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공파 갑자보 서문 (熙川公派甲子譜序)
< 副堤學公18代孫 喜哲 書>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 미덕(美德)이 없는 선조(先祖)를 치켜 올리는 것은
속이는 짓이며, 선행이 있는 선조를 모르는 것은 사리(事理)에 밝지 못함이요,
알고도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은 착하지를 못한 것이니, 이 세 가지는 군자가
부끄러히 여기는 바다. 』 하였고, 고인(古人)은 말하기를 “친족의 근본은 형제요
형제의 근본은 한사람의 몸이였것만, 복(服을) 면(免한)지 몇 대 이후에는 서로
남같이 모르고 지나치게 되니 아! 제 몸이 있기까지의 선대와 혈족을 밝히고
조상을 공경하여 받드는 족보를 보는 자는 효도와 우애하는 마음이 유연히
일어날 같다.”고 하였다. 이 명인지행(明仁人之行)의 술선(述先)과 효제지도
(孝悌之道)의 수족은, 족보 책으로써 자손 대대로 가르쳐 내려 갈 수 있는
까닭에 족보는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난세(亂世)에는 더욱
긴요하고도 절실한 것으로 일컬어 오는 바이다.
우리 창녕 조 씨 전종(全宗)의 처음 간행한 대보(大譜)는 계유족보(癸酉族譜)
이다. 이 계보(癸譜)은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인 숙종13년 정묘(1687)에 편집을
시작한 것으로서, 희천공의 후손인 낙재공(樂齋公) 휘 전주(殿周). 송암공
휘 면주(冕周)와 천성공 휘 경수(敬修)의 후손인 생원공 휘 건(建.) 구봉공
휘 우(遇가) 매계보와 회곡보등의 여러 가첩을 모아 다듬어 편집을 하고, 희천공
후손인 병사공 휘 정량(廷亮)에 의하여 숙족19년 계유(1693)에 간행 반포되었다.
정보(丁譜)후에 거듭 간행된 대보는 고종17년(1880)의 경진족보이니 희천공
후손인 연암공 휘 석우(錫雨)와 하강공 후 석우(錫與) 형제분의 7년에 걸친
보역을 간포 되었고 정보후 113년 만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선대의 명망있은 어른들이 조상의 업적을 계승 발휘하신 데
대하여 명곡최상공 석정(錫鼎)은 우리 계유대보에 서문하기를 『 조씨의
세덕지미(世德之美)와 수보지성(修譜之誠)은 삼난지췌야(三難之萃也)이며
이선지병야(二善之並也)라. 즉 이 세상 3가지의 어려움을 모두 성취한 것이며
2가지를 훌륭한 일을 함께 함이라.』고 하고, 『그 세덕의 아름다움은 세대가
오래도록 이어오면서 번창한 것과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온 가문의 명성과
신분이 높고도 지조를 굳게 지킨 명망 등으로서 이것이 삼난의 성취이며,
그 수보의 정성은 술선한 효도와 수족한 화목으로서 이것 이선을 함께한
것이다.』라고 부러웁게 칭찬하였다. 그리고 연암공(烟巖公)은 경보서문
(庚譜序文)에 “24년간의 대역으로 이룩하게 된 정해보은 상하가 서로 이어지고
처음과 끝이 모두 열거가 되었으니 족보가 그제야 크게 갖추어졌다.”하였고,
또 하강공(荷江公)의 서문에는 “족보를 만드는 법이 세대가 내려오면서 더욱
갖추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계보와 정보와 경보(癸譜,丁譜, 庚譜)》를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의 3대 구보』라고 하며, 그 뒤의 크고 작은 수보에 있어서 규범이 되어
왔었다. 따라서, 경보 후 103년만의 계해년에 수보를 시작한 희천공 파보도
역시, 계. 정, 경보를 세계와 보법의 연원(淵源)으로 삼아 준거(遵據)하기
로하고, 이 기본원칙 밑에서 제정한 《소보 규정》.《수단 규칙》.《범례》.
및《임원 수칙》.《단자접수 수칙》등의 여러 가지 보규에 의하여 수보를
결행한 바이다.
수보의 과정에 의심스럽고 다시 자세히 생각하고 살펴야할 일과
구보(계.정.경 3대 구보)에 빠진 채로 지내온 실재자손과 부록편에 수록되어
있는 여러 일가에 관하여는 3대 구보을 수보할 적에 지켜온 ‘종회 상확
(宗會商確:종중의 회의에서 헤아려 생각하고 비교 검토하여 내리는 확실한
결정)의 옛 보첩대로 반드시 각 대문중의 상확을 거친 연후에 보소의 심의
위원회에서 최종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단자를 거두어 모음에 있어서,
문중내의 하는 수 없는 딱한 사정으로 수단에 응할 수 없음을 미리 통보하여온
경우와 국변과 전란에 헤어지고 흩어졌거나 선재의 계통을 잊어버려 수보에
응하지 못한 처지와 국토의 남북 분단으로도 왕래가 두절되어 단자를 닦아
모을 수 없는 현실의, 이 몹시 애석한 사정에 대하여는 삼대보(三大譜)에
입록된 선대를 부록편까지 모두 이 파보에 옮겨 실어 뒷날에 수족(收族)하는
자료가 되도록 특별히 배려하였다. 세덕문헌(世德文獻)은 대폭 증보 하였으며,
수단. 편집. 감수 및 인쇄와 반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은 건건(件件)히
심의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집행되었음을 밝혀 둔다.
이 갑자파보(甲子派譜)는 희천공 후손의 배달회가 옥산재을 중건하여 낙성
(辛酉年1981청명절)한 후에 전파적힌 여망에 부응하여 추진한 바로서,
계해년 음력2월 20일에 사효재에서 개최된 배달회 제7차 정기총회에서 의결한
만장일치의 종의로써 수를 단행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초5일에는 보소를
개설하고 보규의 제정과 더불어 일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갑자년(1984년)
말에는 단자가 거의 모아지었다. 그리하여 올해 병인년 7월19일(양1986년
8월24일)에 편집과 감수 작업을 완료하고 29일에는 족보 인쇄 전문자인 농경
출판사와 인출을 약정하니 보소의 개설 이후3년5개월 만에 인쇄기에 올리게
된 바이다
그러나 강토가 둘로 잘려진 세변으로 조국 전역의 전종 대보를 다까오신 선대의
업적과 뜻을 계승하지 못한 일이 오늘날 후손의 몹시 원통한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이 달은 희천 선조께서 고려 말 임신년(1392년)7월의
조선태조 혁명에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절의(節義)를 지키시어
영천(永川)에 은거 하신 때로부터 꼭 594주년이며, 편수의 완료와 제판을
시작한 날이 희천공의 휘신(諱辰)인 7월29일과 배위 정부인의 휘신(諱辰)인
7월19일로 우연히도 상부(相符)하니 세대가 비록 멀기는 하나 조상님을
뵈옵듯이 숙연해지는 정성이 어찌 새롭지가 않겠으며, 또 이것이 어찌 낙재공
(樂齎公)이래로 수보사업(修譜事業)을 이어 오신 선대의 조령(祖靈)이 가만히
도우신 바가 아니랴.
이 보역(譜役)이 완성을 알리기까지의 4년 세월에 재무 부도청(財務副都廳)
규학(圭學)씨의 지원과 총무 부도청(總務副都廳) 준(埈)씨의 노고가 극진하였
으며, 출판 간사(出版幹事) 영근(英根) 보(甫는) 인출(印出)과 받질(頒帙)에
감수 간사 명근(命根) 보(甫)는 문헌의 교주(校註)에 고념이 많았다.
우리 파중(派中)이 처음으로 간행하는 이 막중한 파보에 엉성하고 완전치
못한 탄식은 오로지 견문과 학식이 얕고 재주 없는 불초(不肖)가 도청(都廳)의
중책을 맡았기에 모든 일을 정통(精通)하게 보살피지 못한 허물임을 스스로
책망하는 동시에 이 뒤에 어질고 덕망 있는 이가 술선(述先)과 수족(收族)에
넓은 연구과 많은 자료로써 거듭 닦고 다듬어 이선(二善)을 함께하고 오랜
후세까지 자랑할 수 있는 완전한 족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하는 바이다.
경진족보(庚辰族譜)후 106년 병인(丙寅) 7월29일(양1986년9월3일)에
부제학공(副提學公)18대손 희철(喜哲)은 삼가 기록한다.
***자료: 昌寧曺氏 熙川公派譜 券之1 先代文獻 國譯本(1989년 發行)***
첫댓글 연암공 휘 석우(錫雨)와 하강공 후 석우(錫與) 형제분의 (석여)...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