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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사찰사진순례 스크랩 칠현산 칠장사
인덕당 추천 0 조회 57 11.04.24 15: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절집입니다. 멀리는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궁예가 어린 시절에 활쏘기를 연마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때 혜소국사가 주변의 일곱 도적을 신통력과 감화로 도를 닦게 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본래는 아미산이었던 칠장사 뒷산을 칠현산으로 고쳐 부르고 절 이름도 칠장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혜소국사의 신통력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조선 시대 의적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물던 곳이라는 소설의 내용도 칠장사를 품어 안고 있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청렴결백한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린 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기도처로 인근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절집답게 칠장사는 볼거리도 많이 있습니다.
입구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갖춘 철당간이며,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은 진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천왕상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빛바랜 단청이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합니다. 대웅전 뒷편에 있는 꽃창살문도 빼놓지 않고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나한전에는 혜소국사에 의해 현인이 되었다는 일곱 도적을 형상화한 나한들이 모셔져 있는데, 나한들 앞에 놓인 과자와 사탕 봉지들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비신과 귀부와 이수가 분리된 혜소국사비 역시 칠장사에서 빼놓을 수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칠장사 부도밭
칠장사 입구에 14기의 석종형부도가 일렬로 줄지어 서있는 모습입니다. 부도는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들 석종형 부도는 방형이나 원형, 팔각형 지대석 위에 종형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형태와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부도들은 표면에 다른 특징은 없으나 고승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고 상단부는 일률적으로 보주를 장식한 모습입니다.

칠장사 철당간
칠장사 입구의 부도밭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좌측에 솟을 듯이 높이 서있는 철당간을 보게 됩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칠장사 철당간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철당간입니다. 당간지주와 철당간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 중세서 제가 본 것은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 속리산 법주사의 철당간, 그리고 청주시내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 정도인 것같습니다.
칠장사 철당간은 현재 14층의 철제 원통 당간지주가 남아 높이 11.5m에 이르고 있지만 원래는 철통이 28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철통 28개가 다 남아 있었다면 높이 20m가 넘는 거대한 철당간의 위용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이곳에 철당간이 세워지게 된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 일대가 배의 형국이라 중앙에 돛대의 역할을 하는 철당간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칠장사 당간지주
당간을 고정시키는 지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나 글이 보이지 않는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지주와 지주 사이 아랫부분에는 구명이 있어 당간을 꽂아 둘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주 사이에 세워지는 당간은 본래 절에서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당(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하며, 당간을 고정하고 지탱하는 것이 당간지주입니다.

칠장사 사적비
칠장사 철당간 뒤에는 칠장사 사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칠장사 사적비에는 칠장사의 창건과 중수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신의 기록에 의하면 칠장사 사적비는 조선 현종 12년인 1671년에 만들어진 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제 보호대가 있어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 문을 열고자 했으나 보호대 문이 열리지 않아 조금 아쉬웠습니다.
사적비는 높이 223cm에 폭 106cm, 두께 28cm로 자연석을 고르게 다듬어 만들었으며, 윗부분은 둥근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안명노가 지었고, 이석징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제 철당간과 사적비를 보았으니 칠장사로 갑니다. 절집 앞에 있는 상가 몇 채를 지나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좌측으로 천왕문을 통해 칠장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칠장사 천왕문
칠장사 천왕문은 조선 영조 2년(1726)에 건립된 것으로 천왕문 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소조 사천왕상이 있습니다. 소조 사천왕상은 진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흙으로 거대한 사천왕상을 만든 것도 신기하거니와 섬세한 묘사와 옷자락까지 표현된 사천왕상 중에서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칠장사 사천왕 서방광목천왕과 북방다문천왕

칠장사 사천왕상은 진흙으로 만든 사천왕상들입니다. 진흙을 빚어서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사천왕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발로 악귀들을 짓누르고 있는 사천왕상들은 화려하게 채색된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으며, 두 눈을 부릅뜨고 제석천의 명을 받아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칠장사 사천왕 동방지국천왕과 남방증장천왕

칠장사 사천왕들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사천왕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는 천왕문이 만들어진 영조 2년(1726)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소 채색이 바래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가 손상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사천왕으로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칠장사 원통전

칠장사 원통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중에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영조 원년(1725)에 선전. 두한 스님이 처음 짓고, 다음해에 윤영, 처휘 스님이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합니다.



칠장사 원통전 관음보살상

관음보살은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로 보타낙가산에 머물며 세간의 소리를 다 살펴보신다 하여 관세음보살로 불리기도 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재롭게 바라보고 보살핀다는 뜻으로 관자재보살 등으로 불립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으며 칠장사의 경우처럼 단독으로 모셔지기도 합니다. 관음보살이 주존이 될 경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하기도 합니다. 칠장사의 경우는 관음보살의 협시보살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요사채인 음향각에서 바라본 칠장사 대웅전과 원통전의 모습 대웅전 오른쪽에는 봉업사지에서 가져온 석불입상의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칠장사 대웅전
빛바랜 단청으로 인해 고풍스런 모습을 더욱 잘 간직하고 있는 칠장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과 화재로 중창과 중수를 거듭하다가 현재의 건물은 탄명스님이 숙종 29년(1703)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종 14년(1877)에 다시 한번 중건되었다. 대웅전 옆에는 봉업사지에서 발견된 석불입상이 보살 한 분과 벗삼아 대웅전 옆을 지키고 계신 모습도 볼 수 있다.
칠장사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공포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포가 2개씩 배열되어 있다. 전면에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 기법이 가미되었으며, 측면의 기둥은 굵기가 서로 다른 기둥을 사용하고 그 중 한 개의 기둥은 제대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맞배지붕이 풍기는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멋을 풍기는 건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 대웅전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대웅전 내의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보살, 탱화들을 사진에 담고자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고 서성였으나 스님의 독경과 기도가 너무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문 밖에서 겨우 석가모니불만 사진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칠장사 대웅전 내부
스님이 참으로 오랫동안 독경과 기도를 계속하셨습니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다른 전각들을 둘러보고 와도 또 그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물론 법당 앞에는 '내부 사진 촬영 금지'라는 글씨를 보았지만 사진에 담고 싶은 욕심에 오래 기다려 보았으나 결국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사진에 담지 못하고 문밖에서 아쉬운 대로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사진에 담았으나 내부가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 것같습니다.

칠장사 대웅전 뒤 꽃창살문
나한전과 혜소국사비를 돌아보고 내려오던 길에 대웅전 뒷쪽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웅전 뒤에 문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제법 절집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대웅전 뒤에 따로 문을 만든 예는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산 통도사의 경우 대웅전 뒤쪽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큰 창을 내어 금강계단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경우는 보았지만 대웅전 뒤로 예배 대상이 없음에도 문을 낸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로 보입니다.

대웅전 뒷문이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스님에게 여쭤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중에 칠장사를 소개하는 문화해설사를 법당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그 분에게 물어보니 대웅전 뒤쪽으로 이렇듯 문을 낸 연유를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궁금증을 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웅전 문창살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국화문양으로 보이는데, 조각 솜씨와 그 옛스러움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해설사의 이야기에 의하면 문화재청에서도 꽃살문을 답사하고 갔다고 합니다. 꽃살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칠장사 삼층석탑
대웅전 앞에는 조촐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1층 탑신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고 각 면마다 다른 조각이나 새김이 없는 단순한 탑으로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칠장사를 전하는 안내문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랜 세월을 칠장사와 함께한 석탑은 아닌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부도 본래의 것이 아닌 듯 보인다. 새로 만든 기단이 너무 작고 옹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층 탑신에 비해 2,3층은 급격히 비례가 줄어들어 조금 어색한 느낌이며, 1층 탑신에는 문비 이외에는 별다른 새김이 없는 단순한 형태이다. 상륜부 역시 모두 남아 있지 않다. 특히 각 층의 탑신 두께가 일정치 않고 줄어듬이 급격한 것으로 보아 본래 원형이 아닌 다른 탑재들을 모아서 탑을 새로 세운 것은 아닌 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봉업사지 석불입상
칠장사 대웅전 바로 옆에는 한 눈에 보더라도 균형미를 갖춘 석불입상과 소담한 좌불 한 기가 놓여 있습니다. 석불입상은 본래 죽산에 있는 봉업사터에 있었던 불상이라고 합니다. 절이 폐사되고 난 후 석불입상은 인근에 있는 죽산중고등학교 운동장에 다시 세워졌다가 보관에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자리인 칠장사 대웅전 옆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봉업사지 석불입상은 얼굴 부분이 마모가 심하여 눈, 코, 입의 형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다른 부분의 조각은 대체적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모습입니다. 불신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과 신광이 이어진 채로 발아래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광에는 3구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조각 수법이 매우 우수하고 섬세하여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봉업사지 석불입상과 보살상

봉업사지 석불입상 옆에는 말동무를 하기 위함인지 작고 소담한 좌불 한 기가 같이 모셔져 있습니다. 좌불은 통통한 얼굴에 관을 쓴 모습이 보살상으로 보입니다. 보살의 형태와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나 안내문이 없어 정확한 보살의 의미는 알 수가 없습니다.

 

칠장사 명부전
칠장사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작은 전각이 명부전입니다. 명부전은 고통받는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신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1726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좌우 협시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그 좌우로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한 스님이 참으로 오랫동안 기도를 하시고 계셔서 한 참을 기다리며 사진 찍을 기회를 보았으나 결국 내부 사진은 찍지 못햇습니다.

칠장사 외벽의 벽화(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현인을 이끈다는 내용의 그림)
칠장사 명부전 외벽에는 다른 절집과는 다른 벽화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칠장사에 이야기로 혜소국사가 주위의 일곱 도적을 감화시켜서 도를 이루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의적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물던 곳이 이곳 칠장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갖바치가 죽은 후에 병해대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꺽정과 갖바치에 관한 이야기도 벽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후에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는 궁예와의 관련성도 있는 절집이 칠장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명부전 외벽에는 임꺽정과 병해대사(갖바치), 해소국사와 일곱도적, 궁예에 관한 그림이 삼면에 가득 그려져 있습니다.

칠장사 외벽의 벽화(궁예가 어린 시절 활쏘기를 연마하고 있는 그림)

칠장사 나한전 내부

정중앙에 계신 분은 부처님이고 부처님 좌우로 나한들이 보입니다. 이들 나한들은 헤소국사의 신통력에 감화되어 도를 닦아 현인이 되었다는 일곱 도적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한들 앞에 놓인 과자와 사탕들은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 이후에 사람들이 소원성취와 자식들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면서 갖다 놓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안 출신의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에 칠장사에 잠시 머물러 어머니가 싸주신 유과를 앞에 놓고 기원을 드린 후에 과거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칠장사 나한전을 찾아와서 나한들 앞에 과자와 사탕 등을 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칠장사 혜소국사 비각
비각 안에 차례로 비신과 귀부, 이수가 놓여져 있습니다. 탑비가 흩어지게 된 것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첫째는 임진왜란 때 이곳을 침략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무례한 짓을 하자 한 노승이 나타나 법당을 더럽히지 말라고 엄히 꾸짓었다고 합니다. 화가 난 가토가 칼로 노승을 내리치자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가토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번 째는 숭유억불 정책이 취해지던 조선시대에 이곳을 차지하려고 한 양반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세번 째 일반적인 이야기는 거대한 이수가 너무 무거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칠장사에서 열반에 든 고려시대의 국사인 혜소국사의 탑비로 높이 2.27m, 폭 1.27m의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비로 고려 문종 14년(1060)에 건립되었다. 현재는 귀부와 비신, 이수가 분리되어 각기 옆으로 나란히 놓여져 있는 상태이다. 비문에는 혜소국사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김현이 짓고, 민상제가 쓰고, 배가성, 이맹 등이 글을 새겻다고 한다. 새겨진 글씨체는 구양순법의 해서체로 화려하면서도 붓으로 직접 쓴 듯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옆면

비신 옆면에는 살아서 꿈틀대는 듯한 용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칠장사 혜소국사 탑비 귀부

거대한 거북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거북의 등은 물결치는 모양을 하고 육갑의 문양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앞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있므며 머리를 치켜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 보고 있습니다. 거북의 등에는 직사각형의 홈을 파고 연꽃으로 장식을 하여 비신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굳게 다문 입과 가지런한 이빨, 벌렁거리는 코와 부릅뜬 두 눈 등이 사실적이고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칠장사 혜소국사탑비 이수
거대한 이수는 구름과 용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으며, 이수 위에는 다른 종류의 돌로 만든 연꽃돌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수와 돌의 종류가 다른 것으로 보아 본래의 것은 아니고 후대에 누가 올려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으로 보아도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소원과 희망을 비는 이들이 던진 동전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습니다.

칠장사 산신각
칠장사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다른 곳의 산신각과 다른 것은 앞족에 툇마루와 좌측으로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툇마루에 올라 산신각 내부로 들어가게 구조가 되어 있어 특이합니다. 툇마루 옆에 있는 작은 방은 닫혀 있어 용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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