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중 친구 **
팔공산 자락에 남들이 쉽게 들락거리지 않는 계곡이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작은 물웅덩이도 그곳에 있다. 등산로에서 멀지는 않지만 계곡 밑으로 내려가면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와 새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발목을 적실 깊이의 작은 소에는 몇 개의 돌들이 엎어져 있다. 돌 밑에는 나의 산중 친구인 가재가 살고 있다. 이 소는 물이 맑은데다 물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명경지수 그대로다. 오래 전에 이곳에서 국수를 삶아 번거롭게 씻고 건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코펠을 물속에 던져 버렸다. 생각만큼 국수를 건질 수 없는 실수였다. 그러자 돌 밑의 가재가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짜증나는 여름 대낮을 가재와 더불어 즐겁게 보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혼자 막걸리 한두 병 륙색 포켓에 찔러 넣고 산중 친구가 살고 있는 이 계곡으로 온다. 가재에게 줄 닭고기 한 조각은 잊지 않고 챙긴다. 우선 닭고기를 찢어 물속 돌 앞에 놓아두고 술병에 냉기가 서릴 무렵이면 가재들도 기동을 시작한다. 무념무상의 빈 마음으로 물속을 들여다본다. 산중 친구는 이미 가재가 아니라 스님으로 변해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돌 틈은 석굴 선방이다. 내가 “스님!”하고 불러도 시종 묵언이다. 일 년 내내 안거(安居)에 들어 있으니 수도승으로 해탈한 지가 오래된 듯하다. 장난기가 발동한다. 닭고기 공양을 챙기고 있는 스님에게 술잔을 내민다. 스님은 잽싸게 도망쳐 버린다. 그 술은 내가 마신다. 산중 친구를 핑계 삼아 권하고 마시기를 반복하다 보면 취하기 마련이다. 들고 온 시집을 읽을 겨를이 없다. 스님과 노는 것이 참 재미있다. 촉나라 범진이란 사람이 허하라는 곳에 살 때 장소당이란 별채를 지어 술을 마시며 즐겼다. 뭇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늦봄에 손님들을 초청하여 푸짐한 잔치를 벌이곤 했다. 객기가 동한 주인은 “꽃잎이 술잔 속에 떨어지면 대백(大白ㆍ큰 잔)으로 한 잔씩 마셔야 합니다.”했다. 담소가 무르익을 즈음 휘익 하고 바람이 불자 모든 이의 잔에 꽃잎이 떨어져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임을 비영회(飛英會)라고 했다. 조선조 때 문경공 신용개는 천품이 호탕하여 술을 즐겼다. 술친구는 따로 없었다. 늙은 계집종도, 마당의 강아지도, 화단의 꽃도 모두 그의 술친구였다. 하루는 아랫사람들에게 “오늘 저녁에 여덟 손님이 오실 터이니 주효를 잘 준비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하인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언제 오십니까.”고 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윽고 보름달이 떠 그 빛과 붉은 기운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주인이 키운 여덟 분의 국화를 비추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손님은 국화니라” 주인은 국화 분 앞에 술과 안주를 차려두고 “내가 은잔에 술을 따르겠네.”라며 아주 친한 친구에게 하듯 그렇게 말했다. 국화 분마다 각 두 잔씩의 술을 따라 주었다. 자신이 권한 만큼 국화도 술을 따라 주는 것이라 여기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몹시 취했다. 박동량이 쓴 기재잡기에 있는 이야기다. 홀로 술 마시기의 달인은 이백이다. 그를 제쳐두고 독작을 논할 수 없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명시를 보면 독작의 풍류와 흥취가 얼마나 도도한지를 눈 감고도 알 수 있다. “꽃밭 가운데 술 항아리/ 함께 할 사람 없어 혼자 마신다./ 술잔 들어 밝은 달 모셔오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구나./ 그러나 달은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 또한 그저 내 몸 따라 움직일 뿐/ 그런 대로 달과 그림자 짝하여서라도/ 이 봄 가기 전에 즐겨나 보세.” 해질녘이 되어 더위가 자지러질 무렵에 배낭을 챙겨 산중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스님, 잘 계시오.” 여전히 묵언 중이어서 대답도 없고 인사도 없다. 약간 괘씸하다. “술 마시느라 저무는 줄 몰랐더니 옷자락에 수북하게 떨어진 꽃잎, 취한 걸음 달빛 시내 따라 걸으니 새도 사람도 보이지 않네”라는 이백의 시 ’홀로 가는 길‘을 읊조리며 산을 내려온다. 석굴 선방 앞에서 가재 스님과 종일 놀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외롭다. 고독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혼자라는 걸 알게 되니 저만치 가을이 오는 것이 보인다.
|
첫댓글 고독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혼자라는 걸 알게 되니 저만치 가을이 오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