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15) - 소설가 이지흔
접시꽃 피어있는 화단에 물을 주는 평화로움…
소설마다 보편적 한국인의 고향의식 내재
마음·지리적 공간 지키며 사는 세상 꿈꿔
작품행간의 고통론,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
2003. 06.11(수) 21:05
소설가 이지흔(60, 본명 李光男)씨는 남 앞에 자신을 과대포장해 내 보이기를 극히 싫어한다. 자신이 그럴 뿐 아니라 남이 그렇게 해주는 것도 영 낯뜨거워 하는 성격이다. 다시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사정없이 비위가 약한 사람에 속한다.
한마디로 그는 예민한 발톱과 날카로운 이로 상대를 기죽이고 공격하며 살아가는 맹금류이기보다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 속의 쇠똥구리와 같은 그런 사람이다.
그가 현재 홀로 기거하고 있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문암리 금성산 밑에서 그를 만나는 순간 그에 대한 편견이 모두 사라졌다. 어쩌면 섬세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그일 거라고 생각하며 대화를 나눴지만 호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의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내면에는 마음의 고향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지흔의 소설은 고향을 가슴에 담고 사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고향의식을 줄기차게 되새김질 하면서, 부당한 권력과 잘못 풀린 역사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몇 겹으로 고통받는 약자들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은 폭력적 방법으로 보복을 다짐하거나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보통상식을 가진 보통사람들이다. 이지흔은 그 보통사람이 마음의 고향과 지리적 고향을 함께 지키면서 상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의 방법은 무저항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비폭력주의는 공동체의 화해로운 삶을 위한 기본조건이기에 오히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고향이란 결국 우리 모두 화해롭게 살 수 있는 평화공간이 아닌가. 고향을 고향답게 가꾸고 지키는 것, 그것은 이지흔 소설쓰기의 근간이다. 이때 고향은 지리적 공간이면서 한편으로 마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지흔은 이 두 고향을 함께 지키는 듬직한 수문장과도 같은 소설가다.
첫 소설집 '기도하는 쇠똥구리'나 두 번째 소설집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고향은, 아직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이 소설가가 자신의 가난을 미처 가늠하지 옷하고 살던 목포의 어느 간척지 동네라든지, 그가 국어교사로 봉직하던 보성군의 예당이나, 그의 여러 처절한 경험이 묻어있는 광주의 어느 거리를 의미하기 보다는 그것은 차라리 어떤 종류의 진실어린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다.
중년의 한 사나이가 피자마바람으로 마당에 나와 수도꼭지에 연결된 고무호스의 한 끝을 잡고 봉숭아가 자라고 접시꽃이 피어있는 화단에 물을 주는 평화로움, 아직도 소년같은 얼굴을 가진 가장이 제 아버지의 묘지 옆 풀밭에서 뛰노는 아들녀석들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고, 그 아내는 근처 농가의 일손을 거들어 준 보답으로 고구마 한 광주리를 얻어오는 그런 행복,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돌계단이 있는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어내려가면, 그의 제자이고 후배인 젊은이들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정경이 그의 삶과 소설의 진면목이다.
문학속의 고향은 뒤돌아보는 고향이다. 그것은 지나왔던 어떤 기억인데, 묶어둔 기억이다. 일곱 살 나던 해 7월에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를, 어떤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 기억은 어딘가에 억눌려져 있다. 이 억압된 기억이 주변을 거래처의 전화번호, 전철 4호선의 정거장 순서 따위의 활성화된 기억이 감싸고 있다. 핏속에 녹아있던 억압된 기억이 의식속에 범람하여 활성화된 기억에 혼란을 주고, 내 삶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고통스럽게 묻게 한다. 이 제어할 수 없는 기억은 바로 삶의 뿌리이다.
문학은 숨어버렸을 때 찾기 어렵고 쏟아져 나올 때 틀어막기 어려운 이 기억을 조종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를 지니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모든 도정, 모든 추억의 문학이 이 장치에 힘입는다. 전생에서 보내온 어떤 신호처럼, 미래에 대한 무슨 예감처럼 한순간 번득이고 사라지는 이 뿌리에의 기억, 모든 고향상실의 문학은 거기에 가장 높은 비극적 초월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지흔의 고향은 뿌리 뽑힌자의 고향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뿌리를 박아야 할 곳에 박은 자의 비극이다.
이지흔에게서 나타나는 이 비극의 진실들은 모두 저 5월의 광주와 연결돼 있다. 그 5월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으며,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그와 관련된 사건들이 사법처리되는 과정을 그의 직업상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그의 소설에 그 5월이 가시적인 주제가 되어 나타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 행간에는 항상 5월이 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쇠똥구리'의 전직 생물교사 현우는 "그해 5월에 무너"진 사람이며, 같은 소설의 주인공 용구의 아들은 같은 달에 죽었다.
'증발'에서 말하는 구신(狗腎)의 증발은 그 5월에 사라진 사람들의 실종이기도 하며, 광주문제가 기억되거나 잊혀지는 과정에 있어서의 그 모든 진실들의 왜곡과 은폐이기도 하다.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작은 고통들은 어디서나 그 큰 고통과 만난다.
그는 아물다만 상처 속의 탄환같은 이 고통을, 우리 삶이 견디어 갈 절망의 한 기층으로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희망의 첫계단으로 삼기까지 한다. 이지흔이 거의 고의적으로 그 5월의 광주를 그의 소설의 직접적인 주제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우리에게 그 진실을 깊이 있고 총체적으로 말 할 수 있는 언술의 체계가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 대한 강력한 발언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의 모든 고통론과 고향론은 복고적 과거지향이 아니라, 그의 한 소설의 제목 '예감의 나무'가 말하듯 미래의 희망에 속하며, 상한 뿌리에 대한 확인은 죽었다고 믿어지는 나무들의 꽃피우기에 해당한다.
이지흔 하면 소설 말고 떠오르는 것은 그의 판소리다. 어쩌다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어우러져 거나하게 취기라도 오를라치면 '……그래 갖고'하면서 '심청전'한 대목을 숨가쁘게 사설로 왼 다음 심봉사가 마누라를 잃고 통곡하는 장면을 구슬프게 읊는데, 흥이 무르익으면 단가 잡가에 한춤까지 더덩실 곁들여 절정을 몰고간다. 그러다 보니 비록 아마추어 실력이긴 하지만 그의 판소리가 한때 이 지역 문인들의 행사땐 어김없이 무대에 올려지곤 했다. 5월 민중항쟁기념 문학행사와 광주문인협회 문학의 밤에서도 한가락 뽑아 자리를 배운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가 오래전 모 신문에 '광일춘추'라는 칼럼을 쓸 때 '공무원의 굴레'라는 제2금융권 보증문제와 관련해 신용금고라는 제2금융권이 출시에 세우는 보증인으로 반드시 공무원을 고집하는 건 신분과 체면에 얽매여야 하는 공직자의 약점을 이용하는 교활한 수법이라고 꼬집었었다. 또 '고기 한 근'이라는 칼럼에서 그 당시 더러 있었던 저울 눈금 속이는 사례를 지적해 금고연합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뻔 했고 식육조합으로부터는 상당한 심리적 압력을 받기도 했다.
문학은, 특히 소설은 인간을 구원하고 역사를 이끈다. 그는 진실로 소설이 그러기를 기도하며 목사 콜리어의 말을 되새긴다.
"하나님에 관한 글이 나로부터 오히려 하나님을 멀게 하고, 인생에 관한 글이 거꾸로 생의 의미를 가볍게 하며, 도덕에 관한 글을 읽고 그 글이 도리어 도덕관념을 약하게 하였다면 네가 쓴다는 소설이란 대저 무엇이냐? 나는 빵이나 우유를 원한다. 술이나 아편을 바라지 않는다." 이렇듯 그는 질박한 뚝배기에 삶의 잡탕을 끓여 내겠다고 말한다.
그는 함께 사랑하고 함께 부대끼는 일, 다가오는 미명을 위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추스리는 일은 자괴심을 안고 허물어진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숙연히 일깨워 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쇠똥구리, 그 지지리도 못나고 볼품없는 쇠똥구리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그는 다시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글^이재창기자 jclee@kjdaily.com
사진^김기식기자 pj21@kjdaily.com
대학때 백인빈씨 만나 체계적 문학수업
소설습작 15년만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가 이지흔씨는 1943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부모의 품에 안겨 국내에 정착한 것은 그가 세 살때이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의 부모님은 첫 봇짐을 광주에 풀었고 광주에서 성장한 그이지만 사춘기와 함께 가난과 절망을 겪었던 목포를 잊지 못하고 목포를 고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억에도 없는 이국땅을 고향이라 부르느니 어린시절의 아픈 추억이 각인된 땅이야말로 진짜 고향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그는 목포문태고등학교 재학시 문예부장으로 동인지 ‘바위’를 펴내기도 했다. 당시 작고한 권일송 시인이 담임이었으며 그분에게서 시공부를 배웠다. 또한 방송극과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평론가 황현산과는 당시 만난 선후배 사이다.
그의 문학적 집념은 고교를 졸업하면서 드러난다. 고교시절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그는 두 번이나 서울대를 낙방하고 자연스레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그 당시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처음 신춘문예에 투고한 것은 아마 스물한살 때였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대학에도 낙방하여 재수생의 서러움을 명찰처럼 가슴 한복판에 달고 다니던 때였는데, 1월에 있을 입시를 앞두고 12월에 있는 신춘문예를 겨냥하며 가을부터 글을 쓴다면서 퍼질러 앉아 있곤 하였다. 남들처럼 재수생 학원에나 다닐 일이었는데, 나는 우환 중에도 모든게 시답잖아서 나주 다보사(多寶寺)라는 절에 처박혀 있었다. 염불에는 힘 안쓰고 젯밥만 밝힌다는 격으로 나는 하라는 입시준비는 팽개치고 시나 소설을 쓰며 밤을 새웠다. 절에서 스님들과 살다보니 한수 더 떠서 출가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만 들었고…”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을 문학에 미쳐있었다. 그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다니면서 소설가 백인빈씨의 지도 아래 박해옥 등과 함께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원로문인들인 손소희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의 체계적인 공부를 했다.
그후 그는197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벌판에 선 사람들’이 당선되었고, 74년엔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고목’이 당선됐다. 그해 그는 보성 예당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 그는 한승원 주동후 이명한 김신운 등과 교류하면서 소설문학동인회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지런히 소설을 공부하고 습작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로 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벌거벗은 자여!’가 당선돼 그렇게 고대하던 등단의 관문을 뚫었다. 실로 소설습작 15년만에, 신춘문예 투고 13년만에 안은 영광이었던 것이다. 당시 심경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안할 애기지만, 나는 지금까지 신춘문예에만 13년이나 낙방한 염치없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한두 번의 투고로써 거뜬히 당선해버린 사람들의 당선소감이나 읽으면서, 그것과 나란히 발표되는 심사평 속에 음울하게 끼어 있는 내 흔적의 훼멸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배설의 욕망을 붙안고 막다른 골목길로 허겁지겁 뛰어든 사람처럼 헐떡거림을 동반하였는데, 그 헐떡거림은 이윽고 나는 서서히 미치게 했던 것이다”
1981년 그는 교직을 청산하고 광주고등법원 도서실장으로 부임 광주항쟁의 충격으로 소설쓰는 일이 시답잖아서 이후 거의 10여년동안 절필, 술에 탐닉한 탓으로 알콜중독에 걸렸다. 알콜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판소리, 북, 장구, 대금 등을 배우고 낚시에 미쳐 1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90년에 들어와 본격적인 작품발표를 하기 시작해 93년 소설집 ‘기도하는 쇠똥구리’를, 그 이듬해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을 펴내면서 제6회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97년엔 장편소설 ‘소쇄원’을, 99년엔 꽁트집 ‘네 사람이 쓴 일흔두편의 짧은 이야기’(공저)를 발간했다.
그는 98년 그의 인생에 있어서 뜻하지 않는 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바로 암과의 싸움 이었다. 그는 그해 방광암 수술을 받고 99년 암과의 투병을 위해 직장인 광주고등볍원에서 명예퇴직했다. 2000년에 두 번째 수술을 받고, 전남 담양군 금성면 문암리 대숲가에서 암투병을 위한 황토집을 짓고 현재 혼자서 기거하며 요양중이다. 그은 그 암과의 싸움 속에서도 알샘닷컴의 ebookknbook에 장편소설 ‘호루라기’를 집필중이다.
아늑하게 자리잡은 황토집을 대나무숲이 감싸안은 그 곳에서 그는 이제까지의 삶과 문학의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 그의 건강회복과 젊은 습작시절 보여주었던 문학의 열정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