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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의 연 혁 ]
유교에서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매우 컸던 만큼 이를 위한 교육제도 역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이미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중국 곡부(曲阜)에서 세계 최초의 사립학교가 바로 공부자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이를 거쳐 나간 제자가 무려 삼천 명에 달했다는 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공식적인 국립대학 교육기관은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다. 이곳에서 경전(經典) 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육예(六藝)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百濟)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제도가 있어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신라에서도 역시 782년에 국학(國學)을 세워 「논어」와 「효경(孝經)」을 필수 과목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 무렵을 전후(前後)해서는 백제의 유학자들이 일본에까지 건너가 유교를 전파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 교육이 이미 체계가 잘 갖춰지고 매우 성행(盛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들어와서는 992년에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國子監)이 설립되어 더욱 세분화되고 발달한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유교의 주요 경전들을 단계별로 나누어 배우고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여 총 8년 반에 걸쳐 교육과정을 마치도록 하였다. 또한 예종 14년(1119년)에는 국자감 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장학기구라 할 수 있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다.
[ 국립대학으로서의 성균관 ]
국자감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고려 초기부터 공부자묘(孔夫子廟)가 세워져 유교의 창시자인 공부자를 추모하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이 행하여졌다. 이같은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어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향교에서 일제히 공부자에 대한 제사 의식인 ‘석전(釋奠)’을 지내고 있다.
국자감은 유학을 가르치고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으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국자감은 그 후 국학(國學) 또는 성균감(成均監) 등으로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어오다가 공민왕(恭愍王) 11년(1356년)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으로 정해진 이후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 성균관의 규모 ]
고려 때까지 성균관은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太祖)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1398년에 지금의 서울 명륜동으로 옮겨 세워졌다. 태조 당시 성균관은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 그리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및 성균관의 관리를 맡아보던 오늘날의 학교 서무실 기능을 지닌 정록청(正錄廳)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명륜당은 학생들에게 유학을 강의하던 강당으로서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곳에서는 약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였으며, 국가에서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후대 유학자 21인과 우리 나라의 대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문묘(文廟)이다. 또 동·서재는 기숙사로서 모두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의 규모는 날로 확장되어 성종(成宗)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이 세워진 것을 비롯, 비천당(丕闡堂)과 육일각(六一閣) 등이 차례로 설치됨으로써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유교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체계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향관청은 대성전에서 석전을 지낼 때에 쓰이는 갖가지 도구(道具)와 의복(衣服) 등을 보관하던 장소였으며, 존경각은 경전을 비롯한 많은 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으로서 우리 나라 대학 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천당은 명륜당과 더불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장소로서 설치되었으며, 육일각은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육예(六藝) 가운데 한 과목인 사(射) 즉 활쏘기를 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국방의 중요성을 잊지 않게 하는 동시에 몸과 마음을 수양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뜻에서 설치되었다.
[ 성균관의 주요 교육 내용 ]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유생(儒生)으로 불렸으며, 이들의 생활은 엄격하고도 질서있는 것이었다.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윤리도덕을 철저히 지키며 교수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 나갈 인재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수업을 받았던 주요 과목은 사서와 오경이었다. 처음 입학한 학생에 대해서는 「대학」부터 배워 단계적으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아홉 과목을 모두 마치는 데 필요한 기본 독서 기간은 약 3년 반이었다. 유생들에게는 매월 말에 그 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성과를 시험보아 확인하였으며, 그 결과는 국가에까지 보고되는 등 매우 엄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서 유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일제의 침략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10년 무력으로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합방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성균관을 폐지한 일제는 민족 교육이 아닌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립하였다. 이같은 강압정책에 따라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그 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전국 유림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이 지니고 있었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하여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비록 국립대학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지는 못하였으나 유교이념에 의한 대학이 다시 우리 나라에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균관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성균관 안에 유림조직으로서 유도회총본부가 설치되고, 각 지방에도 유도회 지부가 결성되어 향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던 민족이념으로서의 유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상처를 빠른 시간 안에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국 유림들의 유교 진흥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꾸준한 노력 속에 청년유도회와 여성유도회가 잇따라 결성되고 자체 언론기구로서 유교신문사가 건립되는 등 체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또한 최근 들어 성균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이 예절학교’를 비롯, 선비학당과 한림원 및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 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매우 높아져 많은 관심과 참여가 뒤따르고 있음은 유교의 부흥과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 성균관의 역사(歷史)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禧』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含)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인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부속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학제의 변천】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同)지사 2인은 겸관(兼音)이었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司藝) 3인, 정5품 직강(直講)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博士) 3인, 정8품 학정(學正) 3인, 학유(學諭) 3인, 정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ㆍ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정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후기에 126명으로 조정하였고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에 미달될 경우에 한하여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본과생(上齋生:上舍生)이나 기재생(下齋生:別科生)도 과거에 급제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ㆍ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또 『실록 實錄』의 기록에 나타난 교수의 한 방법은, 즉 태종 13년(1413) 대사성 권우(權遇)의 상서로 정부가 결의한 것인데, 성균관 학생은 1개월 가운데 20일은 경서를 읽고, 4일간은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고, 6일간은 과거의 문장인 제술을 실시하여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경서의 다소(多少)와 고강 및 제술의 분수(分數:9등급의 점수)를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식년에 이르러 분수를 총계하여 상등 5명 내지 10명을 ‘대성(大成)’이라 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전계(轉啓)하여 관시(館試: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會試:覆試)를 보게 하였다. 그 이하는 모두 관시를 보게 하였다. 그리나 사학에서 승보(升補)된 기재생은 소성(小成)ㆍ대성을 막론하고 모두 생원시를 보도록 하였다. 이 방법은 후에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성균관의 교수방법에 있어서 한 표준이 되었다. 또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유생의 일과와 자치활동】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식당에 참여하는 점수를 원점(圖點)이라 하는데 아침ㆍ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윈칙이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읍례(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한(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ㆍ『맹자』는 각 4개월, 『시경』ㆍ『서경』ㆍ『춘추』는 각 5개월, 『주역』ㆍ『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독서할 때는 글 뜻을 명백히 이해하여 응용에 통달하도록 하였고 장구(章句)에 얽매여 글의 뜻을 해치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후기로 갈수록 지켜지지 않고 주자장구(朱子章句)에 얽매이는 태도로 경직화되었다.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별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ㆍ재뢰(財賂), 그리고 주색(酒色)을 말하면 안 되고, 시세에 따라 권세에 아부하여 벼슬길을 찾아도 안되었다. 또한 유생들은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되었다 유생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재(齋)였다. 상재생은 하재생이 과실이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였다. 벌의 종류는 식손(食損:식당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 輕重에 따라 날수를 달리함)과 출재(黜齋:재에서 퇴거하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엄한 편이었다. 자치 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재회의 임원으로 장의(掌議)ㆍ색장(色掌)ㆍ조사(曹司)ㆍ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당장은 회의 석상에서 선출되는 임시 의장의 구실을 하였고 조사는 좌중에서 최연소자로 뽑아 서기 구실을 하였다. 장의는 회장이고 동ㆍ서재 각 1명으로 2명, 색장은 4명으로 식당에서의 검찰(檢察)을 맡았다. 성균관의 대내적인 문제는 대개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대외적인 문제 가운데서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치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여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권당은 유생들이 문묘의 신삼문(神三門) 밖으로 네 번 절을 하고 일제히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조선시대 권당의 친수는 중종때 1, 명종 때 4, 광해군 때 2, 인조 때 2, 효종 때1, 현종 때 2, 숙종 때 16, 경종 때 2, 영조 때 18, 정조 때 16, 순조 때 14, 헌종 때 4, 철종 때 5번 있었다. 초기에는 유학의 근본 이념에 맞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행하여졌지만 후기에 갈수록 우세한 당파(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 여론의 데모화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장의가 노른 1인, 소론 1인이 뽑혔던 데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책 결정이나 인사 문제, 문묘의 승무(陞廡)문제 등에 유소와 권당의 영향은 크게 작용하였고, 관리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문묘와 교육시설】
조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년(1601)에 재건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후대 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말기의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104칸(間)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ㆍ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성(四聖:顔子ㆍ曾子ㆍ子思ㆍ孟子)과 공분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宋)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廡)에는 주ㆍ한(漢)ㆍ진(晋)ㆍ당(唐)ㆍ원(元)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춘추(春秋)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북쪽에 있고 좌우에 내실(來室)이 있는데 남향으로 18칸[間]이다. 동ㆍ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 가운데서 활쏘기[射]에 관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 존경각ㆍ비천당을 비롯하여 진사 식당(進士食堂)ㆍ정록청(正錄廳)ㆍ향관청ㆍ양현고(養賢庫) 등 169칸의 교육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양현고는 성균관 학생의 식사와 등유(燈油)ㆍ돗자리(鋪席) 등 여러 가지 교육 기구와 석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 예종 14년(1119)에 안향(安珦)의 건의로 창설한 일종의 장학 기관이다. 그 재원은 학전(學田)과 노비(奴婢)에 있었다. 그 규모는 태종 때 1,000결(結:1결은 약 3,000평. 토지의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의 토지와 300구(口)의 노비가 있었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감이 있었다. 현재에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에서는 양현재(養賢齋)를 그대로 두고 교육과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근대학제로의 변천】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管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핀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義兵)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黃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ㆍ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 연혁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4년(1395)에 문묘의 창건을 명하였으며, 태조 6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2)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에 중건(重建)하였다.
2. 형태와 양식
대성전은 남향으로 모두 20간(間)이며, 남북으로는 4개, 동서로는 5개의 기둥이 있으며, 앞에는 당(堂)이 있고, 뒤에는 실(室)이 있다.
대성전은 높은 장대석기단을 쌓고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拱包)를 짠 다포(多包)양식이다.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제공, 이제공은 모두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놓이는 첨차(첨遮)는 삼분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출첨들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끝은 교두형이지만 삼제공 끝은 역시 삼분두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3. 기능
대성전은 문묘(文廟)의 정전(正殿)으로서 공부자(孔夫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공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正位)로 하여 4성(聖)과 공부자의 제자 10철(哲), 송조육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位次奉安)되어 있으며,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무)·서무(西무)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현들의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釋奠)을 지낸다. 이 건물과 공간을 통칭해 문묘(文廟)라 한다.
현재, 전국의 모든 향교(鄕校)에도 문묘를 갖추고 있으며, 석전을 모시고 있다. 그 가운데 성균관의 문묘는 국가의 대표 문묘로서 건축양식과 위패 등, 규모와 격식이 가장 웅장하다.
대성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 10시에 분향례(焚香禮)을 하고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음력 2월·8월]에 걸쳐 대규모의 제례(祭禮)를 거행하는데, 이것을 석전(釋奠)이라고 한다. 석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되어 있다.
4. 변천 및 현황
문묘에 모신 위패는 성균관 재생들의 건의에 따라 시대별로 변해왔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묘에 모신 위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성전에 공자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등의 4성(聖)과 10대(大) 제자,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 6명 등 21위가 모셔졌으며, 동·서무에 우리나라의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를 합해서 모두 112위를 모셨다. 문묘 전체로 보면 133위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기가 끝나고, 1946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서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은 1949년 문묘 배향(配享) 성현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서무에 있던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는 모두 대성전으로 모시고, 중국의 위패는 모두 태운 뒤 땅에 묻었다. 이리하여 현재 성균관 문묘에는 본래 대성전에 있던 21位와 우리나라의 18位를 포함해서 모두 39位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성균관은 옛 성현(聖賢)들에 대한 배향(配享)공간과 교육공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대성전은 배향공간에 속한다.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공부자의 제자, 후대의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학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성균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 모두 설치되어 있으나, 성균관 내의 대성전이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완비되고 규모가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