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주(晋州) 右道. 9일.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6리이다.
異名: 진양(晋陽). 강주(康州)ㆍ청주(菁州)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
* 진주목사겸진주진병마첨절제사. 임기 3년.
* 진주판관. 종5품.
* 진주교수. 종6품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 주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진관】 군 다섯 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함양(咸陽)ㆍ곤양(昆陽)ㆍ거창(居昌)이다.
『신증』 거창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縣) 여덟 사천(泗川)ㆍ남해(南海)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하동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단성이다.
『신증』 거창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한 사람이다. 【군명】 거열성ㆍ거타ㆍ정주(菁州)ㆍ강주ㆍ진양ㆍ청천(菁川)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ㆍ정해군(定海軍).
【성씨】 본주 정(鄭)ㆍ하(河)ㆍ강(姜)ㆍ유(柳)ㆍ소(蘇)ㆍ임(任)ㆍ강(康), 김ㆍ박 모두 내성(來姓)이다. 반성(班城) 형(荊) 형(邢)이라 한 데도 있다. 주(周)ㆍ옥(玉)ㆍ현(玄)ㆍ성(成), 김 속성(續姓)이다. 영선(永善) 양(楊)ㆍ한(韓)ㆍ임(林)ㆍ임(任). 복산(福山) 문(文) 송자(松慈)와 같다. 악양(岳陽)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 김 속성(續姓)이다. 화개(花開) 김. 살천(薩川) 박.
【풍속】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 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 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 리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갱이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 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 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런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 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 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여 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 주 서쪽 55리에 있다. 우산(牛山) 주 서쪽 65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주 남쪽 60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 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 주의 동쪽 15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 주 남쪽 79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 주 서쪽 3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 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 주 동쪽 20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 가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급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 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급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성곽】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돌고 도는 것은, 운수의 성하고 쇠함과 인사의 잘하고 못함이 서로 관계되어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인사를 닦아서 천운에 응하는 까닭에, 혹 도적의 난이 일어나도 마침내 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우리 고을의 성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내가 총각 적에 여기에서 유학하면서,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이때에는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연이었었다. 쥐새끼 같은 해구(海寇)가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康州) 길안(吉岸)의 토벌만으로도 족히 꺾어 부술 수 있었고,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여서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처럼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 이래로, 바다 도적으로서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해마다 심하여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ㆍ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가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리오. 기미년에 지금 지밀직 배공(裵公)이 강주에 진장(鎭將)으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사가 반도 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강성군 산성(江城郡山城)이 있어서 한 고을 사람이 의거할 곳이 있었고,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또 주의 치소(治所)에서 거리가 멀므로 갑작스런 사태에 능히 미칠 수 없었다.
해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백성의 뜻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의 성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장정들이 일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 성 둘레는 8백 보이고, 높이는 세 길이 넘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의정(義正), 북쪽은 지제(智濟), 남쪽은 예화(禮化)이며, 문 위에는 모두 누를 지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정천(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品字)가 동쪽에 벌였고, 세 곳의 못물이 북쪽에 돌아 모인다. 또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이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위의 한 사람이 성밖의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해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아, 처음 시작하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키는 어려움보다 못하고, 처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이 마침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데, 일은 반절이면서 공은 곱절인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중광(仲光)이다. 정사하는 데에 대체를 힘써서 어른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반복하여 복종하지 않던 토속(土俗)이 그의 의(義)에 감복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판관 이군 사충(仕忠)도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관방】 적량(赤梁) 주 남쪽 백 13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82척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다.
삼천진(三千鎭) 남쪽 74리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
【봉수】 대방산 봉수(臺方山烽燧) 주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南海縣) 금산(錦山) 북쪽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망진산 봉수(望晉山烽燧) 남쪽으로 사천(泗川) 안점(鞍帖)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廣濟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남쪽 76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昆陽) 우산(牛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광제산 봉수(廣濟山烽燧) 주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笠巖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하륜의 서문에, “고을 객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에 지금 판서 광주(廣州) 안공(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 안공의 이름은 노생(魯生)이요, 최공의 이름은 이(迤)이며, 은군의 이름은 여림(汝霖)인데, 무두 훌륭한 관리로서 세상에 명성이 있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鳳鳴樓) 객관 남쪽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예전 누(樓) 3칸이 있는데, 그 밑을 비게 하여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누문이라 하는데 이름이 없다. 그 곁에는 노목 수십 그루가 벌여 서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난다. 관가와 민가와 대숲과 꽃나무가 가렸다 비쳤다 서로 연접하였다. 산빛과 물빛이 그 밖에 비치고 유람하기에 알맞은 것이 실로 깊숙하고 넓게 트인 중간에 있다. 영목사 정헌대부 최공(崔公)이 이 주에 부임하여서는 모든 황폐한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기를,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 사신과 빈객이 왕래할 때에 시원한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촉석루는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또 공해(公廨)에 막혔다. 이 누를 수리하면 공역은 덜하고 일은 편리하겠다.’ 하고, 마침내 공인(工人)을 모아서 농사 여가에 일을 시켰다. 기울어진 것을 바루고 썩은 것을 갈아 넣었으며, 작고 비좁은 것은 더 보태어 늘리고, 단청을 칠하고, 봉명(鳳鳴)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사람 전 상주 목사(前尙州牧使)였던 전군(全君) 제(悌)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였다. 내 적이 생각하니, 봉(鳳)이란 것은 왕자(王者)의 상서이다. 옛날 주(周) 나라가 한창일 때에 봉황이 높은 뫼에서 울었다 한다. 지금 밝은 임금이 위에 계셔 몸소 인의를 행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부리는데, 백성과 가까운 관직(지방관)을 더욱 중하게 여긴다. 최공은 자애하고 인후한 자질로, 외방에 나가 한 주를 맡아서 왕화(王化)를 펴매, 이에 봉명(鳳鳴)으로써 누 이름을 하였으니, 이는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써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행여 봉이 우는 상서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영천(穎川)에 태수로 있을 때에, 봉황이 관사에 오고 다스림이 천하 제일이 되었으므로, 조정에 불려들어가 승상이 되어, 공이 당시에 빛나고 명예가 후세에 전해 온다. 이것은 진주 사람이 최공에게 기대하는 것이며, 최공도 또한 스스로 힘씀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른 산이 둘러 물가에 임했는데, 우리 고을 좋은 경치 참으로 맑고 기이하네. 영천(穎川)의 치적을 오늘에 기대하고, 아각(阿閣)에 화하게 울던 것은 성한 시대를 상상하네. 대나무가 인가를 가려 보일락말락, 나무는 관도에 깊어 꾸불꾸불. 농옥(弄玉)을 불러 함께 타고 갈까나, 어찌하면 퉁소를 얻어 달 아래에 불까.” 하였다. ○ 박욱(朴彧)의 시에, “산에는 연이은 봉우리 있고 물에는 물가 있네. 진양의 좋은 경치 바라보매 기이하네. 옛 친구 서로 만나 흉금을 터는 곳, 걸각(傑閣)에 함께 올라 술잔 잡을 때로세. 누수(漏水)는 다했는데 시는 못 이루었고, 촛불은 다 타도 흥은 남았네. 우습다. 후령(緱嶺)에서 신선된 이여. 부질없이 퉁소 배워 세상 밖에서 불었네.” 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촉석성 안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정사하는 자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한 누의 일어남과 황폐한 것으로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을 인해서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어찌 여사라 하여 하찮게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 오래였더니, 지금 우리 고을의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 제도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 보면 긴 강이 밑에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그 바깥에 벌여 있다. 여염집이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보일락 말락하며, 푸른 석벽과 긴 모래밭이 그 곁에 연하여 있다. 농부와 잠부(蠶婦)가 그 일에 힘을 다하며,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한다. 새들이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며 자맥질하는 것 같은 것도, 한 구역의 동물로써 제자리를 얻은 것이 모두 볼 만하다. 또 누를 이름한 뜻은,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하였다. 이 누는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鄭先生)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安先生)의 장구(長句) 사운(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걸 선생(傑先生)의 여섯 수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菴) 민 선생(閔先生), 우곡(愚谷) 정 선생(鄭先生),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적이 침입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고 누도 또한 잿더미로 되어 버렸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나라 안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을 잔질하며 서로 경사하기를,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힘을 부리는 것을 엄금하여,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고을 부로(父老)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읍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는 한 지방 훌륭한 경치였는데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에 향을 올리는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도록 하였다. 계사년에 판목사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대(隊)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해 걱정을 제거하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공역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과 세도를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의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로움을 침노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가리가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몸만이 홀로 즐기지 않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로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수를 올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다시 일으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하였다.
○ 고려 정을보(鄭乙輔)의 시에, “황학(黃鶴)이라는 이름난 누, 그도 한때이었네. 최공이 일 좋아하여 시를 남겼다. 올라와 놀매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시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성쇠가 있어라. 소 먹이는 두덕과 낚시터에는 가을 풀이 얕고, 거위 노니는 돌다리와 해오라기 섰는 물가엔 석양이 더디다. 푸른 산은 사방으로 모두 새그림인데, 분바른 계집 세 줄 서서 옛 노래를 부른다. 옥잔을 주고 받으니 산달이 오르고, 구슬 발을 걷으니 고개에 구름이 드리웠다. 난간에 기대어 머리 돌리니 건곤도 작은 듯, 이제야 우리 고을이 특별히 기이함을 믿노라.”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누에 올라 옛날 놀던 때 생각하며, 억지로 강산에 답해 다시 시구를 찾는다. 나라에 어찌 난세를 평정할 현인이 없으리. 술은 나를 흔들어 노쇠한 나이를 비감케 하네. 지경이 맑으니 세속의 자취가 끊기기 쉽고, 좌석이 넓으니 춤추는 소매 휘두르기 어찌 방해되리. 붓에 먹찍어 속절없이 춘초구(春草句)를 짓고, 술잔 멈추며 또 죽지사(竹枝詞)를 부른다. 기생은 다가 앉아서 즐거움이 친밀하고, 사람은 시절과 함께 가기 싫어하네. 이 땅의 높은 정취는 참으로 속세가 아닌 듯, 적성(赤城)과 현포(玄圃)도 기이함을 독차지하지 못하리.” 하였다. ○ 백미견(百彌堅)의 시에, “유람하는 것은 시대 못 만남과는 관계없다. 호수와 산 좋은 경치가 시 읊기를 요구하네. 누구의 눈으로 일찍이 여기 터보아 집 지었나. 내 몸이 평안하여 쇠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기둥에 기대니 건곤은 끝난 곳이 없고, 물결을 짜놓은 듯한 발과 장막 반공에 드리웠다. 풍류의 가을 달을 이태백이 읊조렸고, 뱃노래 소리 저문 강에 어부가 노래한다. 얘기하고 웃으며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갔다가 오는데 사흘 동안을 더디다고 하던가. 무성한 숲, 긴 대나무는 서남쪽 언덕에 있는데, 내 정자가 분수 밖에 기이함을 도리어 두려워하네.” 하였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촉석루에 올라서 한참 동안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 영운(靈運)의 뛰어난 재주 내 어찌 미치랴마는, 원룡(元龍)의 호기 온전히 쇠하지 않았다. 맑은 강, 낭떠러지엔 고기가 자주 뛰고, 큰 들판 긴 숲엔 바람이 더디 분다. 금술잔을 대해서 묵은 한을 삭이고, 은필(銀筆)을 가져 새 글을 쓴다. 처음으로 눈을 만나 찬 매화 맹동 같더니, 또 봄을 보니 고운 버들이 드리웠다. 떠나려다 멈칫거리며 다시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다 기이하여라.”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인간을 굽어보니 고금이 되었건만, 기이한 경치는 올라도 다하지 않네. 서쪽에서 오는 두 줄기 물은 쪽빛이 합쳤고, 남쪽으로 가는 뭇 봉우리는 파란빛이 짙다. 세상 따라 행하고 멈춤은 두공부(杜工部)의 탄식이요,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뒤에 즐김은 범문정(范文正)의 마음이로다. 강을 격한 옛 마을엔 바람과 연기 그대로인데, 서울서는 당년에 몇번이나 월 나라 노래를 읊었던고.” 하였다. ○ “흥했다 폐함이 돌고 돌아 바로 지금을 기다렸음인가. 산 꼭대기에 높은 누각이 반공에 임했네. 산은 들 밖에서 연했다 끊어졌다, 강은 누 앞에서 넓기도 깊기도 하네. 백설양춘곡(白雪陽春曲)은 선녀 같은 기녀의 노래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또의 심사여라.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이 없어, 고달픈 객이 돌아오며 홀로 읊조린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10년의 유람길 세상에 두루 돌았더니, 늦게야 선궁(仙宮) 몇 째 누(樓)에 기댔는고. 술을 많이 마셔 미쳤지 속물이 아니니, 높은 데 올라서 시 짓는 것 곧 맑은 놀음이네. 산에 가득한 소나무 숲엔 피리소리 움직이고, 한밤중 물결 위엔 흰 달이 떴어라. 햇살이 붉은 발에 비치니 봄 잠이 족하여, 제몸이 남쪽 고을에 체류하는 줄 모른다.” 하였다.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창망한 호해(湖海)에 가장 명승이라, 하늘이 사신(詞臣)을 보내 이 누에 이르렀네. 막막한 강 언덕 꽃은 밝기가 비단 같고, 겹겹으로 연기 낀 나무 푸름이 흐르는 듯하다. 백년 풍물은 그 누가 구사(驅使)하랴. 한 돛대 술 실은 배는 제대로 남쪽으로 떠다닌다. 지는 해에 유하주(流霞酒) 취해 잠이 달게 든 곳, 일부러 이 몸을 고을에 머물게 한 듯.”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서쪽으로 지리산을 연해 참으로 선경이라, 기이한 경치는 동쪽으로 강북(江北)의 누에 다 있네. 풍경은 영원히 봉악(鳳岳)에 머물러 있고, 번화함도 정천(菁川) 따라 흐르지 않는다. 3년 동안 풍월 두고 시 천 수 지었고, 한 번 웃으니 신세와 이름이 다 헛것인 것을, 대궐 향할 한쌍의 오리가 그리 멀진 않지만, 꿈속에도 묘연하니 중주(中州)가 아득해라.”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건축하였다.
【학교】 향교 주 동쪽 3리에 있으며, 사교당(四敎堂)이 있다. ○ 하연(河演)의 기문의 대략에, “우리 고을 학교에는 본래 강당이 없었다. 전 교관 조보인(趙寶仁)이 주 목사에게 의논하여 재목을 준비하였고, 지금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부지런히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당 이름을 사교라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진주 고을은 지리산의 영기와 남해의 정기가 빚고 화합한 것으로서,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 내 일찍이 들으니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이 이 향교에서 배워서 공업이 빛났고, 그 뒤에 인재가 더욱 성하였다 한다. 근래에 문경공(文敬公) 강보(姜寶)군과, 나의 선조 원정공(元正公) 휘(諱) 즙(楫), 어사대부 휘 윤원(允源) 및 정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 참찬 정을보(鄭乙輔)와, 조선 초기 이래로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문정공(文正公) 정이오(鄭以吾), 양정공(養正公) 하공복(河敬復)이, 모두 이 향교에서 공부한 뛰어난 분들로서 문과 무로서 모두 당시에 날렸다. 우리 고을의 지기의 신령함과 인물의 걸출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일컫는 바이다. 그러나 반드시 교양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여러 학생에게는 평상시 강독하는 데에도 편리함이 있고, 봄 가을 좋은 철을 당하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하는 방법과 같이하여, 주목(州牧)과 교관(敎官)이 여가 있는 날에 여기에 놀러와서, 혹 책을 펴서 강문(講問)하며, 혹 제목을 내어 시 짓게 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던 운취와 비슷하며,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을 즐기며, 역복(棫樸)과 한록(旱麓)의 흥기함이 있다. 비록 그러나 사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어찌 이것만을 위한 것이리오. 학문하는 데에는 두 길이 있다. 실제를 힘쓰는 학문이 있고, 명예를 힘쓰는 학문이 있다. 실제를 힘쓰고 외면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爲己] 학문이고, 명예를 힘써서 이름을 따르는 습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한[爲人] 학문이다.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서, 나아가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먹는 음식과 행동과 언어에 학문 아님이 없다. 근본을 북돋우고 성정을 함양하여 차례를 따라 진보하며, 공부가 성취하기에 미쳐서는 덕성을 높이고 경학을 연마하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아도 그 글이 의리의 근원에서 나오고,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정사하는 것이 도덕의 작용에서 발하게 된다. 이것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공자의 4교(四敎)라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되,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으며, 충신(忠信)을 마음에 간직하게 한 것이니, 이 중에 충신이 근본이다. 당(堂)을 이름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학문하는 길에 무엇이 이보다 더하랴. 여러 학생이 마땅히 마음에 지녀서 나날이 새롭게 할 바이다.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을 숭상하는 교화로서 하늘이 선비를 많이 내어 편안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 강석덕(姜碩德)의 시에, “10년의 풍속과 교화가 민정에 흡족하니, 봉이 우는 높은 산이 정기를 모았네. 새로 전당(鱣堂 강당)을 여니 학문의 바다가 맑고, 항상 필진(筆陣)을 열어 시성(詩城)을 움직이게 한다. 가을이 깊으니 푸른 대는 바람을 머금어 맑고, 봄이 따뜻하니 청아(菁莪)가 비를 맞아 향기롭다. 성대한 교화로 오늘날에 길한 선비가 많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경서를 궁구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이 성진(聖眞 공자의 화상)을 배알하는 시에, “공해(公廨)의 단청이 한 횃불에 없어졌으나, 완악한 도적들도 오히려 문방(文坊)을 보호할 줄 알았네. 10년 동안 교남(嶠南 영남) 풍진 속에, 홀로 의관 갖추고 소왕(素王 공자)을 배알한다.” 하였다.
【역원】 소촌역(召村驛) 주 동쪽 24리에 있으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 다섯이 있는데, 상령(常令)ㆍ평거(平居)ㆍ부다(富多)ㆍ지남(知南)ㆍ배둔(背屯)ㆍ송도(松道)ㆍ구허(丘虛)ㆍ관율(官栗)ㆍ문화(文和)ㆍ영창(永昌)ㆍ동계(東溪)ㆍ양포(良浦)ㆍ완사(浣沙)ㆍ오양(烏壤)ㆍ덕신(德新)이다. ○ 승(丞) 1명이다. ○ 정이오의 시에, “역에 나무 그늘 짙고 시냇물 흐르는데, 오랜 나그네 몸 고달파 잠깐 머문다. 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 강 위 인가에 죽루(竹樓)가 있네.” 하였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
영창역(永昌驛) 주 남쪽 52리에 있다. 문화역(文和驛) 주 남쪽 60리에 있다. 평거역(平居驛) 주 서쪽 10리에 있다. 정수역(正守驛) 주 서쪽 54리에 있다. 평사역(平沙驛) 주 서쪽 1백 19리에 있다. 소남역(召南驛) 소남진 서쪽에 있다. 안간역(安間驛) 주 북쪽 42리에 있다.
부다역(富多驛) 주 동쪽 59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람과 햇빛 맑고 고와서 가을 기운 높은데, 역정(驛程)의 단풍잎이 말 머리에 나부낀다. 전송하고 맞이하는 것은 오직 소나무인데, 길을 끼고 우뚝 서서 허리 굽히기를 부끄러워한다.” 하였다.
개경원(開慶院) 주 동쪽 2리에 있다. ○ 정이오의 기문에, “진주의 진산(鎭山)이 높직하게 구름 위에 솟았으며, 양 기슭이 길게 울퉁불퉁 옆으로 동서로 뻗었다가 다시 서로 감쌌다. 감싼 복판이 널찍하여 사방이 편평한데, 거기에 진주가 위치하였다. 두류산 동남쪽 산 골짜기 물이 모여서 강이 되어 남쪽으로 가로질렀다. 왼쪽으로 감싼 복판에 긴 두덕이 북에서 남으로 와서, 강에서 백 보 되는 곳에서 멈췄는데, 《군지(郡誌)》에서 이른바 옥봉(玉峯)이라 하는 것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나그네가 되어 절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기상이 있으므로, 그곳에다가 원(院)을 짓고 개경(開慶)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기(地氣)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그 남쪽에 강물이 돌아 결(玦) 같고 띠 같으며, 멧부리들은 착잡하게 솟아서 병풍과 장자(障子) 같고, 석벽에 불상 같은 무늬의 그림이 있는데, 고을 사람이 불영암(佛影巖)이라 한다.
원이 처음에는 겹으로 된 누각이 층층으로 솟아나서, 맑은 물결과 푸른 석벽에 빛났던 것이나, 고려 말기에 왜구에게 진주가 함락되니 백성이 텅 비었고, 원에도 화가 미쳤다. 지금 경산 부사(京山府使) 하공(河公) 유종(有宗) 호보(浩甫)는 우리 고을의 효성스럽고 우애있는 군자이다. 일찍이 옛 제택 곁에다가 원 하나를 개설하고, 오가면서 올라다 보며 사정(思亭)의 뜻을 본받고, 또 혜택이 나그네에게도 미쳐서 유숙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자원(長者院)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재목과 기와를 모으고 공역을 헤아려 날을 정하는데, 마침 목백(牧伯) 박공 자안(子安)이 부임하여 하공에게 청하기를, ‘개경원이 이 고을에 도움 됨이 가장 크다. 사신이 왕래할 때에 경유하는 곳이고, 수령을 맞이할 때에 휴식하는 곳이다. 또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나그네들이 잇따라서, 어깨가 맞닿고 소매가 부닥치니, 어찌 다른 역관과 견줄 것이겠는가. 그러니 원을 수리하지 않음은 수령의 허물이다. 그러나 공사(公舍)를 수선하느라고 딴 곳은 돌볼 여가가 없으니, 청컨대 먼저 개경(開慶)에 착수하여, 우리 고을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보가 의롭게 여겨서 허락하고 재목과 기와를 실어 나르며, 옛 제도보다 줄여서 달을 넘겨 완성하였으니, 홍무(洪武) 갑자년이었다. 장엄하고 화려함은 비록 예보다 못하나, 아래위 당과 행랑이 질서 정연하며 산뜻하여 볼 만하였다. 5년 뒤 무진년에 다시 재목과 재력을 갖추어서 장자원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은 하공의 본뜻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선양공(單襄公)이 초(楚) 나라에 사신 가면서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그 나라 냇물과 못에 제방과 돌다리가 없어서 길이 막힌 것 같으며, 나그네가 묵을 곳이 없음을 보고, 마침내 그 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개 성곽ㆍ도로ㆍ여사(旅舍) 등은 모두 삼대(三代) 시대부터 정사를 하는 요체이며, 주관(周官)에는 더욱 여기에 삼가하였다. 인인(仁人)과 군자가 그것이 황폐한 것을 보고는 모두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는 바이다. 이번에 개경원을 중건한 것을 호보는 자신의 공으로 하지 아니하고 목백(牧伯)에게 돌리니, 또한 착한 것을 남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우리 고을 산수의 아름다움과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는 즐거움은,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허락된다면 마땅히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에 얻게 될 것이니, 호보는 기다려 주오.” 하였다.
장박지원(長朴只院) 주 동쪽 49리에 있다. 축현원(杻峴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분현현(盆峴縣) 주 동쪽 20리에 있다. 가수개원(可樹介院) 주 동쪽 59리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섬진 언덕에 있다. 영창원(永昌院) 영창역 곁에 있다. 남제원(南濟院) 주 남쪽 4리에 있다. 어속원(於束院) 주 동쪽 62리에 있다. 추모원(楸母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철소원(鐵所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서정자원(西亭子院) 주 서쪽 5리에 있다. 소남원(召南院) 소남역 곁에 있다. 구라량원(仇羅梁院) 구라량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0리에 있다. 차의원(車衣院) 주 북쪽 13리에 있으며 낙빈루(樂賓樓)가 있다. 응제원(應濟院) 주 서쪽 11리에 있다.
『신증』 【교량】 십수교(十水橋) 주 남쪽 28리에 있다. 사천(泗川) 경계이다.
【불우】 단속사(斷俗寺)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뒤에는 중 대감(大鑑)의 영당으로 되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중 신행(神行)의 비명과,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중 대감의 비명과,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이 있다.
○ 강회백(姜淮伯)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불일암(佛日庵) 서쪽으로 쌍계사(雙溪寺)와 10여 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
천불암(千佛庵)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 안양사(安養寺) 섬진에서 동쪽으로 고개 셋을 넘어 60리에 이 절이 있다. 오대사(五臺寺)와 함께 훌륭한 절이라 일컫는다. 묵계사(黙契寺)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평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한 곳에 있다.
영신사(靈神寺)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 속담에, “능히 그 위에 올라가서 절을 네 번하는 자는 불성을 깨친다.” 한다.
응석사(凝石寺) 집현산(集賢寺)에 있다. 하연(河演)의 조부의 진영(眞影)이 있다. 청곡사(淸谷寺) 달엄산[月牙山] 서쪽에 있다. 법륜사(法輪寺) 달엄산 동쪽에 있다. 향적사(香積寺) 천왕봉 밑에 있는데,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와룡사(臥龍寺)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놀고 간 곳이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 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0월에 마쳤다. 3일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 지제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우방사(牛房寺) 우산에 있다.
지거사(智居寺) 지리산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가 주지 각경(覺冏)에게 부친 시에, “남으로 놀아 어느 곳에 시냇소리 듣는고. 지리산이 높고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봄 원(院)에 해 길고 일 없으니, 사미가 와서 묘법연화경 배우리.” 하였다.
화엄사(華嚴寺)ㆍ신흥사(神興寺) 모두 지리산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로는,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뜰에 늙은 괴목(槐木)이 있는데, 거의 백 아름이나 된다.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히어 다리 같으므로 절 중이 인해서 다리로 만들었다. 치원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고을 입구에 돌 두 개가 마주 있어 문 같은데, 동쪽 돌에는 쌍계, 서쪽 돌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또 옛 비가 있는데 비문은 치원이 지은 것이다. ○ 최치원이 이 절에 있으면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친 시에,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하였다.
영대사(靈臺寺) 지리산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이끼 낀 길 지팡이 짚고 굽이굽이 내를 따라 가니, 대숲이 잠겼는데 시냇물 시끄러워 길이 더욱 아득하다. 지는 해 창자 끊어지는 곳, 구름에 연한 높은 나무에 소쩍새 운다.” 하였다.
용암사(龍巖寺) 반성현(班城縣)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 박전지(朴全之)의 기문에, “옛날에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세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仙巖)ㆍ운암(雲巖)과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 성모상(聖母像)이 있는데, 이마에 칼 흔적이 있다. 속설에는,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격파 당해서 궁하게 되자, 천왕이 도우지 않은 탓이라 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찍고 갔다.” 한다.
강민첨 사(姜民瞻祠) 주 관청 안에 있다. 천희(天禧) 2년에 민첨이 거란 군사와 싸워서 공이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신증』 【총묘】 하륜(河崙)묘 주 북쪽 오이방(梧耳方)에 있다.
【고적】 흥선폐현(興善廢縣) 곧 흥선도이다. 본래 고려 유질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본 주에 와서 속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왜구 때문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 원종 10년에 일본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굴촌폐현(屈村廢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 본주에 예속되었다.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ㆍ어아부곡(於牙部曲) 모두 주 남쪽 10리에 있다. 침곡부곡(針谷部曲)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주 서쪽 30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주 북쪽 5리에 있다. 인담부곡(鱗潭部曲) 영선현에 있으며 주와 30리 거리이다. 송자부곡(松慈部曲) 영선현에 있다. 월아부곡(月牙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선천(鐥川)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주 서쪽 40리에 있다. 송곡향(松谷鄕) 주 남쪽 30리에 있다. 복산향(福山鄕) 영선현에 있다. 벌대소(伐大所) 주 서쪽 40리에 있다. 수곡소(水曲所) 주 서쪽 30리에 있다. 화곡소(火谷所)ㆍ대곡소(大谷所) 모두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대곡소(水大谷所) 주 남쪽 40리에 있다. 갈곡소(葛谷所) 주 동쪽 20리에 있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대개 잣나무는 절개가 있어 사시를 통하고 천년을 지나도록 지엽이 변하지 않으니, 보통 초목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가 사랑하지 않으랴.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하셨는데, 이는 그 절개를 사랑한 것이다. 공의 사랑하는 바가 성인의 뜻과 같으니, 그의 공이 개국의 으뜸으로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음이 마땅하다. 지금 공이 간 지 48년이다. 조그마하던 잣나무가 푸르름이 하늘을 떨치고 뇌우(雷雨)를 밀칠 만큼 되었으니, 그 천연 그대로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요, 공의 당시 정사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절공 이후로 이 고을을 다스린 자가 또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영목사 최공이(崔公迤)가 처음으로 이것을 읊조렸으니, 정절공에게 가만히 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덥고 싸늘함을 반백 년 겪었으니, 세한(歲寒)의 재목이 제세(濟世)의 현인과 합치되네. 손수 영재(鈴齋) 가에 심은 뜻 알고자 할진대, 맑은 바람을 남겨 후세에 전하세.’ 하였다.” 한다.
암석이서(巖石異書)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에 있을 때에, 중이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지리산 바윗돌 사이에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을 바로잡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아 들이려 한즉, 벌써 가버려서 찾지 못하였다.
남지이조(南池異鳥)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에 헌창(憲昌)이 정주 도독(菁州都督)으로서 웅천(熊川)의 진장(鎭將)으로 옮겨 가서 배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못 가운데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몸 길이는 5척이나 되며 빛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같았다. 주둥이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고, 눈은 사람 같으며, 목구멍은 다섯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당시 사람이,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구라량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현(固城縣) 사량(蛇梁)으로 옮겼다. 송대산성(松臺山城)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73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성산성(城山城) 하나는 주 동쪽 44리에 있는데 토축이며, 둘레는 2천 8백 14척이고, 하나는 주 서쪽 48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9백 7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신증』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진성부곡(晉城部曲) 주 동서쪽 15리에 있으며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명환】 신라 향영(向榮) 헌덕왕 때에 정주 도독이었는데, 헌창이 자기에게 붙으라고 협박하였으나, 향영은 몸을 빼어 달아나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았다. 김흔(金昕) 헌덕왕 때에 강주 도독(康州都督)이 되었다. 복세(福世) 신문왕(神文王) 5년에 정주 총관이 되었다. 김암(金巖) 강주 태수였다. 왕봉규(王逢規) 경애왕 때에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였다. 당(唐) 나라 명종(明宗)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고려 왕해(王諧) 부사로 있었는데,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감복하였다. 동도 유수로 옮기게 되자 진주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유임되기를 원하고, 드디어 간절하게 조정에 청하기를, “우리 왕 사또를 1년 동안만 빌려 주소서.” 하여, 다시 재임되었다. 사람됨이 굳세고 정직하며 청백하여, 모든 계획한 바가 백성을 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김준(金晙) 사록(司錄)으로 왔다가 청백하므로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좌습유 지제고가 되었다. 임민비(林民庇) 의종조(毅宗朝)에 원이 되었다. 채정(蔡靖) 신종조(神宗朝)에 목사였다. 이행검(李行儉) 고종조(高宗朝)에 사록이었다. 전광재(全光宰) 고종조에 부사였다. 안진(安震) 통판이었다. 이우(李瑀) 재간이 있으므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배극렴(裵克廉) 목사였다. 설장수(偰長壽).
본조 최이(崔迤) 영목사로 있었다. 안노생(安魯生)ㆍ조세안(趙世安)ㆍ임인산(林仁山)ㆍ정사(鄭賜)ㆍ안지귀(安知歸)ㆍ이영견(李永肩) 모두 목사였다.
『신증』 손소(孫昭) 목사였으며, 옥사를 잘 처결하고 정사가 너그러워서 백성이 애모하였다. 이우(李堣) 목사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 다스렸다.
【인물】 고려 하공진(河拱辰) 현종이 거란군(契丹軍)을 피해서 남쪽으로 간 다음, 공진이 표문을 받들고 거란 진영에 가서 군사를 돌리도록 청하였다. 거란 임금이 허락하고 드디어 공진을 억류하였다. 억류되어서는 내심으로 환국하려고 꾀하면서 겉으로 충성을 표시하니, 거란 임금이 매우 총애하였다. 공진이 좋은 말을 많이 사서 동쪽으로 나오는 길에다 두고서 돌아올 계책을 꾸몄다. 사람이 그의 계책을 고발하여 거란 임금이 공진을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신이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하옵는바,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겨서 용서하고, 절개를 고쳐 자기에게 충성하라 하였으나, 공진의 언사가 더욱 공손하지 않으니, 마침내 죽였다.
강민첨(姜民瞻) 목종조(穆宗朝)에 과거에 올랐다. 현종(顯宗) 때에는 대장군으로서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이 되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응양 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전임되었고,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병부상서로 죽으니,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되었다.
강창서(姜彰瑞) 어려서 본주 향교 소속의 생도로서 학업에 힘써서 글을 잘 지으니, 강 남쪽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왕(熙王) 8년 봄에 성시(省試)에 가려는데,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려 옥에 갇혔다. 고을에 나아가서 방면하기를 청했으나 관원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장원 급제하면 방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옥사를 연기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장원이 되었다. 금의환향하니, 목백이 막료와 주 아전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고, 그의 집에 가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부모에게 술을 권해서 경축하니, 온 경내가 영화롭게 여겼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강인문(姜引文) 박사 계용(啓庸)의 아들이다. 부자가 모두 유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간 일이 있었는데, 원(元) 나라 조정에서 일본을 정벌하면서 계용이 길을 안다는 것으로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다. 풍파가 험난하였고 또 교전하던 때이므로 여러 번이나 죽을 뻔하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도 선비노릇은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문하시중 창귀(昌貴)가 모두 아전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증손 성민(性敏)이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선비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하을지(河乙沚) 충혜왕조(忠惠王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이 계림원수(鷄林元師)에 이르렀다. 하즙(河楫)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러서 진천군(晉川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원정(元正)이다. 하윤원(河允源) 즙의 아들이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辛旽)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그른 줄 알면서 그릇 판결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일을 보았다. 상주가 되어 시묘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정을보(鄭乙輔) 상서 공부시랑으로 증직되고, 정천군(菁川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강기(姜蓍) 나이 19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판도판서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강회백(姜淮伯) 강기의 아들이다. 신우 초년에 과거에 올라 밀직제학을 지냈고, 본조에 들어와서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본조 하륜(河崙) 고려 말기 과거에 올라 조정과 외방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경세제민의 재질이 있었다.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서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하연(河演) 윤원(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경복(河敬復)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하한(河漢) 경복의 아들인데, 또한 무용(武勇)으로써 일컬었다. 벼슬이 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장(剛莊)이다.
정이오(鄭以吾)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시를 잘하여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정척(鄭陟) 향공(鄕貢)으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원사 수문전 대제학(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대(恭戴)이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청렴개결로 스스로 지켰으며, 조정의 의례에 건의한 바가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청직(淸直)’ 두 자로써 경을 칭찬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다.” 하고, 의복과 말을 하사하였다.
강석덕(姜碩德) 회백의 아들이다.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대민(戴愍)이다.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강희안(姜希顔) 석덕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글씨가 그림과 함께 묘하였다. 강맹경(姜孟卿) 회백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으며, 지낸 벼슬은 모두 청요한 관직이었다. 세조조에 좌익(佐翼) 공신으로써 진산 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강희맹(姜希孟) 희안의 아우이다.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써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와 문이 정묘하였고,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하숙산(河叔山) 세조조(世祖朝) 친시에 장원하였다. 벼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에 이르렀으며, 뒤에 병으로 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강자평(姜子平)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다. 두 번이나 승지가 되었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정척의 아들이며, 사람됨이 충효 정직하였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고,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해 3년 동안을 심상(心喪)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주신(舟臣)도 과거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하숙부(河叔溥) 경복의 손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써 일컬었고,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강귀손(姜龜孫) 희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유순정(柳順汀)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었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조정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말기에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계책을 결단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강혼(姜渾)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을 잘하였다. 연산조에 승지가 되었다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진천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형(姜詗) 자평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가 연산조 갑자년에 죽음을 당했고, 금상(今上) 초년에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신증』 【우거】 본조 조숙기(曺淑沂)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효자】 신라 성각(聖覺) 스스로 거사(居士)라 호하고, 일리현(一利縣) 법정사(法定寺)에 의탁하였다. 뒤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늙어서 병이 들자 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장사를 지성껏 지냈다. 혜공왕(惠恭王)이 벼 3백 섬을 하사하였다.
고려 정유(鄭愈)ㆍ정손(鄭愻) 모두 지선주사(知善州事) 임덕(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서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 사는데, 왜적이 밤에 갑자기 닥쳐 군사들이 다 도망치는데, 임덕은 병들어서 말을 타지 못하였다. 형제가 부축하여 달아나는데 왜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서 두어 놈을 쏘아 죽이니, 왜적이 감히 달려 들지 못하였다. 그 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고 돌진하여서 임덕의 뺨을 찌르므로 정손(愻)이 제 몸으로 가로 막으면서 또 네 놈을 베어 죽여, 임덕은 화를 면하였으나 정손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유에게 종부승(宗簿丞)을 제수하였다.
강안명(姜安命)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모가 매양 이웃 늙은이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였으므로 안명은 아내와 함께 힘껏 준비하고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자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죽은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하였다. 홍무(洪武) 경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하현부(河玄夫) 벼슬은 사직(司直)이다. 90세 된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고 종기를 빨았다. 전후에 부모상을 6년 동안 입었다.
여효제(余孝悌)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힘껏 섬겼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 3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안(香案) 위에 있던 사배(砂杯)를 물고 가버렸다. 효제는, “까마귀는 비록 미물이나 반포(反哺)하는 덕이 있는데, 나의 효성이 까마귀와 같지 못하므로 이것을 물고 가게 된 것이다.” 하면서, 깊이 탄식하였다. 꿈에 한 늙은이가, “슬퍼하지 말라. 3일이면 잔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까마귀가 다시 물어다가 향안 위에다 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지성스러운 효도가 미물을 감동시킨 것이다.” 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본조 모순(牟恂) 세종조에 과거에 올라 좌사간대부를 지냈다. 일찍이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하였고, 뒤에 또 어머니가 병들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군만(君萬) 광대이다. 그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갔다. 군만은 하늘에 통곡하면서 아침 되기를 기다려서 활과 살을 가지고 산에 들어갔다. 범이 다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있다가 군만을 보자 울부짖으면서 앞에 와서 먹었던 사지(四肢)를 토하였다. 군만은 살 한 개로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범의 배를 갈라서 남은 뼈를 다 거두어서 화장하였다. 득비(得妃) 그 아버지 김계남(金繼南)이 간질을 얻어 4년 동안을 낫지 않았다. 득비는 산 사람 고기를 먹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제 왼쪽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서 먹였더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화(成火)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 김백산(金白山) 16세 때에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가므로 백산이 낫을 휘두르면서 범을 쳐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다. 성종(成宗) 9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인(朴氤) 아버지가 죽었는데, 마침 연산군 때여서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인은 최복(衰服)으로서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금상(今上) 4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응태(姜應台)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금상 11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영암(靈巖) 사인(士人) 인우(仁祐)의 딸인데, 본주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시집왔다. 홍무(洪武) 기미년에 왜적이 진주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달아나 숨었다. 이때에 정만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왜적이 마을에 마구 쳐들어왔다. 최씨는 30여 세로 자색이 있었다. 네 아들을 안고 산중에 숨었더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하다가 최씨를 만나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였다.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며 소리질러 꾸짖기를, “나는 죽을 뿐이다. 도적에게 더럽힘을 받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하며, 꾸짖기를 말지 않으니, 왜적이 마침내 해쳐서 나무 밑에서 죽었다. 왜적이 두 아들을 포로로 잡아 갔고, 셋째 아들 습(習)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체 곁에서 울부짖고, 젖먹이 아이는 기어가서 젖을 빨아 피가 흥건하게 입으로 들어갔는데 잇따라 죽었다. 10년 뒤 기사년에 도관찰사 장하(張夏)가 조정에 알려서 정문을 세우고, 정습에게는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신증』 본조 정씨(鄭氏)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다. 연산군 을축년에 지서는 죽음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되고 집에는 못을 팠다. 정씨는 그 곁에다가 초막을 얽고, 지서의 입던 옷을 설치하고, 제전(祭奠)을 드리면서 3년을 마쳤다.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유맹상피진(遺氓尙避秦) 이색(李穡)이 융막(戎幕)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좋다는 말 들었다. 정천(菁川)이 막부 이웃이라지. 다만 공무가 적어지게 되면, 자주 나가서 유람함이 무슨 방해되랴. 괴상한 얘기는 진(晉) 나라 적 일을 듣는 것 같으려니, 남은 백성이 오히려 진 나라를 피하였으리. 그대는 능히 그들의 종적을 알겠는가, 사해는 아직도 한창 풍진이로다.” 하였다.
명성천하희(名城天下稀) 이색의 시에, “기실(記室)은 망년의 벗이요, 이름난 성으로 천하에 드물다. 강루(江樓)엔 서늘함이 좌석에 가득하고, 대숲 속 집에는 푸른 빛이 옷을 적시네. 홍시에 서리가 처음으로 무겁고, 뱅어는 가을이라 한창 살쪘겠네. 맑은 늪이라 응당 아직 끝남이 없으리니, 남쪽으로 바라보며 돌아가는 사람 전송한다.” 하였다. 영대사원운매곡(靈臺寺遠雲埋谷) 이색의 시에, “영대사 머니, 구름이 골을 묻었고, 촉석루 높으니, 나무가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수점청산침벽호(數點靑山枕碧湖) 정여령(鄭與齡)의 시에, “두어 점 푸른 산이 푸른 호수 베개했는데, 공(公)은 이것이 진양도(晉陽圖)라 말하네. 물가에 초옥이 그 얼마인가. 그 중에 내 집 있는데 기울었는지 않았는지.” 하였다.
시원우과금단취(柹園雨過今丹脆) 최해(崔瀣)의 시에, “감나무 동산에 비 지나니 금단이 물러졌고, 밤나무 언덕에 서리 내리니 옥 껍질이 얼룩졌다.” 하였다. 진양가려증경처(晉陽佳麗曾經處)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아름다운 진양은 일찍이 지난 곳, 노래하며 피리불던 누대를 꿈속에 자주 드네. 묻노라, 지금엔 지주(地主)가 없다 하는데, 강에 가득한 가을달을 누구에게 맡겼는가.” 하였다. 문무영재생락토(文武英材生樂土) 하연의 시에, “문무의 영재는 낙토에서 나고, 산천 맑은 기운은 이름난 성에 자욱하다.” 하였다. 장천평초풍연호(長川平楚風煙好) 정이오의 시에, “긴 냇물 질펀한 풀밭에 풍연이 좋고, 호탕한 피리와 애절한 거문고 소리에, 세월이 더디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치고, 관찰영(觀察營)을 두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적량진(赤梁鎭) 흥선도(興善島) 가운데에 있는데, 거리는 주에서 1백 10리, 서쪽 남해로 30리이며, 성의 둘레는 1천 2백 82척이며, 옛날 만호가 있었다. 숙종 1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수군동첨절제사 겸 좌조창영운차사(水軍同僉節制使兼左漕倉領運差使)가 있었다.
혁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쪽으로 74리, 말문면성(末文面城)이다.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으로 옮겼고 또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우수영(右水營) 서남쪽의 남해 가에 옮겼다. 옛날에 만호가 있었고, 뒤에 고성의 사량(蛇梁)에 옮겼다. 각산수(角山戍).
【영아】 우병영(右兵營) 본조 태종 때 창원(昌原)에 설치하여 선조 36년에 촉석산성(矗石山城)에 옮겼는데, 앞은 장강(長江)에 임하였으며, 명승지로 삼았다. 속영(屬營) 진주 우영(右營)ㆍ상주 좌영ㆍ김해 별중영(別中營)이다.
○ 우영 인조 때 설치하였다.
○ 우영장 겸 토포사 1명이다.
○ 속읍은 진주ㆍ거창ㆍ하동ㆍ함양ㆍ곤양(昆陽)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남해ㆍ사천ㆍ단성(丹城)ㆍ산청(山淸)ㆍ안의(安義)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이다.
【관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ㆍ중군(中軍) 곧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심약(審藥)이 각 1인.
【토산】 대나무[竹]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ㆍ웅담ㆍ녹용ㆍ백토(白土)ㆍ김ㆍ문어.
【성지】 송대산성(松臺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73척이다. 영선고현성(永善古縣城) 동쪽으로 44리이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8백 14척이다. 굴촌고현성(屈村古縣城) 서쪽으로 48리이며, 둘레가 9백 77척이다. 진성부곡성(晉城部曲城) 동쪽으로 45리이며, 산위에 옛 터가 있다. 월아산목책(月牙山木柵) 동쪽으로 15리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설치하였는데, 옛 터가 있다. 척산성(尺山城)ㆍ당산성(堂山城)ㆍ신령산성(神靈山城) 이상 세 곳은 왜인이 쌓은 것이다.
【방면】 주내(州內) 군 안에 있다. 조곡(槽谷)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25리이다. 금산(金山)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여(大如)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갈곡(葛谷) 위와 같은데 본래 갈곡의 소재지이다. 가주(加住) 위와 같다. 가수개(加樹介)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가좌촌(加佐村)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상사(上寺)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반성(班城) 위와 같다. 오동(於東)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용봉(龍鳳) 위와 같다. 양전(良田) 위와 같다. 영이(永爾) 동남쪽으로 끝이 70리이다. 내진(內晉) 동남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외진(外晉) 위와 같다. 말문(末文) 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창선도(昌善島) 곧 흥선도(興善島), 남쪽으로 처음이 1백리, 끝이 1백 20리이다. 적량(赤梁) 흥선도 가운데 있는데,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영이곡(永耳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읍곡(五邑谷) 위와 같다. 영현(永縣)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성을산(省乙山)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금동오(金洞於)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곡(松谷) 위와 같다. 소촌(召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곡(耳谷) 위와 같다. 지곡(枝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정촌(鼎村)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섭천(涉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나동(奈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차(加次) 본래 가차례(加次禮) 부곡인데,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평거(平居)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4리이다. 신풍(新豐)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부화곡(夫火谷) 위와 같다. 동곡(桐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45리이다. 모태곡(毛台谷)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죽(沙竹)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동물곡(冬勿谷)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태(省台)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50리이다. 집현(集賢)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명석(鳴石) 북쪽으로 40리이다. 대곡(大谷) 본래 대곡의 소재지였는데,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설매곡(雪梅谷)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비라(非羅)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침곡(針谷) 본래 침곡 부곡이었는데,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40리이다. 원당(元堂) 위와 같다. 이하(籬下)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수곡(水谷) 위와 같다. 단속(斷俗) 서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60리이다. 서남(西南) 서쪽으로 35리이다. 정수(正守)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북평(北坪) 위와 같다. 운곡(雲谷)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종화(宗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대야(大也) 위와 같다. 본래 대야천(大也川)의 부곡이었는데, 일명 선천(鐥川)이라고도 한다. 청암(靑巖)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30리이다. 가서(加西)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20리인데, 일명 시천(矢川)이라고도 한다. 삼장(三壯) 위와 같다. 백곡(柏谷)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금만(金萬)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사월(沙月)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진성(晉城)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파지(巴只)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산(吾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대평(大坪)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 오아(於牙) 부곡은 남쪽으로 10리, 율곡(栗谷) 부곡은 서쪽으로 30리, 부곡(釜谷) 부곡은 북쪽으로 5리, 인담(鱗潭) 부곡은 영선(永善)에 있는데, 주에서 30리 거리이다. 송자(松慈)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월아(月牙) 부곡은 동쪽으로 15리이다. 명진(溟珍)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동쪽으로 15리인데, 고려 말에 거제(巨濟) 명진포(溟珍浦) 사람이 여기에 와서 붙어 살다가 본군에 와서 거제로 돌아갔다. 진성(晉城) 부곡은 동쪽으로 45리, 지금의 진성면(晉城面)이며, 송곡향(松谷鄕)은 남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송곡면이다. 복산향(福山鄕)은 영선에 있고, 벌대(伐大)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40리이며, 수곡(水曲)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수곡면이다. 화곡(火谷)의 소재지는 동쪽으로 30리이며, 수대곡(水大谷)의 소재지는 남쪽으로 40리이다.
○ 대야천(大也川) 부곡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에 남해의 왜인들이 토지를 잃고 임시로 붙어 살던 곳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ㆍ황류진(黃柳津) 주의 동쪽이다. 운당진(雲堂津) 동쪽으로 10리, 남강진 하류이다. 정천진(菁川津) 서쪽으로 3리, 남강 상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서쪽으로 29리 단성(丹城) 신안진(新安津) 하류이다. 구라량진(仇羅梁津)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이 곳을 경유한다.
【교량】 십수교(十水橋) 남쪽으로 28리, 사천(泗川) 경계이다.
【창고】 읍창ㆍ군향창(軍餉倉)ㆍ제민창(濟民倉) 모두 읍내이다. 가산창(駕山倉)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영조 경진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아뢰어 설치하여, 진주ㆍ곤양(昆陽)ㆍ하동ㆍ단성ㆍ남해ㆍ사천 및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의 전세(田稅)ㆍ대동(大同)을 거두어 수로로 서울에 이르렀다.
○ 진주목사 감봉 적량첨사(晉州牧使監捧赤梁僉使)가 거두어 바쳤다. 별향창(別餉倉)ㆍ통창(統倉) 모두 말문면에 있다. 장암창(場巖倉) 가차례면에 있다. 영현창(永縣倉) 영선 고현에 있다. 반성창(班成倉) 반성 고현에 있다. 북창(北倉) 사상면(寺上面)에 있다. 강창 대산여면(代山如面)에 있다. 서창(西倉) 수곡면(水谷面)에 있다. 별회창(別會倉)ㆍ보군창(補軍倉)ㆍ양무창(養武倉)ㆍ조음포창(助音浦倉)ㆍ유황고(硫黃庫)ㆍ영고(營庫).
【목장】 진주장 흥선도 가운데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 있다. 【사원】 덕천서원(德川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우고 광해주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曺植) 자는 건중(建中), 호는 남명(南溟)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전첨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영경(崔永慶)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벼슬은 지평 증 대사헌이다.
○ 신당서원(新唐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우고,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조지서(趙之瑞)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연산주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응교 증 도승지이다.
○ 은열사(殷烈祠) 고려 현종 신유년에 세우고, 광해주 때 사액하였다. 강민첨(姜民瞻) 본관은 진주인데, 벼슬은 병부상서 증 태자태보 상주국이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 창렬사(彰烈祠) 선조조에 세우고 뒤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이며 본관은 언양이다. 벼슬은 판결사 창의사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황진(黃進)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벼슬은 충청 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최경회(崔慶會)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벼슬은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장윤(張潤)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벼슬은 진주 목사 증 병조판서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의정(李義精) 벼슬은 현감이다. 이상 5현(賢)은 선조 계사년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 충민사(忠愍祠) 효종 임진년에 세우고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병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양산도(梁山濤) 자는 회원(會元)이며, 벼슬은 공조 좌랑 증 좌부승지이다. 김상건(金象乾) 김천일의 법관인데 벼슬은 사포별좌 증 좌부승지이다. 이준민(李俊民) 벼슬은 거제 현령 증 병조 판서이다. 강희열(姜熙說) 의병장이다. 조경향(曺慶享) 벼슬은 진해 현감이다. 최기필(崔琦弼) 벼슬은 판관 증 호조 참의이다. 유사(兪)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의병장인데, 주부에 추증되었다. 이욱(李郁)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생원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강희복(姜熙復) 의병장이다. 장윤형(張胤賢) 벼슬은 수문장 증 호조 좌랑이다. 박승남(朴承男) 벼슬은 판관이다. 하계선(河繼先) 유생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최언량(崔彦亮)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고종후(高從厚)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의병 복수장이다. 벼슬은 임피 현령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잠(李潛) 무과 출신으로, 적개의병장이다. 이숭인(李崇仁) 본관은 송경(松京)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 증 호조 판서이다. 성영달(成穎達) 본관은 창녕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경상 우병사이다. 윤사복(尹思復) 본주의 군관인데 벼슬은 첨정 증 호조 참의이다. 이인민(李仁民) 자는 자원(子元)이며 이준민의 아우이다.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유경(鄭惟敬) 벼슬은 주부이다. 김태백(金太白) 벼슬은 수문장이다. 박안도(朴安道)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양제(梁齊) 선무랑이었다. 이상은 선조 계사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고읍】 굴촌(屈村) 서쪽으로 50리, 본래 신라 현의 땅인데, 경덕왕 16년에 굴촌이라 고쳐 강주(康州)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와서 소속되었다. 문화(文和) 동남쪽으로 60리, 본래 신라의 교화량(蛟火良)이었는데, 경덕왕 16년에 문화라 고쳐 고성군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소속되었다. 흥선(興善) 흥선도 가운데 있으며, 남쪽으로 70리이다. 본래 고려 유질(有疾)의 부곡이었는데, 현종 때 창선(彰善)이라 고치고 내속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흥선이라 고친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이 흩어져 죽자 인하여 폐해버렸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80리, 그 설치를 혁폐하여 마치지 않았다. 뒤에 강등시켜 부곡으로 삼았다. 그 우두머리가 머리를 깎았으므로 중대가리[僧首]라 하였다.
*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 (15고을)
무관직 兵馬僉節制使 겸임
* 교수(敎授) 1 명 종 6품.
* 서원: 26명.
* 일수: 36명
*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좌도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7일정
異名: 달구화(達句火)ㆍ달성(達成).
*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
* 도사(都事) 감영소속
* 중군 겸 토포사 (中軍兼討捕使) 감영소속
* 심약(審藥) 감영소속
* 검률(檢律) 각 1인
대구부 소속관
* 판관(判官) 음직 종5품
좌수 1인. 별감 3인. 군관 40인. 인리 96인. 지인 40명. 사령18명.
군뢰 13명. 관노 42명. 관비 40명.
* 영장(營將) 무관 정3품.
군관 1백71명. 진무(鎭撫) 30명. 지인 22명. 사령 25명. 군뢰 50명.
0 己卯式元戶 1759년 영조35
호수: 12,752호. 인구: 59,614명. 남자: 24,913명. 여자: 34,701명.
동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청도군(靑道郡) 경계까지 47리,
서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52리,
북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43리이며,
경상감영은 부 성내에 있다.
남쪽으로 통제영까지 3백30리, 3일 반정.
동쪽으로 울산병영까지 2백40리, 2일 반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2백70리. 3일정.
0【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이 경산부(京山府)에 붙였고, 인종이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 세종 때에 승격시켜 군을 삼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0【속현】
수성현(壽城縣) 부의 남쪽 12리에 있다. 본래 위화군(喟火郡)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는데, 신라 경덕왕이 수창군으로 고쳤으며, 가창(嘉昌)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이 경주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1353)에 감무(監務)를 두어 해안현(解顔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1394)에 감무를 폐지하여 대구에 내속(來屬)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고, 태종 14년(1414)에 다시 내속시켰다. 해안현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美里)라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주에 붙였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어 수성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감무를 폐지하여 내속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에 붙였고, 태종 14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하빈현(河賓縣)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본래 다사지현(多斯只縣), 또는 답지(沓只)라 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는데, 뒤에 내속시켰다. 또는 금호(琴湖)라고도 부른다.
0【진관】
도호부 1고을 밀양(密陽). 군 1고을 청도(淸道). 현 7 고을 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인동(仁同)ㆍ현풍(玄風)ㆍ의흥(義興)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이다.
『신증』 신녕(新寧)
0【성씨】 본부 백(白)ㆍ하(夏)ㆍ배(裴)ㆍ서(徐)ㆍ이(李), 도(都) 내성(來姓)이다. 하빈(河濱) 신(申)ㆍ이(李)ㆍ송(宋). 수성(壽城) 빈(賓)ㆍ나(羅)ㆍ조(曺)ㆍ혜(嵇)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수성에 옛날에 3성(城)이 있었는데, 수대군(壽大郡), 일명 양성(壤城)은 그 성(姓)이 빈이고, 구구성(句具城)은 그 성이 나이고, 잉조이성(仍助伊城)은 그 성이 조와 혜이다.” 하였다. 유(柳)ㆍ장(張)ㆍ최(崔)ㆍ신(申)ㆍ유(劉)ㆍ고(高)ㆍ정(鄭)ㆍ예(芮)ㆍ진(陳)ㆍ김(金)ㆍ이(李) 모두 내성(來姓)이다. 해안(解顔) 모(牟)ㆍ백(白)ㆍ하(河)ㆍ신(申)ㆍ정(丁) 《육익》에 또한 말하기를, “성화성(省火城)은 모이고, 무가성은(無價城)은 신이고, 불좌성(佛座城)은 백과 하이고, 명성(鳴城)은 정이다.” 하였다. 제(諸)ㆍ진(秦)ㆍ박(朴) 모두 내성(來姓)이다. 한(韓) 속성(續姓)이다. 자이(資已) 김(金) 속성(續姓)이다.
0【형승】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겹이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구불구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 모두 김요(金銚)의 금학루기(琴鶴樓記)에 있다.
0【산천】
* 연귀산(連龜山)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地脈)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귀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 침산(砧山) 부의 북으로 6리에 있다.
* 공산(公山) 팔공산(八空山)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岳)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 중국 숭산 (嵩山)의 별칭)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다. 둘러 있는 것은 부 및 하양ㆍ신녕ㆍ부계(缶溪)ㆍ인동ㆍ팔거(八莒) 등의 읍이다.
* 마천산(馬川山) 하빈현에서 남으로 1리에 있는데, 일명 금성산(錦城山)이라고도 한다.
* 왕산(王山) 해안현에 있다.
* 팔조령(八助嶺) 수성현에서 남으로 34리에 있다. 청도군 조에도 보 인다.
* 입암(笠巖) 신천(新川) 가운데에 있다. 그 모양이 삿갓 같기 때문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 금호(琴湖) 부의 서북으로 11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 나는 영천(永川郡) 보현(普賢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모자(母子山)에 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沙門津)으로 들어간다.
* 달천진(達川津) 하빈현에서 동으로 16리에 있는데, 금호의 하류이다. * 저탄(猪灘) 해안현에서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금호의 상류이다.
* 신천(新川) 부에서 동으로 4리에 있다. 팔조령에서 나와서 금호로 들 어간다.
* 성당지(聖堂池) 부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 동안진(東安津)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6리에 있다. 근원은 봉화현(奉 化縣)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신증』 행탄(杏灘) 하빈현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 불상지(佛上池) 부에서 북으로 10리에 있다.
* 연화지(蓮花池) 부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다.
0【토산】
붕어[鯽魚]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백복령(白茯苓)ㆍ감(枾)ㆍ잣[海松子]ㆍ송이[松蕈]ㆍ죽전(竹箭) 왕산(王山)에서 난다. 호두[胡桃]ㆍ입초(笠草)ㆍ지황(地黃). 『신증』 잉어[鯉魚]ㆍ지치[紫草]ㆍ옻[漆]ㆍ석류(石榴)ㆍ쇠무릎(牛膝)ㆍ구기자(枸杞子)ㆍ인삼(人蔘)
0【성곽】
* 달성(達成)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9백 44자, 높이 4자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0【봉수】
* 마천산 봉수(馬川山烽燧) 남으로 성주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으로 같은 주(州)의 각산(角山)에 응한다.
*법이산 봉수(法伊山烽燧) 수성현에 있다. 남으로 청도군 팔조현(八助縣)에 응하고, 북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
0【누정】
* 금학루(琴鶴樓) 객관(客館)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 김요(金銚)의 기문에, “옛사람이 물건에 이름 붙이기를 혹은 그 땅에 말미암고, 혹은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는다. 파릉(巴陵)의 악양루(岳陽樓)로 말하면 그 땅 이름에 말미암았고, 저수(滁水)의 취옹정(醉翁亭 취옹은 구양수(歐陽脩)의 아호)으로 말하면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았다. 지금 금후(琴侯 금은 성, 후는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가 정사를 맡았으며 읍에 금호(琴湖)의 이름이 있고, 누(樓)의 그림이 학이 춤추는 형상이니, 이 누에 오르면 한 거문고와 한 학이 있어서 쇄락출진(洒落出塵)하는 기상이고, 성문화명(聲聞和鳴)하는 멋과 남풍해온(南風海慍)하는 즐거움이 있다. 금학으로써 그 누각을 이름지음이 옳겠도다. 드디어 나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았소. 언자(言子)의…정치, 복자(宓子)가…것, 영천(潁川)의 정치로 말하면, 그 공효(功效)가 봉황래의(鳳凰來儀)에 이르렀으니, 옛 사람의 정치를 알 것이요. 이제 후(侯)가 달구(達句)를 다스림은 신(信)이 흡족해서 사람들이 화목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공경하여 속이지 않고, 홀아비와 홀어미가 편안하여 원망하지 않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서 소송(訴訟)이 적어졌으니,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하였다.
○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넓어 사람이 많이 살고, 다락이 높아서 시계(視界)가 밝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함께 가고, 거문고는 달과 같이 맑구나.” 하였다.
○ 일본 중 경양(慶陽)의 시에, “그림 그린 들보의 나는 듯한 가에서는 학의 여윈 그림자를 보고, 붉은 난간의 굽은 곳에서는 거문고의 남은 소리를 듣네.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천년의 모습이요, 흐르는 물 높은 산은 태고(太古)의 마음일세.” 하였다.
0【학교】
향교 부에서 동으로 2리에 있다.
0【역원】
* 범어역(凡於驛) 부에서 동으로 9리에 있다.
* 금천역(琴川驛) 하빈현의 서쪽 1리에 있다.
* 낙중원(洛中院) 부에서 남으로 3리에 있다.
* 대로원(大櫓院)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 사부원(沙阜院)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 관방원(觀方院) 부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 마천원(馬川院) 하빈현에서 남으로 4리에 있다.
* 남천원(南川院)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리에 있다.
* 오원(梧院) 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 박실원(朴實院) 부에서 서쪽으로 26리에 있다.
0【불우】
* 동화사(桐華寺) 공산에 있다. 고려 김훤(金晅)이 지은 중 홍진(弘眞)의 비명(碑銘)이 있다.
* 지장사(地藏寺) 수성현에 있다.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의 기문이 있다.
* 선사암(仙槎庵) 마천산에 있다. 암자 곁에 최치원(崔致元)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 부인사(夫人寺)ㆍ자화사(慈華寺)ㆍ파계사(把溪寺)ㆍ보리사(菩提寺) 모두 공산에 있다.
0【사묘】
*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 성황사 부의 동쪽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0【고적】
* 공산성(公山城) 공산의 동쪽에 있는데, 부에서 30리 떨어졌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고, 높이가 4척이며, 안에는 샘이 2, 도랑이 3개 있다.
* 미리사(美理寺) 해안현에 있다. 혹은 해안을 미리라고도 한다. 견훤(甄萱)이 신라의 서울 가까운 곳에 닥쳐오니, 경애왕(景哀王)이 고려에 구원을 빌었는데,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서울에 들어와서 왕을 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국고의 보배와 무기를 다 취하였고, 자녀들과 여러 공장 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서 귀의하였다. 고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우니,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여러 군대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을 피하였다.
* 자이소(資已所) 해안현에서 북으로 20리에 있다.
*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 수성현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1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0【명환】
본조 금유(琴柔)ㆍ옥고(玉沽) 모두 군수였다. 군의 아전 배설(裵泄)이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며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며 남용하여 수령들이 많이 그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했는데, 배설이 만년에 남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수령들을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와 옥고는 모시고 살았다.” 했다. 『신증』 신엄(申嚴).
0【인물】
고려 빈우광(賓于光) 수성현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또 중국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이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다. 필법(筆法)이 당대에 이름났다. 배정지(裵廷芝) 충렬왕 때에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현(燕岐縣)에서 합단(哈丹)을 쳤는데, 칼을 빼어 말을 달리니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와서 보거(輔車 광대뼈와 아랫이틀 사이)를 꿰뚫자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목 자른 것이 매우 많았다. 생김새가 멀쑥하고 장대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무략(武略)에 탄복했다. 입으로는 이익을 말하지 않았으며,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서균형(徐鈞衡)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본조 서거정(徐居正) 갑자과(甲子科)에 합격하고 또 중시(重試)ㆍ발영(拔英)ㆍ등준(登俊)의 3과에 뽑혔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었고,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달성군(達成君)을 봉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어휘가 풍부하고 민첩하여 저술한 것이 많고, 홍문관 대제학이 된 것이 모두 26년이었다. 중국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거정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를 주고받되 붓을 멈추지 않자 기순이 탄복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 재능을 칭찬하고, 우리 사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안부를 물었다. 《사가집(四佳集)》ㆍ《동인시화(東人詩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閑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0【효자】
고려 하광신(夏光臣) 명종 때 사람인데, 어머니를 섬기기에 효성을 지극히 하고, 여묘(廬墓)살이를 3년 하였다. 태정(泰定) 계묘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조희삼(曺希參) 수성현 사람인데, 관직은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15년(1382)에 어머니를 부축하고 왜란을 피하였는데,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里縣)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는데, 적이 쫓아오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다. 너는 말을 달려 피하는 것이 옳다.” 하니, 희삼이 말하기를 , “어머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그 어머니와 더불어 밭 사이에 숨었는데, 적이 칼을 뽑아 그 어머니를 치려하자, 희삼이 몸으로 가려서 적에게 죽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김한(金閑) 해안현 사람이다. 어릴 때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늘 상례(喪禮)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그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고 또 3년을 살았다. 나무로 부모의 모습을 새겨서 두 무덤 사이게 두고 큰 농(籠)을 짜서 그 앞에 놓고 그 속에서 살았는데, 부모의 나서 길러주고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어떤 큰 호랑이가 농 곁에 왔으나 오히려 움직이지 않자 호랑이는 얼마 있다가 가버렸다. 채순(蔡順) 수성현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었으나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무덤을 지킬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묘살이하고 이듬해 그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이장하여 아침 저녁 상식을 올려 6년에 마쳤다. 본조 박득춘(朴得春) 해안현(解顔縣) 사람이다. 부모를 위하여 여묘살이 6년을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추원 녹사(錄事) 벼슬을 내리고 정려했다.
0【열녀】
본조 서씨(徐氏) 낭장(郞將) 김내정(金乃鼎)의 아내이다. 나이 24세에 내정이 죽었는데, 절개를 지켜 두 남편을 섬기지 않았다. 태종 때에 정려하고 복호(復戶 부역을 면해 줌)하였다.
0【제영】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 금유의 시에, “군(郡)을 위해 몸이 피곤하더니, 다락에 오르니 눈이 트이네. 금호에 새 물이 가득하고, 영각에 여름 바람이 맑네. 감히 현가(絃歌)의 정치를 바랄까마는, 조수(組綬)의 영달일랑 뽐내지 마라. 3년토록 조금도 공이 없으니, 붓을 놀려 부질없이 정만 머금네.” 하였다. 십영(十詠) 서거정의 시이다. 금호범주(琴湖泛舟)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난주(蘭舟 목란(木蘭)으로 만든 배로 일반적으로 놀잇배를 뜻함)를 띄우니, 차츰 한가히 가서 백구(白鷗)에 가까울사. 한껏 취해 달 밝은데 노저어 되돌아가니, 풍류란 반드시 오호(五胡 중국의 경치 좋은 다섯 호수)에 노는 것이 아닐세.” 하였다. 입암조어(笠巖釣魚) “가랑비 자욱히 가을 물가에 내리는데, 낚싯줄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네. 잔 고기는 낚싯밥 아래 다소 있음을 알겠는데, 금오(金鼇)를 낚지 못해 멈추지 않네” 하였다. 귀수춘운(龜岫春雲) “거북 봉우리가 흐릿하여 큰 자라 봉우리 같구나. 구름이 무심히 나온다지만 또한 뜻이 있더라. 대지의 생령(生靈)들이 바야흐로 바라고 있는데, 뜻 없이 단비를 만든다 하랴.” 하였다. 학루명월(鶴樓明月) “한 해 열두 번 둥근 달 중에, 추석에 한껏 둥근 달을 기다려 얻네. 또한 긴 바람이 구름 쓸어 가버리니, 온 다락에 조그만 요기(妖氣)도 붙일 곳 없네.” 하였다. 남소하화(南沼荷花) “물에 돋아난 어린 연꽃은 작은 돈짝을 겹쳐 놓은 듯한데, 꽃이 피면 끝내 배[船] 보다 크네. 재질이 커서 쓰이기 어렵다 말하지 마라, 고질병을 보내어 만성(萬姓)을 고치기에 알맞으니.” 하였다. 북벽향림(北壁香林) “옛 벽의 푸른 향나무는 옥삭(玉槊 옥으로 만들거나 혹은 옥색의 창(槍))같이 길고, 긴 바람이 끊임없어 사시(四時)에 향기롭구나. 은근히 다시 가꾸어 힘을 붙이면, 머물러 맑은 향기를 온 고장에 함께 할 수 있으리.” 하였다. 동사심승(桐寺尋僧) “멀리 절에 올라가는 돌층계 길엔,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 검은 지팡이로다. 이렇게 흥겨운데 알아주는 이 없네. 하기야 흥이 청산(靑山)에 있지 중에 있진 않거니.” 하였다. 노원송객(櫓院送客) “관도(官道 국도(國道))에 해마다 버들 빛이 푸르고, 단정(短亭 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이 수없이 장정(長亭)을 이었네. 양관곡(陽關曲 이별곡) 다 부르고 각각 흩어지니, 모래밭 가에 두 흰 술 병만 누었구나.” 하였다. 공령적설(公嶺積雪) “공산 천 길에 울퉁불퉁 산이 겹쳐 의지했는데, 쌓인 눈이 하늘을 적셔 이슬이 맑구나. 신사(神祠)에 신령이 응당 있음을 알겠고, 해마다 삼백(三白 정월에 내리는 눈)이 내려 풍년을 얘기하네.” 하였다. 침산만조(砧山晩照) “물은 서쪽에서 산 밑으로 흐르고, 침산은 푸르러 맑은 가을에 붙었구나. 저녁바람에 어디에서 방아 소리가 급한고, 비낀 해에 일임하여 나그네의 수심을 찧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풍각(豐角) 남으로 70리인데, 동남쪽으로는 밀양(密陽)과 5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 상화촌(上火村)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유산(幽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풍각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밀성(密城)에 속했으며, 본조 현종 조에 내속했다. 화원(花園) 서남쪽으로 30리이며, 서쪽으로 성주(星州)와 7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설화(舌火)인데, 경덕왕 16년에 화원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에 속했으며, 후에 본부(本府)로 옮겨 속하고, 그 후에 경산부로 다시 속했다. 본조 숙종조에 다시 본부로 속하게 하고 읍호(邑號)를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방면】
동상(東上) 끝은 5리이다.
동중(東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끝은 5리이다.
서중(西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하(西下)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감물천(甘勿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포(玉浦)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월배(月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조암(阻巖)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법화(法華) 서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평곡(省平谷) 서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5리이다.
수현내(守縣內)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동(守東)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북(守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상수남(上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수남(下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수서(上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수서(下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10리이다.
○ 앞의 7면은 수성(壽城) 고현 땅이다.
해동촌(解東村)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해북촌(解北村)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해서부(解西府)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해서촌(解西村)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 앞의 4면은 해안(解顔) 고현 땅이며, 지금은 금호강(琴湖江) 북쪽이다.
하동(河東)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하서(河西) 서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남(河南)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북(河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다.
○ 앞의 4면은 하빈(河濱) 고현 땅이며, 금호강 북쪽에 있다.
각현내(角縣內) 남쪽으로 끝은 70리이다.
각북(角北)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각초동(角初同)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끝은 1백리이다.
각이동(角二同) 남쪽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리이다.
각남(角南)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 앞의 5면은 풍각(豐角) 고현 땅이다.
화현내(花縣內)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35리인데, 즉 화원(花園) 고현 땅이다.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은 풍각 고현에 있다.
자이소 해안현(資已所解顔縣)은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본조 영종(英宗) 12년(1736)에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24보이고, 우물이 다섯이다.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 수성(壽城) 고현 서쪽 10리이다. 둘레가 3천 51척이다.
*마천산고성(馬川山 古城) 서쪽으로 35리이다.
*하빈(河賓) 고현 남쪽 1리에 유지(遺址)가 있으며, 금성(錦城)이라 부른다.
*화원고성(花園古城) 고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부른다.
*구위성(舊倭城).
【영아】
순영(巡營) 태조(太祖) 원년(1392)에 안렴도관찰(按廉都觀察) 출척사(黜陟使)의 영(營)을 상주(尙州)에 설치했다. 태종(太宗) 원년(1400)에 다시 안렴사(按廉使)를 삼았고, 세조(世祖) 11년(1465)에 고쳐서 관찰사(觀察使)라 불렀다. 중종(中宗) 13년(1518)에 본도의 일이 번잡하다 하여 좌우도 관찰사(左右道觀察使)로 나누었는데 동년에 다시 합했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적이 모략질하고 약탈하여 도로가 불통하였으므로 또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었는데, 좌영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영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였다가 26년에 다시 합쳐 영(營)을 성주(星州)의 팔거(八莒) 고현에 설치하니, 즉 총병(總兵) 유연(劉綖)이 진(陣)을 주둔했던 곳이다. 28년에는 땅이 넓어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다시 좌우로 나누었으며 29년에 다시 합하여 달성(達城)에 영을 설치하고 이어 석축(石築)을 더하였다. 30년에는 병화(兵火)로 인하여 또 파했는데, 31년에 관찰사 한준겸(韓浚謙)과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대구(大邱)와 성주(星州)를 한 도(道)로 하니, 백성의 피폐함이 가시지 않으므로 안동부에 유영(留營)하자고 하였다. 34년에는 체찰사가 다시 본부(本部)로 영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토산】 입초(笠草).
【누정】 관풍루(觀風樓)ㆍ척금루(滌襟樓)ㆍ점풍루(占豐樓)ㆍ읍북루(挹北樓) 모두 읍내이다. 임수정(臨水亭) 서남쪽으로 35리이다. 하목당(霞鶩堂) 낙동강가 경치가 훌륭하다.
【사원】
*연경서원(硏經書院) 명종(明宗) 갑자년(1564)에 건립하고, 현종(玄宗) 갑자년(1660)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조에 보인다. 정술(鄭述) 충주(忠州) 조에 보인다. 정경세(鄭經世) 상주(尙州) 조에 보인다.
*낙빈서원(落濱書院) 숙종 기미년(1679)에 건립하고 갑술년(1694)에 사액하였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 조에 보인다.
*표충사(表忠祠) 현종 경술년(1670)에 건립하고 숙종 정묘년(1687)에 사액하였다. 신숭겸(申崇兼) 마전(麻田) 조에 보인다. 김낙(金樂) 순천 사람으로,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0 旱田
元帳付七千八百七結二十三負內各樣免稅陳雜頉竝三千五百五十八結九十負九束己卯時起四千二百四十八結三十二負一束
0 水田
元帳付四千九百七十六結五十四負四束內各樣免稅陳雜頉竝五百四十八結七十三負四束己卯時起四千四百二十七結八十一負
0 進貢
白术 白芍藥 赤芍藥 赤茯苓 甘菊 柴胡 人蔘 蒲黃 栢子仁 枸杞子 蓮子 續隨子 連翹 瓜蔞仁 白茅香 生木果 端午乾雉 臘平生雉
0 糶糴
元會米一千一百八十八石三斗一升二合九夕雜穀八千四百六十二石十三斗九升二合二夕常平廳米二百三石六斗六升二合九夕雜穀一萬七千五百五十六石十斗七升九合八夕賑色米六十一石九斗三升八合五夕雜穀二千四百二石三斗四升四合五夕私賑米一石二斗七升四合雜穀三百二十三石五斗五合三夕別會米一百十六石十四斗九升六合七夕雜穀四百七十一石十二斗一升六合三夕每年九月開倉十一月封倉以己卯穀摠爲准
0 田稅
米九百六十六石十二斗五升三合太七十五石五斗六升六合每年三月收捧以琴湖津船裝載入洛東江到梁山勿禁津移載海船由大洋到泊釜山倉公木一百十同十二疋二十一尺八寸四月收捧以陸路輸納東萊府己卯條爲准
0 大同
作木一百十五同以陸路上納惠廳米三千五百二十五石十一斗七升七合六夕儲置本府己卯條爲准而每年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
0 均稅
田稅條木六同四十疋二十九尺大同條木五同十六尺九寸錢五百兩八戔四分結錢四千四百八十八兩五戔三分船稅錢八兩三月收捧四月上納選武軍官布五同四十疋十月收捧十一月以陵路輸納均廳己卯條爲准
0 俸廩
衙祿位九十結米二十石公須位十五結米九石三斗官需米三百九十石民結所出雉鷄丁未年自營門設置屯畓永防營府所用炭辛未年自營門永爲防給以備營府之用柴癸酉年自營門永防營用戊寅年又自營門永防鎭營所用本府則每夫捧九丹柴木以爲計用藁草靑草收捧民夫以備營府鎭營三處所用氷丁丙子年自營門防給貿藏永爲定式以備營府及鎭營之用
0 軍兵
禁衛正軍二百二十六名官保四百五十九名資保二百四十二名別破陣保一名御營正軍一百五十二名官保三百四名資保一百五十二名京步兵二百二名諸色軍五十一名忠贊衛六十名忠翊衛二名砲保二百二十七名校書館刻手保四十二名樂工樂生并十三名束伍軍二百七名保人四百十四名步軍八百八十二名保人八百八十二名卜馬軍三十五名保人七十名水陸軍一千二百五十四名并保六百二十七名主鎭軍二百三十四名差備軍四名武學七百三十四名烽燧軍三百名撥將四人撥軍九十名
* 영해(寧海) 左道. 8일.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異名: 우시(于尸)ㆍ유린(有隣)ㆍ예주(禮州)ㆍ단양(丹陽)ㆍ덕원(德原). 책양(冊陽).
* 영해도호부사겸안동진관병마첨절제사. 문관 3품 임기 3년
* 영해교수. 종6품
속관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11인. 인리 31인. 지인 16인.
사령 17명. 관노 21명. 관비 16구.
0 호구 已卯 式元戶 1759년(영조35)
호수: 2,355호. 인구: 8,021명. 남자: 3,913명. 여자: 4,108명.
안동진관영해도호부(安東鎭管寧海都護府)
동쪽은 해안까지 7리, 남쪽은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은 진보현(眞寶縣) 경계까지 80리,
서쪽으로 영양경계까지 60리,
예안현(禮安縣) 경계까지 1백 26리,
북쪽은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30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리이다.
남쪽으로 대구감영까지 3백리 3일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3백80리 4일정.
남쪽으로 통제영까지 9백40리 10일정
0【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유린(有隣)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고향이라고 하여 승격시켜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하고, 뒤에 승격시켜 예주목(禮州牧)으로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태저목(汰諸牧)을 고쳐 지금 이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 6년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고쳐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0【속현】
*영양현(英陽縣) 영(英)은 연(延)이라 하기도 한다. 부의 서쪽 84리에 있다. 본래 고은현(古隱縣)이었던 것을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 예주(禮州)에 예속(隸屬)시켰으며,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고 후에 다시 내속시켰다. 익양(益陽)이라고도 한다.
*청기현(靑杞縣) 부의 북쪽 99리에 있다. 본래 대청부곡(大靑部曲)은 예전에 청부현(靑鳧縣)에 속하고, 소청부곡(小靑部曲)은 영양현(英陽縣)에 속하였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대소청부곡(大小靑部曲)을 합하여 청기현(靑杞縣)으로 하였다. 청계(靑溪)라고도 한다.
0 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강무당(講武堂) 장관청(將官廳)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
0【성씨】
본부(本府) 박(朴)ㆍ김(金)ㆍ황(黃)ㆍ이(李)ㆍ임(林)ㆍ신(申).
영양(英陽) 남(南)ㆍ이(李)ㆍ김(金)ㆍ방(房).
청기(靑杞) 유(兪)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
석보(石保) 김(金) 속성(續姓)이다.
0【풍속】
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 줄을 다루는데 공교(工巧)하다 권근(權近)의 서루기(西樓記)에 있다.
0【형승】
동쪽이 바다에 닿아서 일본과 이웃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문(記文).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하였다. 산은 멀고 첩첩하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다 모두 권근의 기(記)에 있다.
【산천】
*용두산(龍頭山)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그 산정(山頂)에 우물이 있는데, 장마에도 가뭄에도 물의 증감이 없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처음에 산정에 한 갈대[葦]가 있었는데, 길이가 하늘에 닿았다. 그곳에 우물을 팠더니 물이 썩 맑고 깨끗하였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이 비치면 변하여 진흙 빛이 되었다.”고 한다.
*동해산(東海山)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반포산(半浦山)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잉량대산(仍良大山) 부의 서쪽 9리에 있다.
*가서음산(加西音山) 부의 서쪽 13리에 있다.
*가을면산(加乙面山)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산성산(山城山) 부의 서쪽 13리에 있다.
*등운산(騰雲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일월산(日月山) 영양현(英陽縣)의 북쪽,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의 경계에 있다.
*망일봉(望日峯)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서읍령(西泣嶺) 부의 동쪽 40리에 있어서 온 고을의 전송(餞送), 영접(迎接)하는 곳이 되어 있다. 『신증』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크고 작은 사신(使臣)의 행차가 만약 처음으로 재[嶺]를 넘으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다 피해 다녔다. 손순효(孫舜孝)가 감사(監司)가 되었을 때에, 바로 재 위로 와서 고목(古木)을 깎아 껍질을 벗기고 글을 써서 말하기를, “너는 화산(華山 서울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을 읍(揖)하여 만세를 부르고, 나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백성들을 위로한다. 어느 쪽이 가볍고 무겁다는 것을 누구가 능히 알 수 있으랴. 밝은 태양이 우리의 두 충정(衷情)을 비추고 있다.” 하고, 인하여 이름을 고쳐 파괴현(破怪峴)이라고 하였다. ○ 권오복(權五福)의 시에, “탐천(貪泉)도 오은지(吳隱之)를 그르치지는 못하였으니, 우는 재[泣嶺]라는 이름자를 가지고 무지(無知)한 자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구구하게 괴이한 것을 깨뜨린다고 한 것이 도리어 괴이하노니, 우는 재라면 모름지기 타루비(墮淚碑)를 새기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오현(烏峴) 영양현(英陽縣) 경계 50리에 있다.
*남면현(南眠峴)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오다가 이 재에 이르러 말 위에서 곤(困)하게 자는데, 황(黃)씨 성을 가진 한 아전이 술을 올렸다. 태조가 잠에서 깨어서 마시고 그 아전을 수헐(愁歇 근심이 그친다는 의미)이라고 명명(命名)하고, 그 산을 면현(眠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현(松峴)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 아조(我朝) 세종 조(世宗朝)에 이 재의 남쪽에 땅불[地火]이 일어나서 밤낮으로 연기는 나지만 불빛은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나무나 돌을 던져 넣으면 다 탔다. 큰 비가 와도 꺼지지 않더니 거의 반달이나 지나서 저절로 꺼졌다. 성종(成宗) 갑진년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밑에 석유황(石硫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파보았으나 석유황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함한동(含恨洞)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그 동중(洞中)에 연지계(燕脂溪)가 있으니 관기(官妓)들이 사는 곳이다.
*축산도(丑山島) 부의 동쪽 1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형상이 소[牛] 같아서 축산(丑山)이라고 한다. 그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말 같다. 그래서 마산(馬山)이라고 한다. 전함(戰艦)이 정박하는 곳이다.
*바다 부의 동쪽에 있다.
*적천(赤川) 부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영양현(英陽縣) 대천(大川) 현(縣)의 동쪽 5리에 있다. 그 원류(源流)는 일월산(日月山)에서 나와서 진보현(眞寶縣)에 이르러 신한천(神漢川)이 된다.
*용당(龍塘)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산의 돌 사이에서 샘이 솟아 나와서 큰 못이 되었다. 그 아래에 관개(灌漑)하는 토지가 매우 넓어서 백성들이 그 이(利)를 입고 있다.
*백석정(白石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경정(鯨汀)ㆍ장정(長汀) 모두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병곡포(柄谷浦)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병곡역(柄谷驛)의 옛터가 있다.
*망곡포(網谷浦) 백석정에 있다.
*경정(景汀)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고성포(高城浦)ㆍ대진(大津) 모두 관어대(觀魚臺) 아래에 있다.
*영혈지(靈穴池) 영양현에 있다.
【토산】
구리[銅] 대소산(大所山)에서 난다. 아연[鉛] 창수원(蒼水院) 남쪽에서 난다. 죽전(竹箭) 축산도에서 난다. 인삼(人蔘)ㆍ방어(魴魚)ㆍ대구[大口魚]ㆍ홍어(洪魚)ㆍ청각(靑角)ㆍ석류(石榴)ㆍ문어(文魚)ㆍ송어(松魚)ㆍ넙치(廣魚)ㆍ연어(鰱魚)ㆍ자해(紫蟹)ㆍ고등어[古刀魚]ㆍ홍합(紅蛤)ㆍ전복[鰒]ㆍ송이[松蕈]ㆍ김[海衣] 미역[藿]ㆍ참가사리[細毛]ㆍ꿀[蜂蜜].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2백 78척, 높이가 13척이다. 안에 우물 셋, 못[池] 하나가 있다. 영양산성(英陽山城) 부의 서쪽 66리에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78척, 높이가 7척이다. 높고 험준하며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축산포영(丑山浦營)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둔다.
【봉수】
*대소산 봉수(大所山烽燧)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남쪽으로 영덕현(盈德縣) 별반산(別畔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광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강원도 평해군(平海郡) 후리산(厚里山) 봉수에 응한다.
*광산 봉수(廣山烽燧) 부의 서쪽 43리에 있다. 서쪽으로 진보현(眞寶縣)의 남각산(南角山)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대소산 봉수에 응한다.
【누정】
*해안루(海晏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서루(西樓) 곧 성(城)의 서쪽 문루(門樓)이다. ○ 권근(權近)의 기(記)에, “영해(寧海)는 즉 옛날의 덕원(德原)이다.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하여 땅은 궁벽하고 깊숙하여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도 대단한 추위는 없다. 물고기와 자라와 전복과 조개 등 해산물의 생산이 많다. 옛날 태평하던 때에는 백성들은 풍성하고 송사(訟事)는 간단하여 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줄을 다루는데 공교로웠다. 노래하는 목청과 춤추는 태도는 맑고도 예뻤고, 정사(亭榭)와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는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다. 시중(侍中) 몽암(蒙庵) 이혼(李混)이 이 고을에 귀양왔을 때에,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얻어서 무고(舞鼓)를 만들고 그 절도(節度)를 가르치니, 그 소리는 굉장하고, 그 춤은 변전(變轉)하여, 쌍쌍이 펄펄 나는 나비가 봄을 재촉하는 것보다도 화기(和氣)가 있고, 날래고 사나운 용감한 기세는 두 마리의 용(龍)이 서로 다투어 적(敵)에게 달려갈 때보다도 힘차다. 이것이 영해부의 가장 기이한 광경으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풍속을 살피며 절월(節鉞)을 가진 인사(人士 감사)들은 반드시 와서 유람하고 관찰하니, 실로 한 방면의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런데 왜구(倭寇)가 일어나고부터는 날로 쇠체(衰替)하더니 신유년에는 그 화(禍)가 더욱 격렬하여 성(城)과 읍(邑)은 폐허가 되고 여염은 불타버렸다. 두어 해 동안을 적(賊)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여 살고, 범과 산돼지가 옛마을에 와서 살았다. 변방이 이미 이즈러지니 왜구의 침입은 더욱 심해져서, 계해년 여름에는 원주(原州)와 춘천(春川)을 거쳐서 철원(鐵原)의 경계를 와서 침노하며, 양주(楊州)ㆍ광주(廣州)를 침략하고, 공주(公州)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을 일으키는데 이르렀다. 그 왜구는 다 축산도(丑山島)를 거쳐서 들어 온 것이다. 한 읍이 수비를 잃어 삼도(三道)가 해를 입었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었다. 다음해 갑자년에 원수(元帥) 윤가관(尹可觀) 공이 합포(蛤浦)로 나와서 진무(鎭撫)할 때,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서 마침내 이 고을에 이르렀다. 가시덤불 속에 원수의 절(節)을 멈춰 세우고 둘러보며 탄식을 거듭하였다. 곧 성을 쌓아서 국경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즉시 역전(驛傳)을 통해 계문(啓聞)하였더니, 묘당(廟堂)의 의논이 그러하게 여겼으나 그 수비를 어렵게 여기었다. 김을보(金乙寶)군이 자원하고 나서니, 부월(斧鉞)과 인절(印節)을 주어 만부장(萬夫長)을 삼고, 계림(鷄林)과 안동(安東)의 군사 2천명을 출동시켰다. 이에 뭇 왜구가 소요하고 양탈(攘奪)하는 가운데서 한쪽으로 적을 방어하고 한쪽으로 성을 쌓아서 7월에 시작하여 한달 만에 마쳤다. 또 축산도에 전선(戰船)을 배치하여 수졸(戍卒)을 두었다. 그런 뒤에는 왜구가 여기에 배를 대고 서식하지 못하게 되어, 한 읍은 재건되고 여러 고을들은 편안함을 얻었으니, 다 윤공이 성을 쌓은 덕택이다. 이때로부터 유리(流離)하여 남의 고을에 붙여 살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백성의 집들이 겨우 서더니, 무진년 정월에 실화(失火)로 연소되어 공(公)ㆍ사(私) 건물들이 적지(赤地)가 되어버렸다. 기사년 봄에 병마사(兵馬使) 박문부(朴文富)가 왔는데, 남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힘써 관대한 정치를 시행하며, 백성으로서 생업을 잃고 유리하는 자를 보듬고, 아전으로서 허가 없이 중이 된다는 환속시켜서, 그 노고(勞苦)와 안일(安佚)을 균평하게 하며, 그 주리고 결핍함은 구제하여 따뜻이 보호하고 어루만져서, 갓난 아기처럼 돌봐 주었다. 역마를 타고 온 사자(使者)라면 비록 미관(微官)일지라도 반드시 묵고 있는 객관에 가서 위로하고 대접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公)은 벼슬이 높고 저 사람은 낮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극진히 하십니까.’ 하니, 후(侯)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손이고 나는 주인이다. 손과 주인 사이에 어찌 자급(資級)과 품등(品等)을 따질 수 있겠는가. 저 사람이 혹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려 아전과 백성을 혹독하게 꾸짖는다면 내가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후(厚)하게 하면 저 사람도 반드시 성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는 자는 감복하여 즐거워하고 아전은 꾸짖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왜구가 다시 와서 밤에 해안에 이르렀다. 후가 듣고 즉시 성문을 열고 말에 채찍질하여 나가려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적(賊)이 어두운 밤을 타고 왔으니 적변(賊變)이 장차 어떻게 될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고 수가 약소하니 적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다려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더니 후가 말하기를, ‘국가가 나를 인재가 아니라고 버리지 않고 한 지방을 맡겨서 백성의 사명(司命)이 되었는데, 바닷가의 소금 굽는 사람들은 홀로 국가의 백성들이 아니란 말인가. 적이 왔다는 것을 듣고도 구제하지 아니하여 적의 칼날 앞에 쓰러지게 한다면, 비록 내가 구차하게 산들 장차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달려가 죽는 것은 그게 바로 나의 직책이다. 또 내가 돌격해 나가면 적도 또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의 행렬에 앞장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니 적이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말[馬]을 해치는 표범과 사람을 잡아 먹는 범들도 모두 단번에 무찔러서 백성의 피해를 제거하였다. 그가 백성에게 어질고 적에게 용감함이 이와 같으니, 고을 사람들의 유임(留任)을 원하는 신망을 얻고 관찰사의 포상과 칭찬의 추천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또 농한기에 백성의 힘이 한가할 때에는 성의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도로의 장애물을 제거하며, 옛터에서 기와를 주어다가 관사를 덮게 하였다. 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기를, ‘서문(西門)은 이미 화재로 인하여 막아버린 채 쓰지 않는데 어찌 또한 이것을 구축(構築)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기꺼이 명령을 들었다. 몇 날이 못 되어서 다시 지으니, 위는 누(樓)이고, 아래는 관문(關門)인데, 견고하게 되었다. 성에 세 문이 있는데, 동문은 땅이 낮고 누추하고, 남문은 산이 가깝고 좁다. 오직 서문만이 넓은 들을 향하여 버티고 서서 훤하게 통하고 시원스럽게 트였다. 산은 멀고 첩첩하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다. 굽이치기도 하고 트이기도 하면서 멀고 아득하여 한 눈으로 천 리를 볼 수 있으니, 실로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독차지하고 있다. 만약 봄ㆍ여름ㆍ가을의 농사철이 되어, 모든 집들이 일제히 일하는 때에 이 누에 오르면,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점심을 가져가며, 아침에 나가 김을 매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어떤 이는 짝지어 일하고 어떤 이는 떼를 지어 일하며, 어떤 때는 심고, 어떤 때는 수확한다. 서쪽 들에 일하며 남쪽 밭에 힘쓰는 자들은 진흙이 묻고 바람과 햇볕에 그을리면서, 부지런히 노역(勞役)하여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의 온갖 상태가 다 누(樓)의 헌창(軒窓)과 좌석 아래에 있어서 모두가 눈앞에서 떠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을 가진 자는 마땅히 날마다 이 누에 올라서 때대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오직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알아서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농사에 힘쓰는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또한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과 밥상 위의 밥알이 낱낱이 농부들의 신고(辛苦)에서 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부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려는 마음이 왕성하게 자라서, 반드시 백성의 힘쓴 결과를 먹으면서 백성을 위한 일은 게을리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그들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어서 그의 기름과 피를 빨아 먹으며, 쓰는 것을 사치하게 하여 재물을 손상시킴으로써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야 차마 어찌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누를 지은 것이 우리 농민에게 유익함이 크다. 따라서 저 산 모양과 바다의 빛 같은 경치 좋은 것은 이 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옛일에 징험하여 지금을 알 수 있으며, 전의 일을 거울 삼아 뒷일을 경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노래와 춤을 즐거던 곳도 본래 같은 산과 바다였고, 중간에 폐허가 되었던 것도 또한 같은 산과 바다였으며, 이제 이 성루(城樓)를 복구한 것도 또한 같은 바다와 산인 것이다. 산과 바다는 변천함이 없는데, 인간 세상은 폐(廢)함도 있고 흥(興)함도 있으니, 즐거움이란 산이나 바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즐길 만하고, 뒷일을 생각하면 또한 상심(傷心)할 만하다. 예전에 이미 음란하고 사치하며 안일(安佚)하고 향락(享樂)함으로써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제 도로 안정하고 다시 진기(振起)하는 초두(初頭)에 불현듯 엎어진 앞 수레의 자국을 밟아서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자들이 마땅히 알아서 경계해야 할 바이다. 내가 이 고을에 귀양살이를 왔는데 마침 이 누 낙성(落成)하는 때를 만나 벽에 기(記)를 쓰라고 청하므로 내가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몽암(蒙庵)이 북[鼓]을 만들어 한 고을의 화려한 사치를 더하더니, 박후(朴侯)는 누를 지어서 한 고을의 근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 명성을 남기고 은택을 끼치는 장점은 마땅히 한 개의 북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것을 기(記)로 한다.” 하였다.
남루(南樓) 성의 남쪽 문루(門樓)이다. 동루(東樓) 성의 동쪽 문루이다. 봉송정(奉松亭)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바다 어귀가 비어 매우 허전하였는데 옛날에 봉씨(奉氏) 성(姓)을 가진 이가 부사(府使)가 되어 소나무 일만 그루를 심어서 돌개바람을 막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소송정(小松亭)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관어대(觀魚臺)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관어대부(觀魚臺賦) 서(序)에,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다. 동해의 바위 아래에 서 있어서 노는 물고기를 셀 수 있다. 그러므로 관어대라고 이름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이다. 그래서 작은 부(賦)를 지어놓고 혹시 중원(中原)에 전하여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부에 “단양(丹陽)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 물가엔 큰 파도가 끝없이 아득할 뿐 그밖의 것은 알지 못하겠다. 그 큰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고요할 때에는 거울을 닦아 놓은 듯하다. 풍백(風伯 바람을 말은 신)이 풀무로 쓰는 곳이요, 해약(海若 바다의 신)이 제 집으로 삼는 곳이다. 큰 고래들이 떼를 지어 희롱하니 그 기세는 큰 창공을 뒤흔들고, 사나운 새가 외로이 나니[飛] 그림자가 떨어지는 노을에 이어진다. 대(臺)가 있어서 굽어보니 눈에는 땅이 보이지 않는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물이 있을 뿐, 멀고 아득한 그 사이가 천리 만리로구나. 오직 대의 아래에는 파도가 자는 듯 일어나지 않는다. 굽어 보니 온갖 고기들이 같은 것도 있고 서로 다른 것도 있다. 어릿어릿하는 놈도 있고, 천천히 꼬리를 치는 놈도 있어서, 제각기 만족하고 있다. 임공(任公)이 백마(白馬)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것은 과장한 것이니, 내가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니며, 강태공(姜太公)의 낚시는 곧은 낚시였으니 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바이다. 아, 우리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나의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그 즐거움을 즐겨서 나의 편안함을 몰각(沒却)하나니, 물(物)과 내가 한 마음인 것은 고금이 같은 이치이다. 누가 구복(口腹)을 위하여 급급하게 굴다가, 군자의 버림을 받겠는가. 문왕(文王)은 이미 가고 없으니 오인어약(於牣魚躍)을 생각하여도 기대하기 어려움을 슬퍼한다. 공부자(孔夫子)로 하여금 뗏목을 타게 한다면 또한 반드시 여기에 즐거워함이 있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물고기가 못에서 뛴다’고 한 글귀는 곧 중용(中庸)의 큰 뜻이다. 그 뜻에 잠기어 탐구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다행히 자사(子思 중용의 작가)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부(賦)에, “엄숙하게 옥장막(玉帳幕 임금 있는 곳)에서 부절(符節)을 받고, 장차 동쪽으로 바다의 끝까지 가련다. 우격(羽檄)이 어지러이 교착(交錯)하고 있으니 내 어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장한 일과 노숙한 계책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질까 두렵구나. 예주(禮州)의 성문(城門)에서 쉬고는, 전현[前修 전현(前賢)]의 옛집에 서 있노라니, 그 곁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대(臺)가 있어서 적성(赤城)의 새벽 노을을 몸에 감고 있네. 두 손[客]을 따라 이곳저곳 가리키노라니, 황홀하여 몸이 맑은 물기운에 의지하여 이곳을 밟은 줄 알지 못하였노라. 장주(莊周)는 어찌 물고기를 안다고 자랑하는가.맹자(孟子)가 감히 물[水]을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랴. 위태로운 돌 계단에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니, 아득히 먼 구름 물결은 그 몇 리인고. 조금 뒤에 회오리바람이 잦아들자 짠 내 나는 연기 어지러이 일어난다. 바다의 신기루는 쓸어낸 듯 사라지고, 광경은 갑자기 달라진다. 길게 휘파람 불며 굽어보나니, 뭇 고기들은 발랄(潑剌)하게 제 멋대로 무리져 놀고 떼지어 헤엄치는데, 조그마한 물속에서 무자맥질하는 물고기가 흉내 낼 수 없구나. 큰 물결 업신여기며 떠 올라서 호흡하니 그물을 놓고 창으로 찔러 본들 무엇을 바라랴. 혹은 지느러미를 흔들고 비늘을 떨치니 나는 그것들이 바람을 부르고 우레를 일으키며 통령(通靈)한 것으로 변화할까 두려워한다. 용처럼 서린 가지 휘어잡고 크게 탄식하며 온갖 물류(物類)가 제각기 다 편안하다는 것을 느낀다. 솔개가 나는[飛] 것과 함께 비유하였으니, 누가 지극한 이치를 밝게 알아 들으랴. 이것은 태극(太極)이 앞에 보이는 것이니, 맹세해 마음에 새겨서 버리지 말라. 두 손님이 애호해 돌봐줌으로, 바라보고 발돋움하여 홀연히 얻음이 있었네. 술잔을 높이 들어 서로 권하면서 하나의 근본이 여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목은옹(牧隱翁)께 술잔을 올리고 그의 웅대한 글을 외우노라니, 맛좋은 음식에 실컷 배부른 것 같구나. 간(肝)과 담(膽)은 초(楚) 나라와 월(越) 나라처럼 먼 것이 아니니, 원하건대 다 같이 밝고도 정성된 군자(君子)에로 돌아가고자 하노라.” 하였다.
『신증』 임영루(臨瀛樓)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0【학교】
향교(鄕校)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0【역원】
*병곡역(柄谷驛)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영양역(寧陽驛) 부의 서쪽 75리에 있다.
*면현원(眠峴院) 남쪽 면현(眠峴) 아래에 있다.
*제인원(濟仁院) 부의 서쪽 1리에 있다.
*위장원(葦長院) 부의 서쪽 18리에 있다.
*적혈원(赤穴院)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서쪽 55리에 있다.
*천상원(川上院)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덕봉원(德奉院)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정족원(鼎足院) 부의 서쪽 81리에 있다.
*창수원(蒼水院) 서읍령(西泣嶺) 아래에 있다.
*환희원(歡喜院)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0【불우】
*범흥사(梵興寺) 등운산(騰雲山)에 있다.
*위장사(葦長寺) 용두산(龍頭山) 우물 곁에 있다.
0【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속칭에 팔령신(八鈴神)이라고 일컫는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0【고적】
*석보부곡(石保部曲)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수비부곡(首比部曲) 부의 북쪽 90리에 있다. 본래는 영양(英陽)에 속하였는데, 고려 문종(文宗) 때에 옮겨서 울진(蔚珍)에 붙였다가 뒤에 근처라 하여 도로 영양에 붙였다.
*북량루(北涼樓) 옛터가 객관의 북쪽에 있다. 이곡(李穀)의 시(詩)에, “한기(韓琦)는 감히 주금당기(晝錦堂記)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부탁하더니, 비록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가기 또한 바쁘더라. 촉군(蜀郡)에서 길잡이 현령(縣令)이 노시(弩矢)를 짊어지고 구종(驅從)하는 것을 보았으며, 회계(會稽)에서 벽제하는 것 허리의 문장(紋章)을 웃었구나. 북쪽 헌함에 서니 하늘은 넓고 바다는 검고, 서쪽 재[嶺]에 가을이 깊으니 나무도 풀도 황엽(黃葉)일세. 이별하는 마당에서 먼저 눈물부터 뿌리는 일은 그만두라. 나에겐 이미 때를 느끼고 옛날을 회포하는 배알마저 무디었으니.” 하였다. ○ 종적은 평생에 물에 뜬 마름 같은데, 꿈속에서 이따금 누(樓) 머리에 기대어 보네. 다리[橋]에 이름을 쓰고 한 번 삼천리 멀리 떠났다가 인(印)을 차고 20년 만에 다시 왔구나. 소나무는 들에서 마중하는 듯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물은 어옹(漁翁)으로 숨을 만하여 가벼운 배 떠 있네. 다른 해에 혹시 동산(東山)의 뜻을 성취하리니, 곱게 단장한 자야 잘 있으니 눈물 흘리지 말라.” 하였다.
*유사정(流沙亭) 부의 동쪽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유사(流沙)는 우공(禹貢)에 실려 있는 바로서 임금의 감화(感化)를 받은 곳이다. 그러나 유사라고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은 나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그들의 유연(遊燕)하며 거처 휴식하는 곳에 현판을 걸 때에는 본래 이름난 산수에 의거하여 명명하거나, 혹은 크게 아름다운 것, 크게 악(惡)한 것을 이름으로 걸어서 권장하거나 징계하는 뜻을 붙였으며, 혹은 그 선대(先代), 고향 등에 대한 이름을 붙여서 근본을 잊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만약 멀리 떨어진 이역(異域)이며 낮게 여기고 미워하는 곳으로서, 중국에서 인물도 나지 아니하며, 배와 수레가 이르지 않는 땅인 유사(流沙)와 같은 이름은 사람들이 말하기도 싫어하며 일컫기도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그것을 큰 글씨로 두드러지게 써서 문 위에 걸어 놓겠는가. 나는 우리 형의 품은 뜻이 반드시 남보다 뛰어남이 있음을 안다. 천하의 큼과 성인(聖人)의 교화는 다같이 무궁한 것으로 이것은 오히려 밖에 나타난 상태요, 사람의 신체의 작음과 천하의 큼은 다같이 서로 같은 것으로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이치이다. 그 밖의 상태로부터 보면 동쪽으로는 부상(扶桑)까지, 서로는 곤륜(崑崙)까지, 북쪽은 불모의 땅까지, 남쪽으로는 눈이 오지 않는 곳까지 성군(聖君)의 교화가 젖어들고 미치고 입혀지게 된다. 그러나 온 천하가 혼연일체로 통일되는 일은 항상 적고 분열되는 일은 항상 많으므로 진실로 나는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의 것으로 살펴본다면 근육과 뼈가 서로 묶이고, 정(情)과 성(性)은 미미하다. 그런데 심(心)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우주를 포괄하고 사물에 대처하여 위세나 무력으로도 능히 떠나게 할 수 없으며, 지혜나 힘으로도 저지시키지 못하는 의젓한 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비록 편벽된 한 구석에 그윽하게 엎드려 있더라도 그 가슴속과 도량(度量)은 성군의 교화가 펼치는 사방의 먼 곳까지도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형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인가. 나는 일찍이 사방으로 유람할 뜻이 있었으나 이제는 이미 싫증났다. 신축년 겨울에 병화(兵禍)를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처음으로 영해부(寧海府)에 올 수 있었다. 여기는 나의 외가로서 우리 형이 산다. 영해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연접하여 일본과 이웃하고 있으며, 실로 우리나라의 동쪽 끝이다. 이제 내가 다행히 한 구석에 올 수 있어서 그 동쪽 끝의 끝까지를 보았다. 다른 것도 돌이켜 생각해 볼 터인데, 더구나 유사(流沙)와 상대되는 곳이겠는가. 그 위에서 술잔을 들면서 나에게 기(記)를 쓰라고 요구하기에 감연(欣然)히 쓴다.” 하였다.
*읍선루(揖仙樓)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읍선루 멀리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더니, 부절(符節) 잊고 올라 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네. 버들 장막에 드리운 연기는 작은 말을 감추고, 연방(蓮房)은 물에 거꾸로 향하여 잠긴 물고기에 비친다. 좋은 노님이 이제부터 몇 년의 추억이 되려는가, 아름다운 경치가 도리어 싫어져 3일 동안 소원(疎遠)하였다네. 소남(召南) 황각로(黃閣老)에게 알리기 위하여, 절경(絶景)을 제영(題詠)한 봉서(封書)로 편지를 한 통 보내노라.” 하였다.
*무가정(無價亭) 부의 성(城) 동쪽 3리에 있다. 이곡(李穀)이 지은 것이며, 남은 터가 아직도 있다.
*정신방(貞信坊) 송현(松峴)의 남쪽에 있다. 예전에 정절이 굳은 여자가 있어서 수절하면서 그 절조를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 동네[坊]를 정신(貞信)이라고 이름지어 표창한 것이다.
*백석부곡(白石部曲)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창숙부곡(倉稤部曲)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묘곡부곡(畝谷部曲)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주곡부곡(主谷部曲) 청기현(靑杞縣)에 있다.
*창석부곡(唱石部曲)ㆍ
*가하부곡(賈下部曲) 모두 영양현(英陽縣)에 있다.
0【명환】
*고려 김수자(金守雌)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예주방어사(禮州防禦使)가 되었다.
*윤신걸(尹莘傑) 충선왕 때에 벼슬이 강등되어 본부의 지부(知府)가 되었다.
*이혼(李混)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뗏목을 건져다가 무고(舞鼓)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악부(樂府)에 전하고 있다.
*우탁(禹倬) 사록(司錄)이 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팔령신(八鈴神)에게 미혹(迷惑)되어 제사를 받드는데 매우 더럽고 욕되게 하였다. 탁이 와서 즉시로 부숴서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음탄한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김을보(金乙寶) 만호(萬戶)가 되었다.
*박문부(朴文富) 병마사가 되었다.
0【유우】
*고려 이곡(李穀) 급제하기 전에 유람(遊覽)으로 여기에 와서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본조 권근(權近) 고려 말기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 본부(本府)에 귀양살이 하였다. *안로생(安魯生) 귀양살이하였다.
0【효자】
본조 박진(朴辰)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그의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엄동(嚴冬)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서 물고기의 회(膾)가 먹고 싶다고 하니, 진이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다가 회를 만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죽으니 집안에는 한 말의 쌀도 없었으므로 죽을 쑤어서 아침저녁의 상식을 드리고 3년을 여묘(廬墓)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명해서 가각고 부록사(架閣庫副錄事)에 임명하였다.
0【열녀】
본조 구음방(仇音方) 예빈시(禮賓寺)의 종이다. 나이 35세 때에 남편이 병사(病死)하니 그의 아버지가 과부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딴 데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구음방이 딴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도망하여 들에 가서 숨었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거듭하니 그의 아버지가 강요하지 못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로부터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마늘을 씹지 않은 것이 27년간이나 되었으며 또 신(神)을 제사하지 아니하여 속히 죽기를 원하였다. 성종 4년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0【제영】
운물관동방(雲物冠東方) 이색(李穡)이 신석보(申碩甫)를 전송하며 지은 시(詩)에 “단양(丹陽)은 나의 향곡(鄕曲), 풍경은 우리 동방에 첫째라네. 공명(功名)은 그런대로 가할 것이니, 터를 잡아 집 짓는 것 건강할 때에 하여보세. 함께 관어대(觀魚臺)에 올라서, 한 번 시원하게 부상(扶桑)의 아침 햇빛을 마시고지고.” 하였다. 낭타어기소우암(浪打漁磯疎雨暗)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물결 부딪치는 낚시터에는 성긴 비[疎雨]가 어둡고, 갈매기 서 있는 물가에 모래는 밝고 언 구름[凍雲] 빛 누르구나.” 하였다. 나지백발노황수(那知白髮老荒陲) 고려 박치안(朴致安)이 노기(老妓)가 달 아래서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지은 시(詩)에, “칠보단장(七寶丹裝)의 방 안에서 노래하고 춤출 때에, 어찌 흰머리로 황량한 시골 구석에서 늙을 줄 알았겠는가. 황금이 없으니 장문부(長門賦)를 살 길 없고, 꿈은 있어 비단 글자[錦字]의 시(詩)를 전하는 일이 있네. 구슬 같은 눈물은 오(吳) 나라 비단의 소매를 몇 번이나 적시었던고, 훈훈한 향기는 아직도 월(越) 나라 비단의 고운 옷에 촉촉히 스며 있네. 밤은 깊고 사창에 달은 밝은데 거문고의 가락이 구슬픈 것은, 다만 평생에 알아 주는 종자기(鍾子期) 같이 곡조 아는 이 없음을 탄하는 것일세.” 하였다. 평읍부상만경추(平揖扶桑萬頃秋)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굽어서 방장산(方丈山) 1천 봉우리의 새벽을 마시고, 정면으로 부상(扶桑) 만경 창파의 가을을 움켜 잡는다.” 하였다. 12영(十二詠) 안로생(安魯生)의 사(詞)이다. 등운산(騰雲山) “땅의 주축(主軸)은 하늘 북쪽에서 왔고 산의 뿌리는 바다 가운데에 박혔다네. 뜬구름 푸르름 쌓인 것 몇 천 겹이드냐, 구름 기운 스스로 부드럽게 모이었구나. 고목(古木)에는 푸른 등(藤) 덩굴 늙어 있고, 깊은 벼랑에는 햇빛마저 어두워라. 마침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보게 되었으니 마음대로 맑은 바람에 의지해서리라.” 망일봉(望日峯) “일찍 심양곡(尋暘谷)을 출발하여 와서 망일봉에 올랐네. 금까마귀(金鴉)가 푸른 물결 속에서 날아 나오니, 맑은 기운이 온 하늘에 가득하여 진다. 만물은 형태와 그림자로 나뉘고, 삼원(三元 천(天)ㆍ지(地)ㆍ인(人))은 처음과 끝을 만들었다. 가만히 차고 기우는 이치를 생각하여 보니 신묘하기 그지없어, 묵묵히 하늘의 공교함에 감사드린다.” 서읍령(西泣嶺) “맑고 얕게 물 흐르는 산골 길을 지나서, 산 안개 푸르른 산봉우리 향하였네. 세 줄 [三行] 붉은 비단 옷에 분단장 고운 님과 말 안장 나란히 돌아가니, 대낮의 광채가 움직였다네. 물은 가는 말을 쫓아 급히 흐르고, 산은 전별하는 장막인냥 둘러 있네. 이별가(離別歌) 다하지 않았는데 날은 이미 석양이라, 흐르는 눈물 다시 옷깃을 적시는구나.” 남면현(南眠峴) “동쪽 나라 용처럼 일어나던 날, 삼한(三韓)에 범처럼 싸울 때였네. 다만 운수가 우리 군사(郡師 임금이요, 스승이란 말)에게 인연이 있었을 뿐, 큰 사업 어찌 미리 알 수 있었으랴. 잠자면서 남쪽 재에 올랐을 때, 충심(衷心)으로 술 한 잔을 드리는 자 있었네. 바람처럼 날고 번개처럼 쓸어 안위(安危)를 정(定)한 뒤에, 우리 임금 단정히 손 모으고 하는 일 없으셨네. 연지계(燕脂溪) “동천(洞天)이 은밀하여 선경(仙境)을 감추었고, 시내는 돌아서 첩(妾)의 집을 둘렀네. 향기로운 바람 달빛 따라 비단 창에 불어 오니, 흐르듯 달빛이 비파(琵琶)에 비쳤네. 손으로 청동의 거울을 닦고, 머리에는 백옥(白玉) 비녀 꽂았구나. 새벽이 되어 단장을 마치니 얼굴 빛 꽃과 같은데, 물이 붉은 것 단사(丹砂)와도 같아라.” 축산도(丑山島) “땅은 다하니 바다는 크고, 구름이 걷히니 섬들이 드러나누나. 큰 물결 거세게 치솟아 천둥 울리듯 하니, 형세(形勢)가 눈사태 무너지는 듯. 만 그루의 대 수풀은 연기에 잠겨 고요하며, 일천(一千) 돛배들은 비 맞으며 돌아온다. 비록 바다의 도적 불의(不意)에 올지라도, 소문만 듣고 꺾이어 달아날 것을 나는 안다.” 읍선루(揖仙樓) “누(樓)가 높으니 구름이 기둥에서 일어나고, 산이 높으니 푸르름이 치마에 물방울져 떨어진다. 연꽃에 부는 바람 가늘게 맑은 향기 보내오니, 문득 신선의 고장에 들어간 것 같구나. 나뭇잎 떨어지매 가을임을 알겠고, 달이 밝으니 밤의 서늘한 기운 생겨난다. 난간에 기대서서 때때로 다시 술잔을 잡으니, 내 몸과 세상 양쪽 모두 서로 잊었다네.” 봉송정(奉松亭) “바다가 넓으니 물결 소리 웅장하고, 들이 비었으니 회오리바람이 침노한다. 소나무는 보호하는 장벽이 되어 무성하게 수풀을 이루었으니, 천년을 두고 푸르름이 그늘진다. 방초(芳草)는 푸른 담요[靑氈]처럼 부드럽고, 개인 날의 모래는 흰눈처럼 쌓였네. 몇 사람이 술을 갖고 날마다 서로 찾아와서, 흥에 겨워 번뇌하는 가슴을 시원히 열었던고.” 관어대(觀魚臺) “석벽(石壁) 천 층 밑에, 바다는 몇 길인가. 큰 물결 일만 리라도 한 천지(天地)이라, 굽어 보며 노는 물고기 세어 보누나. 물이 줄어드니 낚시터의 바위가 드러나고, 돛을 여니 간밤 비 드물다. 만약 여상(呂尙)으로 하여금 여기 와 살게 하였다면, 서백(西伯)도 같은 수레에 타고 갔을 것이다.” 범흥사(梵興寺) “보배스러운 땅에서 절을 찾으니, 공문(空門 불교)에는 세상 정이 엷구나. 붉은 수염 맨발로 바위 문지방 나와서, 소나무 아래에서 무생(無生)을 설교한다. 밤이 고요하니 돌샘의 소리 높아지고, 새벽 찬 하늘에 범종 소리 울려 온다. 도심(道心)과 못 그림자 둘 다 맑고 깨끗한데,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아 곧 자신의 형태를 잊어버린다.” 함한동(含恨洞) “요뇨(騕褭) 자류(紫騮) 같은 좋은 말 타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해맑은 젊은 이. 금빛 채찍 높이 들어 가리키는 곳 꽃같이 단장한 아가씨도 많더니, 그 중에도 단장 새로 한 아가씨께 기울었네. 가냘픈 손[手] 살그머니 구슬발 걷더니, 맑은 눈이 반기면서 골방[洞房 깊숙한 안방]을 나오네. 누(樓)에 올라 마주 앉아 봄경치 구경할 때, 단 한번의 탄식에도 간장 이미 끊어지네.” 정신방(貞信坊) “남녀가 구별이 있어 인륜이 바로 서면, 어떠한 덕행(德行)인들 맑아지지 않으랴. 다만 한 사람 절부 있어 마음 곧게 가졌기에, 온 마을이 좋은 이름 얻었다네. 열녀의 끼친 풍속 지금 아직 남아서, 관저(關雎)의 높은 교화 다시 행해진다. 단양(丹陽)의 예(禮) 바른 풍속 고금이 같으니, 이로부터 빛나고 밝은 교화 입는다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 끝이 3리.
*남면(南面) 처음에 5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30리.
*묘곡(畝谷) 본래는 묘곡부곡이었는데,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가을(加乙) 서쪽으로 25리에 있다.
*석보(石保) 본래는 석보부곡이었는데,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5리.
*오오곡(烏於谷) 서북쪽으로 45리.
*서남(西南) 처음은 8리, 끝은 40리.
*백석부곡(白石部曲)은 북쪽으로 25리,
*창숙부곡(倉稤部曲)은 서쪽으로 30리.
*가서향(加西鄕)은 서로 13리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산성산(山城山)이라 칭하는데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다.
【진보】 축산포진(丑山浦鎭) 동남쪽으로 14리에 있으며,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다. 선조 14년에 동래부(東萊府)의 부산포(釜山浦)로 옮겼다.
【창고】 읍창(邑倉) ㆍ석보창(石保倉) 석보면(石保面)에 있다.
【토산】 감[枾].
【누정】 임영루(臨瀛樓) 서쪽으로 5리에 있다.
0 旱田
元帳付一千四百七結二十三負九朿內各樣免稅陳雜頉并八百二十一結三十三負己卯時起五百八十五結九十負九束
0 水田
元帳付五百八十六結十負八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二百六十七結九十八負己卯時起三百十八結十二負八束
0 進貢
人蔘 膃朒臍 防風 胎水 槐實
枸杞子 乾文魚 半乾大口魚 裂乾紅蛤 乾大口魚 生文魚 生大口魚
0 糶糴
元會大小米四百二十三石一斗四升四合一夕雜穀二千四百七十三石十二斗五升四合三夕服色大小米七百四十五石四斗一升三合六夕雜穀八百七十四石七斗四合三夕常平廳大小米二十四石十一斗七升五夕雜穀七千十石四斗三升私賑雜穀六百七十九石七升四合別會大小米一千五十一石四升五合雜穀一千二百三十四石一斗四升一合三夕九月開倉十一月封倉己卯條爲準
0 田稅
作木十一同三疋十五尺九寸米九十一石六斗三升六合太十石二斗七升四夕四月收捧五月海船裝載自本府大津由盈德前洋淸河 長鬐 蔚山 禨張大洋三日到泊于東萊納于釜山倉己卯條爲準
0 大同
作木五同錢布參半三月收捧四月以陸路九日達于京納于宣惠廳米五百五十石二斗九升六合儲置本府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己卯條爲準
0 均稅
結錢五百二十五兩一戔鹽雚船稅錢七百六十二兩六戔六分三月收捧四月上納選武布代錢一百二兩一戔十月收捧十一月以陸路九日達于京納于均役廳己卯條爲準
0 俸廩
衙祿位四十三結六十五負九束木二十六疋二十二尺四寸米四石六斗七升二合九夕太六斗九升四合一夕公湏位十四結一負八束木八疋二十一尺一寸米一石四斗九刀二夕太二斗七升五合官需米二百石民結所出每夫雉一首鷄一首炭一石柴三十舟藁草二百斤靑草二造介式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手保五十三名御營正軍二十名資保二十一名禁衛正軍六名資保
七名兵曹騎步兵十七名樂工保四名司僕寺諸員二十二名醫女保六名主鎭軍三十九名差備軍二名陸軍七十八名保三十九名水軍五十七名保二十九名射夫十一名束伍馬步軍二百八十八名馬步保三百十三名烽軍二百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