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된다. 당시 대구의 운동은 규모에서나 내용에서나 전국 최고였다. 서울의 대중동원력보다 훨씬 컸으며 의제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량이 매우 높았다. 2대 악법반대투쟁으로 혁신계가 대중동원력을 획득하게 되었고, 민자통을 결성하여 운동의 중심부로 등장하면서부터 운동은 훨씬 심도 있게 발전한다.
저항운동이 활발하였던 만큼 정치활동도 활발하였다. “대구시 민주당의 세력은 일견 강대하며 전시를 4구로 나누어 합계 약 15만이라고 이룩되고 66만 총인구의 약 4분지1강을 보였다. 신민당 또한 미조직지역도 있다고 전해지면서 5만 내외에 달하여 양당이 적어도 성년 층 남녀는 거의 빠짐없이 망라된 느낌까지 받았다...그리고 혁신계의 세력은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선에서 의견이 일치되었다. 즉 사회대중당에 뚜렷이 태도를 표명한 주도층은 통일사회당, 사회당, 민족통일연맹, 민주자립연맹, 구국동지회, 민민청(주로 청구대학생), 통민청, 피 학살자유족회, 민족통일촉진학생연구회(경대중심)등 수십 명이 되나 동일인이 수개단체에 동시에 관계를 가짐으로 실수는 적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영향력도 확실히 실수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원노조원은 3,700명으로 초・중・고등교원의 약 90%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대중운동의 규모는 매우 컸다. 주요한 집회에는 대략 3만명 정도의 시민이 참여하였는데, 당시 대구 인구 66만에 비하면 대규모 군중이라고 할 수 있다. 2대 악법을 반대하는 대구지역의 대규모 투쟁으로 장면정권이 긴급각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1961년 3월 25일 대구일보, 매일신문, 영남일보는 2대 악법반대투쟁 2차 집회에 3만명의 군중이 대구역전에 운집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1961년 2.28 1주년기념식에는 3만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학원자유침해를 배격 한다’ ‘평화통일 쟁취 한다’ ‘한미경협반대’를 외쳤다. 서울에서는 4.19이후 최대집회가 유일하게 1961년 5월 13일 통일촉진궐기대회에 3만명이 참가한 것인데, 대구는 1만에서 3만 규모의 집회가 4월 공간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김태일은 2.28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에서 “2.28은 사회구조 변동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근대적 사회세력들- 학생, 시민, 언론 등으로 구성된 대단히 느슨하지만 포괄적인 연대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첫째 도시화로 인한 도시 시민의 형성 둘째 근대교육의 확대에 의해 민주주의적 규범을 수용한 학생들의 등장 셋째 도시의 성장과 교육의 확대로 인해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확대와 이를 통한 도시민들의 정치적 비판의식의 성장을 들고 있다. 김태일이 지적한 학생, 시민, 언론 연대는 4월혁명 공간에서 지속되면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으로 확대, 심화된다. 이중 언론은 대구지역의 대중운동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구의 언론기관은 다른 어느 지방과도 비하기 어려울 만한 세력을 가졌다... 대구에 대구매일(25,000-50,000부), 대구일보(10,000-20,000), 영남일보(20,000-40,000), 시사신보(10,000내외)의 4대신문이 있고 주간이나마 한국노동신문이 있다. 그리고 서울의 일간신문이 빠짐없이 내려와서 좁은 바닥에 신문이 넘치고 마치 언론기관이 대구에 군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침에 사소한 사건이 대서특필 저녁의 화제로 강요되고 관청마다 <기자, 기자> 시청, 도청이 비명을 울렸다. 언론의 중압이란 서울서 느끼지 못했던 대구에서 감촉이었다. 물론 경쟁에 날이 가는 각신문은 각기 이색을 보였고 취재에 성의를 가져 비행기조차 마련한 영남일보는 혁신적 방향, 대구매일은 민주 사회적 방향, 대구일보는 보수적 온건, 이러한 평들이 일반적이었다. 그 사설도 대체로 그런 방향을 보였다.”
당시 대표적인 진보언론은 민족일보(전국), 영남일보, 대구매일, 국제신문(부산)을 꼽는데, 대구에 연고를 둔 신문이 두개나 된다. 서도원, 장석구, 이재문, 강창덕 등 민민청 활동가들 다수가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생운동의 경우, 제2단계 운동의 주도권은 서울대학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운동이 가진다. 이는 4.18, 4.19를 주도한 서울지역의 학생운동이 이후 정세에 대한 주동적 인식을 유지하였을 것이고 또한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신진회, 신조회 등 이념서클을 조직화해 학생운동의 지도역량을 구축하였으며 거기에 지방에서 의식화된 학생들의 서울 진학 등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대학생운동의 대중 투쟁력은 강하였지만 운동과 사상을 지도할 중심지도력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었으며 결국 이에 대한 상당한 부분을 학교 밖의 지도력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혁신계의 운동역량의 중심은 단연코 영남이었으며 그리고 그 중심은 대구였다. 4월혁명 정세의 분수령은 1961년의 2대 악법반대투쟁과 자주통일운동, 남북학생회담 성사 투쟁이었다. 1단계의 운동이 체제내적 요구인 반부패, 절차적 민주화 요구이었다면 2단계는 체제의 극복을 요구하는 즉 친미분단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것이 통일운동이었다. 체제를 위협하는 대중행동을 봉쇄하기 위한 민주당정권의 대응 방안은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대 악법이었다. 대구의 혁신계는 2대 악법을 반대하는 3만이 집결하는 대규모 시위인 4.2데모를 일으킨다. 이에 민주당정권은 긴급 각의를 개최하고 시위 주동자를 구속한다. 마침내 미국과 기득권세력은 민간권위주의정부로서는 더 이상 체제의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분명한 판단을 하게 되며 이를 군사정부로 대치하고자 의도하였을 것이고 그 시점이 바로 대구의 4.2데모와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통일촉진궐기대회였다. 이는 기득권을 유지해야 할 친일친미매판세력의 위기의식과 한일관계 재정립과 월남파병을 수행할 군사정부의 필요성을 느낀 미국의 요구가 일치한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4월혁명 공간에서 활동한 민족민주 인사들을 무더기로 구속하여 소급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군사법정에서 중형을 선고한다. 전국적으로 약 3000명을 무차별 연행하고 그중 48개 사건, 206명을 재판에 회부한다.이중 재판받은 인사들을 지역별로 분석해보면 도표와 같다.
지역
재판받은인사
지역
재판받은인사
서울
70
경북
8
경기
11
전남
10
부산
34
전북
8
경남
15
강원
1
대구
43
충남
3
이 도표로 보면 대구, 경북(51명)과 부산, 경남(49명)을 합치면 100명이며 전체의 반을 차지한다. 서울의 경우 가장 많은 인사들이 재판을 받지만, 개별 조직의 중앙적 성격에 의한 상징적 탄압이 많은 점을 고려한다면, 영남권의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6.박정희의 지역장악과 인혁당사건 그리고 대구의 보수화
이렇게 형성된 인혁그룹은 박정희와 두가지 방향에서 대치한다. 첫 번째는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 지원활동이다. 당시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시도할 당시는 경북대학교의 3선 개헌반대투쟁이 전국의 대중투쟁을 주도할 만큼 모범적이었다. 인혁그룹은 여정남 등을 통해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을 지도,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서도원이 작성한 ‘반독재구국선언문’이 3차례나 학생운동으로 전달되어 경북대 학생운동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그 글도 명문이었지만 그 글의 어투가 고전적이어서 학생이 작성한 글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달되어 발표된 것으로 봐서 당시 인혁그룹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중앙정보부나 경북도경은 이러한 상황을 감시와 조사를 통해 상당히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가 박정희로 하여금 인혁그룹제거를 결심하게 하였을 것이다.
두 번째의 대치 방향은 야당과 민주대연합을 통한 정권교체운동이었다. 인혁그룹은 서울과 대구에서 1967년 ‘반독재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추진위원회’,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구성하였고, 3선 개헌 때는 야당이 주도하는 “3선 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 결성대회‘에 인혁그룹이 연합전선 형태로 참여하는 등 민주주의를 위한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한다. 박정희정권이 볼 때, 이 활동은 자신의 전략요충지인 대구의 잠재된 만년야당 기질에 불을 붙일지도 모를 공포스러운 행위였다.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1971년 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과 경선하게 된다. 3선 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둔 박정희는 민주세력의 결집을 상징하는 야당 후보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 과정에서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선거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를 ‘영남과 호남’의 지역 대결구도로 왜곡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북을 비롯한 영남에서 몰표를 받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 1963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처음 치러진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7대 대선에서 박정희가 전남(광주, 전남)에서 52%, 경북(대구, 경북)에서 50%를 받아서 주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많은 표를 받은 윤보선을 이겼다. 이때의 득표 양상을 ‘여촌야도’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호남 지역감정이란 결코 없었다. 그러나 71년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영남에서 71.9%(경북에서 73%)라는 몰표를 받는다. 이는 선거과정에서 이효상 등이 앞장서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했기 때문이다.이때부터 대구경북은 박정희 집권의 전략적 근거지가 되었다.
박정희는 영남권 ‘몰표’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완전히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극단적인 수단도 동원할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와 그 지역의 정치적 하수인들은 지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에 혈안이 된다. 그중 주목할 것은 4월혁명에서 민주, 민족운동의 중심 근거지였던 언론, 학원을 장악한다. 학원의 경우는 4월혁명의 중심인 대구대, 청구대를 통합하여 영남대를 만들고 박정희가 교주가 된다. 2.28학생운동의 중심 고등학교인 경북고등학교 출신자들은 박정희에 줄을 대고 미래 소위 TK세력의 인적 자원이 된다. 이로써 4월혁명의 중심 근거지를 모두 붕괴시킨다.
그러나 결코 회유되지 않는 핵심 민주세력인 인혁그룹과 그 영향 하의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탄압을 넘어서서 그 지도자를 ‘살해’할 의지를 발동한다. 박정희의 인혁그룹 살해 의지는 이미 소문의 형태로 존재했다. 대구에서 있었던 3선 개헌 반대 시위 이후 대구의 운동지도자들을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경찰과 정보기관의 입을 통해 우회적으로 운동지도자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검거되기 전에 경락연구회 회의에서 우홍선은 매우 신빙성 있는 정보기관의 정보를 회의에 공개한다. 이번에 혁신계세력을 살해할 것이라는 정보이었다. 이를 두고 장시간 회의가 열렸고 의연하게 대처하기로 한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선생 등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교도소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번에는 못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공소장이 너무나 빈약하여 유죄 성립이 어려웠음을 잘 알았을 것이고, 그리고 1차 사건에서 풀려난 경험이 있음에도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마 조사과정에서 ‘박정희의 살해의지’를 분명히 느낀 것으로 보여진다.
인혁그룹과 박정희의 전략요충지 대구를 둘러싼 첨예한 대결은 마침내 박정희로 하여금 ‘인혁살해’라는 잔인한 선택을 하게 한다. 박정희의 그 잔인한 선택은 결국 ‘정치적 자멸’로 귀결되었지만, 반면에 대구지역이 ‘만년야당’에서 ‘만년여당’으로 되는 정치적 비극으로도 귀결되었다.
7. 마무리말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2차례 탄압을 받아 다수가 희생된 인혁그룹은 4월혁명 중, 후기 민족민주운동이 활성화된 국면을 주도한 청년그룹에서 비롯되었고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등장한 박정희정권의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목숨을 건 저항투쟁을 한 민주주의 그룹이다.
이 그룹은 4월혁명의 실패를 반성하는 가운데, 당시 일반적으로 논의된 ‘지도조직’ ‘전위조직’의 결여에 대한 반성에서 그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여타의 전위조직적 시도와 동일하다. 하지만 실질적 대중운동성을 갖고 있었던 형성과정의 특성 때문에 무리한 조직형식을 최소화하고 당면 운동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방향에서 조직화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조직은 실질적으로 박정희정권 아래 민주주의운동을 지도한 재야그룹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 구성원이 주로 영남권 출신인 것은 해방정국에서 4월혁명에 이르기 까지 영남권운동이 전국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 점령 지역이었기 때문에 운동이 상대적으로 ‘보존된’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28과 3.15, 4월혁명 중, 후기 민족민주운동 그리고 70년대 민주주의운동에서 보여준 영남권의 주도성과 대구지역의 진원지적 역할은 이러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혁그룹은 이러한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인혁그룹이 토대를 두고 있는 영남권, 특히 경북지역은 박정희 역시 집권전략의 중심지였다. 호남차별과 영남우대를 통한 영남권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박정희의 집권전략은 영남지역 특히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인 대구에서 충돌한다. 이는 결국 박정희로 하여금 인혁그룹의 지도자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선택으로 귀결된다. 즉 이 사건은 대구경북과 영남권 전체를 장악하고자 하는 박정희의 다양한 시도 중 핵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혁살해로 박정희의 대구지역 장악은 완성되었고 이후 대구는 보수의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이 글에서 인혁그룹의 형성과 활동과 운동적 위상을 밝히기 위해 설정된 한국전쟁 미 점령지역으로서의 ‘영남권 운동’이라는 개념, 인혁을 포함하여 4월혁명 공간에서의 대중운동을 민족민주운동의 ‘계기적 표출’로 이해한 점, 인혁살해의 핵심 요인 중 하나를 박정희의 대구지역에 대한 정치적 장악에 의한 것으로 파악한 점은 이후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거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