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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쉬름예거 글을 하나 올렸으니
영국군 공수부대원 글을 하나
올려보겠습니다.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고 타이트한
부분도 있지만, 이 모든 걸 내가 감당
해야 했다고 생각하면 참전자란 게
쉬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출처: BBC 전쟁기록 녹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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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E. Davies
- 1st Battalion Parachute Regiment
1939년 10월의 바람 부는 어느 날,
나는 네스 열차역에서 모인 몇 명을 향해 작별을
고하며 손을 흔들었다. 기분은 이상하고 흥분되었다.
몇 주 전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쳐들어갔고 챔벌레인 수상
은 전쟁에 들어갈 지 말아야 할 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리고 나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브레콘에 있는 사우스
웨일즈 국경연대에 입영하라는 것. 제21보병연대. 줄루 전쟁
에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유명한 부대였다.
병력은 영국 각지에서 모였다. 훈련은 전투와 같은 수준으로
시켰고 전세계에서 그렇게 훈련시키는 부대가 있는지 싶다.
처음 받은 군복은 신형으로 Denims라고 불렸고 정말 튼튼했다.
그때부터 난 로봇처럼 움직였다. 1939년 겨울은 정말로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고 사방이 꽁꽁 얼었다. 동향 친구인 브라인과
많이 친해져서 지냈다.
몇 주가 지나자 우린 훈련이 끝났고 난 엔진차량 코스를 끝냈다.
그 다음에 부대 배치를 받기 위해 떠났고 그때 친구 브라인과 작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녀석은 사우스웨일즈연대에 그대로 배치되
어 노르웨이로 갔다가 중상을 당했으나 살아남았다. 난 히어포드의
브렉녹 대대로 배치됐다. 거기서 1940년 여름까지 있었다.
이때부터 영국의 야간 상공은 독일 폭격기들의 엔진 굉음으로
가득 차면서 융커스와 하인켈들이 날아왔다. 여러 곳이 맞았지만
리버풀이 가장 심각했고 우리 막사 근처에도 떨어졌다. 난 대대
운전병으로 리버풀 항구와 부대를 왔다 갔다 했다. 당시는 독일이
영국을 침공할 거라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 정찰기들이
영국의 곳곳을 정찰했다.
맨체스터 링웨이 비행장
1941년 1월 난 낙하산연대에 자원했다. 내 인생에서 뭔가 더 흥미
진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신체의무검사는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어 점프를 위한 강력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밑바닥
을 잘라낸 4.5미터 높이 비행기 동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했다.
밑에는 커다란 코코넛 매트가 깔려 있었다. 뛰어내리고 떨어지고
구르고 하는 다양한 연습을 했다. 발과 무릎이 가장 중요했다. 교관
은 영국공군 낙하산훈련 스쿨 교관이었다.
이어 생명줄 강하에 들어갔다. 중요한 점은 그냥 앞 사람을 따라
빨리 뛰어나가는 거였다. 점프는 맨체스터의 태톤 공원에서 했다.
강하는 물이나 수목지대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항법이 매우 중요
했다. 첫 번째 비행기 점프에서 열린 문 앞에 1번으로 서 있는데
레드라이트가 들어왔다. 이어 그린라이트가 들어오면서 “Go” 사
인이 나왔고 아무 생각 없이 100 mph 속도의 비행기에서 뛰어내
렸다. 머리 위에 펴진 낙하산은 붉은 실크로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의 자격 강하는 총 9회였는데, 2회는 기구(balloon) 강하였고 곤돌라
에 네 명씩 앉아 올라갔다. 기구는 대형 윈치를 통해서 240-300미터까지
올라간다. 그때 처음 떨어지던 기분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우린 서로를
쳐다봤고 창백한 웃음을 씩 웃었고 “이런 건 없을 거다!”라고 말했던 기억
이 난다. 내 코와 입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면서 125 mph 속도로 떨어졌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어 어깨에 충격이 왔고 위를 보니 버섯 같
은 낙하산이 펴져 있었다.
항공기 강하는 보통 휘트니 폭격기로 했고 우린 그걸 ‘날아다니는 관’
이라 불렀다. 기체 안은 무슨 화학적 냄새로 속이 메슥거렸다. 동체 가
운데 구멍으로 뛰어내리는 것인데 잘못하면 걸려 코가 부러질 수도 있다.
당시 링웨이 비행장에서 항상 긴장 상태였고, 비극도 일어났다. 폴란드
훈련병 두 명이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사했다. 그걸 ‘Roman Candle’
이라 불렀는데 이 실크 천의 낙하산은 아주 가끔 수상한 이유로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우리 평상으로 돌아갔다.
체스터필드, 하드윅 캠프
체스터필드에 있는 하드윅 캠프의 1낙하산연대로 간 나는 새
인생을 시작했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모두 자원자이며 번쩍
이는 윙과 함께 사단마크 그리고 그 유명한 레드 베레를 쓰고
있었다. 훈련은 엄격했다. 완전군장 행군과 크로스컨트리 달리
기와 체력단련이 이어졌고 부대 안의 링에서는 권투시합도 벌
어졌다. 우린 습관처럼 이렇게 말했었다.
“The only good German is a dead one.”
1낙하산여단은 솔즈베리 평원으로 이동했고 우리 1대대는 펄포드
의 막사로 들어갔는데 선사시대 유물 스톤헨지 근처였다. 가끔 거길
지나쳤는데, 당시 가을 저녁이 되자 거기서 이상한 빛이 나왔다. 뭔
가 있는 곳이다. 몇 주가 지나자 캠프의 거대한 체육관에 모였고 사
단장 F.A.M. ‘Boy’ 브라우닝 소장이 나타났다. 그의 아내 Daphne du
Maurier는 작가였다. 내 정확한 소속은 1공수사단 1낙하산연대 1대대
제3박격포소대였고 독특한 놈들 많았다.
기고자 토마스 베이비스는 맨 오른쪽. 1942년 북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침공
1942년 11월의 쓸쓸한 어느 날 우린 수송선을 탔고 목적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여러 루머가 돌았지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가 가장 유력했다.
이제 모험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구축함, 순양함들이 호위로 붙었고
비스케이만을 지날 때는 유보트를 경계하며 앞에서 나갔다. 유보트는
당시 미국 해안까지 갈 정도였으니. 그때 상당수 무시무시한 배멀미를
경험했다. 10일을 타고 갔는데 갑판에서 매일 체력단련을 했다.
어느 태양이 빛나는 날 알제리에 도착했다. 풍경은 낭만적이었다. 차가운
하얀색의 건물과 파란 하늘, 성경에 나올 풍경이었다. 우리가 갈 곳은 알제
리 외곽의 메이슨 프랜치 비행장이다. 우린 시가를 통해 행군했다. 걸어가
는데 어지러운 태양과 함께 온 몸이 땀 범벅이 됐다. 저녁에는 기온이 급강
하해 서늘하다. 비행장에 도착하자 독일군이 버리고 간 다양한 비행기들이
보였다. 거대한 격납고에서 잤다. 비행장의 가동되는 비행기는 대부분 미군
이 모는 다코타 수송기였다.
우리 1낙하산대대장은 힐 중령이었고, 우린 미 공군의 수송기를 타고 튜니지
남쪽 깊은 곳의 숙 엘-아르바란 곳의 평원에 점프하게 되었다. 수송기에 잔뜩
몰려 탄 상태에서 그 평원 상공에 도달했고, 당시 디지에 아프리카인 두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검은 얼굴이 태양빛에 반짝였다. 우리를 보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들고 있던 쇠스랑을 땅에 던졌다. 먼저 번들을 투하하고 이어 우리가 뛰어
내렸다. 농부들은 마을을 향해 도주했다. 우리가 수상하게도 보였을 거다. 위장
무늬 점프용 스모크에 점프용 헬멧을 쓰고 하늘에서 뛰어내렸으니 말이다.
이후 드롭존에서 우린 중대별로 규합했다. 이때 두 명이 중상을 당하고
한 명은 죽었다. 사망자는 낙하산이 표지지 않은 채 뭉쳐진 기다란 낙하산
(담배말이)에 매달려 추락해 죽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성공적인 점프였다.
마을로 대대가 이동하여 프랑스 육군 지휘관과 부하들을 만났다. 우리의
출현으로 인해 크게 고무된 상태. 프랑스 정보장교의 도움으로 그 일대의
독일군 위치를 알아냈다. 기지로 복귀하는 독일군 폭격기 한 대가 상공에
보였다.
이 사막 외딴 곳의 생활은 산악지역보다 험했다. 염소와 닭 몇 마리가
다인 그곳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 신기하기도 한 대자연의 정말 척박한
땅이다. 원시시대에 다름없었다. 독일군 정찰기가 돌아다녔다.
거기서 작전을 시작하자마자 힐 중령은 일선에서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
중령이 화이트록 대위 등 몇 명과 같이 있다가 독일군 탱크 두 대의 공격
을 받았다. 개몬 폭탄(Gammon bomb, Lieutenant Jock Gammon이라 불렀다)
과 함께 전개하고 있을 무렵, 두 대 중 한 탱크 탱크장이 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밝혔고 힐 중령과 대위가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탱크의 기관총은
발포했고 힐 중령과 대위가 맞았다. 그 탱크는 결국 격파되었고 힐 중령은
나중에 훈장을 받았다.
중대장이었던 피어슨 소령이 대대장직을 인수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어두운 글레스코 출신의 다혈질이었다. 굉장히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성격으로 타고난 군인이다. 그는 야전에서 매우 탁월했고 곧 중령으로
진급했다. 빌 윌슨이 밤에 보초를 서고 있는데 뭔가 움직여 암구호를
했다. “거기 누구야?” 그러나 으르렁거리는 응답이 들렸다. “너의 염병
할 지휘관이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튜니지의 밤은 이글거리는 낮과 비교하면 가차 없이 저온으로 떨어진다.
동료들이 없다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건 독일군도 마찬가지다. 그 더운 곳에서 담요가 필요
할 줄은 몰랐다. 우린 영국 1군 소속으로 멀리 보이는 고지대를 향해 이동
했다. 문제는 독일군도 같은 전술이라 같은 목적으로 그들 공수부대를 보
냈다는 것. 아마도 시실리에서 온 것 같았다. 이로 인해 게릴라전 같은
소규모 치열한 접전이 일어났다.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조심해야 했다.
빌 윌슨과 나는 항상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주로 아군 식량을 탈취하는
것. 우린 약해지고 너무 지쳤으며 이질에 시달렸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에 정말 조심했고 물은 무조건 끓여 마셨다.
기고자 토마스 데이비스. 1939년 21세로 사우스
웨일즈 국경연대 입대했을 무렵의 사진.
어느 날 밤, 우리 중대는 10마일 정도 떨어진 계곡의 이탈리아군
진지를 습격했다. 어렵게 당도하니 이탈리아군은 거의 다 자고 있
었다. 정말 아름다운 달밤이었고 멀리서 들리는 저격총 소리 외에
는 고요했다. 우린 박격포를 휴대해 엄청 힘들었다. 10파운드 고폭
탄 여섯 발을 조끼에 넣고 어깨에 걸치며 갔다. 1마일 정도 거리의
가파른 곳에서 진지가 잘 보이는 유리한 위치를 잡았다.
모두 자리를 잡아 준비가 되었고, 공격준비가 끝났다. 로켓 조명탄이
밤하늘에 오르고 진지 안에 심홍색 섬광이 보였다.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구령이 떨어졌다. “쏴!” 박격포들이 진지 안의 오두막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이 오두막에서 나오며 소총과 기관
총을 쐈다.
조명탄이 더 오르고, 총체적인 혼란이 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군은
흥분해서 오두막의 전등을 켰고 이어 인페르노가 연출되었다. 이때
아군도 피해가 있었다. 공병이 지뢰를 하나 건드려 12명 정도가 죽거
나 다쳤다. 우리 진지로 돌아오자 날이 밝았다. 그리고 갑자기 십자가
가 그려진 전투기가 나타나서 우릴 향해 캐논포를 발사했다.
1943년 1월이 시작되자, 여단은 후방으로 빠져 휴식을 취했다. 놀라
운 일도 있었다. 제6낙하산야전의무대는 항상 같이 점프하며 전투병
력과 같이 했는데, 군의관 롭 중위는 점프하다 다쳤는데도 그걸 숨기
고 백여 명을 치료했다. 갑작스런 기습은 보통 독일군 메서슈미트의
출현이었다. 우린 미친 듯이 쏴서 격추도 시켰다.
한번은 우리 대대가 한 독일군 점령 마을을 전투해 점령했는데,
다른 중대가 널린 독일군 시체 옆에서 돼지를 잡아먹었다. 어떤
면에서 전쟁의 참혹한 장면이었다.
또 다른 치명적인 적은 스투카였다. 그게 병사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표현을 못 하겠다. 거대한 새가 지면을 향해 무서운 비명을 지르
며 달려드는 것 같다. 마지막에 폭탄을 투하하면 전체 산이 전율하고
공중으로 돌 조각 같은 게 날린다. 우리 포수 중 작 밀러가 박격포좌
안에서 그렇게 죽었다. 그는 우리 품에서 죽었다. 목구멍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몇 초 만에 얼굴색이 백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우리 위치가 가망이 없다고 느끼자 독일군은 가차 없이 공격하며 우리
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꾸준히 가까워지는 가운데 착검 명령이 떨어
졌고 돌격명령을 기다렸다. 이어 어디선가 “Wahoo Mohammed!”라
는 고함소리, 절규에 가까운 고함이 들렸고 그로 인해 우리 공수부대원
들은 공포를 떨쳐냈다. 그 순간 전투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
은 그냥 아랍사람들 말을 흉내낸 것일 뿐이다. 아랍인들은 자신의 당나
귀나 가축에게 “Wahoo Mohammed”라고 소리치곤 했다.
[무하마드는 아랍계열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다. 이를 테면 당나귀에게
철수야 빨리 가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서양 국가들의 군대를
보면 전시에도 상당한 유머감각을 유지하는 걸 볼 수 있다. 잇빨 주]
그런데 이를 악물고 있을 무렵 오히려 위에서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중상자는 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치료를 해줄 수가 없고 병원은
30-4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포로가 되는 게 더 좋다는 판단에서였
다. 나머지 부상자들은 들고 끌면서 관목줄기를 통해 데리고 갔다. 고
지에서 폭풍처럼 우리에게 총을 쐈다. 바위투성이의 경사면을 무리지
어 내려왔다. 부상자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당시 모두 피를 뒤
집어쓰고 있어 누가 정말 다친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간다.
이때 후위에 있던 프랑스 외인부대가 와서 우리의 퇴각을 도왔다.
우린 정말 힘겹게 퇴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대대 3/4이 죽
거나 다쳤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내가 속으로 생각했던 그런 낭만적인 부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군복도 제대로 없어 잡히는 대로 아무 거나 입고
있었으나,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었으며 또한 군기는 매우 방종했다.
그들의 국적은 거의 모든 나라의 집합이었다.
북아프리카 1st Airborne Troop의 지휘관은 프래옐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 1낙하산여단을 빼서 다른 곳에 투입하는 특수목적으로 쓰려고
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보병 라인에서 틈이 생기면 채우겠다는 의미.
드제벨 아보이드와 세드제난 중간으로 우리 1낙하산대대 대대장은 작
피어슨 중령이었다. 하여간 “Wahoo Mohammed”이 나오면 그건 격렬
한 전투가 되었다.
우리들 사이에 아주 강한 동료의식이 생기고 우린 서로에게 의지했다.
아마 다른 중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 중대는 각자가 모여 하나
의 영혼 같이 느껴졌다. 타마라의 수풀 지대에서 우린 끔찍한 장면들을
봤다. 송장들은 북아프리카의 기온으로 인해 빠르게 부패했고 바람이
불어 냄새만 맡아도 어디에 송장이 있는 줄 알게 된다. 구더기가 반쯤
먹은 시체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상의를 벗겨 병사의 신분을 확인
했다. 그리고 소지품을 챙겨 그의 애인이나 어머니에게 소포로 보낸다.
그리고 매장했다.
한번은 차량을 타고 가다가 악몽과 같은 독일 전투기를 경험했다. 차량
들이 멈췄고 우린 길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모두 총을 들어 상공에
대고 쐈다. 심장 쿵쾅거리는 게 갈비뼈에서 느껴졌지만 그냥 엎드려 메
서슈미트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 트럭에 탔던 반이 죽었고 이유
는 독일 전투기의 캐논포탄이었다. 그 장소에서 동료들을 묻었다.
주기적으로 ‘청음 정찰’을 나갔는데 보통 부사관 한 명과 병사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밤에 나간다. 적과의 중간 무인지대로 간다. 한번은 달밤
에 나갔는데 한참을 가다보니 독일쪽 정찰대가 우릴 향해 오고 있었다.
다행히 서로가 반기는 동이 터왔고 우린 서로 물러났다. 우리 중대 쪽
을 공격하는 징후가 될 수도 있었다. 빅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말이야, 영국군과 독일군을 콜로세움 같은 데
몰아넣고 동시에 발포하는 걸로 끝냈으면 좋겠다. 먼저
정중하게 서로 인사하고 시작하는 거지.”
우리 여단은 3개월 째 작전을 했고 부대 표창도 하나 받았다.
영국에 있는 다른 공수사단들은 지중해에서의 다음 단계 전투
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우린 다시
뒤로 빠져 알제리 마스카라로 이동했다.
제2낙하산대대의 장교들. 튜니지 1942년 12월 26일.
북아프리카 만월의 밤은 참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이 깨끗해
보였다. 정말 장관이었다. 마스카라에 다가가자 서부 사막으로 인해
더 더워졌다. 마스카라에 가자 프랑스 거주민들이 있었는데 우릴 적
대시했다. 조금 지나자 친한 척을 하는데 그들은 주로 우리 돈이나
물품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후방으로 빠진 이유는 시실리 침공
을 위한 훈련 때문. 사막에서의 낙하산 훈련은 대기에 문제가 있었다.
공기가 희박하다보니 하강률이 빨라서 경상자들이 꽤 많이 나왔다.
[여담이지만, 이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군인들을 위한 여흥이
여느 곳이나 다름 없이 마련되었고, 극소수겠지만 남아 있던
프랑스 여성들이 연합군 병사들에게 몸을 팔았다는 기록도
있다. 확대해서 볼 문제는 아님. 잇빨 주]
한번은 낙하산 훈련 도중 땅이 갑자기 솟아오르면서 머리를 땅에
천둥소리처럼 쿵 찧었고 순간 시야가 컴컴해졌다. 한 2분 기절했
다가 “태피! 괜찮아?”라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동료 맥코맥이
눈에 점차 들어왔다. 그러나 다시 암흑이 찾아왔고 이 증상은 2일
정도 나를 괴롭혔다.
침공이 리허설되었고 우린 시실리에 야간강하로 계획되었고 점프
후에 중대가 결집하는 훈련을 했다. 우리는 중대별로 색깔을 정해
신원 확인을 빠르게 하기로 했다. 이 작전을 위해 총과 탄약을 넣을
새로운 키트백이 지급되었다. 백을 하체 하네스에 나일론 로프로
묶고 점프한다. 점프한 다음 공중에서 금속고리를 해체해 백을 발밑
으로 내린다. 그러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아프리카 열풍이 소용돌이처럼 만들어져 몰아치는 일이 잦았고 중대
본부 텐트까지 푸른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모두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훈련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우린 2마일 떨어진 마을로 가서 즐거
운 시간을 가졌다. 우린 이렇게 말했었다. “뭐가 걱정이야? 내일 죽는
다 생각하고 그냥 먹고 마시자구.” 그게 그때 우리 인생의 철학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은 코르크처럼 마르고 숨은 바늘구멍으로 쉬는 것
같은 반은 빈사상태가 된다. 그 마을에 걸어 다녔는데 우린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무리로 걸었다.
곧 있을 시실리 침공 공수작전을 위해 사단 전체가 튜니지로 이동했고,
진행은 비교적 편했다. 해안가라 거긴 과일이 풍성했다. 포도와 아몬드
와 올리브가 많았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얀 백사장의 끝이 안 보인다.
그런 좋은 곳에서 있으니 저녁이 되면 마가렛이 생각났다. 링웨이 비행
장에서 공수훈련을 받을 당시 사귀었던 여성이다.
그 추억이 너무너무 멀어보였다.
거기 도착한 후 우리의 임무는 정확히 규정되었다.
Sicily - 1943년 7월 9일
연합군 시실리 침공의 공수작전에는 미군과 영국군이 모두 참가했다.
비행조건과 최초 글라이더 랜딩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좋지 못했다.
남동풍이 불었고 글라이더와 견인하는 수송기는 어려움을 겪으며 항
로를 이탈했다. 바람은 45 mph 정도의 질풍이었다. 달빛은 아주 엷어
창백한 빛만 있었고 바다는 성이 났으며 통신은 감청되는 듯 했다.
깎아지는 벼랑 모양의 몰타 섬에서 비추는 여섯 개 정도의 서치라이
트는 침공군에게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시실리 섬의 드롭존과
랜딩존은 주로 평평한 경작지를 선택했고 목장이나 과수원도 그 대상
이었다. 첫 번째 공수작전 지점은 마레레나 반도 서쪽으로 거기 있는
항구는 2천 3백 년 전 아테네 함대가 격파됐던 곳이기도 하다.
많은 글라이더들이 수송기에서 너무 일찍 분리되었고 시실리 해안의
어둠 속에서 바람으로 일어난 많은 먼지 구름과 마주했다. 착륙은 극
단적으로 어려웠다. 이 침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총 128의
글라이더 중에서 성공적인 건 오직 50대 정도였다. 나머지는 바다에
추락했고 25대는 영원히 아무런 소식 없이 사라졌다.
주 목표는 시러큐스 근처에 있는 폰테 트란데 교량이었다. 도시 서쪽
외곽에 있었는데 상륙한 몽고메리의 8군 선봉부대가 진군하기 위해서
는 교량을 꼭 탈취해야 했다. 어떻게든 다리를 48시간 안에 장악해야
했다. 그래야 시러큐스 점거가 공고해지고 북쪽의 카타니아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것을 맡은 게 우리 낙하산여단이고 48시간을 반드시 버텨야 했다.
목표인 다리의 이름은 ‘프림솔레’였고 시러큐스 위쪽 시메토란 곳의
산악지역에 걸려 있다. 그곳의 높은 곳에 원형으로 배치된 적 대공
포대도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인 법이다.
당시 우리가 점프하던 비행기들은 원래 폭격기라 장갑이 두텁고 방
어력이 강했다. 그런데 다코타 수송기는 아무 장갑 방어력이 없었고
특히나 연료탱크는 매우 취약해서 위험했다. 수송기들은 정확한 항로
를 날려고 했고 우린 거길 Danger Zone이라 불렀다. 5마일 길이 해안
으로 진입해야 한다. 대공포 외에 가끔 독일 전투기의 공격도 있었다.
문제는 해안의 연합군 전함들이 아군기와 적기를 야간에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 그래서 아군기가 아군 함정의 대공포에 맞아 떨
어지는 일이 생겼다.
[82공수사단의 침공 2일차 야간강하 비극을 말한다. 잇빨 주]
27개의 비행기가 여러 이유로 인해 북아프리카 기지로 되돌아
갔고, 내가 탔던 비행기도 그 27대 중 하나였다. 누군가 나무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그게 행운이었다.
우리 비행기가 시실리 해안으로 다가서자 엄청난 해안 포대의 대공포화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술취한 것처럼 흔들렸다. 빨간 스파크가 일면
서 총알이 다코타 수송기 동체를 뚫고 지나갔다. 그러자 당황한 수송기는
바다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수송기에 박힌 모든 리벳들이 반란을 일으키
듯 덜그럭거렸다. 굉음 속에서 우린 소리쳤다. “내 다리 맞추지 마. 제발.”
우린 수송기 앞쪽으로 밀려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패닉 상태에서 우린 문
으로 나가려 서로를 빨리 풀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수송기의 각도
로 보면 점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엔진은 점차 소음이 강해졌고 섬광이
보였으며 밖은 창백한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화가 난 바다 위에 산들이
손짓하고 있었다. 이때 신의 은총으로 간신이 수송기가 수평을 되찾았다.
우린 안도하면서 일어서려고 다시 한 번 발버둥 쳤고 점프를 위한 위치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시 북아프리카 기지로 돌아간다는 말이 들
렸다. 조종사는 점프를 취소시켰다. 좌절감이 들었지만 우리 스스로도 어
쩔 수 없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모두 표정이 심각했다. 몇 시간 뒤에
우린 돌아왔고 꽤 많은 비행기가 점프에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온 걸 알았
다. 우리는 시실리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동료들을 걱정하며 소식을 기다
렸다. 분명히 작전병력은 모자랄 터였다.
원래 공수작전 계획에는 많이 벗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메토의
다리가 확보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쓰라린 전투로 독일군에게
한번 넘어갔다가 다시 되찾았다고 했다.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버티던 우리 여단 점프 병력들은 뼈가죽만 남은 채 우리 4기갑
여단의 탱크를 만났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바로 그곳에 우리와 상대
한 것이 바로 독일군 공수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항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숫자가 많은 이탈리아군은 항복했고 독일군은 교량을 폭파하는데
실패했다. 이를 통해 몽고메리의 영국 지상군이 진격했다. 대신 제1낙하산
여단의 장교 12명과 병사 8백 명을 잃었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1공수사단은 이제 8군의 선봉이 되어 이탈리아
로 향했다. 알제리에 남아 있던 우리 박격포 소대는 짐을 꾸려 영국으로
간다고 했다. 우리의 사기는 높았고 영국군함을 타고 지중해를 통해 이동
했다. 배타고 가는데 바다에서 차가운 비가 내렸다. 정말 내 인생에서 태양
은 볼 만큼 봤다. 이틀 후 대서양 바다에서 우린 북아프리카 참전 기장을
받았고 그 후에 리버풀에 도착했다. 곧 구름 끼고 칙칙한 영국 날씨가
우릴 반겼다. 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토마스 데이비스(왼쪽)와 그의 친한 동료로 나오는
윌리엄(윌) 윌슨의 사진.
England - 1943년 12월
12월 초에 리버풀에서 링컨셔의 주둔지로 열차를 타고 갔다.
녹색 풀과 비에 젖은 대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영국
의 성채로 들어갔는데 정말 기뻤다. 자는데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영국에서 이제 우리 대대는 다시 다 모였다. 거기서 야간
기동훈련을 매우 많이 했다. 나침반만 들고 험한 길을 뚫어
찾아가는 훈련이었다. 몸이 다시 좋은 수준으로 올라왔다.
링컨셔의 공기는 정말 좋았다.
마침내 난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수 있었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빌 윌슨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The Invasion of Europe - Operation Market Garden
겨울은 곧 봄으로 바뀌었고, 유럽침공이 임박했다. 그리고 이때
6공수사단이 작전에 나갈 거라는 증거가 점차 명백해졌다. 대륙
에 처음 발을 디디는. 우리 1공수사단은 아마도 작전 2단계에 투
입될 것 같았다. 이때 영국 남부는 유럽침공의 발판으로 여러
나라의 엄청난 병력이 모였다.
그렇게 1944년 6월 6일 유럽침공이 시작되었다. 침공 며칠 만에 수
천 명이 죽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을 유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필사적
으로 막았다. 결국 세 달 후인 9월 17일, 영국 2군은 또 다른 대규모
작전을 발진한다. 여기에 우리 1낙하산사단과 폴란드 제1독립낙하산
여단, 미군 공수사단 두 개로 엄청난 공수 공세가 벌어진다. 목표는
마스-발 수로와 렉 수로의 교량들이었다. 아른헴이 그 목표의 최정
점으로 강력한 방어를 만날 걸로 예상되었다.
2주간의 연구를 했는데, 모든 문에 시건장치가 되고 사판과 등고선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사판에는 아른햄 지역과 DZ, 숲과 교량 수로
등이 아주 자세하게 만들어져 암기하기가 매우 편해 쏙쏙 들어왔다.
누군가 잘못된 곳에 떨어져도 지형을 참고하여 목표 지역으로 지도
없이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다.
우린 네덜란드 화폐인 길드도 지급받았다. 이때 버튼 형태의 나침반
도 지급 받았는데, 이는 버튼처럼 제작되어 바지 단추 자리에 달았고
독일군이 보기에 이상이 없을 정도로 다른 단추와 색깔까지 교묘히
동일하게 만들었다. 그저 단추를 수평으로 약간 놓기만 하면 동서남
북을 알 수 있었다.
작전이 한두 번 지연되자 우리 긴장감은 고조되었고, 링컨셔 그램트햄
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타고 나서야 안도감이 느껴졌다. 수송기가 활주로
를 향해 가는데 다코타 수송기들이 끝도 없이 보였고 승무원과 낙하산
대원들이 풀밭에 앉거나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귀에 이제 엄청
난 수송기 엔진들의 율동만 들렸다. 이륙하고 30분 동안은 다른 비행장
에서 이륙한 수송기들이 모이는 걸 기다리기 위해 상공에서 돌았다.
정말 수송기들이 계속 날아오는데 끝이 안 보였다.
난 가장 안전한 비행기가 우리 비행기일 거라고 빌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강철 같은 푸른 눈이 윙크를 하면서 나에게 응답했다.
우리 뒤로 지나가는 해협은 정말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대륙의 두터운
숲들이 둘러싼 지형이 보이자 영국보다 훨씬 커보였다. 우린 네덜란드
에 들어섰고 풍차와 전원의 집들과 함께 녹색 천지였다. 수로와 강들은
마치 은색 리본들 같았고 태양에 반짝거렸다. 작은 뭉게구름들이 아래서
터졌고 이는 해안포대의 대공포화였다. 이를 본 스피트파이어와 템페스
트 전투기들은 하강해 포대를 공격했다.
곧 DZ 상공에 도달했고 기체문에는 레드라이트가 들어왔으며
“일어 섯!” 구령이 떨어져 점프를 준비했다.
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Go 사인이 나왔고 1번 줄이 공중으로 뛰어나
가며 소리를 질렀다. “Wahoo Mohammed!” 그 소리를 지르는 대원
들은 경험이 있는 대원들이었고 이제 새로운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하늘에는 낙하산이 비처럼 쏟아졌고 진정으로 총천연색의 장관이
었다. 그러나 우린 이미 미학적인 관점을 잃어버린 군인이었다. 각
비행기들은 내부의 인간 화물을 쏟아놓고는 큰 원을 한번 그리더니
영국으로 돌아갔다.
1파가 내렸고 운 좋게도 이는 완벽한 기습이었고 병사들은 마치
솔즈베리 평원에서 훈련하듯이 기동을 시작했다. 가끔씩 총격이
있기는 했으나 거리가 멀었다. 휴대한 무거운 군장과 함께 빨리
해야 한다는 공기가 감돌았고 우린 열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버둥
거렸다. 소대들이 형성되고 우린 앞으로 나가며 앞 병력을 엄호
했다. 우린 아른헴에 걸린 마쓰 강의 교량에 교두보를 장악해야
했다.
빌 설리반은 웨일즈 출신으로 내 고향 네스 출신이다. 그 친구는
최근에 우리 대대로 전입 왔고 마켓가든이 첫 실전이었다. 설리번
은 나를 따라오면서 무겁게 숨을 쉬면서 헐떡이며 말했다.
“사방이 너무 조용합니다!”
난 포탄을 짊어진 상태로 무거운 등짐을 다시 조정했다.
우린 오스테레빅을 통해서 일렬로 행군하며 아른헴으로 향해
갔다. 사람들이 집에서 뛰어나와 사과와 물컵을 주며 기뻐했고
환영했다. 마치 자유를 되찾아준 정복자 같았다. 그러나 그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 아른헴 왼쪽에 바로 붙어 있는 오스테르벡 시가전은 잇빨중사
본인이 꼽는 가장 흉폭한 시가전 중에 하나다. 일산으로 말하면
종로구 크기인 곳에서 독일군 친위기갑사단과 영국군 공수사단이
격돌했다. 잇빨 주]
곧이어 우린 딱딱한 방어와 마주하게 된다. 우린 커다란 숲 근처에서
전진이 고착되었다. 독일군들은 광신적으로 싸웠고 자기들 위치를 정말
강력하게 지켰다. 우린 다음 교차로로 가기 힘들어졌고 대열은 느려졌다.
단지 몇 분 만에 소름끼치는 장면의 그림에 직면했다. 이때 독일군 소형
참모차량이 그 안에 들어왔다가 장소를 탈출하려 버둥거리다 오히려
우리 중대 오른쪽으로 들어와 총알 십자포화를 받았다.
기관총알로 차 유리가 완전히 박살났고 문은 열렸으며 시체가 거기 좌석
에 걸려 있었다. 한 명은 발이 차 안에 걸려 있었고 고급장교였는지 붉은
색 자수 휘장과 함께 번쩍이는 게 보였고, 그 와중에서 손에 리볼버 권총
을 쥐고 있었다. 운전병은 밖으로 떨어져 도로의 더러운 흙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몸에는 총알이 재봉질처럼... 차 뒤 좌석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 역시 기관총으로 난자되었다. 누군가 손봤을 부츠는 빛나고 있었고
망자의 얼굴에는 악마와 같은 미소가 보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일련의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서 우린 다시 중기관총과 소총들이 파열
되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총성이 메아리로 울리
면서 도탄들이 사방을 날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애처로운 소리에 망연
자실해졌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면서 하늘은 자주빛으로
바뀌었다.
하프트럭 한 대가 우리 오른쪽의 나무를 들이받으며 들어와 나무들을
짓밟으며 돌아다니면서 총을 쐈다. 마치 꿈에서나 나올 법한 선사시대
의 분노한 짐승 같았고 놈으로 인해 우리는 정신적으로 동요했다. 이어
박격포탄들이 떨어지면서 엄폐를 하느라 우린 갈라졌고 그 뒤에서는
총들이 우릴 향해 긁고 있었다. 수류탄이 터지면서 파편이 사방을 날
았다. 난 뭔가 내 생살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땅에 쓰러졌다.
“빌, 괜찮아?” 빌이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울부짖었다.
빌은 얼굴에 자기 손을 대고 손가락 사이로 말했다.
“1분만 있으면 괜찮을 거야! 하느님 감사하게도 내 눈은 괜찮아!”
그의 얼굴에는 작은 수류탄 강철 파편들이 후추를 뿌리듯이 날아와
박혔고, 얼굴이 부어올라 코믹 오페라에 나오는 뚱보 얼굴 같아졌다.
밀고 들어오는 하프트럭으로 인해 우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오기가 생겼다. 당시 내 다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까맣
게 잊은 채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다만, 흘러내린 피가 내 군화
속에서 질퍽대고 있었기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불쾌했다.
독일군은 비싼 통행세로 양 옆에 시체들을 남기고
마지 못하는 듯 비틀거리며 다시 땅을 내줬다.
우린 꾸준히 압박하며 아른헴 쪽으로 향했다. 다른 전우들이 앞
으로 나가는 가운데 나는 다리에 붕대를 감기 위해 잠시 멈췄다.
그러고 있는데 깜짝 놀랐다. 독일군 몇 명이 수풀을 통해서 갑자기
튀어나왔고 잎사귀들이 날렸다. 난 미친 듯이 도랑으로 들어갔고
온 몸이 얼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독일군들 바로 등 뒤에 아군
병사들이 스텐건을 들고 있는 걸 봤고 난 안도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 심문을 받기 위해 본부로 압송되었다.
도시의 건물 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발에는 산뜻한 잔디가
밟혔다. 이어 잘 손질된 관목담장과 함께 아름다운 가옥이 보였다.
그러나 건물의 외벽에는 (총알로 인한) 야생화들이 그려져 있었고,
난 그게 신성모독이라 느꼈다.
우린 강뚝을 따라 이동하면서 경계선 안쪽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우린 그 배역에 충실하고 있었는데, 다리를 지키고 있는 병력
들이 쓰라린 상황에서 여전히 다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다.
영국에서 날아오는 공수 2파가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기상으로
인해 묶여 못 오고 있었다. 안개가 꽉 꼈단다. 제기랄 아른헴은 꽤 날씨
가 맑다. 많은 민간인들은 전투 동안 지하실에 들어가 있었다. 혼란의
시가전 속에 코너를 돌 때마다 전투가 벌어졌고 기관총 십자사격과 떨
어지는 포탄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가장 좋은지 아무도 모르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러 곳에서 독일군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나와 도시의 일부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아른헴은 떨어지는 포탄과 함께 불타는 홀로
코스트 자체였다. 무자비한 포격은 아무런 패턴도 없었고 광선이 보이
고 나면 공중에 파편들이 날았으며 살기 위해 쏘고 또 쐈다.
한 명이 야생의 격노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가는데 그의 얼굴에
점착성 물질이 늘어붙어 얼굴 살은 뜨거운 생살로 변했다. 포탄이
우리 동료가 있던 자리에 직격했고 사방으로 생살이 흩어졌다. 이
러한 공포와 충격적인 장면으로 인해 젊은 병사들 상당수가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독일군 정보부는 연합군 공수부대가 네덜란드
중부를 공격할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비상으로 기갑사단
을 배치했다. 중화기로 무장한 기갑사단은 도시 북부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제9친위기갑사단, 잇빨 주] 그들은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건물에 자리를 잡아 우릴 내려다봤고 방망이 수류탄을 위에서
던졌다. 결국 이를 피해 거리와 지하실로 피하면서 백병전까지 일어
났다.
결국 우린 수류탄을 쓰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그러자 독일군은 위로
올라가려 했고 문으로 나가려던 독일군은 다시 우리에게 막혀 다시
지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우리는 탱크의 역동적인 소음을 들었다.
탱크장들은 우리에게 항복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우린 고수했다. 우린
아군에게 구출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 멀리서 포격소리가 들렸고 우린 그게 호록스 장군이 지후하는
영국 2군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상공에는 우리 연합군 항공기
들이 엄청 많이 아른헴 상공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상공에서 연합
군과 독일군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었다. 그런 혼란 속
에서 우린 외곽을 통해 다리로 가려고 했다.
탱크들은 가옥을 향해 기관총을 갈기면서 대포를 쐈다. 벽이 캔버스
천처럼 진동했다. 회반죽이 빻아지면서 먼지 구름이 일어났고 돌벽돌
들은 박살났으며 사방에 유리가 날렸다. 소대장은 1층에 어깨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우린 아낌없이 붕대를 감아주었다. 옆의 작은
방에는 근위대 척탄병 출신의 키가 큰 동료가 중간중간에 고함을 지
르며 버티고 있었다.
우린 서류나 지도 같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적이 탈만한 것에
모조로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우리 위치는 가망이 없어보였고 탄약
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우린 정말 완전히 지쳐 체력이 고갈되어 있었
다. 2일간 자지 못 했다. 잠시 짧은 소강상태가 이뤄지자 거리 밖에서
쏘는 총과 고함 소리만 들렸다. 그 정적은 오히려 더 두려웠다. 정적
속에서 우릴 죽이기 위해 독일군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빌 윌슨이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으르렁거렸다.
“이런 시팔, 도대체 어떻게 돼 가는 거야?”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되는 듯, 갑자기 문간에 빳빳하게 굳은 그림자
가 보이더니 젊은 독일 병사 하나가 나타났고 그 뒤에는 두 명이 더 있
었다. 그들은 16세 이상으로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소총을 쥔 손
을 아주 민감하게 유지하면서 “Hinder hoc.”이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눈은 어둑한 방을 빠르게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그냥
부주의하게 들어왔다면 그건 그들에게 자살과 같은 행위였을 것이다.
아마도 우린 동시에 발포해 한줄기 폭풍을 서로에게 선사했을 거다.
우린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소대장을 지시하면서 이 사람을 같이 데려
갈 수 있냐고 액션을 취했다. 그들은 우리 셋에게 손짓으로 그들이 서
있는 밝은 곳으로 나오라고 했다. 먼지는 자욱하고 그들 역시 우릴 두려
워하고 있었다. 그들 군복에 달린 반짝이는 것이 보였고 그들은 SS 친위
대 기갑사단이었다. 그들은 안뜰에 일렬로 서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댄
채 우리에게 나오라고 했다.
우린 길가로 호송되었고 독일군은 정중하게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타
라고 했다. 폭풍과도 같은 전장을 떠나서 이내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우릴 지나쳐갔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독일
에 대한 앙심의 감정을 나타낼까봐 두려워하는 듯 했다.
한 용감한 여성이 우릴 향해 뭔가 소리를 질렀는데, 손을 흔들지 않았
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 여성은 아마도 우리에게 힘을 내리는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때 우릴 호송하던 머리가 긴 광신자 같은 독일군
이 마우저 소총으로 그녀를 쐈고, 그녀는 벽에 손을 대고 기댔다. 트럭
이 굽이를 돌아갔기 때문에 중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2-3시간을 달리자 들판에 철조망 쳐진 곳이 보였다. 식물원 같은 곳이
었는데 거기에 우리와 같은 지친 포로들이 있었다. 영국인, 폴란드인,
네덜란드인들이 풀밭에 앉거나 누워 있었다. 그 옆에 창백한 얼굴의
네덜란드 민간인들이 살려 달라는 듯한 모습으로 독일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독일군 고급장교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연합군에 협
력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도 곤경에 처했지만 그들
은 더욱 불쌍해보였다.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린 한 시간 후에 프랑크푸르트 - 마인으로 이동해 심문 수용소로
갔다. 나무로 된 사각형 독방에 들어갔다. [입을 맞추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심문은 원래 각자를 격리시킨다. 잇빨 주]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린
어느 커다란 정부 건물로 갔다. 복도를 걷는데 만자십자장 완장을 한
히틀러 소년단들이 보였다.
방은 아름답게 번들거렸고 육중한 테이블이 있었으며 중간에 흑포도
같은 탐스런 과일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민간인이 매우 즐겁게 보고
있었는데 아마 독일 정보부 같았다. 그의 영어는 억양까지 매우 유창
했다. 그는 웃으면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라고 했다. 답한 뒤에 약간
의 먹을 걸 받아먹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왔다.
많은 걸 물었지만 난 이름 계급 군번만 말했다. 어느 비행장에서
이륙했고 어떤 비행기를 탔는지도 물었다. 난 이름 계급 군번만
반복했으며 더 이상 묻는 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내가
영국에 잡힌 독일군 포로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나 말이
없었다.
천진난만한 누군가가 조금 발설한 것 같은데, 독일군은 이 공수작전
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묻는 것 같았다. 두 시간 뒤, 심문
을 끝낸 사람들은 널따란 장소로 모여져 검은빵 조각을 하나씩 받았다.
그 빵으로 옆 구역 사람들과 담배로 바꾼 사람도 있었다. 사실 미칠
정도로 배가 고팠다.
Stalag IV B Muhlberg-on-Elbe
다음 날 아침 우린 엘베 누흘베르그 IVB 수용소를 향해 긴
여행을 시작했다. 빌과 같이 가지 않아 실망했다. 아마 알파
벳순으로 정한 것 같다.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일주일 내내
검은빵과 향이 무척 강한 치즈 조각이 식사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지도 편안치도 않았던 여행이다.
보초는 트럭 뒤를 그냥 열어두어 공기가 들어오도록 했다. 그건
반가웠다. 쾰른에서 정차해 잠시 팔다리를 폈다. 엄청난 폭격을
받은 곳이었으나 성당만은 우뚝 서 있었다. 피곤하게 일하러 가는
독일 민간인들도 봤다.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지쳐서 몇
명은 그냥 땅바닥에 누워버렸다.
우리가 들어가자 먼저 있던 포로들은 폭풍과 같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흥분해서 세세한 것까지 계속 물었다. 그때
우리 소대원 두 명을 거기서 만났다. 시실리에서 잡힌 친구들이었
다. 브리스톨 출신의 로이 해리스, 맨체스터 출신의 카트라이드.
다른 친구들 소식을 물었다.
거기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적십자사 물품 꾸러미였다. 초콜릿,
버터, 코코아, 사탕 등 좋은 게 많이 들어 있었다. 이곳 역시 주식
은 스프와 검은빵이었다. 러시아 포로구역이 보였는데 그들은 적
십자사 꾸러미를 받지 못했고 그들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
했다.
가장 흥미로운 포로는 1940년 영국 남부해안에서 포로로 잡힌 예비
군 (본토방위군) 출신 포로였다. 그 이야기만 하면 정말 웃겼다. 달밤
에 그는 해안 외떨어진 곳에서 파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구름이
강해 달빛은 가끔 나오는 정도였다고 하는 외로운 철야 보초였다. 그는
몰랐지만 당시 해안에 독일군 유보트가 음산한 바다에 떠 있었고 그 벼
랑 지대를 정찰하고 있었다. 유보트 승무원들이 보트를 타고 은밀히 다
가와 그를 아무런 경고도 없이 포로로 잡았다. 해안의 경비 상태를 알아
보려고 한 일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영국 본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려보낼 수가 없어 그는 그대로 유보트에 탄 채로 독일로
끌려왔다.
겨울의 밤하늘에는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연합군 폭격기들이
베를린이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을 폭격하러 가는 게 보였다.
폭격기는 삼각형 모양으로 길이만 1마일이나 되었다. 폭격 파장
으로 창문이 덜걱거렸다. 서치라이트가 오르고 대공포가 맹렬히
쐈다.
1944년 크리스마스에는 다른 친구들과 캐롤을 부르며 보냈다.
가사는 ‘Silent Night’이었지만 폭격기들의 가차 없는 폭격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자연적으로 가족 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숨겨둔 라디오에서 BBC 방송은 미군과 러시아군
이 독일 영토 깊숙이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봄이 왔고, 1945년 4월, 캠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뉴스
가 들렸다. 독일에게 항복문서를 받을 시기에 죽은 건 비극이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강력하게 남은 건 스탈린과 윈스턴 처칠뿐이었다. 루즈
벨트가 살아 있었다면 전쟁 후 냉전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
한다. 당시 독일 본토는 러시아군과 패튼의 8군이 경쟁하듯이 베를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포격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보초들과 지휘관들이 상당수 사라졌다. 도주한 것이 아니라 전선으로
나간 것 같았다. 보초들은 원래 영국의 본토방어 예비군과 같은 사람
들이었다. 그날 밤 로이가 나에게 굳은 표정으로 오더니 말했다.
“이봐, 오늘 밤에 나가자구! 지도와 절단기가 있어!”
수용소 안에 탈출조직이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소등이
되자 우린 기어서 철조망으로 향했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 섬광
들이 보였다. 내 발이 버둥거렸고 난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
셨다. 로이가 말했다. “갈 길이 멀어!”
수용소를 떠나자 새가 된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지만 모험이 기다
리고 있었다. 당시 강의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고 강변에는 초소들
이 있었다. 연합군은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린 밤에 이동
하면서 벌판과 숲을 지났다. 로이는 나침반을 보기 위에 종종 멈췄
다. 동이 터 올 때 우린 너무 지쳐서 무릎으로 기는 지경이었다. 그
때 크고 오래된 농장이 하나 보였다. 우린 헛간으로 들어가 지치고
땀에 젖은 몸을 눞히고 깊이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오후였고 해가 중천이었다. 밤은 악몽 같았지만 낮은
아름답고 따뜻했다. 주변을 정찰해 달걀 몇 개를 모았다. 거길 나와
농장 집으로 가는데 매우 두려워하는 눈빛의 노인 둘 명이 우릴 쳐다
보고 이었다. 우린 영국인이고 포로라는 걸 이해시키려 했다. 해칠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려주려 했고 단지 먹을 게 필요하다고 의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들이 굽실거리며 안으로 우릴 데리고 들어가 계란
후라이와 빵을 만들어줬다. 그 할머니를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체구가 건장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우린 작은 꾸러미에 음식을 담아 길을 떠났다. 우린 노인 부부에게
인사했고 돌아서 길을 떠났다. 어깨 너머로 보니 두 사람은 처음 봤
던 것처럼 그 자리에 있었고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숲으로 들어가
니 땅을 판 자국들이 있었다. 러시아군이 머물다 간 것 같았다. 매트
리스까지 가져다놓았고 민가에서 약탈했다 버린 옷이나 그런 게 보였
다. 그래서 그 노인들이 우릴 두려워한 것 같았다. 러시아를 휩쓴 나폴
레옹의 군대가 거꾸로 독일에서 재현된 것 같았다.
우린 벨기에 브뤼셀을 향해 방향을 잡기로 했다. 거대한 항구였기에
거기에 가면 영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전투지
역을 피해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결국 우리는 직전에 피해갔
던 큰 도로로 나왔다. 우리의 초기 히치하이킹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트럭들은 우리를 보자 오히려 속도를 내서 달아났다. 어두워지고 있
어 빨리 돌아가려는 것으로도 보였다. 그래서 다시 밤을 보내려고
하는데 한 대형 미국 트럭이 옆에 섰다.
“어딜 가려는 거요?” 운전사가 물었다.
“당신이 갈 수 있는, 최대한 전선과 멀리 떨어지게!”
우린 희망차게 합창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뒤로 제끼면서 타라고 했다. 트럭은 이내 아우
토반을 달렸다. 정말 어딘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숲 지대를 통과하고 계곡으로 접어들자 반대 방향에서 보급트럭의
무리가 나타났다. 훌륭한 경치에 장난감들이 나타난 듯 했고 마치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카젤의 미군기지에 도착한 것은 어두워졌을 때였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
미군 줄에 서서 밥을 먹었는데 포로수용소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식사는
왕실 대축일의 음식 같았다. 빵은 하얗고 꿀처럼 달콤했다. 미군은 모든
게 풍성했고 장거리를 온 우리를 잘 대접해줬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일단 영국군에 보고를 하고 포로를 보충대처럼 분류
하는 수용소로 들어간 다음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 목표였다.
그러나 거기 들어가면 몇 주가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그렇게 다양한 미군 기지를 돌아다녔고, 오히려 재분류
수용소로 떨어질까 봐 영국군은 피해 다녔다. 어느 날은 한 미군
주둔지에 들어갔는데, 저녁에 식당에 병사들이 모이더니 미국 배우
미키 루니(Mickey Rooney)의 쇼가 있었다. 그는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그의 기괴한 쇼는 정말 미칠 정도로 재미있었다.
미키 루니. 이 배우 상당히 훌륭하고 독특한 연기를 구사
하는 배우로 난 기억한다. 이 익살스런 캐릭터의 배우가
슬픈 연기를 할 때 세 배는 더 슬펐던 기억이 난다.
1945년 5월 8일 우린 브리쉘에 도착했고 가능한 빨리 영국으로
가고 싶었다. 벨기에의 수도면서 참 우아하고 고상한 도시였다.
18세기를 보는 듯 했고 거리의 바닥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때 광장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있었다. 요들 원수가 라인강
근처 아이젠하워의 본부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고 독일 육군
전체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베를린에서
러시아 주코프 원수와 함께 독일 원수 카이텔이 정식으로 조인
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참가를 안 했기 때문에 요들의 항복문서 서명은 러시아
군 입장에서 예비 서약으로 간주했다. 1945년 5월 9일 오후 4시 방송
에 나온 처칠은 전쟁의 종료를 선언했으나, 러시아 라디오는 이 시간
에 새와 토끼가 등장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다.
러시아는 다음날인 9일이 돼서야 종전을 발표했다. 그래서 러시아
의 V.E. Day는 하루가 늦었다. 프라하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으며
별로 언급되지 않았고 러시아는 일부러 놔뒀다.
그 이후
소련군 포로들과 끌려온 소련 국민들은 복귀가 지연되었다.
이후에 여러 사항을 종결짓는 얄타 회담이 열렸다.
브리쉘의 공항에 가서 그곳 상급자에게 보고했고, 우리의
특별한 상황을 듣더니 다음날 정오 정도에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라고 했다.
그날 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뉴스를 들었고 브리쉘은
미쳐 날뛰었다. 밤 동안 축하가 계속 되었고 카페와 바들이
문을 닫지 않고 와인과 맥주를 팔았다. 광장 등에서는 사람
들이 무리로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오래 기다렸던 평화
로 인해 사람들은 정신착란에 가깝게 기뻐하고 있었다.
회고하면서,
난 최근에, 6세기 경
중국의 인상적인 시를 하나 보게 됐다.
제목은 ‘전쟁의 승리.’
“무기는 숭고한 게 아니라 비참한 도구다. 사람이 그걸 사용
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평화와 고요가 사람에겐 최상이다.
정복은 하지만 즐겁지 않다는 걸 병사는 안다. 승리를 기뻐하
지만 그건 살인의 기쁨이 될 것이다. 승리의 축하는 사실 장례
식이다. 인간 에 대한 학살은 애도의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전투의 승리가 그 자신들에게 비탄의 페스티벌이다.”
내 이야기는 그저 한 줌 밖에 되지 않는다.
난 낙하산 배지를 달고 레드베레를 쓴 사람
으로서 특권을 누렸고, 또한 명예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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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에 특교단에서 비밀쪽 사람 하나가 왜 코끼리(기구) 하냐고 이상하게 따졋다는군요. 그게 실전적이냐 뭐냐 하면서.
저격사선에 사람 나가있는데 방아쇠울에 손데고 조준하고 있고,
수송기 운항에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 줄 모르셔서 그런가 봅니다.
우리 때 C-123 타면서 조교들이 그랬습니다. 수송기 날면서 항공연료
값이 그냥 500원짜리 동전 1초마다 뿌리면서 가는 거라구요. 사실
수송 강습헬기 많으면 점프할 필요도 없죠.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걸
군인들에게 뭐라면 참 애매하죠.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브리핑하는 자료를 보니 기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1로 보면 수송기는 수백배 되더군요
그리고 온갖 병종에서 다 훈련 받으려 오고 그 당시 교육인원도 적지 않으시더군요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대량으로 병력을 양성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어쩔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격장 사고는 표적지 갈음시에 있었던 일인데 나가 있는 병력을 교관이 인지 하지 못하고 참여자의 자세를 잡게 하여서 일어난 일이고 사실 총알도 아직 삽탄전 이었습니다 물론 바로 참여자를 뛰로 뺏습니다. 사격장에서 간혹 일어나는 부주의에 의한 사고였다 하겠습니다. 그리보니 저도 예비군 훈련때 바로 앞조에서 그런일이 있어서 감흥이
마지막은 군진 수칙이 생각나내요..
나는 만약에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더라도 계급,성명,군번,연령.... 조국이 나를 보호 하고 있음...
항상 연합군 맨앞쪽에 있던 분들이군요
너무 고생을 하셔서 인지 왠만한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신듯 합니다.
영화에서 많이봤는데 연합군포로들이 독일군에 잡혀서 군번.이름. 계급과 성명이외에는 모른다고-- 어떤일이있어도 자신이알고있는 비밀을 누설하지않을려고 정말훌룡한 군인들입니다
낙하산이 애초에 1차대전에서 기구 관측대원이 사용하던 물건이고 보면...비용을 절감하며 조금이라도 더 강하훈련을 시키기위한 최선의 방법이아닌가 생각됩니다(코끼리)...영국군의 특이한 점은 미,소,독등의 공수부대와 달리 반드시 개인의 원 소속부대를 명기하고 심지어 공수연대의 몇 대대라는 표시만 보면 원래 어떤부대에서 파견된 부대인지도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는 정말 이해가 안가지만 이 또한 직업군인의 세계일까요?
심지어 정규군이냐,지방군이냐,국왕직속의 부대냐,현역이냐,예비역이냐,지원병이냐,전시징집병이냐...등등 아주 자세히 분류해 놔서 골머리를 썩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