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국가 재정과 전라도와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소개하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순조 15년 10월 12일 기사
전라 감사 김계온(金啓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가 쓰는 재부(財賦)의 태반을 호남에 책임을 지우고 있는데, 그 호남이 호남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기사년(1809) 과 경오년(1810) 이후로는 피폐하여 잔패(殘敗)되었습니다. 이들 연해의 고을들은 7년 사이에 거의 전부 해마다 분등(分等)이 가장 우심한 곳에 들게 되었으니, 이처럼 흉년이 특히 심한데, 사망한 자가 또한 어찌 더욱 많지 않겠습니까? 혹 1백 호에 2, 3호가 남기도 하고 혹은 5, 60호에 3, 4호가 남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한 면(面) 전체가 10호도 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이들 2, 3호나 3, 4호 또는 10호 미만이 1백 호 내지 5, 60호 또는 한 면 전체의 부역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 따져보면 이들도 곧 도망쳐 버릴 것입니다. 고을마다 분수(分數)가 대개 모두 그러합니다.
그리고 군오(軍伍)에 대하여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숫자를 수괄(收括)하여 보면, 원안(元案) 1천 명 중에 다행한 곳은 절반쯤 남아 있고 불행한 곳은 그 3분의 2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군오를 현재의 호구 숫자와 비교하여 볼 때, 양반과 상민을 모두 수괄하여 사모(私募)는 태거(汰去)하고 호포(戶布)와 구전(口錢)만을 곧장 실행하더라도, 오히려 반에도 못미칠 형편입니다.
기사년·경오년 이전에는 호구가 번식하여 떼를 지어 살고 있었으므로, 기렴(箕斂)한 것이 파속(把束)에도 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금을 물었기 때문에 그래도 편히 살 수 있었는데, 기사년·경오년 이후로는 진전(陳田)은 고사하고 옥토(沃土)마저 황폐해졌습니다. 경오년 가을에 도신의 소청(疏請)에 따라 비록 당년의 3천여 결을 탕감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단지 당년에만 조금 힘을 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 뒤 7년 동안에 옛 진전을 개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신결(新結)마저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나주의 시랑(侍郞) 등 5개 면, 영광의 홍농(弘農) 등 8개 면, 무안의 진례(進禮) 등 4개 면은 진전 이외에는 모조리 기름진 들판인데도, 기사년·경오년에 백성들이 흩어진 뒤로는 이 조세에 겁을 내어 감히 다시 모여들지 못할 뿐 아니라, 남아 있는 자마저 또한 해마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지난해 이후로는 거의 땅이 비어 완전 황폐하여 버렸으며, 나머지 7, 8읍도 모두 비슷합니다. 그러면 형편상 장차 그 세금을 다른 면에 옮겨서 거두어야 할 판인데, 그 다른 면들마저 앞의 면들처럼 버티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기사년·경오년 이후로 아직 군오를 첨대(簽代)하지 못한 것은 어느 고을이나 마찬가지여서 전 주로 보더라도 아직 수천 명이나 되니, 첨대하지 못한 숫자는 모두 이웃과 친족이 부담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목화가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는데도 언제나 겨울철에 번포(番布)를 독려하여 징수하니, 고통을 못이겨 집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가 드디어 쓰러져 죽어서 구덩이를 메웁니다. 이것은 본래 온 도 전체가 겪는 폐단이지만 연해의 고을이 더욱 심합니다. 지금 만약 인정(人丁)을 수괄하여 정액(定額)을 채우려 한다면 아무리 온 고을 전체의 모든 호구를 뒤져서 삼반 관속(三班官屬) ·유생(儒生)·향임(鄕任)까지 모조리 긁어모으더라도 오히려 충당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장차 한 집이 열 집의 군역을 감당하고 한 사람이 백 사람의 일을 겸하여야 할 판이니, 이러고 백성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 위에 어세(漁稅)를 마구 거두고, 환곡의 포흠(逋欠)이 쌓이며, 호역(戶役)을 대신 부담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무릇 이름만 있고 주인이 없으니, 이웃이나 친척에게서 당장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 가지 일에만 그치겠습니까만,
위에 말한 폐전(廢田)이나 허오(虛伍)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별것 아닙니다. 정공(正供)은 토지에서 나와야 하고 경용(經用)은 나라에 바쳐야 하는데, 누가 감히 이에 대한 증감을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백성들은 날로 흩어지고 들판은 날로 황폐하여 갑니다. 다른 고을은 조금 덜하다 하더라도, 연해의 고을은 언제나 흉년을 못 면하여 존망(存亡)의 기미가 곧바로 호발(毫髮)을 용납하지 못할 형편인데도, 아직도 감히 의도(議到)할 수 없다고 핑계만 대면서 우두커니 보고만 있겠습니까?
오직 이 연해의 고을에 흩어져 있는 진전이 비록 그 실제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잘 모릅니다마는, 지금 만약 별도로 조사하여 그 실제의 숫자를 파악해서, 우선 5년 기한으로 감세를 허락하고, 이어서 각 해당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불러 모아 진전이 가장 많은 면(面)과 리(里)에 거주하게 하고 개간 초기에는 정한 법식에 따라 세금은 면제하며, 개간이 다 된 뒤에는 차츰 실결(實結)로 환원하되, 개간을 권장하는 데 부지런하고 게으른가를 상고해서 그 수령의 출척(黜陟)을 논한다면, 6, 7년이 못가서 백성들은 다시 모여들 것이고 토지는 다시 농사지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 사소한 진전을 당장 감면하여 장래의 저 많은 옥토를 개간하게 한다면, 실결(實結)이 점점 늘어나서 마침내 모든 허세(虛稅)가 다 실결에 들어오게 될 것이니, 이것이 결국 나라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올해는 그래도 남은 백성이 있으니, 연해 고을의 재결(災結)이 아직은 절반에서 3분의 2 사이였지만, 허세가 옛날 같다면 내년의 진전이 어찌 금년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면전(綿田)에 대한 급재(給災)는 본래 상법(常法)인데도 유독 호남만이 관례가 없어서 면전의 백지 징세(白地徵稅)가 또한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올해에도 약간의 진전을 감하여 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도의 표급(俵給)한 면재(綿災)의 예에 불과합니다. 연해 고을의 존망이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어떻게 상례(常例)만 가지고 논한단 말입니까? 고오(故伍)의 숫자에 대해서는 아직 고을마다 실지 조사하여 첨대하지는 못했지만, 그 해의 번포를 그 해에 책임지운다면 어찌 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남아 있는 백성들도 위에서 아뢴 바와 같이 장차 모조리 흩어질 것이니, 연해 고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골 읍인 운봉(雲峰)이나 야읍(野邑)인 장성(長城)·능주(綾州)도 호구와 인정을 대조해 보면 그 반수도 감당할 수 없는 곳들입니다. 이런 곳들과 함께 연읍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실수(實數)를 알아내고, 경안(京案)에 붙여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데 대해서는, 금년에는 3분의 2를 감포(減布)하되, 첨대하는 방법으로는 3년을 한도로 해서, 금년에는 3분의 1만 메우고 명년에 다시 그 1분을 메우되, 그 다음해에 3분의 1의 포(布)는 감하여 주고, 또 그 다음해에 가서 비로소 모두 메워서 전부 거두어 들이면 됩니다. 만약 그 3분의 1 중에도 금년에 메워 넣을 수 없는 것과, 향안(鄕案)에 붙여 도내(道內)에서 수포(收布)하는 것에 대하여 저번에 진여곡(賑餘穀)을 나누어 준 것은 사실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으로써 취모(取耗)한다면 그런대로 조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소를 묘당에 내려서 즉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였는데, 소사(疏辭)에 대하여 묘당에서 품처하라고 비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