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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파노라마, 그 빛과 그늘
--안일상 작가의 소설 세계--
문학평론가 리헌석
(사)대전예술단체 총연합회 회장
1. 안일상 소설가 엿보기
<넥타이를 매고 길을 나설 때마다 나는 목이 메이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빈틈없이 너무도 바쁘게 뛰는 사람들을 보며 가끔은 한눈을 팔고도 싶다. 기차처럼 정해진 궤도만을 달리고 싶지도 않고 택시처럼 골목골목을 누비며 약삭빠르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가고 싶다.> <뛰어가는 사람을 멀리 보내고 뛰어오는 사람을 앞세우며 가끔은 멈춰 서서 뒤도 돌아보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고 안일상은 말한다.
첫 소설집 『목마의 꿈』 후기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인데, 소설가 스스로 밝힌 내면의 반향이라 하겠다. 이 글처럼 그는 노타이 차림이 잘 어울린다. 다급하게 서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지도 않는다. 쉬는 듯이 보이지만, 그는 소리 없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술을 나누어 마시는 친지들이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느슨하게 풀어버리기 때문에 그와 마주하는 사람들도 경계를 허물고 마음을 나눈다.
소설가 안일상은 1949년에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향한리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때의 그 곳은 계룡산 자락의 산촌이었다. 농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이 도곡초등학교 6학년 때에 갑자기 타계한다. 슬픔을 감내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친과 남매는 대전으로 이주한다.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학교에 진학하여 후일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또한 주경야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에 중등학교에서 봉직한다. 교직생활 39년을 마치고, 2010년 2월에 교육자로서의 긴 여정을 접는다.
중등학교에서 국어과를 지도할 때, 자신도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자각에 이른다. 그리하여 여러 편의 작품을 빚어, 1991년에 이르러서는 한 권 분량의 단편소설이 쌓인다. 그리하여 1992년 1월 20일, 첫 소설집 『목마의 꿈』을 발간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접목」이 1993년 《문예사조》 신인상에 당선하여 늦깎이로 등단한다. 그의 당선작품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상찬을 받는다.
인공수정으로 한 여인에게 임신시켜 출생된 유아가 미친 유전자의 혈액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혈액형이라고 고민하는 의사의 의료진료 체험담을 통하여 상상치 못할 인간과의 교제가 혈액수혈로 사고를 저지른 자신의 고백과 고민을 통하여 인낙육체의 접촉과정을 접목이라는 비유로 다룬 심리주의적 경향의 소설로서, 의사의 관념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세계로 육박했고, 물속을 응시하던 친구의 시각을 통한 하천공해의 피해의식을 연관시켜 보다 광범위한 물질적 접촉의 위험성을 강조한 테마이며 서술문장법, 심리묘사, 자연묘사 등의 소설미학을 솜씨 있게 소화시키고 있어 미래가 지극히 촉망된다(구인환. 이동희)
그는 당선소감에서 <뛰어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때로는 날고도 싶었다. 이제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꿈을 꿈으로 간직하고, 사랑을 사랑으로 간직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 뒤늦게 당선 소식을 들으니 기쁨과 함께 두려운 생각이 든다.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힌다.
최선을 다하는 소설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한 그는 1997년 장편소설 『무화과』를 발간하여 그의 문학적 명성을 드높인다. 교보문고에서 집계한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5주 연속 진입할 정도로 인기 작가가 된다. 이 여세를 몰아 2001년에도 장편소설 『그들의 섬』을 발간하여 삶의 욕망과 갈등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이어 2008년에는 단편소설집 『기억의 저편』을 발간하여 현대인의 삶을 대변한다. 또한 대전지역의 대표매체인 《중도일보》에 환상적인 내용으로 ‘심판자’를 연재 완료하여 새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이러한 작품 창작과 함께 문학 활동에도 앞장을 선다. 그는 2002년부터 문학사랑 문인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한밭소설가협회 회장 등을 맡아 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문단의 직함보다는 창작인으로서 좋은 소설을 빚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연인이기도 하다.
2. 안일상의 소설 세계
2.1 『목마의 꿈』에서 세상 읽기
문학 청년기부터 창작한 작품들을 엮은 단편소설집 『목마의 꿈』에는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접목」 「목마의 꿈」 「생존의 유희」 「종소리」 「몸보다 작은 날개」 「오늘의 희극」 「찌」 「야누스」 「동틀 무렵」 「해빙기」 「동행」 「사랑의 한계」 「1+1」 「술잔 속의 폭풍」 「밀명, 그 뒤」 등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접목」은 인간의 원초적 갈망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처음부터 ‘오 박사’의 고민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다가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행위가 드러낸다. 이는 단편소설의 특성이라기보다 콩트의 반전과도 같은 구조인데,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산부인과 병원 의사인 ‘나’는 정신병원에 있는 친구 의사인 오 박사를 찾아간다. 그는 찾아온 환자에게 자신의 정자를 인공수정했는데 태어난 아이가 정신 이상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혈액 속에 미친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상상을 하다 결국 정신병자가 되어 입원을 한다. 괜한 생각이라며 아무리 위로해도 그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확신하며 그것을 증명시키려 한다. 한편 주인공인 나는 며느리가 될 사람의 어머니(사돈)와 상견례에 나갔다가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의 정자로 임신시킨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녀가 바로 자신의 정자로 딸을 출산한 여자인 것을 알게 되어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서두 부분은 ‘나’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제공한 정자가 아들의 배우자가 되었다는 가정 아래 <놀라움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사이에 둥근 해면체의 올챙이 떼>가 <나를 보며 ‘아빠, 아빠!’ 하고 소리치며 쫓아오고 있었다.>며 결말을 암시한다. 이 후에는 오 박사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마지막에서야 ‘나’가 다시 등장하여 의외성의 묘미를 생성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후회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뚱뚱해진 몸으로 내 병원을 드나들며 진찰을 받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몸속에 든 내 아이가 잘 자라기만을 빌었다. <중략>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과 함께 밀려오는 현기증으로 나는 벽을 더듬으며 그 곳을 벗어났다. 비틀비틀 걷는 포도 위로 낙엽들이 날리고 있었다.
―「접목」 결말 부분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정자를 인공수정하여 태어난 아이가 정상이 아니어서 고뇌한다. <한참동안 망설이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애의 혈관에 내 피가 흐르고 있어.”>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애써 그런 표정을 감췄다. 상심하고 있는 그에게 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등에서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의 일부가 암시된다. 이러한 암시에 의하여 좀 더 긴장감 있게 진행되던 작품은 마지막 결말에서 반전의 묘미를 제공한다.
「목마의 꿈」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할 정도로 순정 소설이다. 주인공 창섭은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고등학교 때 자신의 제자였던 ‘꼬마’를 만난다. 그녀는 폐결핵 환자로 요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살기 위해 요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죽기 위해 요양을 한다. <혼자 병과 싸운다는 게 외롭고 지루했어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도 느껴졌고요.> <결국 요양한다는 핑계로 이리로 왔지만 사실은 빨리 끝장을 보고 싶은 심정>임을 밝힌다. 창섭과 그녀는 산길을 걷기도 하고, 갯벌에서 농게를 잡기도 하며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녀가 ‘목마’를 선물하고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달빛 속으로 뛰어갔다.>고 서술한다. 소설가 안일상이 첫 번째 소설집의 제목을 ‘목마의 꿈’으로 결정한 것도 이와 같은 순수를 지향하기 때문일 터이다.
「생존의 유희」는 6.25를 제재로 하여, 처참, 불신, 광기(狂氣)를 중심으로 엮고 있다. <한참만에 그는 두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넘어져 있는 김 상사를 발견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 검게 비치는 붉은 피가 엉겨 붙은 한쪽 이마엔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핏덩이가 질척하게 번지고 있었다.> 등에서 현장의 상황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피하는 과정에서 소년과의 조우, 노인과의 조우, 여자와의 조우, 그리고 여자의 언니와의 만남을 현장감 있게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안일상 소설의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는 바, 비극적으로 결말을 짓는다.
「해빙기」는 소설의 요소인 대화, 묘사, 서술 등을 완전히 무시한 채, 큰 단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독자에게 한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인내심으로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줄거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어느 모로 봐서도 사랑스런 여자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집안을 꾸미는 것에서부터 옷 입는 것, 외식을 하는 것까지 결혼 전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하면서 갈등을 한다. 한편 아내도 마찬가지 갈등을 느낀다. 그래서 가출도 하지만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등산을 가게 된다. 등산을 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갈등이 점점 해소된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모든 갈들이 해소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여태까지 작은 것에 얽매여 사고의 폭을 우리 속에 감싸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며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남편이 문득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에 스치는 머리카락에까지 외로움이 물씬 배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아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때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온 남편이 나를 감싸며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산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호--. 그 소리에 모든 응어리가 다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해빙기」 결말 부분
이와 같은 해피엔딩은 안일상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구성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 대조시키며 각자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점이다. 단편에서는 단선구성을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하나인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두 사람의 주인공을 내세운다. 아내와 남편이 각자의 입장에서 변명하고 사실을 밝히는 구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같은 사람은 없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해와 사랑만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내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2.2 『기억의 저편』에서 세상 읽기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쓴 단편소설을 묶어서 발간한 『기억의 저편』에는 「동행」 「컴퓨터의 사랑」 「여심(女心)」 「계백의 미소」 「아내의 초상」 「신이 떠난 자리에 부는 바람」 「혈액형 바꾸기」 「어떤 출장」 「그들의 전쟁」 「기억의 저편」 등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로 수록된 「동행」은 부부 사이에도 믿을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적시하고, 동질성을 띠었을 때에 안도하는 심리를 묘사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편이 검사인 ‘나’는 어느 날 외식을 하고 돌아오다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친 것을 보고 고민한다. 자수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한다. 그러나 이후 남편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녀를 감시하는 듯한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 우연히 시장에 갔다가 늙은 거지를 보며 저런 사람을 없어져야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되뇌인다. 마치 세뇌라도 시키려는 듯이 반복된다. 그녀는 원인을 찾기 위해 남편의 일기장을 보게 되고 비로소 그녀가 혹시 고발이라도 할까 봐 그녀를 믿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비가 오는 날 그녀는 그와 외식을 하고 자신이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친다. 그날 저녁 남편은 그녀를 위로하며 매우 기뻐한다. 믿지 못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턴트맨을 고용해 연출을 한 것이고 그 사건 이후로 이혼을 하게 된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서다.
꿈에서조차 진저리쳐지는 엊저녁의 사건을 생각하며 나는 몸서리를 쳤다.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생각은 더욱 뇌리를 파고들었다. 벌써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을 되새겼지만 생각은 항상 제자리를 맴돌았다. 나는 피곤한 머리를 소파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엊저녁의 일이 필름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동행」 서두 부분)
나는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행동을 했죠?”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스턴트맨 생활 20년에 이런 일을 맡아보기는 처름이라서.”
“그냥 할 일 없는 치기 어린 여자의 심심풀이라고 생각하세요. 심심함을 못 견뎌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그곳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서자 안에서와는 달리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건물 저편의 하늘로 눈을 돌렸다. 맑게 갠 하늘 위로 흰 구름이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동행」 결말 부분
부부 사이의 갈등과 화해라는 명제를 소설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와는 달리 애인의 집착과 사장의 사랑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여심(女心)」은 현대인이 마주치는 삶의 양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상황 전개가 간명하고 대화체가 많아서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심리묘사가 압권이다. 사장의 선물을 받고 그녀는 <물질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갈구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자존심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쓴웃음이 새어나왔고 누군가가 나를 시험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를 시험하기 위한 선물이라면 그 시험은 성공했다.>를 통하여 결말을 유추할 수 있게 구성하고 있다.
「계백의 미소」는 안일상 작가의 고향에 있는 ‘계백장군의 묘’에서 영감을 얻은 듯도 하지만, 중심 제재가 비극성을 띨 수밖에 없는 한계를 노출한다. 공격하는 신라군을 맞아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수성에 성공한 백제군은 도성의 함락으로 길을 잃는다. <사비성의 함락 소식에 곤한 잠속에 있던 군사들은 마치 꿈을 꾼 사람들처럼 멍하니 사비성 쪽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던 계백은 칼을 들어 자기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가물거리며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의식 속으로 환한 미소를 띤 아내가 아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등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현대를 상징하는 과학의 발전과 그 한계에 대한 성찰도 일품이다. <탐험 1호로 명명된 우주선은 화성 탐사를 무사히 마치고 시속 1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지구를 향해 힘차게 비행하고 있었다.>는 서두로 시작하는 「컴퓨터의 사랑」은 과학 발전의 눈부신 성과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박사는 전부터 계획하여 온 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컴퓨터에 창조력을 심어주고 인간의 감정을 입력시키는 일이었다. <중략> 수년 동안 인간의 감정을 분석한 자료를 입력시키며 그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중략> 컴퓨터의 감정 소화 능력은 날로 향상되어만 갔다. <중략> “제 생각으로는 지금 컴퓨터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험에만 치우쳐 너무 극단적인 감정을 입력시킨 게 잘못이었습니다.” <중략> 그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검붉은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벽에다 힘껏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반란.’ 벽에 쓰여진 핏빛 글씨가 점점 부옇게 흐려오는 것을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컴퓨터의 사랑」 중에서
영화 ‘터미테이터’처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과학 문명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감정을 가진 컴퓨터는 이 박사에게 애인(대원) 대신 컴퓨터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만 컴퓨터가 미리 알게 되어 실패한다. 이 박사의 사랑을 얻기에 실패한 컴퓨터는 대원들을 차례로 살해한다. 마지막 남은 이 박사가 컴퓨터에게 이유를 묻는다.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을 차지하지 못할 바에는 지구에 가서 영웅이 되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살아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치는 없어질 것이기에 자신을 만든 이 박사마저 살해하겠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른 이 박사는 ‘컴퓨터의 반란’이라는 핏빛 글씨만을 남기고 무기력하게 살해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해피엔딩을 피하고 있는 작가라고 하지만, 그의 현실적인 내면은 시니컬하면서도 긍정적이다. ‘후기’에서 그는 <일상을 벗어나 여유롭고 한가로운 생활을 꿈꾸지만 생활은 언제나 일상에서 맴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지만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바엔 현실에 만족하고 현실을 즐기며 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사랑과 그리움이 작품을 창작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3. 장편소설과 남은 이야기
안일상의 소설은 잔잔한 어조로 삶의 진실성을 담아낸다. 2권의 소설집에서도 그러하지만, 2권의 장편소설에서도 한 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마력을 발산한다. 이는 우리 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일상은 이야기꾼으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소설가라 하겠다.
장편소설 『무화과』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신장을 기증하고 시골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지망생인 현빈은 어느 날 신장을 받은 여자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 역시 화가 지망생이다. 처음에 현빈은 그녀를 멀리하지만 점점 정이 들게 된다. 며칠을 시골집에서 묵다 떠난 그녀가 그의 뇌리에 박혔고, 그녀를 그리워하던 중 갑자기 그녀가 다시 나타난다. 그림을 그리러 왔다는 핑계였지만 그녀도 그가 보고 싶어 온 것이다. 그녀와 그림을 그리며 사랑은 키워가던 그는 다시 그녀가 떠나자 방황을 시작한다. 그러다 그녀의 졸업날이 다가오고, 그는 그리움을 참지 못해 졸업식장을 찾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축하하러 올 줄 알았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뭔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킨다.
회사에 취직을 한 현빈은 그녀의 뒤를 캐게 되고, 그녀가 어느 변호사의 나이어린 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빈은 그를 산속으로 유인해 자동차 사고로 죽게 만든다. 간접살인을 한 것이다. 그 후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려 할 때 그녀가 찾아온다. 처음엔 창녀 같다는 생각에 혐오스러웠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우연히 그녀의 앨범을 살피던 그는 그녀의 사진 속에서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기억해 내고, 어렸을 때 잃어버린 동생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가출을 한다. 한편 민정은 그가 자신을 동생이라고 오해하고 떠난 그를 기다리며 그의 시골집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사이 임신했던 자식도 유산을 하고 그녀마저 병이 들어 죽는다. 후에 민정이 남긴 편지를 보고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후이다. 현빈은 속죄하는 마음과 회한으로 그녀의 무덤에 꽃을 바치며 그녀와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이렇게 전개된 『무화과』의 특징은 1인칭이면서도 세 사람처럼 구성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나’를 등장시켜 각자의 생활 속에서 사랑에 대한 공통분모를 추려 내어 각자가 느끼는 상대에 대한 사랑의 부피를 알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장편소설 『그들의 섬』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암자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현우는 어느 날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흠뻑 젖은 채 암자로 찾아 든다. 서영이라는 대학 졸업반 여학생이다. 비로 인해 하룻밤을 암자에서 지낸 그녀는 현우가 고시 시험을 마치는 날 찾아온다. 그리고 서로 좋아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얼마 후 현우는 시험에 떨어진다. 낙심해 있던 그에게 서영이 찾아오고 둘은 사랑을 약속한다. 그후 서영은 취직을 하며 그의 뒷바라지를 한다. 그러나 다시 시험에 떨어지자, 자살을 결심한 현우는 강물로 뛰어들지만 구출된다. 그녀를 위로하던 서영과도 결국 헤어진다.
그 뒤 합격을 한 현우는 검사가 되어 사건을 맡던 중 그녀가 관련된 사건을 접하게 된다.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였지만 결국 무혐의로 처리된다. 그리고 현우는 서영의 딱한 처지를 동정해 유학 자금을 도와준다. 그런 중에 주희라는 여자와 약혼을 한다. 그러나 작은 오해로 약혼은 깨어지고 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만난다. 둘은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한 현우는 서영의 전 남편의 가족들의 트집과 투서로 심한 고역을 치른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방조했다는 실토를 한다. 충격과 인간에 대한 실망,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혐오로 현우는 고민을 하다 사표를 제출하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암자로 가 권총으로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한다.
『그들의 섬』의 특징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이 행복하게 끝을 맺을 수도 있는데, 독자들의 이러한 소망을 완벽하게 역전시키는 구성에 있다. <그래, 잘 가. 우리 다음 세상에선 이런 모습이 아닌 진실한 사랑으로 만나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현우는 그녀의 옆자리에 가지런히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라는 결말에서 일종의 허탈감에 젖게 하지만, 순수를 지향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에 공감할 수도 있다.
신문에 연재를 마친 『심판자』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우연한 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그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대해 분개한다. 너무도 약한 처벌을 못마땅해 하며 정치인, 탈세자, 조폭, 노동조합 등 부정한 자들을 처벌하고 정의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사회가 자리를 잡았다고 느낄 무렵 대통령을 도와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일본의 역사왜곡을 수정시킨다. 이러한 판타지 소설은 만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안일상 작가는 『심판자』에 대하여, 1차 연재를 마쳤지만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장편소설로 발간할 예정이어서 심혈을 기울여 다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신문에 연재할 때에는 서둘러 송고를 하느라 세밀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다듬지 않았기 때문에, 저서로 발간할 때에는 새로 쓰는 마음으로 퇴고해야 한다고 실토한다. 이와 같이 작품 완성에 대한 남다른 성실성, 또한 창작에 대한 치열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 그의 소설은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유지할 뿐더러, 독자들로부터도 큰 사랑을 받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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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리헌석 회장님의 안일상의 평론외 컴퓨터 그외 수록한 모든글을 꼼꼼하게 펼쳐주신 그 은혜 감사 드립니다 저도 소설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지만 글을 읽는동안 작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좋은 글의 평론 꼼꼼히 읽고 갑니다
다인님의 좋은 소설을 기대합니다. 호주의 생활에 활력이 붙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