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시대에 장수과학을 담은 강빛마을 이야기
고현석
강빛마을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평리 지내에 새로 생긴 109채의 큰 마을이다. 내가 추진위원장을 맡아 태평지구 전원마을조성사업으로 정부로부터 기반시설공사 지원을 받았다. 건설업자가 집을 지어 분양한 것이 아니고, 109명이 돈을 모아 10만여 m²의 땅을 사서 만든 마을이다. 곡성군수 8년을 하는 동안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인구감소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 좋은 농촌공간이 텅텅 비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현실이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보니 모르는 사이에 장수하는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준비 없이 그냥 은퇴를 맞은 서울 등 수도권의 은퇴세대가 눈에 들어 왔다. 대개 집 한 채가 덜렁 남았는데, 그 집값이 비싸므로 집을 팔고 내려오면 여생을 살아갈 현금을 쥐게 되니 얼마나 활발한가? 살고 있는 집값은 비싼데 춥고 공기 나쁜 수도권의 은퇴세대와 땅값 싸고 따뜻한 전라도 농촌이 상생하는 좋은 일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은퇴자마을을 만들기로 했던 터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2007년 가을에 서울대학교에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이 개설되어 장수과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장수사회선도최고전략과정으로 바뀌었다. 서울의대 박상철 교수가 소장으로 있던 노화·고령사회연구소가 주관하였다. 박 교수는 세계적인 노화학자이며, 한국의 장수과학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널리 사회과학을 아우르고 나아가 인문학적 소양까지 포섭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훌륭한 과학자이다. 그는 100세인 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촌에 대한 통찰과 애정을 체득한 것으로 보였다. 전국의 장수도(長壽度)를 분석하여 구례·곡성·순창·담양의 이른바 구곡순담 장수벨트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의 연구팀이다.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의 어느 한 강좌도 내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장수과학의 지식이 강빛마을 모델에 녹아들었다. 고령사회가 되면서 노인은 보살펴야 할 복지대상으로, 사회의 부담으로 파악되면서, 시끄러운 논란이 많다. 그런데 당장 보살핌을 요하지 않는 수많은 노인들은 정책에서 방치되어 있다. 장수과학은 고령인들이 당당한 삶을 살도록 뒷받침해 주는 학문이다.
장수사회학은 노인이 되면 노인끼리 모아 살아야 좋다고 가르친다.
또 손자·손녀가 10살 무렵이 되면 할아버지·할머니를 귀찮아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편 장수의학은 나이 들면서 기능이 저하되는 속도가 장기마다 다른데, 폐와 신장의 저하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농촌, 중소도시, 대도시 순으로 장수도가 높은데, 유럽은 가족의존적인 남유럽보다 부부중심적인 북유럽이 더 장수한다. 이런 사실과 함께 왜 그런지도 장수과학에서 배웠다. 암이 많은 이유는 예전보다 오래살기 때문이다. 근래에 치매가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매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은 늘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고 한다.
강빛마을은 장수벨트에 속하는 곡성군에 자리 잡고 있다. 공기가 달다고 할 만큼 맑고 시원하며, 늘 신선한 친환경 식재료를 얻을 수 있다. 찌꺼기 거르기에 분주한 폐와 신장의 노고를 덜어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나이 들면 병나서 병원 갈 걱정이 앞서는데 강빛마을에 살면서 건강관리를 서울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잘 할뿐만 아니라 병이 나면 길 안내를 잘 받아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취미생활·평생학습·성취활동·봉사활동을 서울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게 할 수 있다. 강빛마을이 기지가 되어 젊은 세대 및 지역사회와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요즈음 귀농·귀촌 바람이 불면서 상처받고 유턴하는 사례가 많다는데 강빛마을에서는 그럴 걱정이 없다. 흔히 고령남성들은 부인이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강빛마을에 오면 부인은 온통 남편 뒷바라지에 매달릴 걱정이 앞서는데, 실제는 거꾸로다. 미국에 있는 자녀가 출산을 해서 부인이 가서 돌봐주어야 할 경우에 반년이고 일년이고 부인 혼자 다녀와도 된다. 강빛마을에서는 남편 혼자 살아도 걱정이 없다. 각자 자기 집에서 독립생활을 하지만, 마을에는 공동식사 등 다양한 공동의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은퇴세대가 100가구 이상 모이면, 이런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운영할 수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2시간 거리 이내라면 좋겠다.”고들 했다. 수도권에 터 잡은 가족들, 특히 손자·손녀와 멀리 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강빛마을 모델에 공감한 남편들이 돌아가 부인의 동의를 얻지 못해 번번이 나자빠졌다. 입주자 모으기가 정말 힘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109명의 집주인 앞으로 각각 등기를 마치고 2013년 4월 20일 개촌하였다. 집주인의 연령을 보면, 60대 이상, 50대, 40대 이하가 대략 1/3씩이다. 얼핏 이상적으로 보이는데 은퇴자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강빛마을은 노인을 모시는 시설이 아니다. 어려운 노인들을 보살펴 드리는 요양시설도 아니고, 비싼 입주금과 관리비를 받고 노인을 잘 모셔드리는 이른바 실버타운도 아니다. 모든 시설을 다 갖춰 자기들끼리 사는 호화별장마을도 아니다. 지역사회와 시설과 활동을 공유하면서 자기의 건강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하고자 하는 은퇴자마을이다. 한마디로 강빛마을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한 노년, 다시 말하면 제3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은퇴자마을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건강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하는 삶을 선택하기를 두려워해서는 건강장수를 누릴 수 없다. 장수보다 건강이 더 중요하다.
장수는 전지구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제3기 인생에 대한 선진모델이 없다. 정책적 · 자구적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강빛마을 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농촌공동화 방지는 강빛마을의 결과로서 뒷전으로 들어가고 장수시대에 활발한 제3기 인생의 추구가 전면으로 부상한 셈이다. 명실상부한 은퇴자마을의 모습으로 출발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강빛마을에는 이미 제3기 인생을 향한 다양한 실험들이 싹트고 있다. 은퇴세대에게 서울의 일상은 일거리가 못되고 소일거리에 불과하지만, 강빛마을에는 일거리가 많아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일자리가 생길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강빛마을 주택은 건평이 모두 100m²의 2층인데 1층에 은퇴세대가 살면서 2층은 민박을 운영하는 모델이다. 현금소득도 얻지만, 치매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새로운 마을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제1선이고, 민박으로 외부사람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제2선이다.
아직 어린이놀이터를 만들지 못했어도 마을을 다녀간 손자·손녀들이 모두 좋아하며 다시 오고 싶다고 한단다. 그럴 것이다. 가 봐야 자기 집과 똑 같은 할아버지·할머니 집보다는 뒤에 산이 있고 앞에 강이 있는 강빛마을을 더 찾고 싶지 않겠는가? 홀로 친구들과 떨어지는 것을 걱정했던 부인이 오히려 친구들이 찾아오고 마실을 돌면서 마을일도 거들며 좋아해서 그 남편이 안도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멀다고 하는데, 서울과 가까운 곳보다도 부부가 여생을 보내기에 적합한 곳을 더 중요시할 날이 머지않다.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모아 사는 것이 싫다고 한 친구가 있었는데, 일상 만나는 사람들을 보니 온통 나이 먹은 사람들이다. 강빛마을에서는 단체적 · 개인적으로 지역사회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 안에 청년회와 청년들도 있다.
그러나 강빛마을 모델이 가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은퇴세대의 정주가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 강빛마을에 정주하기 어려운 주택소유자들이 은퇴세대에게 주택을 매도하도록 양해를 구하고, 은퇴세대 유치에 나섰다. 현실의 강빛마을 주택에 대한 부동산거래이므로, 농촌정주를 원해도 마땅한 지역과 주택을 못 구해서 애태우는 은퇴세대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기대한다. 서로 친한 두서너 가구가 함께 오면 아주 이상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