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서울 한복판에 시간의 숨결을 머금은 건축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백여 년 전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의 근대 건물들은 서양과 한국 전통이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울의 기억 속을 걷는 여행을 시작해보자.
다채로운 건축양식을 담은 고종의 서재 - 집옥재
조선시대에 지은 5개 궁궐 중 첫 번째 건축물인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렇듯 슬픈 역사가 반복된 경복궁 안에 다른 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공간이 숨어 있다. 바로 집옥재다. 경복궁의 건천궁 안, 북문인 신무문 가까이에 자리한 집옥재는 본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으나 1891년에 고종이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오며 집옥재는 고종 황제의 서재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서재이기도 했지만 어진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기록을 보면 고종 30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러시아 공사 등 외교 사절을 5회나 맞이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유독 화려하고 건축물의 형태 역시 독특해 보는 내내 고종이 이곳을 왜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집옥재는 각기 다른 형태의 팔우당과 협길당을 양쪽에 끼고 있으며, 세 채의 건물은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건물마다 구조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 특징이다. 팔우당은 고종 황제의 개인 도서관으로 세 채의 건축물 중 가장 중국의 건축양식에 가깝다. 연꽃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민 외부는 물론 팔각의 2층 건물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 고종이 팔우당을 지을 때 중국 장인을 불러와 지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된 바는 없다. 독특한 것은 집옥재도 마찬가지. 빨간 벽돌로 지은 이곳 역시 2층 다락 구조로 되어 있으며, 팔우당과 함께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다. 팔우당에 정확히 몇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집옥재에만 4만여 권의 장서를 보관했던 것으로 보아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거라 짐작한다. 집옥재의 가장 큰 특징은 뒷모습에서 발견된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면서도 좌우 벽체와 뒷벽까지 적황색 벽돌로 쌓았고, 벽의 창은 중국풍의 만월창과 반월창으로 마무리 했다. 그 옆, 맨 오른쪽에 자리한 협길당은 또 다르다. 세 채 중에서 우리나라 궁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협길당 뒤편 굴뚝을 보면 이곳만 유일하게 장판 온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종이 여름엔 팔우정과 협길당, 겨울엔 협길당에서 지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치던 집옥재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조용히 집옥재의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와 새로운 궁의 모습을 발견하며 나의 기억 속 또 다른 경복궁의 모습을 그려본다.
관람료 : 18세 이하 무료, 성인(19~64세) 3천원.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1~2월, 11~12월), 오전 9시~오후 6시(3~5월, 9~10월), 오전 9시~오후 6시 30분(6~8월)(매주 화요일 휴관) 안내 : 평일·토요일 오전 11시~오후 4시까지 1시간 간격(11~2월은 오후 3시 30분까지), 일요일 10시·12시·12시 30분~오후 2시 30분까지 1시간 간격 가는 방법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경복궁박물관 오른쪽으로 5분 거리
1 (왼쪽부터) 팔우당, 집옥재, 협길당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각기 다른 분위기의 건물들이 이색적이다. 2 우리나라 궁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협길당. 3 집옥재에 아궁이가 있지만 대청과 마루 둘레에는 구들을 깔았다고 전해진다. 4 뒤란에서 바라본 집옥재의 모습. 빨간 벽에 만월창이 아름답다. 5 세 채의 건물 중 유일하게 협길당 지붕에서만 잡동사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6 빨간 벽돌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집옥재의 옆모습. 그 옆으로 협길당과 이어지는 복도각이 보인다. 7 중국의 건축양식이 가장 많이 보이는 팔우정과 집옥재와 연결된 복도각. 팔우정의 유리창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왕비의 처소 - 통명전
성종이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효심으로 빚은 궁궐 창경궁. 그런 만큼 독립된 궁궐로서의 지위보다는 창덕궁의 보조적 성격이 강하며, 생활공간인 내전의 비중이 큰 것이 창경궁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곳이 단순히 여성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사를 집행할 수 있는 여러 전당이 속속 들어서면서 여러 임금이 이곳을 거쳐하며 나라를 이끌었다. 우리나라 궁궐 중 아픈 역사를 겪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특히 창경궁은 그 상처가 매우 깊은 곳이다.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고 중건하기를 반복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궁의 역사를 이어가다 일제강점기에 끝내 왕궁의 위엄과 기능마저 잃어버린다. 창경궁이란 이름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되고, 1천여 년 된 전각은 훼절되었으며, 왕과 왕비가 머물던 공간은 동물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창경원’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나 본래의 위대한 위용을 찾으려면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야 할 것이다. 창경궁은 다른 궁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가장 화려하고 핵심인 곳이 명정전이기에 그 가치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작은 건물 하나에도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은 깃들어 있다. 통명전 또한 그렇다. 언뜻 보기에는 다른 전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지붕에는 기와를 쌓아 낮은 담장처럼 마감하는 용마루가 달려 있는데, 통명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이다. 이곳이 왕과 왕비가 동침하던 왕비의 침전이기 때문이다. 왜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는 걸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은 곧 용이므로, 용이 깃들어 다음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용이 위에서 이를 내리누르면 안 되므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암투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해 저주를 담은 흉물을 묻은 그 유명한 장희빈 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왕비의 침소로 이용된 곳인 만큼 통명전은 매우 아름답다. 임금이 혹여 왕비가 심심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주변을 가꾼 까닭에서다. 서쪽 마당에는 샘이 있고, 남쪽에는 정교한 돌난간을 두른 조그만 연못이 있다. 연못 중앙에는 아치형 돌다리가 설치되어 연못 위를 걸을 수 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장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말을 인용해 역사를 안 뒤 새로운 시각으로 문화재를 보게 되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느 궁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전각인 줄 알았던 통명전은 어느새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와 있었다.
관람료 : 1천원(만 18세 미만, 만 65세 이상 무료)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30분(2~5월, 9~10월 오전 9시~오후 6시, 11월~1일, 오전 9시~오후 4시 30분, 월요일 휴관) 안내 : 평일 오전 10시 30분~오후 4시 30분까지 1시간 간격(11~2월은 오후 4시까지) 가는 방법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에서 300m 직진 후 횡단보도 건너 왼쪽 길로 300m 직진
1 연못과 돌다리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 용 대신 장군이 왕비의 처소를 지키고 서있다. 3 언덕 위로 올라서면 통명전 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 가운데 세 칸이 개방돼 있는 시원한 구조다. 4 통명전은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지붕이다.
근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 중명전
갈 곳도, 볼 것도 많은 곳이라서인지 서울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청역 주변.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기품 있는 커다란 입구가 눈에 띈다. 직장인들이 많은 곳인지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Beautiful!’을 연발하게 하는 이곳은 덕수궁. 유행가 가사 덕분에 그 옆의 돌담길은 로맨틱한 추억의 장소로 꼽히고 있어 유명하다. 하지만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덕수궁과는 달리 돌담길을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야 보이는 중명전은 이곳이 덕수궁의 일부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사이에는 미국 대사관저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의 궁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긴 했지만 이것은 덕수궁이 최근까지도 수난이 거듭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의 미국 대사관저 자리인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는 1986년에 미국 대사관 측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은 원래 황실 도서관이었는데 덕수궁이 불타면서 고종의 편전이자 외국 사절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을 돌다 보면 정관헌, 석조전 같은 서양식 건물들이 눈에 띄는데 중명전 또한 현대적인 외관이 특징이다. 이는 러시아인인 사바친이 설계하기도 했지만 근대문물 수용에 관심을 가졌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명전은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건축물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하고, 이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들을 파견하기도 한 곳이며, 화재로 원래 모습을 많이 잃고 재건을 거듭해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게다가 왕이 계시던 이곳이 외국인의 사교 클럽으로 쓰이기도 했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었다가 다시 민간에 매각되기를 거듭하다 1983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동극장이 매입한 것을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일이고, 2007년에 덕수궁에 편입되었으며, 2010년에야 복원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니 그동안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원래의 덕수궁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중명전이 간직한 우리의 역사만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관람료 : 무료(덕수궁은 대인 1천원, 만 7세 이상 5백원)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5시(덕수궁은 오전 9시~오후 9시, 월요일 휴관) 안내 : 평일 오후 1~4시 1시간 간격, 토·일요일 오전 10~오후 4시 1시간 간격(인터넷 사전 예약 필수) 가는 방법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12번 출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광화문역 6번 출구 정동극장 옆길(덕수궁은 시청역 1·12번 출구)
1 중명전 외관. 우리의 전통적인 궁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2·3 러시아인인 사바친이 설계해 서양식 요소들이 특징이다. 4 중명전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관. 화려한 샹들리에와 벽난로가 눈에 띈다. 5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내부 복도. 이국적인 타일 바닥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