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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활의 봄을 소망하며 영광스럽게 삽시다
- 나이 듦이 고맙다(김동길 저, 두란노, 2015)를 읽고-
이완순
K형. 지금 토론토 겨울은 어떻소? 이곳도 무척 춥소. 북한 핵실험에다가 갈팡질팡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정치꾼들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소.
그런데 K형. 카톡 방에서 매일 만나는 내가 이렇게 불쑥 장문의 메일을 보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소?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것은 다름 아니오. 지난 주말 카톡에서 “늙으면 죽어야지. 9988? 재앙이야, 재앙.” 하며 맞장구치던 것 생각나오? 지금 그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오.
바로 김동길 교수의 “나이 듦이 고맙다”를 통해서요. 김 교수는 이 책 에서 나이 들어 인생의 긴 겨울을 맞고 있다고 괜히 자승자박만 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 했소. 아직 풀어야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다면서 말이오. 꾀죄죄한 노인네로 머물러 있지 말고 성경과 기도를 통해 부활의 봄을 기다리며 사랑의 불꽃을 지피라 했소.
얼마나 가슴이 시원하던지! 김 교수 특유의 잔잔한 문체로 하나하나 이야기하듯 화두를 던지며 풀어가는데 단숨에 두 번이나 읽어 버렸소.
책은 다음 주 중 보내 주리다. 그 전에 내 자신 마음에 다시 새겨 둘 겸 내용을 정리해 형에게도 보여 주는 바요. 나중에 참고해 보도록 하오.
김 교수는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유보다 더 큰 행복’, ‘나도 너처럼 늙어 가리라’, ‘끝이 있는 곳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타이틀로 4부에 걸쳐 늙어가는 사람들이 지향해 나아가야할 갈 길을 제시해 주었소.
그 내용을 보면, 나이 듦이란 확실히 병과 죽음의 고통이 따라 두려워 지는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예수그리스도께로 가는 길목과 맞닿아 있음을 상기해 보면 소망을 갖고 영광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어려움을 맞이할 때 꼬장꼬장한 태도로 누가 무얼 잘못했는지를 파헤치느라 정력을 소비하지 말고, 항상 성경을 읽고 그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며 따라가야 한다 했소. 그리고 어디를 가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기도를 드리는 삶을 살라 했소. 김 교수는 특히 구약시대의 ‘한나’라는 여인의 기도를 예로 들며 기도의 참 자세를 제시했소. 첫 단계는 자신에 대한 고백, 두 번째는 중보 기도를, 이어 세 번째로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해야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기도가 가능해 진다고 했소. 그저 내 바램만 기도드렸던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웠던 부분이오.
김 교수는 결국 이와 같은 성경과 기도에 의한 삶을 살아가면서 남은 여정 동안 이웃을 사랑 하라는 말씀을 실현하자 했소. 무엇이든 움켜쥐려고만 했던 손을 펴고 ‘나누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희망이 넘치고 미래지향적인 어른이 되자고 강조하면서 말이오.
K형! 어찌 생각하오? 나는 “늙으면 죽어야지.”하며 자조 섞인 농담을 나누던 우리가 불경스러웠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왜 우리가 우리의 생을 마음대로 평가하고 결정하려 들었는지 모르겠소.
김 교수의 말대로 생로병사의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잖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해서 우리 인생이 소망으로 바뀐 것 아니오? 이는 큰 기쁨 아니겠소?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고 걱정해야 될 일이 아님을 우리 모두 간과했던 거였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영역이거늘......
이 추운 겨울, 아니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사는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일랑 저리 치워 버리고, 부활의 봄을 기다리며 사랑의 불꽃을 지피는 어른이 되어 갑시다. 사랑하는 주님이 나사로를 깨우셨듯이 우리들도 깨워 품에 안아 주실 날을 영광스럽게 기다리면서 말이오.
형의 삶이 항상 주님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친구가
서울에서.
시장 사람들
이완순
지난해 겨울, 친구들과 저녁 모임을 갖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가락시장 근처 조그만 대포 집에 2차로 들른 적이 있었다. 초봄을 바라보고는 있었으나, 바람으로 매우 쌀쌀해진 날씨 탓에 뜨거운 동태찌개를 곁들인 막걸리 한 잔은 우리를 이내 포근한 이야기 세계로 빠져 들게 했다. 그런데 9시 경이 되자 문득 다소 붐비던 그 대포 집 안으로 추위를 몰아내듯 몸을 떨며 들어서는 40대의 모습이 들어 왔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는데 첫 눈에 그는 가락시장 상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두툼한 검은 색 방한복에,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눌러 쓰고 들어선 그는, 말없이 주방 쪽 탁자에 놓인 소주 한 병을 따서 종이컵에 가득 딸아 붓고는 한 번에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단무지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천 원짜리 한 장을 탁 내려놓고는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마 이 집에서는 가락시장 사람들이 일하던 도중 이렇게 들러 소주 한 두 컵씩을 들고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투박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만하는 주인 아주머니 모습에서 무한한 친근감이 느껴져 친구들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았다. 마치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으나, 미쳐 내 뱉지 못했던 그 어떤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
나는 어릴 때부터 이상스러울 만치 시장 바닥을 좋아했다. 그 곳이 마치 유일한 내 마음의 안식처인 곳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중구 동화극장 뒤 신당동에 살 때, 어머니는 가끔 나를 아리랑 고개라 불리는 언덕 넘어 시구문 시장(광희문 옆)으로 데려가곤 했다. 찬거리, 생활용품 등을 사면 일부는 나의 손에 들려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때마다 나는 즐거이 따라 나서곤 했다.
질퍽거려 더럽기까지 한 시장 바닥을 조심스레 걸으면서도 오고가는 상인들과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즐거웠고, 특히 나의 초등학교 친구 아버님이신 방앗간 떡집 아저씨의 후덕한 얼굴을 보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시장 한복판을 차지하고 좌판을 벌리고 있는 아줌마, 할머니들. 뻥튀기 아저씨와 혼잡한 시장바닥을 요리조리 내달리는 지게꾼 아저씨. 시장 한 쪽에 자리 잡고 가뜩이나 질퍽거리는 시장 바닥을 검게 물들이던 조그만 연탄 가게 아저씨들.....
애늙은이 같은 감성을 지녔던 나에게는 모두가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손님들의 눈길을 끌던 과자가게하며, 과일가게가 보기 좋았고, 냄새가 진동한 가운데 깨끗하지만은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생선을 늘어놓고 호객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리해서 나는 어머니가 이끌고 가지 않을 때에도 친구들과 시장바닥을 어슬렁거릴 때가 많았다. 물론 당시 볼거리, 놀거리가 그리 많지 않은 시대이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시장바닥에만 가면 가슴이 후련해져 오는 듯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이 모든 감상은, 이제 장년이 된 나의 눈앞에 아직도 선하게 떠오르며 그 시절, 그 동네로 돌아가고픈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특히 함박눈이 내려 장이 덜 선 대낮에 떡집 친구랑 몇이서 아리랑 고래를 미끄럼 타고 내리며 놀다가 옷을 버리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리워진다.
노원구 공릉동 재래시장
이렇게 시장을 기웃거리던 버릇은 중학교 입시 준비하면서 부터 없어졌으나 대학, 군대를 마치고,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해 성북구 월계동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부터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에 공릉동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어느 일요일 아장아장 걷는 두 딸과 함께 아내를 따라 갔다가 재래시장의 그 혼잡함 속에서 사람 냄새를 다시 맡고는 어렸을 때의 감성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나는 그 재래시장의 사람 냄새와 밑바닥 삶의 모습들에 취해, 때만 되면 그 시장을 찾곤 했다. 때로는 장을 보는 아내와 떨어져 코흘리개 딸들 손목을 잡고 시장 한 구석 좌판에 앉아 아내를 기다리며 막걸리 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고, 일요일 아침 휑하니 조용한 시장에 홀로 나가 한 바퀴 돌며 점심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해 줄 삼계탕 재료를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시장 나들이는 마음이 울적할 때나 괴로울 때 마다 계속 되었다. 복잡한 시장에 가면 왠지 모르게 어릴 적처럼 마음이 포근해져 왔다. 아무런 격식 없이, 허례허식 없이 살아가는 시장사람들의 얼굴을 바라 볼 때마다, 내가 직면한 현실은 잊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것은 순전히 이들 시장 사람들이, 이 사회의 기준이라면 값싼 인생으로 치부 될지는 몰라도, 나 보다는 원초적인 희로애락 속에서 진정한 삶을 더 누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것이 나 자신 이었어야한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습관
장년이 된 지금도 나는 가슴이 답답해 오면 시장 바닥을 찾곤 한다. 저녁 후, 잘 닦인 탄천 변 산책길을 걷다가도 가락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가락시장 건너 가락 시영 아파트 쪽 석촌시장을 찾기도 한다. 시장 안에 들어서서 이리저리 기웃 거리며 물건도 보고 장사치들의 얼굴 표정도 보고, 또 한 푼이라도 깎아 보려는 주부들의 표정들을 보면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곤 한다. 때로는 정장차림에 아내를 따라 와 차 옆에서 마냥 기다리는 나 같은 장년의 아저씨들 모습을 보며 고소를 흘리기도 한다. 그러노라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삶의 허전함도 잊어 지고 가슴 아픈 과거도 잠시나마 잊어 지게 된다. 시끌벅적한 시장 분위기가 나의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 들의 순수한 모습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기도 한다. 특히 지금 조금씩 준비 중인 사진집의 글이나 사진의 소재를 얻어 내기도 한다.
심지어 시내에서 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있으면 일부러 종로 5가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는 조금 일찍 나가 광장시장을 둘러보다가 약속장소에 나간다. 그리고는 또, 그 친구를 꼬드겨 광장시장 먹거리 골목으로 가 빈대떡을 시켜 놓고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외국에 나가 근무할 때마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로 하여금 백화점이나 큰 슈퍼마켓 보다는 재래식 시장으로 가게끔 유도하고는 곧 잘 따라 나섰다. 그 곳도 사람 냄새,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삶의 냄새는 여전히 나의 발길을 끌고 놓지를 않았다.
나의 착각
그러나 그 날 그 대포 집에서 나와 친구들을 전철까지 안내해 주고 돌아오다 생각 없이 들른 가락시장에서 나는 갑자기 이러한 감상이 나만의 교만한 사치였음을 깨닫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시장을 좋아한다는 나의 행태 자체가 이들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가진 자"로서 이들의 겉모습만을 보고는 "진정한 삶" 운운하면서 나의 허무와 가슴앓이를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왔을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또한 생각해 보니 시장사람들의 보금자리인 그 허름한 대포 집에서도 점잔을 떨며, 막걸리 한 잔을 드는 것이 무슨 지식인의 “멋”인양 히히 대던 우리의 모습이 차라리 가증스럽기 까지 했다.
이제는 한 밤중이 된 가락시장은 낮에 본 모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밤늦은 시각에 처음 가 보게 된 가락시장은 별세계였다. 시장 안은 정신없이 붐볐다. 지방에서 올라 온 채소를 실은 트럭은 물론, 이를 내리고 실어 나르는 지게차와 상인들에 의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를 쉽게 걸을 수조차 없었다. 또 한 쪽 구석에서는 여기저기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경매꾼의 빠르고 시끄러운 목소리와 앞만 바라보며 손가락을 감춘 채 입찰에 응하는 수많은 상인들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게차를 움직이는 사람이건 경매꾼이건, 몸은 허름한 작업복으로 치장되어 있어도 그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다가 구경하는 내 존재는 그들 안중에는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오히려 거치적거리는 훼방꾼에 지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눈에 뜨인 이들의 악착같은 표정과 열정적인 몸짓에서 나는 전율마저 느꼈다. 이들은 내가 느꼈던 그저 그러한, 물건만을 파는 저 밑의 인생들이 아니었다. 아까 대포 집에서 보았던 그저 그런 술꾼들이 아니었다.
진지한 그들의 모습은 내가 속한 사회에서 나도 항상 취했어야할 것이었고, 한 밤중을 보내며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그들의 열정 역시 내가 지녔어야 할 덕목이었으며, 남보다 앞서 물건을 확보하고 팔면서 보이는 악착같은 그들의 투쟁은 내가 지니지 못했던, 다시 말하자면 나는 가져 보지도 못했던 약점이었다.
나로서는 이제껏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 왔다고 자부하면서도, 그래도 무언가 허전함을 느껴 왔고, 또 그 허전함을 달래려 시장바닥을 어슬렁거렸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만일 내가 이들이 보인 저 꾸밈없는 진정성을 갖고 정말 열심히 살아 왔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 나이가 되도록 허전하다는 사치스런 의식 아래 재래시장이나 찾아 나서고 있을까?
결국 가슴 아픈 일이 생기거나 허전할 때 찾던 나의 시장을 향한 발걸음은, 이들이 나보다 못한 삶을 살아간다는 편견을 지니면서 나 자신의 못난 삶에 정당성을 부여해 보려는 위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시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나물을 파는 할머니와 허름한 복장의 상인들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만족감을 찾아내려 하고, 시장바닥의 그 혼잡함 속에서 잠시나마 나의 괴로움을 잊으려 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나의 위선을 끊임없이 질책 하며 그간 시장바닥을 헤매면서도 왜 그들의 삶에서 진솔한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되새겼다.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과거의 시점으로 다시 되돌아 가 이들처럼 삶에 대한 진정성을 갖추고, 보다 악착같이 살아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퇴 후 백수입장인 나에게 다시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준 이들 시장사람들에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전과 같이 “꿈과 희망”에만 의존하며 남의 눈치나 보고 위선과 허구 속에 살 것이 아니라, 남은 인생이라도 이들처럼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살아 보리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 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기꺼이 나누어 주는, 요즘 유행하는 “나눔의 삶”도 실천할 수 있으면 하고 말이다.
청계천 판자촌 만감
이완순
얼마 전 청계천 판자촌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선배 한 분과 함께, 벼르고 벼르던 "청계천 판잣집"을 찾아 가 보았다. 청계천 9가 청계천 박물관 앞에 1960년대, 1970년대의 판잣집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6.25 동란이후 서울로 몰려 든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청계천 판자촌. 이들 피난민들에 이어 농촌에서, 혹은 삶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나 흘러들어 온 사람들의 애틋한 생활터전을 이루었던 청계천. 나는 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살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신당동 동화극장 뒤편 신당동에서 보냈던 나는 청계천이 바로 인근에 있었고, 또 마침 가까운 친척 한분이 청계천에 살고 계셔서 몇 번 가 볼 수 있었다.
쓰레기와 오물로 악취가 나는 골목 양쪽으로 꽉 차게 붙어 있던 2-3층의 허름한 판잣집들. 청계천변 위로도 나무 막대기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 검은 집들. 그 골목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물동이가 길게 늘어져 있던 수돗가. 아침이면 길게 줄 서서 기다리던 화장실. 허름한 대폿집과 구멍가게들. 어렵게 살던 친척집에 갔다가 청계천 밑 시커먼 모래밭으로 휑하니 뚫린 변소에서 겁먹은 얼굴로 일 보던 기억. 이 모든 것들이 어린 나의 눈에는 신기했고 혼란스럽기만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눈에 선히 떠오르는, 하늘마저 검붉게 물들이며 타 오르던 청계천 판자촌의 불바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화재가 날 때는 건너편 황학동은 불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집집마다 개천 변으로 이불가지며 가재도구를 급히 내 던지던 모습에 구경꾼들은 안타까운 신음과 함께 발을 동동 굴러대었다. 또한 어김없이 장마철이면 반복되는 물 구경도 빼 놓을 수가 없었다. 청계천 언덕 및 판잣집 아래쪽은 그대로 물에 잠겨 일부 집들은 허물어져 떠내려가 버렸고, 쓰레기와 가재도구 등을 안고 도도히 흘러 내려가던 누렇게 탁해진 청계천물은 어린 나의 눈에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는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적 몸부림 속에 1958년부터 20년간 구간별로 청계천변 사람들을 내쫓고 시멘트로 복개가 되었던 청계천. 마치 경제발전의 상징인 양 1971년 건설되어 수십 년 간을 버티며 우리의 답답증을 유발했던 청계고가도로. 그 고가도로 밑 일대를 점령했던 서점가에 가서 보다 싼 값으로 참고서를 구해 보려고 친구들과 걸어갔던 기억은, 그곳을 가기위해 거쳤던 골목길들과 함께 희미하나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렇던 청계천에 옛적 판자촌을 재현해 놓았다니! 그러나 선배와 함께 옛적 추억들을 서로 들려주며 찾아 가 본 판자촌은 규모가 너무 작아 매우 실망스러웠다. 당시 판자촌이 얼마나 컸었는데? 그래서 "판자촌"이라 안 하고 "판잣집"이라 이름 지었구나 자위하며 둘러보았는데, 그래도 집들은 옛날 모습을 잘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광명상회 앞에 붙은 쌀과 미원 선전물, 시민회관의 "새나라 쑈" 선전 벽보가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광명상회와 또리 만화가게의 모습. 한 옆에 진열된 옛날 청자, 아리랑 담배와 과자, 잡지 그리고 각종 영화 포스터들이 어린 시절의 과거를 회상시켜 주었다. 특히 "타잔"과 "돌아오지 않는 해병" 포스터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리어카와 빨간 우체통, 영화 포스터 위로 진짜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옛적 판잣집들에 어지러이 내걸렸던 빨래들을 떠 올리며 역시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물지게와 굴렁쇠, 공중전화 그리고 그 옆의 쓰레기 통. 특히 물지게가 정겹게 마음에 다가왔는데, 옛날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에게는 호사스러운 물건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양손에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좁다란 길을 힘겹게 오갔는데 물지게가 있던 사람들은 쉽게 물을 날랐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 이 물지게를 보자니, 어릴 적 신당동 좁은 길에서 놀다가 이와 비슷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똥지게가 지나가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가던 것도 아련한 추억의 한 단편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쌀을 아끼고 잡곡을 먹자고 당부하는 당시 정부의 담화문과 닭표 간장 선전물을 보고 선배와 나는 한바탕 웃어 젖혔다.
이제는 그 청계천이 모든 시멘트 덩어리들이 걷어 치워지고, 깨끗이 단장된 모습으로 재탄생되어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청둥오리들이 한가하게 먹이를 쫓아 유영하는 쉼터가 되었다니? 아니 그때는 구하기도 힘들었던 크나 큰 잉어들이 떼 지어 다니며 자신들의 삶의 터로 삼고 있다니? 그때 그 시절 청계천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의 청계천을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을까? 이는 한강의 기적과 함께 우리 대한민국만이 일구어 낼 수 있는 "삶의 혁명!"이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찬일까? 그러면서도, 그래도 나에게는 과거 어린 시절 청계천 판자촌에서 부대끼며 느꼈었던 사람 냄새가 더 그리워짐은 또 무슨 연유에서일까?
마침 바로 앞이 청계천 박물관이라 들어 가 보았는데, 시설도 훌륭했지만 청계천을 모형 인형들과 함께 조그맣게 재현해 놓은 모습이 그럴싸해 한참 들여다보았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재미가 있었다. 이 청계천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역사, 생태계, 시설 등 청계천에 관한 모든 것들을 볼 수가 있다.
선배와 나는 배도 출출해져 판자촌과 박물관을 뒤로 하고, 마장동의 옛날 우시장 자리를 찾아 가 보았다. 그 곳도 혼돈스러웠던 우시장은 어디가고 없고 깨끗한 축산물 시장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찾아 가 본 우시장 옆 먹자골목도 이제는 외국인, 특히 일본 사람들도 자주 찾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한 집에 들러 소고기 모듬 안주를 시키자 푸짐하게 나왔다. 잠시나마 둘이서 어릴 적 추억에 사로 잡혀 보았던 그날, 신선한 고기 굽는 냄새에 젖어 기울이는 소주 맛이 그렇게나 맛있게 느껴졌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바이의 해변은 아름답다.
모노레일을 따라 건너다보이는 건물들도 그러하거니와 옥빛 바다와 해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서 바다를 정원 삼은 아파트들도 여행객들 마음을 빼앗기에 넉넉하다.
사막의 기적이라 일컫는 쥬메이라 팜 아일랜드에는 세계 최고높이 164층 초고층 타워인 버즈칼리파가 있다.
124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하늘 높이 서있는 건물들 모습이 멋지다. 두바이는 최근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다. 7성급 호텔 버즈 알아랍 호텔도, 미션 임파서블4 촬영지인 두바이 마리나 요트선착장 모습도 아름답다.천년전 아랍 재래시장을 현대식으로 재현해 놓은 쑥메디나트 쥬메이라에서 금시장을 보는 일은 매우 특별했다.
금으로 겉옷을 만들어 놓은 듯한 세공법이 뜨거운 날씨에도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쪽배를 타고 건너편 시장에 들어서니 아시아인을 반겨주는 상인들의 인사가 정겹다.국제금융센터와 에미레이트 타워도 근사하려니와 두바이왕궁의 담장은 한 시간쯤 달려도 끝날 줄 모른다. 두바이몰에 들어서니 별천지다.
빠듯한 일정이라 쇼핑은 엄두도 못내고 망고아이스크림 먹고 30분마다 공연하는 분수쇼를 관람했다.멋진 음악에 맞추어 버즈칼리파 건물을 순간마다 바꾸며 물보라를 일구며 멋진 춤을 추는 모습이란....
두바이 관광객은 연간 1000만명이 넘었고 공항 이용객도 런던 히드로 공항을 앞섰다고 한다. 관광객들 틈에서 보는 분수쇼 관람은 한번으로 족했다. 아부다비는 두바이에서 두시간쯤 떨어져 있는 도시다. 아부다비는 UEA의 맏형이며 UAE의 수도이자 가장 큰 면적의 에미레이트이다.
UEA 전체 석유 매장량의 94%를 보유하고 UEA 정부 예산의 70% 이상을 부담하고 있다.아부다비는 가젤양이 가득해 붙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부다비의 수도는 알아인이다.
알아인은 샘이라는 뜻인데 팜나무가 많아 테이츠 수확이 많다고 한다.길가에 심겨진 종려나무마다 긴 팔을 내밀듯 곁가지가 뻗어 있다. 가지 끝마다 올망졸망 매달린 대추야자는 양파망 같은 것으로 싸주었다.
데이츠는 사막의 열기에 커지고 익어가는데 7,8 월에 수확한다잘익은 대추야자를 모아 놓으면 꿀이 흐르듯 달디단 즙이 생긴다고 한다.실제로 마트에서 조청에 버무려진듯한 상품을 볼 수 있었다.
베드윈족들은 오아시스 지역이나 5~7미터 파면 물이 나오는 지역에서 양과 낙타를 키워 요거트처럼 시큼한 라만우유와 치즈를 생산한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이들을 볼 수 있었다.사막체험도 특별한 시간 이었다.
주황빛과 치즈빛 살색이 섞인 바스라진듯한 가는 모래는바람이 불 때마다 빛나는 실크 한 두루마리를 선물해준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만들어진 모래물결도 예술이다.
이들 문화와 원형적사고에 영향을 주었을 사막의 따가움과 휘몰아치듯 부는 바람과 황폐한 흙덩이를 밀치고 솟는 샘물과 종려나무의 너그러움....비행장에 내렸을 때부터 눈길을 끄는 나무와 풀 사이를 지나가는 물줄기 호스와 크고 작은 스프링쿨러의 분주함은 자연을 껴안는 중동인들의 품이다.
화려한 이슬람예술의 극치인 그랜드모스크도 방문했다.그들의 의상을 입고 이삭이라는 청년의 안내를 받았다. 벽면 중앙에 횃불모양의 제단이 있는데 은색은 우유를 금색은 꿀을 물결 모양은 바람과 바다, 은혜의 흐름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조명을 받은 모스크 모습은 장관이고 대리석에 꽃모양을 조각한 기둥과 바닥, 천정 장식은 대단하다. 또한 샹드리제와 양탄자의 우아함도 놀랍다. 아랍에미리트 자국민은 11%밖에 안되고 50%가 인디안 10%가 파키스탄인, 5%가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중국인이며 120 여 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산다고 한다. 한국인 거주자는 15000명 정도 인데 두바이에 7000명, 아부다비에 8000명 정도 거주한다.
특히 원전현장에서 일하는 한국분들이 많은데 시내에서 3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주말부부로 사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아부다비의 수도 알아인에는 기독교 출발지인 오아시스 병원과 오아시스 교회가 있다.1959년 알아인으로 온 미국의 케네디 의사가 난산이었던 세째 왕자 파티마왕자의 출산을 도왔는데 왕궁에서 고맙다며 원하는 것을 묻자 병원 안에 교회를 지어달라고 했는데 그의 요구대로 병원을 지어주고 예배 드리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정부는 1971년 UAE로 연합한 후에도 기독교 종교부지를 내어주었고 2006년 크라운 프린세스는 아버지 쉐이크 쟈이드를 기념하여 오아시스병원 안에 사랑방을 만들었다. 병원 안에는 코란과 함께 성경이 놓여있었다.국가 최고 공로상을 받았던 케네디 의사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파견 의사였던 스크랜턴알렌과 스크랜턴대부인이 생각났다.참으로 귀한 생애를 살아냈던 분들이다.
중동의 최초 한인감리교회 맑은 샘교회가 아부다비에 있다. 전국 감리교여선교회연합회 김명숙 회장님과 임원들과 함께 아부다비에 도착한 날 아부다비한인감리교회 맑은샘교회 사택에서 드리는 연합 속회에 참석하였다. 감리교본부 총무님이신 이용윤목사님의 '목마름이 은혜를 경험할 때' 라는 말씀을 들으며 성도들과 예배 드렸다. 여선교회가 정성껏 준비한 비빔밥을 대접 받고 중앙연회 여선교회와 전국여선교회연합회가 마련한 선물을 전했다 .맑은 샘교회는 형제교회라 불리는 성공회 앤드류교회에 세를 내고 예배를 드린다.
그들의 휴일인 금요일 오전에 앤드류교회에서 예배 드리며 특송을 하고 오후 3시에 맑은 샘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최광혁 장로님께서 기도하신 후 중앙연회 최재하 감독님께서 '꿈과 믿음을 가진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설교 하셨다.
100여 명의 성도들과 아동부와 청소년 청소녀부가 함께 예배를 시작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모습도 예쁘고 분반이 끝나고 함께 성찬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예배가 끝나니 다음 팀들이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디오피아인들은 앤드류교회의 공간을 빌릴 여건이 되지않아 교회 밖에서 예배 드린다고 한다.영국성공회 소속 앤드류교회에서 공단지역인 무사파지역 종교부지를 정부에서 받아 맑은샘 교회와 연합하여 800평 3층 규모의 건물을 건축하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중동지역에 최초로 지어지는 감리교회 건축에 한국감리교인들이 관심 갖기를 원하고 계신 것 같다. 그리고 1950년대 전쟁으로 폐허였던 우리나라에 마이어스 여사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태화(큰 평화)를 세우셔서 오늘날까지 일하시는 것 처럼 이제 한국여선교회연합회를 통해 그곳의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마음도 들었다.
장애자를 위해 많은 이들의 기부와 정부의 도움으로 건물을 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영국에서 파견한 싸미라 관장을 만났다. 시설과 경영, 일할 봉사자들과 수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는 기독교인이었는데 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며 눈 감고 기도하기를 거부했다.
감독님은 이야기하듯 눈을 맞추며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아부다이에서 드려진 특별한 기도였다.전국여선교회연합회에서는 11개 연회 여선교회와 '함께 하는 선교'를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는데 이곳 맑은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그 땅의 여성들과 장애를 가진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원한다. 물론 교회 측과 철저한 계획과 계약이 이루어져 해마다 보고가 되어지는 여선교회연합회의 해외사업이 되기를 바란다. 2008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엿새동안 스물 네 명의 귀한 분들과 45도를 오르내리는 기후와 사건들을 경험한 아주 특별한 시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