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사에 도착했는데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해서 사진촬영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간혹 폭우가 내리기도 해서 마음을 조리며 촬영했습니다.

봉산사(鳳山祠)는 진주 강씨의 시조인 고구려 장군 강이식(姜以式)을 배향한 사당으로
경남 진주시 상봉동 885번지 대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진주 봉산사(鳳山祠)는
130만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성지(聖地) 입니다.

봉산사내 대의문

대의문을 측면에서 촬영한 모습

건축성금을 내신분들의 명단





문무관
출입문이 잠겨있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제사용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 명장(名將)으로,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이듬해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듬해에는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에서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교전한 뒤, 임유관(臨谕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가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나후(周羅喉)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개선하였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事)》에 따르면, 묘(墓)는 지금의 만주(滿洲) 펑지현[奉吉縣]인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上鳳西洞)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한다. 본관인 진주는 그의 후손인 진(縉)이 통일신라 때 진양후(晋陽侯:진양은 진주의 옛이름)에 봉해진 데서 유래한다.
강이식(姜以式) 장군 사적비

950년 고려 광종 1년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을 기해 제사를 모시게 했다. 1570년 선조 3년에 사당을 창건하고, 봉강이라고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714년 숙종 40년 사당이 중건되었다가, 고종 8년 서원철폐령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976년에 재건하였다.
비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봉산사는 경사진 곳을 두 단으로 나눠 건물을 배치되어 있다. 위쪽에는 사당이 있고, 아래 쪽으로 정문 봉산문을 접어들면, 문무관(文武館)이라는 강당과 관리 관사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다. 그 맞은편에는 세 개의 비석이 있다. 봉산사 영 내에는 강이식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봉산사의 동쪽, 비봉산의 서쪽 기슭에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 포은 정몽주가 머물렀던 비봉루가 있다.
시조 강이식의 묘비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강이식 장군님 돌아가신해는 알 수 없는데, 묘는 만주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곳 진주시 상봉동 885에 봉산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봉산사가 자리한 비봉산의 원래 이름은 대봉산이었다. 그런데 비봉산으로 바뀌게 된 것은 순전히 풍수 때문이다. 옛날 대봉산 아래 봉곡촌에 진주 강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봉곡촌 뒤에 봉황을 닮은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도사가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을 쳤다. 고려 조정에서 너무 인물이 번성함을 걱정하여 봉바위를 없애게 하고, 산의 이름도 본래 대봉산이던 것을 ‘봉이 날아갔다’는 뜻으로 비봉산이라고 부르게 했다. 산 아래에 있던 호수 ‘봉지’를 ‘가마못’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니, 봉황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엽 어느 도승이 ‘날아가 버린 봉황은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들라’고 점을 쳐 후손들이 알자리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현재 비봉산 앞 상봉서동에 있는‘봉알자리’이다. 또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 산남(山南)지방에 정(鄭)·하(河)·강(姜) 등 세 성을 가진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여 무학대사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비봉산을 살펴보니 바로 이곳이 명당이요 명승이며, 더욱이 비봉산 지맥이 대룡골의 황새터와 연결되어 있어 크게 놀란 무학대사는 지금의 비봉산과 이 산의 서쪽에 있는 가마목 사이의 등을 끊어서 한시름 놓았다 한다. 옛날 봉황은 왕을 상징하였다. 왕이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이라고 했으며 왕이 타는 수레를 봉연·봉거라고 불렀다. 그러니 대봉산 밑에서 왕의 정기를 탄 인물이 날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서는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의 비봉산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대의문 안채의 출입문이 잠겨있어 문틈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