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다섯의 늦은 나이에 공직을 시작하여 1998년 9월30일 20년 9개월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퇴직 하였다.
정년을 1년 9개월 앞둔 내 나이 쉰다섯 때이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매일 넥타이 매고 같은 시간에 출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고 그 해방감은 우리에 갇힌 맹수가 자유를 얻은 것보다 더 했으리라! 미래의 불확실성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말고 여행부터 떠나자.
5차에 걸쳐 속초(설악산)를 시작으로 울진(백암온천), 포항(구룡포), 감 포(수중왕릉), 울산(장생포), 양산(통도사), 안동(하회마을), 하동(평사리), 부곡온천, 쌍계사, 불일폭포, 화개장터, 홍도, 하의도(김대중 대통령생가), 해남(토말), 보길도(고산유적지),
강진(다산유적지), 만리포, 대천, 부여, 남원, 무주(구천동), 진안(마이산), 속리산, 등 등.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 다녀도 성이 안차 학창시절 꿈꾸었던 무전여행이 생각나 서울에서 목포 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99년 4월5일, 밤, 산사처럼 한적한 충북 영동역에서 별들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다 내린 결정이다.
막상 국토장정을 하기로 내 자신과 약속해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 보여 없었던 일로 하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스스로 한 약속을 안 지키려니 부끄럽고 앞으로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2000년 1월 새 천년 21세기가 시작되자 금년 1월에 결행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할 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
2000년 1월 15일,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목동에서 강화도 외포리(약,60km) 까지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첫날 통 진에서 자고 다음날 강화읍을 지나 11시경 찬 우물 삼거리에서 하체가 마비된 듯 발이 안 떨어진다.
장정연습이고, 국토장정이고 이제 다 포기하고 점심이나 먹고 서울로 올라가자.
앞에 보이는 ‘장수 추어탕’ 집으로 들어가 추어탕에 청하1병을 마시고 1시간쯤 지나니 신기하게 힘이 솟아 걷기를 계속하여
15시에 외포리에 도착,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4일 동안 몸살감기를 앓았다. 국토장정! 장난이 아니구나!
1월중 결행하려던 무모한 생각을 버리고 D-Day 3월 중순으로 정하고 하루 6시간씩 매일 걷기훈련을 하였다
3월10일(서울~안산), 아침7시 7.5kg의 배낭에 피켈(호신용)을 들고 억지 미소로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집을 나섰다.
시간처럼 인정사정없이 정확한 것은 없다. 시간이 닥아 올수록 두려움은 커지고 악몽에 시달렸지만 단 1분도 봐주지 않고 그날이 왔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서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설렘으로 가슴이 뛴다.
목동에서 광명 사거리을 지나 노은사동 동창굴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뒤에서 경적을 울리며 포터(1t) 한 대가 내 옆에 급정차
한다. “아저씨, 어디까지 가세요? 타세요.”
갑작스런 일에 황당했지만 목포가지 걸어간다고 할 수 없고 웃음을 참으면서 “집이 저기야. 고맙네.”
정말 고마운 청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신나게 차를 몰아간다.
12시 수암동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14시30분 오늘의 목적지 상록수역에 도착했다.
예상시간보다 1시간 빨리 도착 했다. 숙제를 미리 좀 해 두자. 내일의 목적지인 발안으로 향했다.
16시 화성군 매송면 ‘원리(미성리)’에서 오늘의 장정을 마감하고 숙박을 위해 버스로 상록수역으로 돌아 왔다.
상록수역 앞 골목 ‘무대포집’에서 “시작이 반이다” 국토 장정도 별것 아니군!
기고만장하여 동동주 2되를 퍼 마시고 여관을 못 찾아 택시 까지 탔다
마치 국토 장정을 다 마친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 생각하니 한 없이 부끄럽다.
3월11일(안산~발안), 새벽에 눈을 뜨니 낯선 여관방이다. 머리는 아프고 방안이 난장판이다. 배낭을 정리하여 밖으로 나왔다.
새벽 5시의 길거리는 어젯밤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택시가 실내등을 켠 채 돌아다닌다.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졸고 대학생 인듯한 아들이 반긴다.
아침을 잘 먹고 버스로 ‘원리’로 가서 장정을 시작하는데 어제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가고 패잔병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방울마저 하나둘 떨어진다.
비봉에 도착하니 오락가락하던 비는 그치고 촉촉이 젖은 들길을 여학생들이 두 세명씩 짝을 지어 학교에 간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11시20분 팔탄 휴게소를 지나 개울가에서 맑은 물소리도 감상하고 13시 오늘 목적지 발안에 도착했다.
장정 원칙이 7시부터 15시까지 걷기로 되어 있다.
15시 화성군 향남면 하길 4리에서 오늘 장정을 마감하고 버스로 발안으로 돌아왔다.
3월12일(발안~아산온천), 6시30분. 하길 4리 행 버스를 탔다. 승객은 나 혼자다.
버스가 길이 좁은 발안 시내를 빠져나오다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다. 7시20분 하길 4리에서 장정을 시작한다.
39번 국도는 새롭게 포장되어 길이 넓고 깨끗하다. 국도에는 아침 봄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다.
이른 봄의 농촌 들녘이 포근하고 낭만적이다.
9시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많은 保閑齊 신숙주(1417-1475)선생의 사당이 있는 평택시 청북면으로 들어섰다.
시골 조그만 식당에서 공사판 인부들과 함께 아침 백반을 먹었다.
농촌에서 어렸을 적에 먹던 음식 맛이어서 도시 큰 식당 밥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11시 안중휴게소에서 오랜만에 커피 맛을 보고 이번 장정에서 가장 걷고 싶었던 아산만 방조제를 향하여 걸음을 빨리한다.
14시 드디어 아산만 방조제(2,564m)에 도착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산만! 물위를 떠도는 이름 모를 철새들을 바라보며 바다 바람에 몸을 맡긴체 큰소리로 나도 모르게
‘가고파’를 불러본다. 내 고향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
바닷바람을 들여 마시며 아주 천천히, 천천히 방조제를 건넜다.
16시가 넘어 영인 저수지를 보고 아산온천 관광단지로 올라가는 길이 힘들다.
날은 어두워지고 찬바람이 몸 안으로 파고든다.
30보 옮기고 쉬고 20보 옮기고 쉬고 나중에는 10보 옮기기도 힘들다.
17시30분 한창 개발 중인 아산온천 관광단지 대형 대중탕으로 들어갔다.
당시로는 규모나 시설에 입이 딱 벌어졌다.
3월 13일(아산~신례원), 7시 아산 온천 관광단지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온다.
산속 아침공기가 맑고 상쾌하다. 어제 밤 올라올 때 그렇게 멀고 힘들었던 고갯길이 얼마 되지 않는다.
8시30분 염치 휴게소에서 사발 면으로 아침을 한다. 8순을 능히 넘기신 노부부가 정답게 지키고 계신다.
나의 장정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젊은 시절 만주여행 이야기를 하시며 격려하고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해 주신다.
나는 처음 이곳 지명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소금 염(鹽) 고개 치(峙)로 좋은 뜻의 이름이다.
도보 여행은 ‘눈썹도 빼고 가라’는 말이 있다.
출발 시 7.5kg 배낭을 고개아래 염치 우체국에서 1kg 정도 줄여 집으로 보냈다.
1kg 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 하겠지만, 눈썹으로는 얼마나 많겠는가!
1kg 줄어 든 배낭을 다시 멘 내 기분을 독자들은 모르실 것이다.
순천향대학 버스 승차장에서 쉬면서 지방 대학생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본다.
도고 온천을 거쳐 예산을 향해 가다가 도고 면사무소 앞에서 먼 산을 바라보니 산 전체가 온통 아지랑이에 싸여 있다.
내 어릴 적 고향집 앞산 아지랑이가 생각나고 그립다.
예산으로 가는 길에서 석양에 농촌 마을의 평야를 장난감처럼 달리는 기차를 보니 마치 내가 동화 속으로 들어 온 것 같다.
17시 신례원에서 통닭 반 마리와 맥주 두병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3월14일(신례원~홍성), 어김없이 7시에 예산으로 향한다.
신례원에서 예산 가는 도로가 이번 장정에서 가장 걷기 좋은 도로로 뽑혔다.
인도가 차도와 분리되어 있고 황토 길이다.
8시40분 예산 역 앞 ‘이연 해장국’에서 아침을 먹는데 서울에서 5일 동안 걸어 왔다고 하니 다들 이야기를 한 마디씩 하신다.
아름다운 시골 인심이다. 예산대교를 건너 홍성으로 향한다. 도로 곳곳에서 예산 사과를 팔고 있다.
견물생식(見物生喰)인지 사과가 먹고 싶은데 한, 두개를 팔라고 할 수 없고 더 사면 짐이 되니 고민, 고민하다 포기 했다.
사정을 이야기했으면 분명 사과 한 두개를 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그때 나의 못난 행동을 반성하고 있다.
홍성군 경계의 카페 ‘라데팡스'(La Defence, 파리의부도심)에서 커피를 마시고 쉬었다.
홍성으로 들어가는 길도 좋고 풍수지리상 홍성벌이 한 도읍을 세울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천으로 가는 길에 卍海동산 충령사가 나온다. 홍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한용운(1879-1944)선생의 고향이다.
동산에 올라가 한 젊은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젊음은 축복이자 고뇌의 시기로 구나!
만해동산에서 내려오니 16시 30분이다. 홍성군 구항면 마온리에서 오늘 장정을 마감하고 버스로 광천으로 갔다.
광천의 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값싼 숙소를 찾다보니 여관을 잘못 들어 여인숙 수준이고 양발을 벗어보니 발가락 곳곳에 피멍이 들었다.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마음을 슬프게 한다. 여기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다리병신 쯤 되더라도 가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로움과 슬픔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첫댓글 감명 깊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대단히 존경스럽습니다.
정말로 훌륭하십니다.서울 근교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저에겐 감동 그자체 입니다.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실 앞으로의 얘기가 기대 됩니다
8월1일 형제들과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 갔다가 오늘 올라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덕담을 해주시니 한숨 놓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