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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 개관]
우즈베키스탄 제 2의 도시로서 공업 및 문화의 중심지다. 제프라샨 강의 계곡과 구릉에 걸쳐 위치하며, 타시켄트 및 크라노보스크와 철도로 연결되고, 우즈베크 자동차도로의 기점이다.
BC 5세기경 제프라샨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Sogd)인들이 오아시스가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 이래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BC 375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복, 그 후 월지(月氏)가 사마르칸트 주위에 있던 박트리아를 정복하여 대월지국(康國)의 영토가 되었으며, BC 2세기에는 장건(張騫)이 월지와 동맹을 맺고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8세기 사라센제국, 13세기 칭기즈칸의 침략 등으로 도시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중앙아시아 최고(最古) 도시의 하나로 고대 호라즘 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중심지역으로 1220년 칭기즈칸에 의해 패망하기까지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번영하였다.
14세기에는 티무르가 몽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이 도시를 제국의 수도로 정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건설하였다. 특히 그는 푸른색을 좋아하여 도시 곳곳에 산재한 중세 모스크와 왕족들의 묘가 저마다 푸른색 돔을 머리에 이고 있어 이런 이유로 사마르칸트를 ‘푸른 도시’라고 부른다. 푸른색은 청록 빛깔의 터키석 장식이 연출해내는 신비감의 근원이기도 하여 이슬람 학자들은 사마르칸트를 ‘이슬람의 진주’라고 불렀다.
750년 당나라 때 고구려의 유민 출신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타시켄트를 본영으로 삼고 압바스 왕조의 사마르칸트를 치다가 호라즘의 왕에게 참패하여 중국의 나침반과 제지술이 유출되어 사마르칸트에서 처음 종이를 만들었고, 제지술과 나침반이 아랍으로, 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때 중국으로 간 이곳 사람들의 성씨는 강(康)씨를 따랐으니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로 일컬어지는 백마사(白馬寺)에서『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등의 삼부경(三部經)을 번역한 강승개 (康僧鎧, ?-?)가 이 지역 출신이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수·당대에 걸쳐 강국(康國) 또는 소그드(粟特)라고 불렀고, 소그드인들은 상업에 능하여 원나라 때에는 색목인으로 중용되기도 했다. 고성, 건축물, 바자르 등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민족은 그리스, 이란, 위구르, 월지 등의 혼혈인 타지크족이 다수이며, 인구는 사마르칸트주(州) 전체 약 37만 명, 그 중 고려인이 약 7,000명이며, 사마르칸트시(市)의 인구는 약 17만 명이다. 사막지역인 이곳은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약 200-300km의 지하강이 흐르고 있다. ‘카낫(Qanat)시스템’이라 하여 지하강 1km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올려 식수와 농업용수로 쓴다. 물은 석회가 많이 섞여 그냥 마실 수 없다.
[아미르 티무르(Amir Temur)]
사마르칸트는 티무르(Amir Temur; 1336-1405)와 인연이 깊다. ‘Amir’는 아랍어로 ‘왕 또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동서로 분열된 차가타이 칸국을 통일하고 이란과 킵착 칸국의 옛 영토까지 정복하고 인도의 델리까지 정벌하는 등 대제국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중국을 원정하러 가는 도중 죽었다. 티무르는 평생 정벌로 일생을 마쳤으니 그의 죽음과 더불어 대제국도 무너지고, 그렇게도 아끼고 정열을 기울였던 사마르칸트의 문화도 그의 죽음과 함께 궤멸되고 말았다.
10월 24일 (수)/ 06시 기상. 운동 겸 밖으로 나가보니 거리에 강아지들이 어슬렁거리고, 차는 가끔 다니는데도 매연이 너무 심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까마귀 수 백 마리가 떼를 지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간다.
길가에 큰 항아리 같은 쓰레기통이 3개 있고, 노인이 쓰레기통을 뒤져 종이와 비닐을 줍는다. 그 옆 도로에는 쓰레기를 태운 흔적이 있다.
호텔 동남쪽에 교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34개 교회 단체가 정식 등록도 하지 않고 이 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독교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교를 사칭하여 교민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로수는 주로 플라타너스 고목이고, 집들은 대개 단층 주택에 지붕은 슬레이트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릿느릿하다. ‘빨리빨리 문화’에서 ‘느림의 문화’로 들어온 것이다. 약 40분간 조깅을 하고 들어와서 샤워를 했다.
07시 20분부터 07시 50분까지 호텔 로비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메뉴는 리뾰시까를 비롯한 빵 2가지, 계란 프라이, 우유, 오렌지주스, 버터, 치즈, 야쿠르트, 토마토 볶음, 전병, 과자 2종, 커피, 차 등이다. 이제부터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평소 좋아하지 않는 양식으로 때워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일정을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에서 우리를 안내할 현지 가이드로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3학년에 재학 중이며, 김정위 교수의 제자인 ‘두르도나’라는 아가씨가 왔다. ‘두르’는 여기 말로 ‘진주’라는 뜻으로 우리는 가이드를 ‘진주’라고 불렀다. 08시 46분 버스에 올라 09시에 울루그벡 천문대로 갔다.
[울루그벡(Ulugbek) 천문대]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손자이며 위대한 학자이기도 한 울루그벡이 거의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치하였다. 울루그벡 천문대는 울루그벡에 의해 1428-1429년에 설립되어 학자들과 함께 천문학을 공부하고 실습했던 곳으로 천문대와 별자리 관측, 시간 측정기구가 있다. 옛 소련 전쟁 때 매장한 것을 독립 후에 복원했다. 이때 만든 관측기구는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와 장영실(蔣英實)이 제작한 혼천의(渾天儀)의 모형이 되었다.
옛 천문대를 복원한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전시품을 둘러보고, 옛 천문대가 있었던 건물 지하에 있는 옛날 그대로의 계단을 보고 나왔다.
대수학, 천문학, 수학, 의학을 연구하는 최고의 연구기관인 이곳에서 울루그벡이 학문을 통해 구약성서를 거부하자 이슬람의 승려와 율법학자들이 학문을 통해 너무 알면 마호메트의 신비가 벗겨진다며 울루그벡의 아들을 사주하여 울루그벡이 아들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구르 아미르의 발굴로 울루그벡이 목이 잘려 죽은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으면 1,500숨을 받는다고 해서 사진도 못 찍고 나왔다.
[아프라시압(Afrasiab)]
버스가 지나가는 곳 부근에 있는 흙더미 언덕이 아프라시압(Afrasiab)이다. ‘Afrasiab’의 ‘si’는 ‘30’, ‘ab 또는 yob’은 ‘물줄기’라는 뜻으로 ‘siab 또는 siyob’은 ‘30개의 물줄기’ 즉, ‘삼십천(三十川)’이라는 뜻이다.
아프라시압은 BC 6세기까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으나 BC 5세기경 제라샨 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인들이 이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고 궁전을 세운 이래 여러 민족의 외침을 받아 파괴되어 지금까지 방치되었다.
소련의 고고학자 알리바움이 1965년부터 약 3년간 이 언덕을 발굴하여 많은 벽화들이 나왔는데 이 벽화들을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라고 하며,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벽화는 아랍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기 전인 7세기 중반 무렵 소그드인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8세기 초 아랍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발굴 후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현재는 많은 부분이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벽화의 주된 주제는 각국에서 아프라시압 언덕의 소그디아나 궁전에 온 사절단이 왕을 만나는 모습이다. 사절들 가운데 새의 깃털이 달린 모자(鳥羽冠)를 쓴 사람은 고구려 혹은 신라의 사절로 보고 있으나 조우관은 중앙아시아와 북방 유목민족들도 썼다는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
09시 36분부터 약 30분간 아프라시압 박물관을 둘러봤다. 도자기, 컵, 도자기 가마,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초상이 도안된 그리스 은화, 2-3세기 배화교에서 불을 피우던 제단(altar-a hearth of fire worshipper), 동검, 술항아리, 6-7세기 소그드인이 사용하던 연자방아 비슷한 맷돌, 옹관,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등이 진열되어 있다. 입구에는 편백(扁柏)이 심어져 있고,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편백은 측백의 일종으로 이쪽이 원산이다.
[샤히 진다(Shahi Zinda) 영묘]
‘Shahi Zinda’는 ‘성스러운 곳’을 뜻한다. 8세기 아랍의 침입 이후 형성된 이슬람교도들의 무덤으로 8세기에서 14세기까지 건설되었다. 모스크처럼 생긴 영묘가 양쪽에 일렬로 높은 곳으로 이어져 있고, 끝에서 경계를 넘은 언덕 위에는 현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현대식 무덤에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간단한 약력과 사진이 새겨진 비석을 세워놓았다.
샤히 진다에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인 쿠삼(Kusam ibn Abbas)의 무덤과 1376년에 건립된 티무르 자매의 무덤, 1360-1361년에 건립된 티무르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쿠트루그 오코(Kutlug-Oko), 티무르의 군사참모 에미르 후세인의 어머니 무덤(Tugle Tekin Mausoleum) 및 에미르 후세인 등의 무덤이 있다. 녹색의 아름다운 마졸리카 타일 작품이 인상적이며,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감동적인 곳으로 꼽힌다. 녹색은 이슬람을 상징한다.
[비비하누(BIBIKHANYM) 모스크]
중앙아시아 최대의 모스크로 티무르의 아름다운 왕비 비비하눔을 위한 곳이다. 비비하눔은 인도로 원정을 떠난 티무르가 돌아올 시기에 맞춰 선물로 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를 짓기 위해 각지에서 기술자, 장인, 노동자와 100마리에 달하는 코끼리를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왕비의 미모에 반한 책임기술자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공사를 하지 않겠다며 집요하게 달려들자 왕비는 모스크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나 티무르에 게 발각되어 기술자는 도망가고 왕비는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 뒤 티무르는 모든 여인에게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라고 명령했고, 그 천은 차도르가 되어 지금까지 이슬람 여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했다.
비비하눔은 티무르제국의 보석 같은 곳으로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있는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하나였다. 티무르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고, 한계 상황까지 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에 완공 후에 구조적인 문제로 수세기 동안 서서히 기울다가 1897년의 지진으로 마침내 붕괴되고 도굴꾼들에게 약탈되어 훼손되었다. 현재 파괴된 부분을 보수하고 있으나 재원이 부족하여 언제 완공될지 알 수 없다.
모스크 안마당에는 비석처럼 보이는 석물을 세워놓았다. 그 옆에 아이를 데리고 관광을 온 남자가 한국말로 인사를 하면서 자기는 한국 부천에서 일하다가 귀국하여 그때 번 돈으로 지금은 아들과 함께 놀러 다닌다고 했다.
[시압(Siyob; Siab) 시장(Bozori)]
11시 20분부터 12시까지 시압 시장을 둘러봤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압’은 ‘30개의 물줄기’라는 뜻이다. 배가 또 요동을 쳐서 물어물어 화장실을 찾아 볼 일을 봤다. 화장실이 수세식이기는 한데 화장지도 없고 너무 지저분하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200숨을 내는 것도 기분이 언짢다. 그걸 보면 화장실만은 우리나라가 단연 선진국임을 자부할 수 있다. 화장실 사용료로 1달러를 줬더니 800숨만 거슬러 준다. 1달러는 1,300숨인데 현지 상인들이 1달러를 1,000숨으로 환산해 주기 때문에 300숨을 손해 봤다. 현지에서는 달러를 쓰면 손해다. 여기서 물건을 사려면 무조건 값을 깎으라고 해서 카메라에 쓸 건전지 1개를 사는데도 5달러 달라는 것을 깎아서 4달러 200숨에 샀다. 시장에는 곡식, 생선, 채소 등 식료품, 석류 등 과일과 옷 등 일상 용품을 팔고 있다. 석류도 여기서 멀지않은 이란이 원산이다.
시장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자기는 현재 딸이 셋이고, 의정부에서 8년간 박스 공장에서 일하여 1억 원을 모아 이곳에서 집을 사고, 시장에 가게를 5개나 장만하였다며 지금도 한국에 가고 싶은데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간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월수입이 보통 100달러, 좀 나으면 200달러, 대학교 총장이 500달러라고 하니 한국에 가고 싶은 심정도 이해가 된다.
12시 15분부터 13시 20분까지 좀 구석진 곳에 있는 석사남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석’은 ‘왕’을 뜻하고 ‘사남’은 ‘예쁜’을 뜻한다. 입구 화단에 고추가 열려 있고, 식당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건물 입구의 포도 시렁에는 포도가 밑에까지 주렁주렁 달려 어떤 것은 달린 채로 말라서 건포도가 되었고, 감나무에는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음식으로 리뾰시까, 고추, ‘고소’라는 채소, 토마토, 사과(붉은 것과 노란 것), 샐러드 등이 나왔고, 죽 같은 밥도 나왔지만 밥은 내게까지 몫이 돌아오지 않았다.
13시 30분에 버스에 올라 식당을 나섰다. 오른쪽에 몰와르라는 대학로가 있고, 왼쪽에 알렉세이 나보이와 조미(Zommy)의 동상이 있다. 알렉세이 나보이는 티무르의 아들이고, 조미는 알렉세이 나보이의 스승으로 이란의 10대 시인의 한 사람이다. 차가타이어는 옛 위구르어와 현대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그때까지 이 지역에서는 차가타이어의 영향을 받은 터키어를 썼으나 알렉세이 나보이가 처음으로 우즈베크어로 시를 써서 국민 시인으로서 우즈베크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다.
[국립 문화·역사박물관]
티무르의 위엄 있는 모습의 동상(좌상)이 있는 광장을 지나 13시 40분 우즈베크 국립 문화·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and Cultural of Uzbekistan)으로 갔다. 박물관 입구에도 나보이와 조미의 동상이 있다.
안에는 기원전의 석기, 청동기시대의 화살촉, 도자기, BC 400-1200년대의 무기, 아프라시압에서 출토된 유물의 일부, 비비하누 모스크의 모형, 18-19세기의 무구(武具; 갑옷, 검, 도끼, 활, 총 등), 마구(馬具), 의상, 서책, 도자기, 도기와 기와 파편, 그리스 시대의 동전, 수도관, 건축자재 파편, 7-8세기의 돌하루방을 닮은 석상, 2-3세기 동방종교 사원의 기둥, 스투파, 투구, 근·현대 도자기, 가구, 시계, 파오, 카펫, 악기 등이 진열되어 있다. 주로 도자기가 많고, 옆방에는 현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레기스탄 광장(Registan Square)과 3개의 메드레세]
사마르칸트는 정치의 중심인 도시의 중앙에 ‘레기스탄’, 그 변두리에 ‘샤레스탄’, 교외에 ‘라바트’로 구성된다. ‘Registan’의 ‘Regi’는 ‘찰흙 또는 붉다’는 뜻이다. 14시 30분 15시 30분까지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3개의 메드레세(Madrassa)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으로 갔다.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히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한다. 신학과 함께 천문학, 철학, 수학, 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티무르 시대의 중앙관서로도 사용되었다.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왕에 대한 알현식을 하고, 정령을 포고하고, 공공집회가 열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 광장은 중앙에 틸라카리 메드레세(Tila Kari madrassa), 오른쪽에 시르도르(Sher Dor) 메드레세, 왼쪽에 울루그벡(Ulugbek) 메드레세 등 3개의 이슬람 종교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다.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벡에 의해 1417년에 건축이 개시되어 1420년에 완성되었다. 3개의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주로 천문학, 철학, 수학 연구소로 사용되어 티무르제국의 학술연구의 근원지였으며 입구 문에 ‘학예를 연마하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민의 의무’라고 씌어있다. 지진과 18세기 초의 전쟁으로 입구의 돔 등 일부가 파손되었다.
시르도르 메드레세는 티무르 제국 이후 이 지역을 통치한 우즈벡 영주인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1619-1636년에 건설되었다. 현관에는 아기 사슴을 쫓는 사자와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200숨짜리 화폐의 도안이 여기에서 나왔다.
틸라카리 메드레세는 광장 정면에 보이는 건물로 1647년 시르도르 메드레세를 세운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급히 세워졌다. ‘틸라카리’는 ‘금박으로 된’이라는 뜻으로 건물 안 왼쪽 푸른 돔 아래의 예배당을 보면 그 이름이 어울림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면 천장의 돔이 둥글게 보이나 푸른색 부분부터 세밀한 표현으로 둥글게 보일뿐 사실은 평면이다.
이 광장에서는 지금도 매년 대통령도 참석하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여는데 여기서 티무르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있다.
[구르 에미르 능묘(Guri Emir Mausoleum)]
13시 35분부터 14시까지 구르 에미르 능묘를 둘러봤다. ‘Guri’는 ‘무덤’이라는 뜻이다. 티무르가 1404년 손자 무함마드 술탄의 전사를 추도하기 위해 지은 중세 건축양식의 사원 건물이다. ‘술탄’은 원래 터키의 용병대장을 뜻하여 터키인들이 처음에는 아랍의 용병으로 출발했다가 7세기에 독립하여 터키 지역에 살던 원주민 쿠르드족을 정복하여 셀주크 투르크를 세웠고, 14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를 세웠다.
돔의 하부 벽에는 코란의 문구가 문양화되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글이 씌어져 있다. 푸른 타일로 화려한 모양이 장식된 돔은 64개의 나무가 내장되어 골격을 유지하고 세로로 무수한 홈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돔의 축조 기술은 티무르 시대에 창조되었으며, 사마르칸트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중앙에 티무르, 앞에 스승(Mir Said Baraka), 뒤에 손자 울루그벡, 오른쪽에 아들 무함마드 술탄 등 티무르의 묘 주위에 티무르의 일족 및 당시 지도자들의 묘가 있다.
티무르는 스승을 존중하여 자신의 묘보다 스승의 묘를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여 이에 따라 구르 에미르에서 제일 큰 묘는 티무르 스승의 묘다. 티무르의 묘는 연옥으로 만들어졌고 흑녹색을 띄고 있으며, 유해의 머리는 모두 메카를 향하고 있다. 1941년 학자들이 이 무덤들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티무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다리 불구가 되었고, 울루그벡은 목이 잘려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유해를 통해 증명되었다.
[아트센터]
16시 20분 어제의 호텔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김정위, 조영록, 신근재, 남성우, 조회현 교수 및 몇 사람의 여자 일행들과 국민 시인 알렉세이 나보이를 기념하는 공원에 있는 아트센터(Art Center)로 갔다. 이 건물은 1882년에 건축된 교회(St. George's Church)였으나 지금은 아트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공원은 티무르의 동상이 있던 광장 바로 옆에 있다.
아트센터에 특별히 볼만한 것이 없어 부근에 있는 고려인 시장(MarMar)에 갔다가 김정위 교수의 권유로 한 가게에서 20달러를 숨화(貨) 26,000숨으로 바꿨다. 여자들은 쇼핑을 하고, 남자들은 김정위 교수가 근무하는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했다.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학교]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학교는 시장을 나와서 사마르칸트주의 주청사, 경찰청을 지나서 있다. 학교가 크지 않고, 건물도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늑하다.
학교 경내로 들어가다가 그 학교 학장과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교수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니 건물 벽에 부착된 ‘사마르칸트 국립 외국어대학교’라는 한국어 표지판이 눈에 띈다. 김교수의 집무실은 크지는 않지만 한국 관련 책자와 자료들이 꽤 많이 비치되어 있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꽤 쌀쌀하다. 사막 도시라서 일교차가 심하다. 티무르의 동상이 있는 광장 옆을 지나 18시경 호텔로 돌아왔다.
18시 35분부터 ‘Kishlak’이라는 식당에서 약 1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했다. ‘Kishlak’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반가운 것은 타시켄트에서 만났던 조주 스님이 불원천리하고 이곳까지 와서 우리와 일정을 같이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인 5명(목사 1명, 남자 2명, 여자 3명)과 자리를 같이 했다. 여자 1명은 거의 현지인과 비슷하여 동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음식이 대체로 맛이 없고, 특히 소고기가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어제의 그 호텔로 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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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년 전에 다녀오신 건가요? 자세한 내용 감사!!!
3년 전에 갔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