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의 아버지 박부길 사장은 직접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완공 단계의 막바지 고비에 이르러 벌써 두어 달째 철야공사를 강행해 오고 있었다. 공기를 하루라도 단축시켜 공사비를 절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개통을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것, 그것은 사운을 걸다시피 한 중대한 목표였다. 공사지 절감 효과는 부대수입일 뿐이었다.
「이봐, 이봐, 거기 빨리빨리 일들 안 하고 뭘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아, 예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이쪽 노견이 허물어져 여기다 채울 자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 이 덜떨어진 놈아, 노가다 모래밥 어디로 처먹었길래 이따위로 데데하게 굴어. 언제 올지 모를 자갈 기다리며 노닥거리는 동안에 빨리 흙 파다가 땜빵하고 통과해얄 것 아냐!」
「그렇게 하면 아스팔트 하고 나서 또 무너집니다.」
「말이 많아! 너 군대 안 갔다 왔어? 적당적당 요령껏 하는 것 몰라, 요령껏! 7월 7일 개통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돼. 그 날짜는 각하께서 확정하신 거야. 그래, 7월 7일, 칠땡, 좀 좋으냐. 무너지면 그때 가서 또 땜빵하면 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건 요령껏 해서 날짜를 맞추는 거야, 날짜! 얼띠게 굴지 말고 빨리빨리 흙 파와, 흙!」
「아니, 개통식을 미리 정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박준서는 어이없어하며 핏발 돋은 눈을 문질렀다.
「그래, 명심하고 빨리빨리 해서 우린 이틀 전까지 모든 걸 완료해야 한다. 너, 각하가 납시는 마포대교 개통식 날자에 맞추기 위해 겨울에 세멘트를 빨리 말리려고 연탄 화덕 수백 개를 밤새도록 피워낸 얘기 못 들었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박부길 사장은 다음 구역을 향해 지프에 올랐다. 박준서는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까라면 까야지’하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군사식' 지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나타났습니다. 박정희가 직접 현장을 돌아보면서 감독을 하고 독려한 결과 예정보다 1년 정도 앞당겨서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429킬로미터에 429억원이 들었는데, 일본의 경우에 비해 1/8 수준이었습니다. 이렇게 싼 돈으로 가장 빠른 기간에 공사를 마쳤으니 부작용도 당연히 있습니다. 고속도로 건설 중 사망자는 77명이나 되었고, 1990년 말까지 보수공사로 들어간 돈이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 정도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서울에서 충청, 경북, 경남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소외된 호남지역은 경제면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각종 공장과 기업을 영남지역에 집중시켰던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지역불균형을 가속시킨 결과를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