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합덕 본당은 바로 이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을 넘어서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본당 인근에는 손자선 성인의 생가이자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신리 성지가 있고, 옛 동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면천 사적지도 자리하고 있다. 합덕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오다 보면 길 오른편에 길 쪽을 앞으로 하고 비탈길 위에 서 있는 합덕 본당이 눈에 들어온다. 100년이 넘는 신앙의 경륜을 간직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본당의 전신은 양촌 성당(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1890년에 설립, 초대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제7대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가 6.25 때 납치당해 순교하는 비극이 있었다. 현재 성당 옆에 있는 페랭 신부의 묘소와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묘소에는 유해는 없이 유물만이 묻혀 있다.
페랭 신부 재임 시인 1926년 예산 본당, 1935년 서산 본당, 1938년 당진 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됐고, 1961년 제8대 박노열 신부 때 신합덕 본당이 분리됨에 따라 합덕 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성당 정면을 향한 계단을 올라 도톰한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빨간 벽돌과 두 개의 첨탑으로 세워진 성당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다만 조금 튀는 색감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이 거슬리는 듯 하지만 선조들이 전해 준 신앙의 숨결이 배어 있음인지 조금도 경박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경건히 하는 순례자의 자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성당 마당 잔디 위에 앉아 소박한 웃음꽃을 피우는 신자들의 모습은 그 옛날 숨죽이며 믿음을 지켜 오던 당시의 조심스런 몸짓들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순교 성인들의 피로 닦은 신앙의 터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성당 정면에서 신자들을 반기는 예수성심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돌면 6.25 순교자인 페랭 백문필 신부와 윤복수(라이문도) 총회장, 송상원(요한) 복사의 순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57년 30년간 합덕 본당에서 재임하다가 6.25 때 순교한 백 신부를 기념해 세운 순교비 옆에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순교비를 2005년 본당 설정 115주년과 순교 55주년을 맞아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순교비 옆에는 이 지역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던 백 신부를 포함한 네 명의 신부 묘소와 백 신부와 함께 순교한 총회장과 복사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포 교회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공동체인 합덕 성당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당 구내에 당진군과 함께 합덕 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해안에 인접한 합덕과 면천 지역은 주위에 많은 사적지와 명소들이 분포돼 있다. 홍성, 해미, 솔뫼 등이 근접해 있어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이들 중 하나를 연결해 함께 돌아볼 수도 있다. 또 덕산 도립 공원과, 온양, 도고, 덕산 온천 등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여름이면 만리포, 몽산포, 대천 등의 해수욕장에는 인파가 붐비기도 한다.
합덕 유스호스텔은 인근 성지와 연계한 도보순례 등을 통해 순교신심을 고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근의 역사 유적과 문화 관광지를 탐방하는 가족 나들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예산 성당
대전교구 소속 본당.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664 소재. 1927년 합덕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예산읍 일부 지역. 관할 공소는 신양, 시왕리, 송서, 비곡, 이티, 대률 등 6개소.
병인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1년부터 내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 지역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며, 이후 7-8년 동안 합덕과 그 인근 지역인 고덕면, 신암면, 예산읍, 당진읍 등에서 매년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때 신자 공동체들 가운데서 주목받을 만한 곳 중 하나가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 공동체였다.
1889년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 Pasquier, 朱若瑟) 신부는 이듬해 8월부터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내포 지역 중 북쪽과 서쪽(천안, 아산, 예산, 직산)을 관할하였다. 하지만 1894년 동학 농민 항쟁으로 ‘간양골 본당’은 폐지되었고, 이 지역은 양촌(현 합덕) 본당으로 관할이 이전되었다. 한편 양촌 본당은 1898년 본당을 합덕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본당 이름을 합덕으로 바꾸었다. 1921년 합덕 본당으로 부임한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의 사목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1927년 예산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다.
본당 설립 후 1933년 본당 신축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을 완공하여 1935년 9월 12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52년 7대 주임으로 부임한 보드뱅 신부는 다음해 16평의 오촌리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고, 1954년에는 성당 입구 정면에 성모상을 세웠으며, 22평의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또 1956년에는 2층 건물의 교육관과 1963년에는 유치원을 신축하는 등 본당의 기틀을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66년 9월 19일 삽교 본당을 분리 · 설정함으로써 새 본당에 덕산면, 고덕면, 봉산면, 오가면 일부 지역의 신자들을 이관하였다.
1975년 본당 관할하인 신례원 지역에 공장 설립으로 인한 인구 급증이 예상되자,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결정으로 1977년 10월 신례원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시켰다. 그 후 예산 본당은 대흥면 대률 공소(1979)와 대흥면 손지리 공소(1980) 및 교리실(1981)과 교육관(1982)을 신축하였다. 또한 옛 수녀원을 철거하고 양옥으로 신축(1983)하였으며, 교육관, 사제관 수리 및 증축(1985) 등으로 본당의 내실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88년 8월 17일 예산 산성리 본당을 분리 · 설정함으로써 주교리 1 · 2구, 오가면, 대흥면 일부 지역이 새 본당으로 이관되었으며, 이때 본당명을 예산 오리동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15대 주임 윤종학 신부는 신양면 귀곡 공소(1993)와 신양 공소(1994)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 후 1997년 1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백남익 신부는 부임 직후 성당 마당 보도와 차도 블록 공사를 함으로써 성당 주변 환경을 정리하였다. 2000년 2월 본당 이름을 다시 예산 본당으로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출처 : 백병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에서 발췌]
예산 성당은 전형적인 삼량식(三樑式) 성당 건축으로 외관의 구성은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 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으며, 일본의 건축문화를 수용하였으나 혼재하지 않고 서양의 건축문화를 직접 수용하여 토착화한 건축양식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런 이유로 성당과 사제관 건물이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예산 본당은 2007년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마음의 고향같은 성당을 만들자’는 취지로 선교 운동과 역대 주임신부 초청 행사, 경로잔치, 성당과 사제관 보수공사 및 조경공사 등을 진행하였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