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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어전사
그래도 부러운 가정
성경본문 창24장 61절 ~ 67절
>출 처| 김창인목사
오늘은 창세기 24장 61절에서 6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래도 부러운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실 때 절대로 100%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들어가 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삭의 가정은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 사실 좋습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아들 중에 큰 아들 에서가 가나안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가정은 제가 볼 때 참으로 부러운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을 가정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5월만 되면 첫째 주일과 둘째 주일에 어린이 주일 혹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가정에는 어버이도 있고, 어린이도 있기에 두 주일을 합해서 가정 주일이라 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을 가정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래 전부터 5월 첫 주일을 가정 주일로 지켜 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따라 이삭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이삭의 가정이 어찌하여 "그래도 부러운 가정"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가정 (61-)
처녀와 총각이 만나서 결혼을 하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가정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부부 생활에 결정적인 치명상을 주는 증상이 하나 있습니다. 의부증 혹은 의처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심만 하는 정신적인 질환입니다. 의부증에 걸린 여자는 자기 남편을 사사건건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전혀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 의심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며 의처증이 있는 남자는 아내를 얼마나 의심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도 아내가 여자끼리 인사하는 경우에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데 혹시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게 되면 집에 돌아가서 반쯤 죽습니다. '너 그 남자 좋아하지'라고 하면서 닥달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가 버티어 낼 수가 없습니다. 서로 의심을 하고 의심을 받는 일처럼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부부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런 증세가 깊어지면 부부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서로가 믿어주는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예를 들어서 동네 사람들이 저 집 아내가 어떻다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남편이 '나는 당신을 믿소'라고 하면 이야기를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남편에 대해서 저 집의 남편은 아무와 바람이 났다고 소문이 돌아갈 지라도 아내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내 남편을 믿는다고 하면 그 사건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믿고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를 믿는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릅니다. 하루에도 조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감정이 믿기는 믿되 성령이 우리들에게 임하사 성령으로 믿는 믿음이기 까닭에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너를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를 믿는 바탕은 내 감정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듯이 남편을 믿고, 남편은 또 하나님을 믿듯이 아내를 믿어야 합니다. 이런 가정은 참으로 복되고 부러워할 만한 가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1절을 보면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내와 함께 떠납니다. 아들이나 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 생활을 잘 하겠노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25년 동안 애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나이 100살, 그 아내 사라의 나이 90살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127세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들만 남았습니다. 며느리를 골라 맞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는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고향 땅에 보냅니다. 고향에서 며느리를 골라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종을 보내면서도 아들은 절대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오고 가는 길에 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고 혼자서 주인의 고향에 가서 며느리를 맞이해 오는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주인의 고향에 가기까지 순적한 길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주인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길을 가다 보니 메소보다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동네 밖에 우물이 있는지라 '하나님 제가 여기에 지켜 서 있다가 아가씨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경우 내게 물을 좀 달라 했을 때 나에게 물을 떠주는 아가씨라면 하나님이 내 주인의 며느리로 택한 줄로 믿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리브가라고 하는 아가씨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물을 좀 주어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을 떠서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약대들에게 물을 길어다 먹였습니다. 약대가 물을 한 사발 두 사발을 마십니까? 리브가는 시키지 않은 일까지 넉넉하게 하는 여자입니다. 너무도 후덕한 아가씨였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종은 벌써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너무 고마운지라 손 목걸이를 끼워주고 코걸이를 달아주면서 "아가씨의 집에 내가 좀 쉴만한 곳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그럼은요, 우리 집은 넓고 낙타에게 줄 먹이감도 많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달려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라반이 달려 나와서 그 종을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저녁 대접을 잘 하려고 만반진수를 차려 놓았습니다. 그 때 그 종이 "내가 한 마디 하고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이 종입니다. 그래서 지금 며느리감을 골라 데리고 오라는 사명을 받고 왔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기도하면서 왔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기도했더니 리브가가 기도한대로 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연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두엘과 또 그의 아들 라반이 "이것은 우리가 가부를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께서 다 짝지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가씨에게 한번 물어는 봅시다"라고 한 다음 리브가를 불렀습니다. 리브가가 남편 될 남자의 얼굴을 한번이나 봤습니까? 음성을 한 번이나 들어봤습니까? 편지 한번을 받아 보았습니까? 전혀 그런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리브가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확답을 했습니다. 종을 따라갔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순전히 믿음으로 따라 갔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삭은 자기가 직접 가서 보고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는 종이 데리고 오는 여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시는 것으로 알고 내가 맞이하겠다 하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믿음이 만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가정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이렇듯 철저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 신학을 한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목사가 된 사람을 어느 교회에서 모시겠습니까? 그래서 개척할 수밖에 없다 하여 교회를 개척을 하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자기 보다 젊고 겨우 안면이 있는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젊은 목사의 사모가 차를 준비해서 대접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개척교회 목사님이 젊은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참 행복해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목사님이 "제가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까? 뭐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사모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목사 중에 사모가 없는 목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모가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거의가 재혼하여 사모가 있지 않습니까?" "예, 저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와 어린 세 자녀가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그렇게 큰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아내의 자리가 너무 컸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살아 계시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 젊은 목사가 그 다음 주일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감사 헌금을 했습니다. 감사 헌금도 봉투에 두둑이 넣어 가지고 드렸습니다. 큰 교회라면 헌금 내역을 다 부를 수가 없지만 그리 큰 교회가 아니기에 그 내역을 다 읽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내역에 "아내가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저녁 시간에 남자 교인들이 전부 "아내가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감사헌금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들도 "남편이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전부 감사헌금을 들고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옆에 있는 남편이 곁을 떠나면 그 때 비로소 남편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믿고 사랑하는 아내, 정말로 내가 믿고 사랑하는 남편과 믿음으로 맺어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얼마나 복됩니까? 여러분들은 믿는 아내가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가정이 바로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이루어졌고, 믿음으로 살아온 가정입니다. 정말로 부러운 가정입니다.
둘째, 기도의 가정 (62-63)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셔서 나이 30이 될 때까지는 가정 일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나이 30이 되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만 하겠다하여 공생애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광야로 가셔서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키워야 되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를 때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르셨습니까?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6절을 보면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세우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키우는 일 전에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는 엄청난 일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아무리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앞서 먼저 기도가 우선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기도를 하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을 하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생활의 일부요,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가정은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요, 부러운 가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2절에서 63절을 보면 '때에 이삭이 브엘 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남방에 거하였었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묵상 기도를 하다가'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감을 골라 데리고 오는데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고 종을 보냈습니다. 종을 보낸 날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묵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물가에서 종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삭의 가정은 기도로 이루어 진 가정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 20년이 되었는데도 아들도 딸도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애기가 없다면 이처럼 다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걱정과 근심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부는 '기도할 문제다'라고 생각되어 열심히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20년 동안을 내외가 합심하여 기도한 결과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남편 이삭은 그 날부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도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내는 혼자서라도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태중에서 쌍둥이가 싸우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 이쯤 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작은 아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도를 중단했기 까닭에 하나님의 그런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다가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기어이 작은 아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그것을 응답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가정은 이처럼 기도로 시작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계속 기도로 살아왔습니다. 합심기도는 끝까지 못했을지라도 개인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럽고 복된 가정입니까? 여러분들 가정에 기도 소리가 계속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극상 한다는 것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잠깐 하는 식사기도뿐이 아니십니까? 그 것도 형식적으로 말입니다. 기도가 없는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삭의 가정은 기도의 가정이었습니다.
한번은 젊은이가 벌목장에 가서 취직을 하려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님, 저를 좀 써 주십시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네에게 달렸어,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고, 일을 잘 못하면 안 되는 것이지" 그래서 도끼를 받아들고 월요일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화요일에도 열심히 하고, 수요일에도 열심히 하고, 목요일에도 한 나절을 했는데 주인이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일한 품삯을 계산해 주면서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했고 다른 일꾼들이 놀고 또 쉬는 시간에도 저는 일을 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때 주인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결과가 나오지?" "무슨 말씀이신데요?" "자네가 월요일에는 일등으로 제일 많은 성과를 올렸지. 둘째 날은 중 가운데쯤이었고, 셋째 날은 제일 꼴지야, 오늘은 지켜보니 영 형편이 없어. 왜 그렇지? 점점 능률이 떨어지고 있으니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어.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젊은 청년은 이상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자네 혹시 도끼를 갈아서 날을 세운 일이 있나? 없나?"라고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도끼는 열심히 나무를 찍어서 하루를 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갈고 갈아서 날을 세워야 하는데 도끼 날을 세우기 위해서 가는 시간이 헛되게 보내는 시간인가? 그 시간이 노는 시간인가?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아닌가?라는 주인의 말에 결국 대답을 못했습니다.
도끼의 날을 세워 놓고 한번 찍는 것은 무딘 도끼로 열 번을 찍는 것보다 능률이 더 좋습니다. 반드시 갈고 날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젊은이는 모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또는 믿음 생활에서 날을 세우는 일이 무엇입니까? 준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이 아닙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가 놀고 먹는 시간입니까? 헛되이 보내는 시간입니까?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믿음의 날을 세우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안 하는 사람보다 열 배나 낫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열 사람이 기도하는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도 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가정은 기도로 시작했고, 계속 기도로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에서의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부러운 가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의 가정 (64-67)
본문으로 돌아가서 64절에서 67절을 보면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지 25년이 지난 후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의 나이 37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37살이고 이삭은 37살입니다. 남자만 둘이 살았습니다. 홀아비만 둘이 산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 3년이면 뭐가 서말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홀아비끼리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재미가 없고 구차하다는 뜻입니다. 남자 둘만의 삶은 삭막할 뿐이었습니다. 웃을 일도,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의 세월을 홀아비끼리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삭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본문에 등장하는 리브가라고 하는 아가씨를 맞이하여 장막에 들이고 사랑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합니까? 시아버지가 사랑합니까? 시아버지가 사랑합니다. 시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했겠는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어쩌면 시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는 즉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하지만 내가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오히려 큰 복입니다. 사랑스러운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이삭도 나이 40에 장가를 들었으니 이삭이 정신 없이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제 아들 딸을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항상 져주니까 평안합니다. 우리들도 며느리를 맞이하거든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십시오.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정 어머니가 딸한테는 져 줄줄 알면서 왜 며느리한테는 꼭 이겨야 하는 줄로 여깁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며느리에게 이기려고 했겠습니까? 사랑을 주고 위로를 받고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러운 가정입니다. 나중에 에서의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부러운 가정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부러운 이삭의 가정은 첫째 믿음의 가정입니다. 믿음으로 출발을 했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의 가정입니다. 기도로 시작을 했고, 기도가 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평생을 기도로 마친 가정입니다. 셋째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기에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평생 아내 한 사람으로 만족했고 아내는 이삭 한 사람 밖에 모르는 가정이요, 진정 부러운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도 이렇게 부러운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경본문 창22장 06절 ~ 12절
>출 처| 김명혁목사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아버지와 아들”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어머니에 대한 설교를 주로 하는데 오늘은 아버지에 대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성경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씀할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1:8). 어머니의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도 더할 나위 없이 크고 깊습니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이 나와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랑의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편지들이었습니다. 사랑이 묻어있고 신뢰가 담겨있고 고마움이 차있는 편지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랑과 존경과 신뢰와 고마움은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값지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첫째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나옵니다. 대화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까도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까도 아니었으며, 어떻게 하면 성공해서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 까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아왔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특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공부보다, 돈 버는 것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른 제사 드리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라면 어떠한 희생이나 죽음도 기쁘게 받아드리려는 각오로 충만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음의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가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대화는 두 사람의 삶을 가장 값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버지 손종일 장로와 아들 손양원 목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들 손양원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 손종일 장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매일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방요배를 거절했습니다. 어느날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하며 사랑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하며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라면 어떠한 희생이나 죽음도 기쁘게 받아드리려는 각오로 충만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음의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가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대화는 두 사람의 삶을 가장 값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세 아들과 네 손자를 모두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한국의 아벨이 되었고 아들 손양원 목사는 나병 환자들과 원수들을 용서하고 사랑한 한국의 프랜시스가 되었습니다.
셋째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그의 아들 김명혁 목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민족과 교회를 사랑한 애국자요 목회자였습니다. 일제 하에서도 감옥살이를 했고 공산치하에서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늘 설교준비와 심방에 바쁘셨고 그리고 많은 기간동안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6,7세 때 아버지와 함께 신의주 제2교회의 뜰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기억됩니다. 그 때 저를 많이 칭찬해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제가 노래도 잘했고 연설도 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당의 유리창이 몇 개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때 제가 즉시 곱셈과 덧셈을 해서 유리창의 개수를 알아 맞추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저를 많이 칭찬해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주일성수를 철저히 했고 신사참배를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치하에서는 주일날 절대로 학교에 가지 않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물론 벌을 받기도 했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것은 제가 11살 되던 해인 1948년 7월 어느날 평양 시외 사동탄광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서울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서울로 가도 좋다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간단한 말 한 마디였지만 그 간단한 말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너를 떠나 보내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너만이라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순교의 제물이 될지도 모르지만 너는 내가 다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하여라. 아들아 잘 가거라.” 그것이 마지막 만남과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화였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한 제사의 대화였습니다. 그 다음 달인 8월 저는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믿음과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대화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대화인지 모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대화는 두 사람의 삶을 값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시게 되었고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순교자의 아들로 한국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대화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의 성격과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대화의 성격은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와 딸의 만남도 어머니와 아들의 만남도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신뢰의 만남, 헌신과 제사의 만남, 존경과 사랑의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신뢰와 헌신과 제사와 존경과 사랑의 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여러분들의 삶이 값지고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효자 이삭
성경본문 창22장 01절 ~ 10절> 출 처| 김명혁목사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효자 이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효자란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국어대사전이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효자라는 말을 좀 넓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의 효자, 부모님을 잘 섬기는 사람을 부모님의 효자, 이웃을 잘 섬기는 사람을 이웃의 효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인천 순복음교회의 최성규 목사님을 가리켜 여러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효자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를 겸손하고 충실하게 잘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의 효자였고 부모님을 잘 섬기는 부모님의 효자였으며 이웃을 잘 섬기는 이웃의 효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이웃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세 가지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이웃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을 받되 자기와 자기 자손이 복을 받고 땅에서 복을 받고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효자
첫째 이삭은 하나님께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세상에 태어난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의 할아버지였을 때에 어머니 사라가 나이 많은 할머니였을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세상에 태어난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이삭의 효심이 극진했습니다. 살라고 하며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 앞에서 늘 감사하며 순종하며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웃긴다는 뜻도 되지만 기쁨이란 뜻도 될 수 있습니다. 이삭은 한 평생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웃으면서 기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잡아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분부했을 때 이삭은 아무런 불평이나 항의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했습니다.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는 순종과 효도의 자세였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모델이 되었고 효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절대 순종의 모델이 되었고 절대 효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효도하되 절대 순종의 효도를 했습니다.
이삭은 또한 신부를 얻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창24:63). 이삭은 결혼문제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 효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장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주셨습니다.
이삭은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그 축복으로 우물을 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의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께 효도했습니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창26:25). 이삭을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효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이삭을 또 축복했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26:24).
2 아버지에게 효자
둘째 이삭은 부모에게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늙은 몸으로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 어머니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일찍 일어나고 나무를 지고 산에 올라가자고 하면 산에 올라가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했습니다. 창22장에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서 일찍 일어나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으로 아들에게 하나님의 분부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단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불평이나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대로 조용히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극한 순종과 효심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이삭은 효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신부를 얻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위하여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닌 고향 족속의 딸을 이삭의 아내로 택하기를 원했습니다. 늙은 종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너는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24:3,4). 이삭은 아버지의 선한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삭은 결혼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아버지에게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우물을 팔 때에도 아버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웠을 때 이삭은 제일 먼저 그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불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창26:17,18). 이삭은 태어나서부터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효자였습니다.
3 이웃에게 효자
셋째 이삭은 이웃에게 효자였습니다. 특히 이삭의 말년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효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삭이 100배의 축복을 받았을 때 이삭은 그 모든 축복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이삭은 이웃을 위해서 우물을 파고 또 파고 또 팠습니다. 이삭은 이웃이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으면 대항해서 싸우는 대신 그저 웃으면서 그 우물들을 이웃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도 했습니다. 이삭은 이웃을 마시게 하고 이웃을 도와주는데 모든 재산을 다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리 세 가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효도하며 살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며 살고 그리고 이웃에게 효도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을 받되 자기와 자기 자손이 복을 받고 땅에서 복을 받고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4 효자는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까? 순종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고 위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렸고 이웃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최고의 효도는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과 부모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 드리라고 분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분부하십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분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고 고백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11:5)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효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또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분부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많이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알아서 해 드리곤 했습니다. 방 청소도 하고 일찍 일어나 이불도 개었고 공부도 잘 했고 심부름도 잘 했고 무엇이든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알아서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저를 아주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부모의 효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또한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분부합니다. 아내도 기쁘게 하고 이웃도 기쁘게 하라고 분부합니다. "사람이 새로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신24:5). 어제 새로 아내를 취한 김한경은 아내 조윤정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김한경 군에게 묻습니다. "새로 취한 아내를 기쁘게 해 주겠습니까?" 성경은 특히 이웃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고 분부합니다.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2)고 분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고 분부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저를 기쁘게 해 주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에게 버불 검을 가져 다 준 어린이도 있고 예쁜 꽃을 가져 다 준 사람도 있고 마음의 글들을 써서 보내준 사람들도 있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어린이 한 명이 저에 방에 들려 선물을 하나 놓고 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제가 선물을 구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이웃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이웃의 효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리 세 가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이웃에게 효도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부모를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며 살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면 복을 받되 자기와 자기 자손이 복을 받고 땅에서 복을 받고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효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충만이 받으며 이삭처럼 웃으면서 기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를 기쁘시게 하라
성경본문 잠23장 25절 ~ 절>출 처| 김홍도목사
여러분, “어떻게 하면 자식이 잘 되고 행복할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어떻게 하면 내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기쁘시게 할까?” 하는 이 두 가지 마음 중에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아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자식들의 사랑과 효심은 점점 식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고려장 하듯이 비록 산속에는 갖다 버리지 않으나, 제주도나 해외에 여행 갔다가 부모를 버리고 오거나 양로원이나 기도원에 갖다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피주 공고 교장이신 이영순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인이 되신 한영선 목사님의 “늙은이는 서럽다네” 하는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늙으면 섧다네. 눈 어두워 그렇지. 돋보기 안경 쓰고 확대경 손에 드나 그래도 안보여 두 번, 세 번 살핀다네. 늙으면 섧다네. 귀먹어 그렇지. 남의 소리 반타작. 묻기 뭣해 지나고, 재빠른 전화 소리는 정말 듣기 힘들다네. 늙으면 섧다네. 무시당해 그렇지. 수에도 치지 않는 젊은이의 풍조로다. 무언가 저들끼리만 쑥덕쑥덕 하누나. 늙으면 섧다네. 짝 잃으니 그렇지. 백년해로 약속 어겨 어느 한 쪽 먼저 가니 남은 쪽 외로움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늙으면 섧다네. 병들어 그렇지. 내 몸은 내 몸이나 내 맘대로 못하니 옆에서 돌보지 않으니 꼼짝못해 답답하지.”
이런 넋두리가 몇 년 전만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구구절절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 저도 이제는 늙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머지않아 늙음이 찾아옵니다. 늙으신 부모님의 심정 헤아려 어버이를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선량한 직장인이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부모에게 행한 대로 자기도 받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인륜 관계의 첫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고, 에베소서 6장 3절에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고 부모를 멸시하는 사람은 결코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는데, 친족이 아니라 자기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더 악한 사람이겠습니까?
본문 잠언 23장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어버이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1. 중심에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 그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일본 어느 대학에 외아들 대학생이 있었는데 효자로 소문이 난 청년입니다. 한 번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는데 친구 하나가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효도하나 살피러 따라갔는데 실망을 했습니다. 인사를 하고나서는 옷을 훌훌 벗고 목욕을 하는데 연세 많으신 홀어머니에게 자꾸 심부름을 시키더랍니다. “어머니, 비누 좀 갖다 주세요.” 또 조금 있다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 “어머니, 냉수 좀 주세요.” 그래서 목욕을 다 한 다음에 “나는 자네가 효자라고 해서 어떻게 행동하나 살펴보러 왔는데 실망했네. 자네가 직접 할 수 있는데 홀어머니를 심부름만 시키는 게 어디 있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물론 내가 내 손으로 갖다 쓸 수 있어.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세.” 하는 설명을 듣고 과연 효자이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식을 기쁘게 하고 자식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의 3분의 1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다 효자, 효녀가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되겠지요.
가렵기는 왼쪽 다리가 가려운데 긁기는 오른 쪽 다리를 자꾸 긁어주듯이, 부모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참된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전에 저희 모친께서 살아 계실 때 큰 아들네 집에서도 모시려고 하고 둘째 며느리를 좋아하니까 저희집에 계시라고도 하는데 싫다고 하시면서 4형제 아들네 중심되는 거리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사달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저희 형제들이 집 가진 형제가 없지만 돈을 모아서 10여 평짜리 아파트를 사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제일 고생하는 막내딸 이름으로 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 그 딸이 그 집을 다 날려버렸는데 또 하나 사달라고 하셔서 돈을 모아 사 드렸더니 역시 그 딸의 이름으로 등기해 주고 몇 해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동생 하는 짓은 밉지만 어머님이 기뻐하신 것을 보며 저희들은 만족했습니다.
형식으로 겉치레 효도보다 중심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참 효도라고 봅니다. 부모에게 무관심했던 죄를 회개해야 될 줄 압니다.
2. 공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무시하는 태도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부모를 구타하고 부모를 죽이는 자식까지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려면 어른을 공경하고(honer) 경외하는(fear)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가 많고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공경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 32절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했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나이 많으신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내 육신을 낳고 키운 부모님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르쳐준 스승도 또 다른 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선생님을 사부(師父)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욱 중요한 우리 영혼의 지도자이신 주의 종, 영의 양식을 공급해주는 목사나 영적 지도자를공경해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神父)라고 하는데 “Father”, 즉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교황”을 “Pope”라고 하는데 “아버지”, “파파(Papa)”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선 교인이 영세만 받으면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이 반말을 합니다.
자식들한테 존경을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남에게 존경받는 것보다 더 흐뭇하고 기쁜 일입니다. 재작년에 제 여섯 살짜리 손녀가 주일 오후에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귀에다 대고 “할아버지, 참 훌륭해 보여요.” 하고 웃지도 않고 말하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또 제 막내아들 정민 전도사가 주일 밤 예배를 다 마치고 밤늦게 와서는 제 손을 꽉 잡고 머리를 숙이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렇게 힘든 목회를 어떻게 40년이나 했습니까?” 하는데 못들은 척 하면서도 자식들한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지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또 사위 목사들이 주일 설교 끝나면 머리를 숙이면서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외국 사람 설교, 한국 사람 설교 다 들어봐도 역시 아버님의 설교가 깊이 가슴에 와 닿곤 합니다.” 하고 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공부 좀 했다고 건방지게 비판할 수도 있을 텐데 진심으로 인사할 때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 아내도 언제나 고개 숙여 은혜 받았다고 인사하면서 설교 대지까지 외우곤 합니다. 한집에 사는 남편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존경을 표시할 때 정말 피로가 다 풀리고 기분이 상쾌해 집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받아 그와 그의 가족들까지 방주를 타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비판하고 흉보던 함은 저주를 받았지만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조급히 생각하여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랄 땅에 이사해 갔을 때 그의 아내 사라가 너무 미인이라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빼앗으려고 할 때 자기가 죽을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성군 다윗은 그렇게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지만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고,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흉계를 꾸며 충성된 우리아 장군을 일선에서 싸우다가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다 허물과 실수가 있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자식을 공부 많이 못시켰어도, 부모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신분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3.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을수록 고독함을 잘 느끼고 가까움을 잘 탑니다. 그러므로 자주 대화하면 기뻐하십니다. 전에 보면 딸들이 시집갔다가 친정에 오면 밤을 세워가면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을 세워가면서도 피곤해 하시지 않고 그 얘기 듣는 것이 좋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대로 자식들이 장관이 되고, 사장이 되고, 목사가 되었어도 부모님한테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전에 제 후배, 정 목사란 분은 30, 40이 되었어도 시골 부모님한테 가면 아버지 팔을 베고 다정하게 어리광 부리며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 앞에서 어른 행세하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도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과 대화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꼐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보잘것없는 죄인일지라도 오래 대화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속사정 다 털어놓고 하나님께 말씀 드리며 의논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사이 너무 바빠서 부모님과 자식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4. 감사와 칭찬을 해드려야 합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은공에 감사를 표시하고 칭찬해 드려야 부모의 마음이 기쁜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뭐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칭찬하랴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은덕을 감사하고 부모의 장점을 칭찬해 드리는 것을 부모님은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저는 사춘기 때 웃기는 얘기를 잘하고 가족의 폭소를 터뜨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족을 웃기기 위해서 아버님의 단점을 들어 웃기는 얘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같이 웃으시더니 두 번째 또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안색이 달라지시면서 화를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도 쉬운 말로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고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송영할 때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고 두 손들고 부르는 것도 주님을 칭찬하고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노아가 비록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했어도 그것을 들추어내면서 비웃고 흉보던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훌륭한 점을 칭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5. 물질로 봉양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신 것같이 역시 어려운 중에라도 매월 얼마씩 형편에 따라서부모께 용돈도 드리고 여유가 있으면 맛있는 음식도 사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파고다 공원에 모인 노인들이나 노인정에 계신 노인들 대부분이 용돈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식들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는 다 후회가 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 체면을 위해서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살아 계실 때 생선 하나, 닭 한 마리 잡아 대접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어려우면 또 이해가 되지만 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부모 위해 쓰는 것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모릅니다.
옛날 한풍 곽(郭)씨 가문에 이름난 효자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밖에서 일하다 들어와 보니 연세 많으신 시아버지가 자기 손자 목을 타 누르고 죽이려고 하더랍니다. 며느리가 “아버님, 뭘 하고 계십니까?” 하고 비켜서게 했더니 “내가 닭고기가 먹고싶었는데 마침 닭이 한 마리 들어왔길래 잡아먹으려고 잡고 있던 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들춰 업고 얼른 암탉을 잡아 삶아드려 잡숫고 있는 중인데 남편이 들어와 보니 분위기가 이상해서 물어보니까 그 사실을 설명해 드리고 어린 아들을 보니까 이미 숨이 넘어갔더랍니다. 그것은 탓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당신은 하늘이 우리 가문에 내려주신 효부”라고 하니까 그 여자가 “이것은 내가 절 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렇게 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라고 했더랍니다.
가장 큰 효도는 예수님 믿지 않는 부모라면 어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전도를 안 받으면 일주일, 혹은 한 달 금식하면 다 들으실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하지 않고 있다가 이 다음 부모님이 지옥불에 들어가시면 영원히 고통 가운데서 원망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름다운 관계
성경본문 잠23장 24절 ~ 25절>출 처| 이정익목사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오늘은 부모님 주일입니다. 그리고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 이 세상에서 이 어버이 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웃이나 형제 그리고 친구와 친척 도 다 좋은 관계이지만 이 어버이와의 관계와는 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내 몸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그리고 나를 낳으신 부모입니다.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는 아니지만 효 그 이상으로 가정과 부모와 자녀의 문제를 다루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식사나 하고 꽃이나 달아드리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 때문에 몇 가지 부모님 생각을 깊이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정신적인 것들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에게 몇 가지 우선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 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녀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만큼 자식을 위한 희생과 사랑과 애정을 가진 존재가 없습니다. 부모는 그만큼 내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베풀고 희생하는 모습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자식에게 무조건적입니다. 부모의 인생은 자식이 전부입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혹 어떤 부모는 내 인생도 중요하다 하는 이해타산적인 부모도 있기는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 없는 내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에게는 자식 그 이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모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오늘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제일 먼저 생각하며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생전에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생존해 있을 때 할 일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 생존시에는 관심도 없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큰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근사하게 만들고 울고불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 왕릉 같은 무덤이나 웅장한 비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불효자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더 큰소리로 웁니다. 그렇게 큰소리로 울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모님 생전에 즐겁게 해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효의 정신입니다. 그 말은 기회 있을 때 행하고 실천하고 이루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회가 다 지나갔을 때는 이미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 생전에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반드시 부모님의 영혼 구원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의 영혼이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일찍이 예수를 알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자식도 내 친구도 내가 전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 부모님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 부모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지금쯤 성경말씀대로라면 지옥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이 일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보통의 일입니까. 내 부모가 예수를 믿어도 믿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 부모가 살아생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은 상태로 하나님으로부터 불려 감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아십니까. 성경은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여러 번 여러 번 말씀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지옥에 가지 말고 천국에 가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웃습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비웃습니다. 속으로 목사가 비이성적인 설교를 하는 줄 압니다. 그리고 현실성 없는 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경이 할말이 없어서 장난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천국과 지옥도 없는 기독교, 장치 성경이 누차에 걸쳐서 경고한 심판도 없는 기독교를 왜 믿습니까. 수양이나 하고 불안한 마음 위로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이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서 자신감을 잃고 확신도 없이 믿음과 생기를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부모가 그 지옥엘 갑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을 오죽하면 지옥이라 했겠습니까. 상상도 학 싶지 않은 곳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답이 금방 나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효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이 세상을 다 사시고 돌아가시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가시도록 안내하는 영혼구원 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억 원짜리 황금 수의를 입혀서 두꺼운 관에 넣어 큰 무덤에 묻어 놓으면 무엇 합니까. 그것이 뭐하는 짓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은 남의 무덤에 묻혀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남의 무덤에 잠시 묻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부활할 것인데 큰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것 그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최대의 효는 내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를 알게 해서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최대의 효입니다.
네 번째는 “부모님은 가장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는 싫다고 취소하고 다시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이웃이나 친구는 싫으면 바꾸고 만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내 부모는 그럴 수 없는 특수 관계입니다.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이미 나의 부모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내가 그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가 보통 그냥 관계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만나지 않고 보지 않고 그냥 지낼 수 있는 관계입니까. 이 부모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너 낳은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관계가 악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악화되면 모든 것이 불화해집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가 불화되면 그것은 형벌입니다. 저주입니다. 가장 비참한 삶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을 보면 이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불화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부부가 이혼함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부부의 이혼은 참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근래 이 이혼율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면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집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한을 마음에 안고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성장한 후에도 그 결손적인 요소를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또 가정들이 불화화게 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며느리를 얻으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특히 며느리와 시부모와의 갈등은 전체 가정들이 모두 겪고 있는 아픔입니다. 이 문제는 서양의 가정들도 모두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 며느리의 문제는 갈등을 내포한 채 삶이 시작됩니다. 새 가족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렐만한 기쁨의 일인데도 양가정의 독특한 문화가 극복도지 못하고 시부모라는 고질적인 문화가 극복되지 못해서 자녀가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이 갈등이 문제는 시작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좋은 경우와 바쁜 경우를 이렇게 비교해서 그 원인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듣고 자신의 가정환경과 그리고 지금 처해진 여러분의 처지에서 한번 깊이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시어머니가 미울 경우입니다.
이런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눈에 밉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시어머니들은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빼 놓고 아들과 소곤소곤 상의할 때, 세 며느리 중 한 며느리만 편애하고 사랑할 때, 당신의 구세대적 사고방식만을 막무가내로 고집할 때, 용돈을 주고 보약을 해 드리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을 때, 며느리가 시집살이 때문에 살이 빠졌는데도 아들에게만 얼굴에 살이 빠졌다고 할 때, 아들집에 오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는 시어머니, 이런 경우가 며느리들이 볼 때 시어머니가 싫어질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감이 됩니까. 아주 하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이 관계를 악화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들입니다.
다음은 시어머니 눈에 며느리가 미울 때입니다.
이런 때 며느리가 밉습니다. 여러분들 중 며느리들은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빈손으로 왔을 때, 늙은 시어미를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릴 때, 시어머니의 생일을 모르고 그냥 지나갈 때,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돈 줌 번다고 시어미가 하는 살림을 간섭할 때, 휴가 갈 때 자기들만 갈 때, 직장 다니는 며느리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그냥 놔둘 때, 며느리가 아들인 남편을 종 부려먹듯 할 때, 이때 시어머니의 눈에서 열불이 난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생각이 모자라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는 시어머니가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며느리들에게도 시어머니가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시어머니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에게 “피곤하지 열심히 해라”하고 격려할 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앉아서 남편들 흉볼 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장난칠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함께 상의해 줄 때, 며느리 생일날 조금이라도 용돈을 줄 때, 아이 키우느라고 수고한다 하면서 우유 값을 주실 때 등입니다. 이런 경우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고마움과 친근감을 느끼며 마음으로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닙니다. 며느리들은 격려와 칭찬이면 다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어머니들에게는 이런 아량도 없고 조그만 용돈 줄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서로 마음 불편하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며느리가 예쁘게 보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예쁘게 보입니다. 며느리들은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 그 짐을 받아줄 때, 시어미를 엄마같이 대해 줄때, 때때로 “어머님 고맙습니다”하고 카드를 보내줄 때, 시어머니에게 검소한 며느리, 둘이 잘 살아가는 며느리 등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선 별 것도 아니라는 생각부터 듭니다. 힘들 것도 없습니다.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서로 열리지 않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좋은 관계가 평생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부모나 자식이나 한 가지를 꼭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식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부모는 하나님이 맺어준 특수한 관계라는 것과 부모에게 잘 하는 것이 결국 내가 복을 받고 살아가는 가장 큰 비결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의 젊은 부부들은 이 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만 살면 행복한 줄 알고 늙은 부모를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살면 결국 내가 늙었을 때는 내 아이들도 나에게 그렇게 합니다. 심은 그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옛날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늙은 어머니를 밥만 축낸다고 산속에 버리려고 지게에 지고 갔습니다. 산속에 어머니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니까 아이가 “할머니 어디다 두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산에 버리고 왔다”고 하니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지게 잘 보관하세요” “왜 그러느냐” “잘 보관해야 나도 그 지게로 이 다음 아버지 늙으면 갔다 버릴 것 아닙니까”하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무 소리 못하고 다시 가서 어머니를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은 강조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그래야 내가 또 자식으로부터 그런 즐거움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부모의 입장입니다.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도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들에게는 이 생각이 부족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며느리가 아니고 딸입니다. 내 자식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고 며느리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식구들 끼리 이야기 하다가도 며느리가 들어오면 말을 그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들 앞에서 한 며느리 흉을 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쓸데없는 고집을 피웁니다. 며느리가 해 주는 일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아들하고만 속닥속닥합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상의하는데 며느리를 소외시킵니다. 시부모가 그렇게 처신하면 오늘 며느리들은 모두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런 모습을 그냥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가 한번 두 번 쌓이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치유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모든 문제는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은 부모에게 즐겁게 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관계의 조화는 피차가 노력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피차가 복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무엇이 더 소중한 일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효자 축복
성경본문 잠23장 22절 ~ 25절>출 처| 최성규목사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을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진리를 사고
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 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
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
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어버이날은 우리를 위해 피
와 땀과 눈물을 흘리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어버이날
뿐 아니라, 매일매일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순복음인천교회에서는 효를 실천
하기 위해 2000년 1월 1일부터 “믿는 자천국, 효자 축복”이라고 외쳐왔습니
다. “믿는 자 천국, 효자 축복”은 단순한 구호나 인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자, 성경적 효의 약속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적 효는 한국적 효나, 유교적 효, 불교적 효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효라고 하면 유교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효의 원조는 성경
입니다. 하나님은 공자가 태어나기 약 1천 년 전에 모세에게 ꡔ네 부모를 공경
하라ꡕ(출 20:12)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하
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성경적 효입니다.하나님 아버지는 성경적
효를 실천하는 효자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경적 효자에게 내리시는 복을 알아봄으로, 성경
적 효자가 받는 복을 받고 그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신앙의 복
신앙의 복은 성경적 효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아무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
리는 교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요 6:65). 신앙의 복을 받은 성경적 효자만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부를 수 있습니다. ꡔ너희가 아들
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
게 하셨느니라ꡕ(갈 4:6). 또한 누구에게나 성경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적 효자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
습니다(마 13:15-16). 뿐만 아니라, 성경적 효자는 성령에 순종함으로 말씀실
천의 복도 누립니다. 예수님은 ꡔ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ꡕ(눅11:28)
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라면, 행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성경적 효자가 누리는 더 큰 축복은 신앙의 복이 자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입니
다. 예수 안에서 모든 저주는 끊어지고, 신앙의 복은 전수됩니다(딤후 1: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나와 내 자녀의 하
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성경적 효가정을 이루어 신앙전수의 축복을
누리며 삽시다. ꡔ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
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ꡕ(시 128:5-6).
둘째, 형통의 복
만사형통은 인간관계의 형통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너,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이웃과 이웃, 성도와 성도간에 관계가 형통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
장 근본이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부모에게 효하
는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형통합니다. 성경은 ꡔ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
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ꡕ(엡 6:2-3)리라고 약속
합니다. 이삭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거부가 된 것은 효도했기 때문입니다. 이삭
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함으로, 어디를 가든지
형통하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ꡔ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
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
부가 되어ꡕ(창 26:12-13). 이처럼 효를 행하면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나라
와 민족도 형통하게 됩니다. 에스더가 자신을 키워준 삼촌 모르드개의 말에 순
종했을 때, 위기에 빠진 유대민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에 2:7; 4:14; 9:1-
5).
셋째, 장수의 복
효자는 장수의 복을 누립니다. 성경은 ꡔ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
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ꡕ(출 20:12)고 약속하십니
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산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건강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
게 장수할 수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는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ꡔ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
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ꡕ(마 15:4). 그
러므로 우리 가정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불효를 눈감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불효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입니다.
ꡔ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내가 너의 중에 악을 제
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ꡕ(신 21:21).우리는 불효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효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하
루 속히 효도법을 제정하고, 효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효자가 되
고, 우리의 가정이 효가정이 되며, 우리의 마을이 효마을이 되고, 우리의 도시
가 효도시가 되며, 우리의 국가가 효국가가 될 때, 아동학대와 홀몸노인과 청
소년 문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넷째, 자손의 복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효자 집에서 효자가 나
옵니다. 효부 롯의 가문에서 효자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효자이신 스승 예수님
을 본받아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효자로 크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레갑 족속이 하나님께 복 받은 것
은 순종의 효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농사를
짓지 말며, 포도원을 재배하지 말고, 천막생활을 하라”는 선조 요나답의 명령
을 300여 년 동안 기억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ꡔ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
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
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ꡕ(렘
35:18-19)고 축복하셨습니다.
반면에, 효가 없는 부와 권세와 지식은 자녀를 망치고, 부모까지 실패자로 만
듭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부와 권세와 지식은 있었지만 효가 없었기
때문에 불량자가 되었습니다(삼상 2:12).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저지
른 죄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엘리 제
사장까지 죽게 했습니다(삼상 4:10-18).
자손 천대까지 자녀들이 복 받기 원한다면 효의 가문이 되어야 합니다. 효가
있는 가정은 자녀 때문에 “크게” 즐겁고 행복합니다. ꡔ의인의 아비는 크
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ꡕ(잠 23:24-25).
효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존귀하게 대
해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ꡔ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
히 여기지 말지니라ꡕ(잠 23:22)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삼으신 효를 행합시다. 우리가 효를 행하면 가정이 행복하고, 학
교교육이 잘 되며,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살며, 나라가 삽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믿는 자 천국, 효자 축복”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님처럼 하나님께 효자, 부모님께 효자 되어서 신앙천대, 자손천대, 축복천대
의 복을 누리게 해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버이의 즐거움
성경본문 잠23장 19절 ~ 25절>출 처| 곽선희목사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 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 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 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 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 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 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 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세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 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 없는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 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한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 음을 짓고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 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 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 에 다 소개하지는 않습니다만은
"A Father's Prayer"
by MacArthur 라 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Build me a son"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 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 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 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 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아주 유 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 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 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
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 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 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 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 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 입니다.
한국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 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 엇인가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한 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 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 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 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 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 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 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 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 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 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 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 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은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 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 다.
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 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 히 마음을,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야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 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째가 뭐냐 하면은 어떤 일이든지 아 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 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 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 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 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 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 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 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외 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 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 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 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 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 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 니다. 이제 이 분의 마음속에 슬픔 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 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 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 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 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며 칠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 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갔으면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 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 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 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 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 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 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 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 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 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 지요. 그래 옛날에는 과거를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 하면 효자요, 허구헌 날 낙방하면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 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 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 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 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 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아들 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 요."
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 면은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 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부모님 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 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 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 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 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 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 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 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 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번 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 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 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 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 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 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 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
"그 때에 그 어 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 여라."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
"너는 효자다."
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 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
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 님이여, 그놈을 불효자랍니다. 효도 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 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 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 습니다."
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주라."
그랬어요.
"흉내 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
결국 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 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 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 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 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 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 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 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 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 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 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 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 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 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 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
"양로원 에 보내야 됩니다."
그게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 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 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 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 적으로 25%입니다만은 한국만은 아 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 국가입니다. 그 래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 는 오래 살겠다고 보약을 먹고 운동 을 하고 발광을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잊지마세요. 성경은 오래 사는 비결 오직 딱 하나 가르쳐 줬 어요. 그것은 효도하라 그랬어요. 부모 박대하면서 오래 살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비성서적이요. 사업 에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부모님 마음 슬프게 하면서 사업 잘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40년 목회 하면서 수없이 보아왔습 니다. 오래 사는 집, 거기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아주 성공 한 사람은 비록 잘못도 많지만은 그 분은 효자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불효하면서 잘 되고, 불효하 면서 건강하고, 불효하면서 오래 살 고…… 기대하지 마세요. 효가 장 수와 형통에 철저한 비결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제가 뉴욕 에 갔을 때에 제가 잘 아는 친구 분 이 계세요. 거기에 한번 오랜만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어머니가 계세요. 제가 이 서 울에 있을 때에 그 분, 그 어머니를 가까이 지났거든요. 잘 아는 터이 라서 가자마자 어머니 어디계시냐고 그러니까 아 저 골방에 계신데 뵙지 말라고, 냄새나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 는 동안에 어머니가 자꾸 보고싶어 서 문을 열어요. 문을 여니까 또, 가서
"어머니 가만히 계세요."
문을 꽝 닫잖아요. 그걸 내가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웬만하면 내가 분위기를 위해서 그 냥 있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뵜더 니요, 그 어머니가요 얼마나 슬피 우는지요. 내가 곽목사님 온다는 말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못 만나게 했다고…… 그러면 서 우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여러 분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 요. 구제 대상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 가 존중해야되요. 어느 사람은 논 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스 라엘 나라가 강한 이유? 오직 하 나,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기 때문이 요. 그리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겨 무슨 말하다가도
"이거는 조상 적부 터 내려오는 전승이요, Tradition"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 에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롭다 는 것이에요.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 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 야 하는 거예요. 의롭게 살아야 됩 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이 잔소리가 많고 그들이 간섭 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다 그 깊은 곳에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나 는 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는 선하 라.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했다 너 만은 좀 열심히 해다오."
보상적 심 리가 있어요. 또 나는 의롭지 못했 다 그러나 너는 의로워야 한다는 거 예요.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은 언 제나 선한 것이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 조 금은 지나칠 때도 있어요. 말씀은 다 안하고 있지만은 그런 후회가 많 아요. 과거의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랬다만은 너는 제발 이래다 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요. 그 런고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야 한 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오늘 20절로부터 보면 은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마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되요. 청종하는 지 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잘 믿는 것, 그리 스도인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효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소원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신앙생활 잘해서 영생의 기업 을 얻으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서 모든 일에 실수없이 행하면 부 모님께 직접적으로 효도하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 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 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 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 다고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 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 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 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 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 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 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 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 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 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 고……"
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 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 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 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 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 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 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 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 다."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 니다."
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 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
자 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 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 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 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 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 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 하려 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 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 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 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 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 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 은 없어요. 그런고로 부모님을 즐 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 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