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영성 – 11월호 원고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 2 – ‘성당 스타일’로 살기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래가 있다. 싸이라는 가수의 ‘강남스타일’이다.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람들은 단순한 리듬과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누구나 유쾌하게 보면서 따라할 수 있는 형태의 가벼운 춤이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을 통한 개인 간의 실시간 소통 문화가 자신의 관심을 타인과 공유하는 독특한 문화의 덕을 본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노래의 성공은 ‘스타일’이란 단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 보다는 자기가 따라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가깝게는 부모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 가령 식탁문화와 언어생활, 옷을 입고, 집을 꾸미고 정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심리적 교감을 중요시 한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 여러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인간관계에서 늘 우리는 내 자신의 스타일보다는 남들과의 관계에서 보여 지는 스타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유행과 같이 흘러가는 대중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민감하다. 청소년들은 유명 연예인이나 가수들의 의상과 춤, 말투나 행동들을 따라하고, 여성들은 당대의 패션과 소품들의 다양한 유행에 민감하다. 계절이 바뀌면 옷이 가득 찬 옷장을 열면서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대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여성이 남성보다는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그런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남성들 역시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하거나, 직장에서 자신들만이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들이 있다. 대화의 방식이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 같은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공감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도 어떤 ‘스타일’이 있는 것일까? 분명히 존재한다. 신앙생활이란 한편으로는 시대와 문화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문제를 하느님 앞에서 풀어내는 신뢰에 찬 인격적 결단이라는 점에서 다를 수 없겠지만, 신앙을 일상의 삶에서 풀어가는 과정에는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다.
이미 오랫동안 서구 유럽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던 ‘성당’은 그들이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주일이면 따로 준비된 옷을 입고 미사에 참석하고, 주일 헌금을 내며,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온 이들과 친교를 나눈다.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생선을 먹고, 성당을 지날 때면 고개를 숙여 감실을 향해 절을 하고, 삼종이 울리면 삼종기도를 바친다. 거리에서 사제들을 만나면 예의를 표하고, 큰 죄를 지었으면 어김없이 고해성사를 보며 죄를 씻는다.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성인들의 축제가 오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나가 축제를 즐기며, 부활절과 성탄절 즈음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지킨다. 대림시기에는 불야성을 이룬 성탄절 시장에서 선물을 사서 성탄절에 가족들과 함께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순시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재계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카니발을 열어 성대하게 즐기고 사순절을 시작한다.
물론 이런 가톨릭의 고유관습이 서구 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고, 그 신앙적 의미가 세속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젊은 층에게 가톨릭교회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신앙 세계가 황폐해지고 있는 유럽의 현실을 생각하면 왜 교황님이 올 해 10월 11일부터 ‘신앙의 해’를 선포 했는지 이해가 간다. 내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10년이란 세월동안 변화된 서구사회의 모습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저변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정신이 깔려 있고, 사회를 움직이는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성당 스타일’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느낀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떨까? 나는 어떤 스타일로 가톨릭 신앙을 살고 있는가?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단순한 성당 스타일로 산다. 주일에 자기가 편한 시간에 미사에 참석하고, 행여 신부님과 마주칠까 혹은 성당에서 봉사하라고 붙잡을까 두려운지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에서 별별 행사를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며 충실하게(?) 주일의 의무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일 미사에 빠졌다고 영성체를 못할까봐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는 이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미사에 빠져도 주일의 의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다. 성당에 오래 다녔어도 성체조배를 제대로 해본 사람도 없고, 묵상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모임에서 개인적인 통성기도를 바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그래도 천주교 신자라는 자부심은 강하다. 묵주반지와 묵주를 들고 다니는 열심함(?)은 물론이거니와 용감하게 식당에서 성호를 긋는 이들도 많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위해서인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감추고 선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어쩌면 그것이 반전 효과를 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정 반대로 나의 행실 때문에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성당스타일’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내 편의대로 신앙생활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도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인지,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체험이 부족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도생활이 익숙하지 않고, 그저 미사 참석해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의 성호를 긋고 기도하며, 식사전후에 기도하고, 어렵고 힘들 때 화살기도를 바치며, 눈에 잘 띄는 곳에 성경구절이나 좋은 기도문을 걸어두고 늘 주님께 의탁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도우려는 선한 의지를 갖고, 성경책에 먼지가 쌓이도록 놓아두지 않고 매일 미사 책에 나오는 그날의 독서와 복음이라도 읽을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그립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회적 행태들을 볼 때 정의감을 갖고, 사회 복지, 정의 평화, 환경 문제와 같은 사회 교리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할 말은 하고, 최소한 함께 행동은 못해도 반대는 하지 않는 그런 신자로서의 동질감도 가졌으면 좋겠다. 사제들이 비록 부족하고 인격적 결함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존경심과 그들 없이는 미사도 성체성사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주면서 기도로서 회심하고 더 신자들을 향해 전념하도록 사랑해주는 성당 스타일도 필요하다.
누가 뭐래도 성당스타일은 ‘우리 신부님’, ‘우리 수녀님’이란 사랑스런 존재를 떠올리고, 성모님의 사랑과 성인성녀들의 신앙을 본받는 신심이 중요하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레지오 활동을 하든, 본당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든 중요한 것은 내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신심을 키워가고,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좋은 관습들과 전례들, 성체강복, 성시간, 십자가의 길, 금육과 단식재, 성체조배, 묵주기도, 연도와 같은 전통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도 필요할 듯싶다. 특히 11월 위령성월이면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성인들의 통공의 교리를 살아가고, 미사의 은총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생미사나 연옥영혼들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하는 가톨릭의 전통도 지켰으면 좋겠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삶의 스타일이 있듯이, 내가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성당스타일’을 되찾을 때가 된 것 같다. 그것이 성당에서 누리는 기쁨을 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라이프스타일로 성장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묵주기도 바치는 아름다운 손.
가톨릭 신앙이 가진 행복감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