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하지만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흔히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었다”고 애써 자위한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포기하려는 순간 과연 이 절실한 목표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간절히 원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꿈은 이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이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바로 K-리그 성남일화 고재성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재성(맨 왼쪽)이다. 그의 축구 인생은 꿈을 위해 도전하는 이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사진=연합뉴스) 주말에 공 차던 평범한 아이 경기도 수원시에 살던 고재성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다.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딱히 그럴 여건이 아니었다. 고재성이 다니던 수원 권선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래 아이들처럼 축구를 좋아하고 잘 뛰어 다녔지만 자신이 훗날 축구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주말마다 수원시에서 여는 ‘토요 축구 교실’에 나가 친구들과 공 차는 걸 좋아하는 보통 학생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을 사이에 둔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수원 수성중학교 축구부 코치가 그만두면서 신입 선수를 뽑지 않은 탓에 새로 수성중학교 축구부에 부임한 코치가 선수 선발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이미 초등학교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선수들은 다 중학교 진학이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코치는 ‘토요 축구 교실’에서 자질 있는 선수를 뽑을 생각이었다. “혹시 축구부에 들어올 생각 없나.” 코치는 고재성을 보자마자 그의 능력을 알아봤다. 고재성은 비록 덩치는 또래 아이들보다 작았지만 실력은 출중했다. 빠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언제나 ‘토요 축구 교실’에서는 ‘에이스’ 노릇을 하던 게 고재성이었다. “할게요. 축구부 할게요. 사실 예전부터 축구부에 들고 싶었어요.” 고재성은 흔쾌히 코치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정식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었던 고재성은 체계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1997년 1월 축구선수 고재성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키 작은 꼬마 이야기 수성중학교에 입학한 고재성은 공격수로 나섰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축구를 했다. 늦은 선수 수급으로 인해 처음 정식 축구부원이 된 동료가 많은 터라 함께 모여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고재성은 이 시기에 많은 걸 배웠다. “또래 친구들은 중간에 힘들다면서 축구부를 많이 떠났지만 저는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즐기면서 축구를 해서 그런지 1학년 때부터 주전 선수로 대회에도 많이 나가게 됐죠.” 중학교 시절 고민 없이 공을 찼던 고재성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큰 고민에 빠졌다. 키가 또래 아이들보다 현격히 작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생인 고재성은 3학년 선배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작았다. 체격 조건이 불리하다는 건 몸싸움이 잦은 축구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코치는 고등학교 1학년 고재성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재성아. 운동 쉬어라. 그냥 가벼운 운동만 하자. 지금은 일단 키가 크는 게 중요해. 힘든 운동하다보면 클 키도 안 커.”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이 시기에 고재성은 키를 위해 운동을 1년이나 포기했다. 고재성은 이후 축구부 합숙 생활을 똑같이 하면서도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남들이 혹독한 체력 훈련을 할 때 그 옆에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공을 가볍게 차는 게 그가 하는 훈련의 전부였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몸싸움도 될 리가 없었고 물론 경기에도 거의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 고재성은 근성 있는 플레이를 펼친다. 그의 축구인생과 무관하지 않다. (사진=김재호) 부상, 그리고 어렵게 선택한 유급 “그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고 1년을 보냈더니 고등학교 2학년 때 무려 키가 20cm나 컸어요. 기적이었죠. 지금 키도 174cm에 불과한데 그때 무리하게 운동을 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하지만 1년이란 시간 동안 20cm의 키를 얻은 대신 또래 친구들과의 실력차는 더 벌어졌다. 팀은 승승장구하면서 우승컵을 연이어 들어 올렸지만 고재성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낙담은 시작에 불과했다. 키 걱정이 끝나니 이번에는 더 큰 고민이 그를 찾아왔다. 이제 좀 경기에 나서는가 싶은 찰나에 발목을 심하게 다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전국대회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선수들만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 그에게 부상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팀이 우승할 당시 저는 키 문제로 대회에 나서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대학 입학 자격이 없었어요. 그런데 3학년이 되고 성적을 내야하는 시기에 부상을 당하다니…. 너무 답답했죠.”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갈 수 있는 대학교가 없었다. 발목 골절과 인대 파열로 6개월의 재활이 필요한 큰 부상을 당한 고재성은 깁스를 한 채 학교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감독님, 저 1년 꿇어도 써 주실 건가요?” 고재성은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유급을 결정했다. 감독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축구 인생도 불안했지만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다는 것은 더 큰 위험부담이었다. 하지만 감독도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 1년 쉬고 다시 해 보자.” 고등학교 ‘4학년’, 그리고 대학 입학 2002년 9월에 당한 부상으로 이듬해 3월까지 재활에만 매달린 고재성은 결국 친구들이 다 대학에 간 시기에도 고등학교에 남아 있었다. 좌절할 만도 했지만 고재성은 고등학교 ‘4학년’ 신분으로 팀을 전국대회 상위권으로 이끌어 당당히 대학 입학의 자격을 얻었다. “선생님은 네가 대구대학교에 갔으면 좋겠어. 거기 감독이 나와 동문인데 너를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거든.” 그는 수도권에 있는 축구 명문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었지만 지도자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 입학을 결정했다. 고재성은 이때까지 남들 다 하는 유소년 대표 한 번 못해봤다. 체격 문제와 부상, 유급으로 날린 시간도 많았을뿐더러 날고 기는 선수들이 워낙 많아 고재성을 눈 여겨 보는 이는 없었다. “처음 대구대학교에 입학을 결정했을 때는 그리 내키지 않았어요. 저도 수도권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대학교에 가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구대학교를 선택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대구대학교 역시 감독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신입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았다. 신입생 8명 중 고재성을 비롯한 6명이 곧바로 경기에 투입됐다. 고재성은 입학하자마자 치른 전국 대회에서 팀의 준우승을 함께했다. 고등학교 시절 여러 문제로 출장 기회가 적었던 그로서는 대구가 기회의 땅이었다. 또한 이때까지 쭉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대구대학교에 입학한 뒤 전천후 선수로 변모했다. 오른쪽 측면은 물론 미드필더, 공격수 등 안 맡은 포지션이 없었다. 처음으로 상이란 것도 받아봤다. 전국대회 우수선수상이었다. K-리그의 외면과 좌절 그런 그에게도 K-리그에 입성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재성은 2007년 K-리그 드래프트 신청을 준비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높은 순위는 아니더라도 K-리그 구단의 지명을 받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때 또 다시 큰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대학교 4학년 마지막 대회를 앞두고 또 다시 발목을 다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다쳤던 반대쪽 발목이었다. 마지막 대회에 나가기 딱 1주일 전에 동료들은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떠났지만 그는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좌절했다. “공교롭게도 그 대회가 제 고향인 수원에서 열렸어요. 동료들은 다 대회에 나가 마지막으로 K-리그 스카우터들 눈에 들기 위해 죽어라 뛰는데 저는 깁스를 한 채 친구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이전까지 좋지 않은 말들이 나와도 마지막 대회에서 뭔가 보여주면 드래프트에 뽑힐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어요. 드래프트장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어요. 그냥 안 될 거 알고 잠이나 실컷 잤죠.” 아니나 다를까. 2007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그를 선택한 구단은 없었다. 번외지명으로도 그는 선택받지 못했다. “재성아. 소식 들었다. 그러지 말고 수원시청으로 한 번 가 봐.” K-리그의 선택을 받지 못한 그가 잠시 방황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시절 은사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에서 그를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고재성을 원하는 수원시청 감독이 바로 10년 전 그에게 처음 축구화를 신게 한 ‘토요 축구 교실’ 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수원시청을 지도하고 있는 바로 김창겸 감독이다. ![]() 고재성은 K-리그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내셔널리그로 향했다. 그의 보금자리는 수원시청이었다. (사진=내셔널리그) 새로운 축구 인생, 내셔널리그 “제 소식을 듣고 ‘재성이를 뽑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떠느냐’면서 김창겸 감독님이 고등학교 시절 감독님께 전화를 하셨대요. 사실 처음에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어요. 재활을 다 마치고 K-리그 입단 테스트를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위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당장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1년 동안 수원시청에서 운동하면서 다시 K-리그에 도전하는 게 더 안정적일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조언을 듣고 어렵사리 내셔널리그 수원시청행을 결정했습니다.” 고재성은 10년 전 키 작은 초등학생 꼬마를 처음 축구의 길로 안내했던 김창겸 감독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팀도 내셔널리그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어 선수들의 분위기도 좋았다. 이때부터는 대학교 시절 처음으로 맡았던 오른쪽 측면을 주포지션으로 결정했다. 그동안 학원 축구에서만 활약했던 그는 처음 성인 무대를 경험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정말 잊을 수 없는 1년이었어요. 학원 축구는 팀 위주지만 성인 축구는 팀은 물론 개인도 빛나야 하더라고요.” 고재성이 선택한 오른쪽 사이드백은 이미 주인이 있었다. 수원시청 정재운은 오른쪽 사이드백으로는 내셔널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그러니 당연히 고재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리 없었다. 2008년 전반기에는 가끔 경기에 나섰지만 후반기 들어 순위 싸움이 치열해지자 결국 그 자리는 정재운의 차지로 돌아갔다. 한 시즌 동안 10경기 남짓 뛴 게 전부였다. 그래도 고재성은 좌절하지 않았다. “기회는 언젠가 올 것이라 믿었어요. 준비돼 있으면 수원시청에서건 다른 곳에서건 언젠가는 빛날 것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운동했어요.” 연습생 신화의 첫 장 대구대 동기 9명 중 6명이 K-리그에 진출해 잘나가고 있었다. 유창현(포항)을 비롯해 홍진섭(전북), 양승원(대구) 등이 K-리그 그라운드를 누빌 때마다 이들이 너무 부러웠던 고재성은 이듬해 다시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안 될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셔널리그에서도 주전 경쟁에서 밀린 선수를 뽑을 구단은 없었기 때문이다. 고재성은 형식적으로 드래프트를 제출했지만 여기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드래프트 이후 K-리그 구단을 돌며 연습생 입단 테스트를 받을 계획이었다. 역시나 2008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고재성을 지명한 구단은 없었다. 몇몇 K-리그 구단 입단 테스트를 치렀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런데 이때 대구대학교에서 고재성을 지도했던 박순태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재성아. 광양으로 가봐. 거기서 입단 테스트 한 번 받아봐. 거기 감독하고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이야기 해 놨거든.” 고재성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짐을 싸 광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도착해 훈련장으로 나가자 노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K-리그 최고 명문팀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바로 성남일화였다. 당시 성남은 1군과 2군으로 나눠 순천과 광양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고재성이 찾아간 곳은 2군 훈련장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수원시청의 고재성입니다. 오늘부터 테스트를 받기로 했습니다.” 갓 부임한 신태용 감독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래. 오늘부터 열심히 해 봐. 쭉 지켜볼 거야.” 신태용 감독이 웃으며 화답했다. 고재성을 비롯해 네 명의 연습생들은 성남 2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고재성이 K-리그에 입성한 일부터가 기적의 연속이었다. (사진=김재호) 감격적인 K-리그 입성 고재성은 신태용 감독 눈에 들기 위해 죽어라 뛰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항상 맨 앞에서 뛰길 자처했고 활기찬 모습으로 공을 찼다. 성남은 순천과 광양에서 1차 전지훈련을 마치고 1군들만 따로 일본으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고재성이 합류했을 때는 1차 전지훈련 막바지였다. 그런데 입단 테스트를 받던 네 명 중 세 명이 훈련 도중 불합격하고 짐을 쌌다. 입단 테스트를 받던 선수 중 고재성만 남은 것이었다. 1차 전지훈련이 끝날 때쯤 신태용 감독이 따로 고재성을 불렀다. 그리고 신태용 감독 입에서 놀라운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여권 만들어. 너도 일본 전지훈련 가야하니까.” 1군들만 가는 일본 전지훈련에 따라 오라는 말은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는 의미였다. 고재성은 날아갈 듯 기뻤다. 2년 동안 문턱에서 주저 앉았던 K-리그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에서 받던 연봉보다 적은 1,200만 원짜리 연습생 신분이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K-리거가 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2월 감격적으로 성남의 일본 전지훈련에 함께했다. “열심히 하면 안 될 게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원래 예전부터 축구 잘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욕 먹는 건 면역이 돼 있어 자신 있었습니다. 욕 먹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노력하면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1군 훈련에 합류하니 하늘같은 선배들이 고재성을 반겼다. “반가워. 감독님이 그러더라. 참 성실하고 열심히하는 녀석이 있어서 연습생으로 뽑았다고. 그게 너구나. 앞으로 잘 해보자.” 고재성은 지독한 성실함으로 신태용 감독 눈에 든 것이었다. 축구선수 고재성의 봄 2009년 봄이 왔다. 고재성의 축구 인생에도 봄이 왔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강한 인상을 풍긴 고재성은 K-리그 개막전에서 신태용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원정 경기 장소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대학 시절 K-리거의 꿈을 품었던 대구였다. 대구대학교 후배들이 단체로 응원을 왔다. 고재성은 라커룸에서 경기를 기다리며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뺨을 철썩철썩 몇 대 때렸다. ‘재성아. 정신 차리자.’ 고재성 말고 긴장하는 또 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전북에서 이적해 와 고재성의 팀 동료가 된 대학 동기 홍진섭이었다. “진섭이가 바로 제 위쪽 미드필더였어요. 경기 전에 ‘우리 대학 때처럼 멋지게 해보자’고 약속했죠.” K-리그 데뷔전을 1-1로 마감한 고재성은 이후 서서히 주전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2009년 5월 5일 꿈에 그리던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켰다. “어리둥절했죠. 골 넣고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그냥 막 뛰어 다니면서 골 세레모니를 했어요. 그런데 그 골이 들어 가고나니 자꾸 신기하게 연속골이 들어가더라고요. 하지만 수비는 정말 불안했어요. 그 해에 15경기에 나섰는데 힘이 많이 들어가 경고를 무려 8장이나 받았죠. 그라운드에 서면 절 욕하는 관중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요. 부모님도 경기 보러 오시는데 제 욕을 다 들으시니 얼마나 슬프셨겠어요.” 그의 데뷔 시즌은 절반의 성공이자 불안한 성공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10년이 됐다. 그는 김성환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지만 오히려 홀가분했다. “주전이라는 부담감이 컸는데 성환이가 오른쪽 사이드백으로 나서면서 백업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부담감이 더 줄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대신에 기회가 오면 성환이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죠.” 부담감을 덜어 낸 고재성은 오히려 이 시기에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김성환의 백업으로 보다 안정감을 구축한 것도 이때였다. ![]() 고재성은 성남이 아시아 정상을 밟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사진=연합뉴스) 아시아 무대 정상에 서다 고재성은 비록 백업 멤버였지만 2010년 성남이 화려한 역사를 쓰는데 일조했다. 전광진과 김철호 등 중앙 미드필더 자원에 공백이 생기면 김성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고재성은 오른쪽 사이드백으로 경기에 나섰다. 정규리그와 FA컵, 리그컵, AFC 챔피언스리그 등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해야 하는 성남으로서는 고재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점점 그의 출장 기회는 늘어갔다. 2010 시즌에만 정규리그 16경기에 나서며 진가를 발휘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부상을 달고 살던 고재성은 신기하게도 K-리그에 입성한 후 큰 부상 없이 시즌을 소화했다. 묵묵히 노력하던 고재성에게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기회가 찾아온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이 경기는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서보고 싶은 무대이자 한 번 설까말까한 무대다. 성남은 전광진이 결승전에 나설 수 없게 되자 정규리그 때와 마찬가지로 변칙 전술을 썼다. 김성환을 중앙으로 돌려 세우고 오른쪽 측면에 고재성을 기용하기로 한 것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습생 신분으로 K-리그에 입단하고 싶어하던 풋내기 선수가 아시아 최정상을 가리는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상대는 ‘이란의 강호’ 조바한이었다. ‘디펜딩 챔피언’ 포항을 제압하고 올라온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경기 전 라커룸에서 (조)병국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네가 언제 이런 큰 무대에 또 서 볼 수 있을까. 나도 마찬가지고. 후회하지 않도록 꼭 이기자.’ 그라운드로 나서기 전 다같이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는데 정말 뿌듯했어요. 지금까지 힘들어도 참고 축구를 한 보람이 이런 거구나하고 느꼈죠.” 고재성은 이날 경기에서 오른쪽 측면을 완벽히 틀어 막았고 결국 성남은 조바한을 3-1로 제압하고 감격적인 아시아 챔피언에 등극했다. “저는 사실 국내 선수들이 더 무서워요. 외국 선수들은 이상하게도 별로 무섭지 않더라고요. 그냥 마음이 편했어요. 언제나 땀은 배신하지 않거든요. 저와 우리 선수들은 조바한을 이길 수 있을 만큼 많은 땀을 흘렸기 때문에 질 거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그런데 막상 경기가 끝나니 기쁜 마음보다는 ‘드디어 끝났구나. 무사히 끝났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긴 했나 봐요.” 이렇게 내셔널리그 출신 후보 선수는 아시아 챔피언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 꿈이 아니다. 고재성은 인터밀란과 맞붙었다. 간절히 원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꿈도 이뤄진다는 걸 입증한 사진이다. (사진=연합뉴스) 꿈에도 그리지 못했던 대결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남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각 대륙 챔피언이 모두 나서는 FIFA 클럽월드컵 참가 자격을 얻었다. 첫 판에서 알 와흐다(UAE)를 꺾은 성남은 준결승전에서 ‘유럽 챔피언’ 인터밀란과 만났다. 전광진은 가벼운 부상을 당했고 김철호는 군입대로 팀을 떠난 상황이라 고재성이 이번 경기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불과 3년 전 내셔널리그에서 백업 멤버로 벤치를 지키던 선수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호화 멤버를 상대하는 순간이었다. 3년 전에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고재성은 평소 사무엘 에투의 팬이다.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을 할 때도 인터밀란을 선택해 에투를 다룬다. 에투의 플레이를 보고 감탄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 고재성이 버틴 성남 오른쪽 측면을 공략할 선수는 바로 공교롭게도 에투였다. 고재성은 이날 에투의 팬이 아닌 그의 전담수비로 마주섰다. “워낙 잘하는 건 알잖아요. 열심히 한 번 막아볼 생각이었어요. 오락에서나 보던 선수를 막는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려나 싶었죠. 그러면서도 불과 몇 년 사이에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선수를 수비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사했어요.” 평소 경기보다 오히려 부담감은 덜했다. “누구나 아는 실력 차이잖아요. 우리야 잃을 게 없는 경기였어요. ‘열심히만 하면 결과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파이팅을 외쳤죠. 하지만 그렇게 크게 질 줄은 몰랐어요. 경기 내용은 밀리지 않는데 점수차는 점점 벌어지는 걸 보면서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팀은 다르구나’라고 느꼈어요.” 부상으로 고등학교를 1년 쉬고 내셔널리그에서도 조명받지 못하고 연봉 1,200만원의 연습생 신분으로도 기뻐하고 오락에서나 에투를 다루던 한 선수가 세계 최강의 팀과 그라운드에서 몸을 부딪히며 겨루는 꿈 같은 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 고재성은 K-리그에서 연습생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일단 시작은 순조롭다. (사진=연합뉴스) 고재성의 꿈, 그리고 그의 메시지 고재성은 현란한 개인기를 갖춘 선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톡톡 튀는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묵묵히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선수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땀 흘려온 선수다. 그리고 세상은 잔인하지 않았다. 땀 흘려 노력하는 선수에게 3년 만에 최고의 기쁨을 줬다. 부상으로 아파하고 내셔널리그 팀 벤치에서 그라운드를 갈망하던 그는 노력 하나로 선수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무대에까지 섰다. 그 역시 아시아 정상에 오르고 세계 최고의 팀과 맞붙는 영광까지 누렸던 2010년을 예상한 적은 없었다. “이 정도로 엄청난 한 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냥 열심히 해서 K-리그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지 누가 감히 이런 상상을 해봤겠어요. 집에 걸려 있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을 보면 항상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앞으로도 어떤 크고 작은 경기건 열심히 해서 이 기쁨을 더 많이 누려보고 싶어요. 팬들한테 사랑받는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정말 인정받는 선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죠.” 고재성은 충분히 감동적인 축구선수다. 숱한 좌절을 딛고 바닥에서부터 아시아 축구선수가 설 수 있는 최고의 무대까지 밟은 인간 승리의 주역이다. 만약 그가 키가 작다고, 발목이 아프다고, K-리그에 가지 못했다고, 내셔널리그에서 주전을 꿰차지 못했다고 축구를 포기했다면 아마 지금의 그도 없을 것이다. 그는 축구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큰 교훈을 준다. 세상의 벽에 막혀 좌절하는 이들이 있다면 도전 정신과 성실함으로 우뚝 선 고재성의 마지막 말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셔널리그에 있을 때도 워낙 환경이 좋아서 그런지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축구로 대학에 진학하고 성인 무대에까지 올라설 정도면 실력은 충분하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상의 무대에 서려는 노력을 한다면 놀라운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어요. 취미가 아닌 이상에야 그만둘 때까지는 죽어라 노력해야죠. 여러분도 도전하세요. 누구나 자신이 모르게 감춰진 능력이 많아요. 밑져야 본전인데 겁먹을 게 뭐 있나요. 도전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뤄집니다.” footballavenue@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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