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가석방]
2012년 12월 16일. 제법 짧은 잠을 잤는데도 눈은 일찍 뜨였다. 여전히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비행기 출발이 새벽 6시면 공항에 2시간 전에 도착해야 해 일찍 서두른다고 했지만 1시간의 여유는 더 있었다.
아내는 매 시간 잠을 깨곤 했다. 즐거움도 두려움도 아니다. 늘 그랬다. 무슨 크고 작은 일을 두고는 이미 꿈을 통해 그곳에 가보기도 하고, 먼저 일을 치러보기도 하는 습성이 있다. 예민한 까닭이다.
그 이른 1시간을 나는 나머지 짐을 꼼꼼히 챙기느라 약간을 채워 보았는데 이 역시 5분이면 족했다.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지난 6개월 동안 다이어트라 밥은 될 수 있는 한 먹지 않으려 했지만 맛있게 한 공기를 북어국에 다 말아 먹었다.
이른 새벽 밥을 먹으려 지난 저녁부터 갈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배가 고프다. 다이어트를 한 이후에는 이른 저녁의 식사 외엔 하지 않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배가 고픈 것은 자연스럽다.
약간의 먹을 거리를 찾는 나를 아내는 말렸다. 또 후회하려고 그러냐는 핀잔이다.
요사인 다이어트의 효과를 봐 먹을 것 있어도 자발적인 절제를 하게 되는 습성이 생겼다. 고질적으로 따라 다녔던 바로 그 악습, 즉 저녁에 폭식하는 버릇은 가끔 맛 배기로 남겨 두었지만 횟수는 미미할 만큼 줄어들었다. 어쩌면 굳이 ‘폭식’이라 지칭한 이 용어는 다이어트 중에 배가 불러 “풍선 터질” 만큼 먹는 것을 가리킴은 아니게 되었다. 차라리 “배가 부르다”고 느끼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배 부르게 먹는 현상을 가끔 남겨 두고 있다. 다이어트의 치명적인 적, 저녁의 滿食이 다이어트에 간접적인 도움이 된다는 역설은, 그러나, 사실이다. 이와 함께 동일하게 발견한 특수 다이어트 방식으로 너트 류를 섭취하여 이런 폭식과 배고픔의 욕구를 누르는 것이 있다. 이 방법은 적당량의 너트를 섭취함으로 배고픔의 근원을 해결하기 때문에 상당히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너트의 좋은 지방 성분은 몸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공항에 가기 위해 나선 시간은 새벽 3시 30분이다. 우리 집 강아지 살구와 자두가 눈에 밟혔다. 내가 아니면 하루에 한번씩 이라도 해주는 산책 마저도 이젠 서너 주 동안 못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온다. 꼬리 흔들며 안아 달라는 눈 망울이 애처롭기 한이 없다. 두 주 후를 기대하며 참고 떠나야 한다.
이 사랑스런 녀석들이 우리 집에 온 것도 이제 8년이 넘어 간다. 강아지 나이로 8세면 사람 나이의 56세가 지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15년은 살지 못하는 강아지들의 수명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에 사로잡힌 나를 스스로 질책할 때도 많다. 산책을 나가면 누구나 이들을 “Poppy”라 부르며 다가 온다. 아니 여전히 생김과 몸 놀림은 천진난만 어린 아이들 같다.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며 사랑할 시간 보다는 지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있곤 한다. 긍정보다는 부정이 생각을 누르는 현상은 일종의 습관인가.
오늘 따라 집 앞에 있어야 할 소형차는 건너 집 앞에 서 있다. 두 개의 가방을 끌고 가 실어야 해 약간의 시간을 소비하고 새벽 소음을 일으켰다. 뒤 트렁크가 약간 비좁을 정도로 짐을 채웠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엔진 시동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공간의 미학처럼 시공에 한 점 소리를 올려 놓을 때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듯이, 엔진 소리가 가늘고 높은 모양을 하고 직각 기류로 빠르게 상승하는 모양이 보인다. 잠시 그 현상에 매료되어 본다.
차 안을 데우고 떠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냥 떠나는 것이다. 최소한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꼽고 5초의 간격을 두었다가 엔진을 시작한 친절은 베풀었으니 D기어를 넣고 엑셀을 약간 눌러 앞 차와의 좁은 간격에 주의 하며 차를 몰았다.
그 시간은 어느 도로고 막힐 것이 없음으로 차라리 지름길을 택했다. 신호가 많음에도 신호 마다 다 정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시간이 단축되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동일한 상황과 시간에 다 가보지 않은 두 길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어 이미 갔던 길을 우선 축으로 주관적인 비교를 하며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져 하이웨이를 거쳐 88로로 진입해 내 달려 가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나는 첫 눈 오던 전 날 오전의 만남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많은 잠을 자지 않은 지난밤 내내 그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으로 내 내부에서는 몸부림을 쳐야만 했던 만남의 이야기다. 돈이 많은 분임에도 투자된 돈이 사업에 묶여 있고 매년 새롭게 유지 비용으로 상당한 돈이 계속 더 들어가야 하는 한편, 그 사업의 규모가 워낙 커 수입이 없음에도 포기할 수도 없는 시간을 5년 참아 오신 이야기다. 말씀 중 맺혔던 눈물이 기억나고, 부부가 아무 일이나 해야 하는 서민 이민자의 일이라도 찾고 싶어하시는 그 한 없는 쇠락을 듣고 있어야 했던 가시 방석의 그 고백들이 산더미처럼 만감이 교차하게 했던 이야기다. 함께 기도하는 것 밖에 달리 방안을 찾을 수도, 조언이라고 감히 드릴 수도 없었다.
88도로는 Nordel way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 끝 단은 내리막길 3Km이다. 그리고 그 내리막은 써리, 델타, 뉴웨스트민스터 및 리치몬드를 잇는 멋 들어진 Alex Fraser bridge로 통하게 되어 있다. 이 다리를 쏜 살같이 넘어 91번 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정말이지 공항으로 가는 길은 참 잘 되어 있었다.
공항이 있는 리치몬드에 도착하니까 새벽 3시 40분이었다. 공항 입구에 있는 주유소 편의점에 들어가 막 내린 커피를 아내는 사왔으나 내내 그 한기를 느껴야 했던 새벽의 추위를 풀기에는 역 부족이었던 것 같다. 맛도 역시 밴호테 류의 여타 다른 브랜드의 커피와는 비교할 수가 없이 조야했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출발 2시간 전이니 이것 저것 신경 쓸 것 없이 티케팅과 짐을 부쳐야 했다. 세계적인 국제공항 밴쿠버 청사에는 수 많은 항공사의 부스들이 있고, 미국으로 가는 항공사 출국 청사에서 알래스카 에어라인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부스들을 따라 내려가며 모두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렇게 헤매다간 시간 낭비가 심할 것 같아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 본다. 반대 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반대 편으로 다시 올라가며 찾은 알래스카 에어라인엔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아뿔싸. 이렇게나마 일찍 오지 않았으면 더 힘들 뿐 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항공사의 서비스가 참 좋아 기분 좋게 짐을 부칠 수가 있었고 몇 가지 궁금 사항에 대해 친절하게 답을 주었다.
티케팅이 끝나고 짐을 부치는 곳으로 진입하니까 그 다음 단계는 더 이상 아내와 같이 동행 할 수 없는 몸 수색대였다. 남는 시간에 커피나 한 잔 하며 헤어짐의 아픔을 다스리려 했는데 갑작스런 이별이 온 것이다.
아내를 안아 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진정 오랜만의 헤어짐이라 아픔이 있었다. 12년 전 가족을 정착 시켜 놓고 나는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한다고 벼르면서 떠나던 날도 이렇게 헤어져야 했다. 그 때의 아픔은 이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통증이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렇게 떠났다가 결국 4개월 만에 가족 없이 살 수 없다는 낭패감으로 다니던 회사 멈추고 다시 돌아왔던 뒷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아내를 그렇게 남겨 놓고 몸 수색대를 건넌다. 아내를 돌아서 휘어진 길로 들어서고 나서 돌아 보니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한번 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열망이 불 일 듯 한다.
그렇게 비행기를 탑승했다. 30분의 시간을 더 기다리고 나서이다. 새벽 5시 25분.
[2부. 비행기 안으로]
통제된 공간에서도 자유 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같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잠자고, 책보고, 영화보고, 묵상하고, 기내식 먹고,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쓰는 일이 장장 열 네 시간 동안 가능하니 말이다.
밴쿠버에서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는 알래스카 항공은 비행 시간이 3시간 남짓 한 짧은 코스이다. 일찍 기내로 들어가 비행기 중간 쯤 세 좌석으로 된 창가 석의 복도 쪽 자리에 앉았다. 조금 후 부부가 와 창가 석 두 자리에 마저 앉으며 그 세시간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책과 생명의 삶 묵상 집. 그것이 내가 가방을 머리 위 짐 칸에 올려 놓기 전 꺼낸 유일한 동반자였다. 두 주간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은 현재로선 어쩔 수 없는 특권이기에 나는 선물로 받은 것 포함 그 동안 읽지 못하고 있던 책 몇 권을 챙겨 끝내고 싶었고, 무엇보다 글을 쓰며 그 시간들을 채우고 싶었다면 그것은 솔직한 고백이다.
요동치지 않는 비행기. 안 쪽의 부부는 고맙게도 한번도 일어나 자리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아 나로서는 더욱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책을 몇 장 보지 못해 이내 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의 비행이라 모두들 ‘자는 분위기’인데다 그 동안에 모르게 쌓인 피로가 누적 량이 과도 했던가 보다. 나는 긴 잠을 자고 일어났던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서 스튜어디스로부터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다. 책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허무히, 그러나 결코 허무하다고 할 수 없이 비행기는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행의 앞뒤는 이렇다. 아내와 아들이 의기투합하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성수기에 떠나는 것이라 좀 더 싼 인터넷 항공사를 통해 티켓을 이미 끊어 놓고 나에겐 생일 선물로 준비하고 있었다. 생일이 두 달 전인 10월 20일 이니 티켓 구입은 3-4개월 전이다.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노래하듯 하는 나의 흘러가는 푸념들을 ‘흘러가게’ 듣지 않은 아내가 아들과 함께 준비한 배려이다. 내가 없는 동안 장성한 _ 하나님의 특별하고 자애로우시고 넓고 일방적이신 은혜로 - 아들이 다행히 방학을 맞기 때문에 나의 일을 봐줄 수가 있어서 그런 비밀 작전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티켓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동안의 나의 처지가 도무지 한국을 간다는 게 있을 성 부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거부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일은 어떡하며, 티켓 비용 포함 가서 쓸 돈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군다나 직항로로 12시간을 갈 항공시간이 왕복 모두 갈아 타고 대기하며 각 각 18시간에서 20시간 가량 가까이 걸리게 될 것을 생각하면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여행이 실행되는 바로 두 어주 전 시점까지 “가겠다” “안 가겠다”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는 해프닝도 많았다. 선물 해준 사람의 성의는 뒷전으로 물려 놓고 말이다.
비행기는 바퀴를 내리려 동체 아래서 시끄러운 소음을 분산 시켰다. 얼마 후 그 바퀴가 땅을 치며 더욱 어지러운 소음과 함께 작지 않은 충격으로 비행기는 착륙했다. “Buckle up” “No Smoking”사인은 그로부터 5분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대기 시간을 알려왔기 때문이라는 기장의 맨트가 들려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크고 깨끗했다. 공개된 인터넷 선이 있어서 무선으로 아이폰을 연결한다.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이폰의 출현으로 시작되었지만 카카오톡, 일명 카톡도 그에 못지 않은 혁명이다. 무료로 문자, 사진 전송 및 전화를 할 수 있게 해주니 세계 어디에서나 쓰지 않는 사람이 드문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카톡으로 공개된 인터넷 선을 타고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다. 여기까지 잘 도착했다고, 한국 가는 길이 참 좋다고, 너무나 고맙다고……
밴쿠버에서 출발한 알래스카항공은 로스엔젤레스 국내선 청사에 사람들을 떨어 트려 놓았고, 아시아니 항공이 있는 곳은 국제선 청사라 빌딩을 세 곳 정도 지나 다음 건물인 국제선 청사에 위치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 놓는 처지라 국내선 청사 밖으로 나와도 국제선이라든가 아시아니 항공이라는 표지나 안내는 찾아 보기 힘들었다. 두어 사람에게 물어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가기는 했지만 가면서도 긴가 민가 할 정도로 주위는 공사로 이름 값 높은 로스앤젤레스답지 않았다.
아시아나 항공사 부스를 찾는 것 역시 이 국제선 청사에서는 내게 쉽지 않았다. 또 헛다리 짚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무작정 부스마다 써 있는 항공사 이름 들을 따라 내려가며 주욱 훑었지만 찾지 못했다. 다시 공항에서 일하는 듯한 직원에게 물어 보니 한 쪽을 가리켜 준다. 이미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서서 수속을 밟고 있는 최고로 복잡한 카운터였다.
내 눈이 이렇게 어둡나. 나의 하는 일이 그렇게 허술 한가.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았던가. 세 시간 후에 출발할 비행을 위해 3시간 전인 그 시간에 그렇게 많이 줄 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카운터를 담당하는 모든 한국 직원들이 정겨워 보였다. 게다가 그 이름 하여 몇 년 연속 세계 제 1의 우수 항공사로 뽑힌 저력의 아시아나 항공사답게 젊고 친절한 데는 예외가 없었다.
좌석 번호 46E는 앞서의 밴쿠버-로스앤젤레스 행의 Boing 737과는 다른 거대한 보잉747 Passenger기의 복도 석이다. 복도 석은 네 자리가 붙어 있고 나는 가운데의 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두 자리 창가 석, 세 자리 창가 석의 프리미엄은 모두 이미 힘과 권력 있거나 돈으로 자리까지 산 사람들에 의해 독차지 된 것 아니었던가? 불쌍하게도 뒤 늦게 비행기로 들어온 나는 이미 와 세 자리 모두 차지한 다른 승객들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다 가방을 올려두어야 하는 머리 위 짐칸도 모두 꽉꽉 차 버려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발 밑에 두려 했으나 크기 때문에 알맞게 들어가지 않았다. 옆에 앉은 필리핀 여 승객은 장시간 여행에 발이 불편할 테니 스튜어디스에게 넣어 둘 공간을 부탁하라고 한다. 이전 처럼 책과 묵상 집과 컴퓨터를 꺼내 놓고 제법 가벼워진 가방을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해 좀 떨어진 곳의 짐칸에 올려 놓았다.
나는 그곳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14시간의 시간 동안 한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화장실에 꼭 가야 할 용무가 아니고서는 그곳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약간의 인내심을 동반하면 뻐근함은 약간의 자세를 바꾸는 것과 스트레칭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그 열 네 시간 동안 잠을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담소 하고, 식사를 하고, 묵상하고, 컴퓨터를 보면서 즐겁게 왔다. 한 평 남짓 공간에서도 자유 함을 느낄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 자유로움과 기대감은 오기 전의 두려움, 뒷 일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을 말갛게 씻어 주고 있었다.
[3부. 추억 잡기]
눈을 뜨면서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내가 누워있던 곳이 생소했다. 아 그래 내가 이곳에 왔구나. 꿈이 아니고 몸이 현실로 와 있구나. 아픔이 몰려온다. 얼마나 그리운 곳이던가? 얼마나 이 자리에 내가 와 있기를 어머니가 간구하던 곳인가? 이 곳에는 어머니께서 외로움을 달래고 계셨던 많은 세월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전날 저녁 들어 설 때는 왜 그렇게 작고 누추한지, 바로 찾아 왔는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낯 설더니 밤 사이에 제법 익숙해져 버렸다. 역시 시차는 생각과 정신을 넘어 몸이 먼저 여전하게 가지고 있는 것인가 보다.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눈은 새벽 3시에 깨어 난다.
한국에 오면 그리움 때문에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 골목 시장에 가서 떡뽁이와 오뎅 사 먹기, 석촌 호수 왕복 5Km의 길을 마음껏 뛰어 보기.
떡뽁이는 골목 시장에 가야 있는 떡뽁이를 말한다. 고맙게도 골목시장은 아직 “버젓이” 살아 있었다. 경제가 눈이 부시게 발전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도 모양이 약간 바뀌었을 뿐 그대로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게다가 그 자리 그 곳에 그 아주머니가 떡뽁이를 팔고 계셨다 _ 그렇게 보였고 그렇다고 하신다 -.
한편, 석촌 호수엔 화려한 변화들이 있기는 해도 옛 모습 그대로를 대 부분 간직하고 있다. 아기자기 새로운 길들과 조경이 되어있고 Wi-Fi도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영락 없이 좋은 휴식과 여유 공간이자, 운동을 위한 수련장이다. 또 그 옆엔 100층 넘는 건물이 건설되고 있다.
그 곳에 이른 아침에 끌리듯 나선다. 나가는 길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어머니가 사시는 빌라만 그대로일 뿐 앞 뒤 옆 모든 곳에 새로운 건물과 빌딩이 생겨 종이 접은 상자들처럼 우후죽순으로 서 있었다. 길은 분명 옛 길이되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눈을 뜨기 보다는 도리어 감고 이전 모습 상상하며 걸어본다. 있던 골목도 없어지고 없던 가계가 생겨 났다. 수 없이 즐비한 식당 들이란……
화요일 이른 시간이라 문 들은 닫혔고 인적은 뜸 하였지만 밤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흥청될지 의심할 필요 없다. 네온사인, 어지러운 간판 사이로 뿜어 나오는 술 내가 상상의 끈을 놓지 않는 나의 코를 진동한다. 그 진동하는 냄새 속에는 하수구 냄새를 넘어 이상한 냄새가 묻어 나온다. 앗 똥 냄새! 바로 그랬다. 그 향취는 상상 속의 냄새가 아니라 현실 속에 번지고 있다. 그 이른 아침의 추운 기운을 타고 나오는 그 고약한 냄새는, 뭐랄까 멋진 옷을 입고, 화장하고, 머리를 세우고, 비싼 귀금속을 낀 여인이 버스 안에서 방귀를 끼는 모습 같다 할까? 아마 집집마다 화장실의 분뇨가 하수구로 흘러 나오는가 보다. 혹은 분뇨가 흘러가는 관에 구멍이 나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맨홀에선 예외가 없었음에도 정작 이 환경에 익숙지 않은 나만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멋있고 화려한 모양을 갖춘 환경과 건물 사이로 흘러 나오는 그 냄새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호수의 물은 반쯤 얼음. 설치된 외부 온도계가 표시하고 있는 온도 영하 6도. 수상 버드하우스는 고장 나지 않아 보임.
다리 밑 통로 새로운 사진들로 정겨운 시정. 스피커 통해 흘러 나오는 물 방울 소리는 따스한 배려가 돋보인다.
[4부. 통한의 고백]
<詩 - 12년 만의 휴가>
12년 만의 휴가
이국의 삶을 선택하고
비행기에 오르던 2000년엔
감옥으로 향하는 나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땅개처럼 바닥을 기지만
감사라는 것
하나 붙잡고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
그렇게 흘러간 12년.
나는 지금
내가 크고
군대 가고
아내를 만나고
사랑 하고
다희를 낳고
동호가 태어난
그 집에 와 앉아 있다.
왜 이렇게 작은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누추한지 모르겠다
총각 냄새 가득하던
나의 방은
치워져
말갛고
황량하다.
어머니 얼굴에 가득한 주름
웃음이 줄어든 환경과 이웃
첫 날 이른 아침엔 일찍 일어난다.
그것도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기다려 맞은 시간이다.
영하 6도.
같은 온도도 여긴 더 맵다.
잠시만 있어도
코가 시리고
입이 얼 판이다.
석촌 호수를 무작정 내달려 본다.
나의 청년 때는 늘 그랬듯이.
아내가 나 만나기 전
자전거 탄다고
이곳 내려오다
훌쩍 넘어진
그 내리막길은
계단으로 바뀌어 있다.
그 내리막길은
내가 다시 아내를 만나고
같잖은 자전거로
뒤에 태워주며 우쭐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래
이곳에는 추억의 백 가닥이
남아 있지.
세포가 형성되고 난 후
분열하고 자라서
하나의 형상을 갖추게 되는
그 일련의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감동의 현장이
강산까지 변하는 12년 세월 동안
남아 있어 줘서
참 고맙다.
콧물까지 얼었다.
그래도 계속 달려본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 시간들을
그렇게라도
달려가 잡고 싶다.
첫댓글 가명을 본명으로 수정해 보았습니다. 현재는 영 부족해도 배우면서 앞으론 많이 올릴것 같아서요^^
반갑습니다
진작에 저희 회원이셨군요
신춘문예 수상을 축하드리며
활발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저도 2000년에 이민을 왔는데
저랑 같은 시기에 이민을 오셨네요.
노력하며 살아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이민살이입니다.
힘들때마다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래...이제 캐나다 나이 13살, 그러니 뭘 얼마나 잘하겠어?
아직 더 세월이 필요한 것이니 쉽게 실망하지 말고 가자!
이러며 스스로를 격려하곤 합니다.
13살 동지님께도 힘내시라는 말과
수상 축하 같이 드립니다.
말씀에 힘 얻습니다.
2000년도엔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안가면 큰일날 것 같이 메스컴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나도 그에 힘입어 이민을 오게 되었지요.2001년에는 메스컴에서 더 목소리 높어서 나도 신청을 하고 왔으니 제 캐나다 나이는 12살이네요. 참 제가 얼미전 동물병원에서 보았는데 강아지 사이즈에 따라 나이가 다르더라구요 사람 나이로 계산 할 때 작은 사이즈는 x5,중간x6큰 사이즈는 x7 아마 퍼피처럼 보인다니 x5를 하시면 지금 생각하신 것 보다 훨씬 젊어질거예요. 한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본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민 동기가 문협에 많이 계셔서 더 기뻐요. 강아지 나이 계산법 알려주시니 참 감사하고, 우리 살구자두에게 어서 알켜줘야 겠어요 ^_^ 구여운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