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1863~1939년) 선생. 그는 조선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살며 한국의 새날을 열어간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자, 교육가요, 그리고 진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남궁억은 관료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관료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시대의 진실을 보기 시작한 그는 독립협회와 YMCA 의 시민사회운동과 언론을 통하여 겨레의 눈을 열어 독립의 기초를 놓고자 했으며 교육으로 이 땅의 자주와 주권을 회복하고 세계화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다. 1939년 4월5일 소천하기까지 77년을 산 선생의 생애는 단 한 번도 굴함이 없는 다재다능하고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애국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그러한 나라사랑의 정신과 행적은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배명학원 설립자인 조용구 전 이사장, `강원일보' 초대 사장과 도덕재무장운동 `MRA' 총재를 지냈던 벽파 김우종 선생과 같은 몇몇 제자들, 그리고 그의 노년의 활동 무대였던 모곡 한서 초·중등학교, 한서교회, 홍천군이 매년 실시하던 군민축제를 통해 간신히 그 맥을 이어온 정도다. 그나마 홍천군은 스스로 홍천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 한서의 이름을 버리고 한서 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인 무궁화축제로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선생의 애국, 애족의 놀라운 족적은 시대를 넘어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 남궁억의 삶과 활동
남궁억은 1863년 한성 서부 `현 서울 정동' 왜송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근대식 세관원(稅關員)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영어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3년 동안의 통역 견습생을 거쳐 1886년 24세의 나이로 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영어통역관과 구미 6개국 순방 사절단의 수행원 임무를 맡았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 밖 서구 열강의 모습을 진지하게 보았으며, 쓰러져 가는 국가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이 시대는 한국 현대 역사에 있어서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한 남궁억이 예기치 않게 시민사회운동가, 언론인, 교육가로서 활동하며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된 것은 바로 그 시대가 이러한 인물들을 필요로 한 때였음을 방증한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보리울'로 낙향하기 전까지 남궁억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일본의 식민지 확대 야욕 속에 흔들리던 국가를 굳건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이천만 민중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사상에 실력을 겸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96부터 1898년까지 독립협회의 실질적 리더인 수석 총무를 지냈다. 그리고 비록 그 명분을 살리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지만, 내로라 하는 민족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조직했던 민간 결사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이 되어 일제의 강제 병합에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남궁억은 다재다능하며 창의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며 `독립신문'의 영어판을 만들었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분할 점령 도모에 대한 글을 싣는 등 국내외에 절망적인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자 하였다.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남궁억은 교육과 인재양성, 그리고 이를 통해 독립의 초석을 다지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그가 이전부터 민영환이 설립한 홍화학교에서 영문법과 역사를 가르쳤던 일을 생각한다면, 교육가로서의 남궁억의 모습은 결코 낯선 것이라 할 수 없다. 1906년 사립 현산학교`현 양양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배화학당 교사로도 가르쳤으며, 1919년에는 모곡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교육월보', `가정교육', `동사략', `조선이야기' 발간 등과 같은 일련의 교육관련 활동은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1918년 선영(先塋)이 있는 모곡으로 낙향한 이후 1939년 4월5일 소천하기까지 남궁억은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1910년,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하여 사돈이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8년 12월15일 일요일. 저녁 7시 남궁억 씨의 고별사를 듣기 위해 교회로 갔다. 그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요량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대들보 노릇을 해왔다. (하략)”
그 당시 올곧게 독립을 주장하고 일제의 강점에 대항하며 역사의 전면에서 싸웠던 많은 이가 활동 무대였던 서울을 떠나 속속 낙향하고 있었다. 그가 56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낙향을 결심하던 때에도 이미 많은 지도자가 새로운 거처를 찾아 산간벽지로 들어갔었다. 그는 일제의 회유와 감시가 점점 더 강하게 조여오는 상황에서 민족을 위한 새로운 도전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결행한 것이었다. 보리울 `모곡'이라는 산간벽지 시골에 예배당을 세우고, 그곳을 이용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족과 독립을 상징하는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의 예배당과 사립학교로 보냈으며, `무궁화 예찬시'와 `일하러 가세' 등 100여 곡의 시와 노래를 지어 겨레의 가슴에 독립의 사상과 의지를 심고자 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선택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위안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선후배 지도자들이 교회를 찾아 힘을 얻고 새롭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역시 윤치호의 전도를 받아들여 낙향과 함께 신앙생활은 물론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젊어서 가졌던 애국심을 변치 않게 하시니 감사하거니와,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일지라도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1922년 어느 가을날 `일하러 가세'를 지었던 그 밤에 드린 그의 기도문이다. 그의 고백은 스러져 가는 고국에 대한 사랑과 그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 마침내 71세의 고령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숨가쁘게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궁억은 일신의 안일과 부귀를 꾀하지 않고 오직 겨레의 새날을 준비했던 실천하는 지성인이자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 신앙구국 교육입국
신앙으로 강탈당한 겨레의 주권을 되찾아 국가를 구원하고, 교육으로 큰 기둥을 세워 나라를 일으키자는 이 신조는 그의 인생 후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낙향 후 예배당을 짓고 그곳에 보통학교를 시작하였으며, `조선어 보충',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의 책을 써서 민족 교육에 앞장섰다. 그리고 500여평의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어 민족의 꽃인 무궁화 묘목을 전국의 사립학교와 교회에 보급하였다. 홀로 산골에 들어와 22년간 한결같은 자세로 자신의 뜻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동시에 간단한 한문과 우리 역사를 비롯하여 영어, 산술과 같은 신교육을 가르쳤다. 남궁억이 `개화해야 산다', `특별히 산골 사람들이 깨어나야 민족이 바뀐다'라고 입이 닳도록 가르친 대로 예배당이 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가까운 이웃마을 아이들도 이곳에 와서 공책과 연필을 배급 받아 소학교 정도의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무궁화 동산 (우승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시절 잃은 나비' 등 그가 짓거나 가르친 노래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흘러넘치게 되었을 때에는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이 곁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민족정신과 독립의 기초가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남궁억이 펼쳤던 교육 운동과 무궁화 보급 사업은 실제로 큰 파급력을 가졌다.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그의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었으며, 그 기소 내용은 `모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학교에 무궁화를 수천 그루나 심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시를 읊게 하고, 여 교원으로 하여금 무궁화 창가를 가르치게 해서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전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관계로 종교적 집회나 접촉에서 늘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크게 확대되어 강원도 경찰부의 지시로 7만 그루나 되던 무궁화가 모두 뽑혀 불태워졌다. 민족혼을 상징하는 무궁화! 결국 홍천은 물론 춘천 일대의 민가에 있던 무궁화까지 모두 뽑혀 사라지고 말았다.
신앙과 교육을 강조한 남궁억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교육을 강조한 그는 `교육월보',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조선어 보충', `조선문법',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 실제적인 교육자료를 발간해서 전국에 보급했다. 그리고 무궁화 수본을 나누는 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에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그의 사상과 실천은 다양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한두 사람의 탁월한 지도자가 아닌 이천만 민중의 가슴과 머리에 독립사상과 의지를 심고 이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선 온 국민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독립에 힘이 되는 실력을 가꾸는 것이 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사명이자 역할이라고 믿고 묵묵히 이를 행동으로 옮긴 실천하는 지도자였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 기초 다져놓고 청초호 자유수를 영 너머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 이뤄 놓고 보리라.” (설악산 시조, 1906)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한서 남궁억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디든지 무궁화가 만발해 있다. 봄이 지나 여름이 될 때까지 수많은 풀과 나무는 마치 제 자랑이나 하는 듯 새 옷을 입고 꽃을 피운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날마다 꽃을 피워내어 한 그루의 나무에서 2,000여 꽃송이를 피워내는 것은 우리의 꽃 무궁화밖에 없다. 아침이면 빛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가운데 피어나, 빛과 함께 살다가, 저녁이면 얼굴을 접고 고이 떨어지기에 무궁화는 지조와 고상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꽃이다. 민족의 꽃 무궁화는 5,000년 역사 속에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시련의 역경을 이기고 그 문화와 역사를 지켜온 우리 겨레의 자긍심이자 자부심의 상징이다.
일본은 남궁억의 사상과 신앙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하여 어린 학동들까지 동원하여 무궁화 묘목 7만 그루를 뽑아 불태웠다. 그러나 남궁억이 이 꽃을 통해 겨레의 새 날을 열어가려 했던 보리울에는 지금 그 어느 곳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궁화가 계절을 넘어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순례하는 수많은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매일매일 새롭게 피어난다. 어린 시절 뜻도 모르고 동무들과 함께 하던 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바로 이 민족 이 겨레의 가슴에 피어나는 새 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의 노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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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선생' 전문가 지상좌담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은 77세의 일기를 대한민국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올곧은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 1918년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해 교육운동과 무궁화 보급사업을 통해 민족혼을 바로잡기 위해 힘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와 선생이 일깨우려 한 무궁화의 의미, 향후 선양사업의 방안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허기영 “민족에 모든것 쏟았던 정치가이자 교육자·언론인” 석도익 “무궁화 보급·선양 통한 민족정신운동 최초로 시도” 연제춘 “나라꽃 무궁화 축제 매년 개최 선생 정신·업적 기려”
- 남궁억 선생과 홍천의 인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 허기영 홍천문화원장 = 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 뿌리를 두고 면면히 내려온 민족만의 자랑이며, 이를 바탕으로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감은 그 민족이 무한히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의 원천이라 하겠다. 우리 후손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선현들의 지혜를 배우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배움 속에서 가치관을 발견하게 되며 더욱 민족문화로 승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홍천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얼이 담겨 있는 역사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다.
한말의 풍우 속에서 선각의 정치가요, 교육자였으며 사상가로서 겨레의 주권을 옹호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으로서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의 정의와 주권회복, 조국의 미래를 위해 후세 교육에도 전념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겨레의 꽃 무궁화 보급을 위해 일하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77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겨레를 위해 살다간 민족의 등불이었다.
`무궁화의 고장 홍천'이라는 무궁화 메카 도시로 거듭나게 된 것도 모두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을 이어가는 맥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 홍천군민의 헌장을 보면 한서 남궁억 선생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새마을 운동이 불타오르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고 서두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훌륭한 한서 남궁억 선생의 선양사업을 위해 홍천군에서는 추념식을 비롯하여 지금의 나라꽃 무궁화 축제의 기반이 되었던 한서문화제, 학생백일장, 전국한시백일장, 무궁화 사진 공모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이 밖에도 한서 남궁억 선생을 소재로 한 선양사업을 연구하여 홍천을 찾는 분들의 마음속에 남궁억 선생의 얼을 심게 할 것이다.
2011년 신묘년이 되어 한서 남궁억 선생이 소천한 지 72주기가 되었다. 그때에 일본의 식민지였고 외세의 어려움을 겪었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우뚝 선 것은 바로 한서 남궁억 선생 같은 훌륭한 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 기성세대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강산과 영광된 조국을 위하여 뼈를 깎는 정신으로 새 역사 창조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남궁억선생이 우리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무궁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석도익 홍천문인협회장 = 한서 남궁억 선생은 잃어가는 나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정신적 운동으로 무궁화나무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무궁화로 노랫말을 만든 `무궁화 동산가'와 찬송가에 올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이라는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워 나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제는 무궁화 묘목을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모곡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1935년 선생은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었으나 옥중에서의 여독으로 4년 뒤인 1939년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강원도와는 인연이 있어 양양군수로 재직 시 현산학교를 설립한 바 있다. 어디를 가나 교육을 우선하였으니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인재육성이 첫째라는 것을 일깨운 선각자다. 또한 나라 잃은 망국의 민족에게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를 보급하고 선양함으로써 민족정신운동을 최초로 시도한 민족지도자다.
일제의 한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무궁화를 통한 국민정신운동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뭉개버리기 위하여 전국의 무궁화를 멸종시키려 하였으며 무궁화는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며 좋은 나무나 꽃이 아니라는 편견을 주입한 정책이 오래도록 우리 국민 정신 속에 남아 있어 한서 남궁억 선생의 큰 뜻에 부끄러울 뿐이다. 선생이 홍천에 내려와 무궁화의 씨앗을 뿌렸기에 그 무궁화는 홍천에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헛되지 않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1977년 홍천군민은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선생의 나라사랑 얼을 선양하기 위한 한서문화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심성을 닮아 가슴에 피어나는 꽃 무궁화는 나라꽃이라 지정되지 않았어도 나라꽃으로 자리매김한 무궁화는 민족지도자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깃든 홍천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선생의 얼을 이어받은 홍천군은 이로 인하여 무궁화 메카도시로 선정되었다. 홍천군민은 한서남궁억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무궁화의 아름다운 역사를 써나가고자 한다. 또한 온 국민의 이름으로 정부와 국회에서는 무궁화가 나라꽃임을 공식 지정하여 공포하도록 촉구하는 바다.
- 한서 남궁억선생 선양사업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연제춘 홍천군문화체육과장 = 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이 되고 한서 남궁억 선생을 기리는 고장이 된 것은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에서 남궁억 선생이 민족정신의 부활과 대한독립을 위해 왜경의 감시를 피해 뽕밭으로 위장한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무궁화묘목보내기 운동을 펼친 곳이기 때문이다. 홍천군에서는 한서 남궁억선생에게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된 이후 1979년까지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선생의 묘역을 정비했다. 2000년에 이르러서는 강원도지정문화재(기념물 77호)로 지정됐다.
1977년부터 매년 4월5일 남궁억선생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는 `한서문화제'는 2008년 30회까지 치르다 2009년부터는 `나라꽃 무궁화축제'로 명칭을 바꾸어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 2001년에는 충렬탑, 남궁억 동상, 3·1운동 만세비, 전몰군경위령탑 등이 있었던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에 무궁화를 수종별로 식재하고 분수대 광장, 야외 공연장을 새롭게 조성한 무궁화 테마공원을 개장해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홍천군 서면 모곡2리 387번지 7,477㎡부지에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의 공사로 328㎡ 면적의 한서남궁억기념관을 건립해 한서 남궁억선생의 유품과 무궁화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서 남궁억선생은 1863년(철종14)부터 1939년까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신문화 운동의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서 남궁억선생은 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 1886년에 어전통역관으로 관직에 입문하여 칠곡부사, 내무부토목국장,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역임했다. 매관매직에 관여하지 않고 청렴한 관리로 본분을 다하였고 민족의 독립과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민중계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언론인·교육자·종교인으로 민중계몽과 구국교육에 선각자로서 활동한 분이다.
특히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 사장과 대한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교육월보 등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으며 양양에 현산학교, 홍천군 서면 모곡에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열정을 다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남궁억 선생을 홍천군에서 선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 대한민국의 독립을 일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기독교인으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특히 한서 선생은 초지일관 자주독립의 염원을 담아 꺾이지 않는 기개가 가득한 어록으로 동시대를 산 이들을 감동케 했다.
한서 선생은 1933년 무궁화 및 역사 사건(일명:십자당사건)으로 구속됐을 당시 회유를 권하는 홍천경찰서장 도미다에게 “내 나이 칠십이고 다 산 몸이 전환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니, 어서 법대로 할 것을 바라는 것뿐이오. 나는 죽더라도 조선사람으로 죽겠소”라며 조선인으로서 자주독립에 대한 굳은 결의를 표출했다.
또 민족독립의 피 끓는 염원으로 항상 젊은 청년들에게 “자네들은 걱정하지 말게,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자네들은 독립을 꼭 볼걸세”라며 힘을 북돋웠다. 한서 선생은 대한협회보를 통해 “사상이 없는 사람은 능력이 없다. 그러나 사상이 있다고 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상이란 자는 사실의 어머니”라며 “우리 민족은 천부의 능력이 있어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왔으며 이제 다시 이 천부의 능력을 발휘해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강변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일궈내자는 열망을 담은 것이다.
또 77세를 일기로 소천한 한서 선생은 두 해 전 부인의 장례를 치르며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果木)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이 땅의 독립을 위한 거름으로 바쳐지기를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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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년전 노구를 이끌고 이곳에… `무궁화운동의 성지' 일궜다
◇한서남궁억선생묘역정화기념비.
한서 남궁억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홍천군 모곡리 `보리울 마을'
한서 남궁억(南宮檍·1863~1939년) 선생의 얼이 서려있는 홍천 모곡리(일명:보리울)를 찾아가는 길. 춘천~서울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촌 IC로 빠져 나와 겨울철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농촌 도로를 달리다 보니 눈에 익은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푯말이 보인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차를 도로 한쪽에 세워놓고 내비게이션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문득 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충의문화유적벨트' 조성 사업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다. 충의문화유적벨트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춘천 남면'과 `홍천 서면'을 한데 묶어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하는 사업으로 남궁억 선생을 비롯해 유인석 장군, 윤희순 의사, 김유정 선생의 유적지를 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에서 직선거리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과 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 곳이야 말로 항일운동의 본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차를 부지런히 몰아 춘천에서 홍천의 경계를 넘어서니 이내 남궁억 선생이 여생을 보낸 모곡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 남궁억 선생이 여생을 보낸 `보리울'
남궁경숙씨의 일기와 남궁태경씨의 기록에는 보리울은 산이 높고 골이 험해 인마(人馬)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고 적고 있다. 또 지방 순회 중 어느 여선교사가 어찌나 산이 험하고 높던지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사느냐 하면서 울었다는 얘기가 전한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군에서 작전상 도로를 닦아 놓고 이후에 확장되면서 승용차와 버스 등의 통행이 가능했던 점을 감안하면 90여년 전 노구를 이끌고 서울과 홍천을 오고 간 남궁억 선생의 노고는 짐작할 만하다. 남궁억선생은 1919년 57세 되던 해에 이곳 보리울에 예배당을 짓고 모곡학교를 설립했다.
“고개를 돌려 남향에는 수산(壽山)이 덜미를 내려 누르고 동으로는 홍천강이 흐르는데 용문산(龍問山)에서 내리는 냇물과 합류점에는 고래가 용을 쓰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흐르니 심산풍경이야말로 선생의 여생을 즐겨 줄 수 있는 산정(山情)이었다. (중략) 그 당시에는 지방민들의 민도가 낮아서 선생이 사업을 몰이해하므로 공사간에 항상 고립을 느끼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 `남궁억의 생애와 구국운동' 홍천문화원 刊
겨울 정취 속 현재의 보리울 마을 모습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길을 따라 끝없이 논이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 그대로였다.
■ 한서 남궁억 선생 묘역
한서 남궁억선생의 묘역은 한서초등학교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차를 타고 한서초교 앞에 다다르니 빨간 화살표가 `학교 뒤 주차장 가는 길'이라는 글귀와 함께 왼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난 1977년에 조성된 남궁억 선생 묘역은 2000년 11월18일 강원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화살표를 따라 반원을 그리며 샛길로 10m 정도를 더 들어가니 깨나 널찍한 주차장이 있고 그 위로 남궁억선생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묘역을 소개한 표지판에는 “(전략)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홍천군민이 뜻을 모아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묘역은 계단 형식으로 조성돼 있고, 묘역 입구 돌계단 오른쪽에는 한서남궁억선생묘역정화기념비(翰西南宮檍先生墓域淨化記念碑)가 들어서 있어 참배객들을 맞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계속 올라가면 묘역 정상에서 남궁억 선생의 묘소를 만날 수 있는데,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에게 예의를 갖추고 돌아서니 그가 여생을 보내며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보리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묘역과 바로 맞닿아 있는 한서초교의 아이들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남궁억 선생의 묘소 바로 아래층에는 선생의 장남으로 전 뉴욕총영사를 역임한 남궁염(南宮炎) 선생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를 뒤로하고 300여개의 계단을 타고 다시 올라가니 남궁억 선생이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던 유리봉 정상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선생의 기도하는 동상이 있는데 매년 많은 이가 찾아와 참배하고 선생의 얼을 기린다. 이 동상은 지난 2000년 5월 세워졌으며, 인근 마을 주민들의 십시일반 성금으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 무궁화 공원
홍천군이 42억원을 들여 지난 2002년 7월 연봉리 2만㎡에 조성한 무궁화 공원은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남궁억 선생을 기념해 세운 공원이다. 공원 안에 들어서면 남궁억 선생의 시비와 함께 군민헌장기념비, 충혼탑, 3·1만세탑, 6·25전쟁 홍천지구전투 전적비 등 수많은 조형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특히 공원 한가득 심은 무궁화는 꽃이 한창 만개할 때 주변의 경치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매년 이곳에서 남궁억 선생 추념식이 열리기도 한다.
■ 한서 남궁억 선생 유적지
한서 남궁억 선생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 등이 있는 한서 남궁억 선생 유적지가 위치해 있다. 기념관 옆으로는 복원된 모곡예배당이 있고 한서교회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기념관은 남궁억 선생의 독립운동가로서,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지난 2004년 6월22일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먼저 남궁억 선생의 흉상과 함께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고 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선생의 활동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연보부터 어록, 그가 창안해 여학생들에게 수놓게 한 무궁화 자수 지도, 모곡리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인연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또 선생의 친필 서예본과 낙관인은 물론 무궁화 십자당사건 재판기록, 독립신문 영인본 등 독립운동과 교육·언론활동의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1933년 십자당(十字黨)사건의 취조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한 디오라마(diorama)와 무궁화운동의 성지인 모곡리 386번지 강신재 언덕을 재현한 모형도 함께 설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모곡예배당은 19세기 구한말 옛 예배당(모곡학교)을 전통적인 한옥 양식으로 복원했는데 관람객들도 직접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은 1919년 9월 한서 남궁억 선생이 현재 자리에 예배당을 설립해 `무궁화운동'을 전개했으나 1933년 11월 `무궁화사건'으로 구속되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교된 것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복원된 예배당 안에는 예배당 중앙을 천으로 가려놓고 남성신도와 여성신도가 각각 예배를 드리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의사, 유관순 열사, 만해 선생 등 수많은 항일애국지사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또 남궁억 선생이 지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시절 잃은 나비, 조선지리가, 무궁화동산 등 애국의 노래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벽면에는 무궁화 사진이 한가득 붙어 있어 선생의 치열했던 삶을 반추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