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백만원 4.3사건 희생자 직계 가족 보상금을 받으며 (23.1.13)
수필: 고광자
어머니
보셔요
아래를 내려보고 계시지요?
오늘은 너무 가까이 생전의 모습을 뵙는 듯
숨결이 곁에 다가옵니다
생전에 좀 더 어머니 곁에서 말씀을 경청하며 살걸,
생활이 급급하고
젊음들이 경쟁을 하니 어머니 집에 가는 것만으로 뵙는 것으로만 만족하였었죠.
어머니
그 시절 어린 동생을 잃었을때의 아픔은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을까요
낭자한 이불속의 동생을 보면서 얼마나 울며 통곡하셨을까요.
친정 어머니도 없는 설음에서 일찍 고씨집에 결혼하여 아이 셋 낳고 가까이 이웃에서 살았었지요.
우리 부모님 내외는 오밤중 폭도들이 동생집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갔지요.
둘째 동생이 무참히 살해를 당하고 쿤 동생은 뒷집으로 피하여 돌담을 넘다가, 깨진 항아리에 박혀 또 피가 낭자했지요. 동경 유학에서도 대학을 좋업한 엘리트였지요. 막내 동생은 작은 몸인지라 이불 속에 쏘옥 숨어 벌벌 떨며 구사일생으로 발견 못하고 살아났지요.
남은 동생들과 얼마나 애틋하게 그리며 살았을까요. 그 누나는 평생을 동생들 생각에 사로 잡혀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희생양 동생을 가슴에 묻고 남편 따라 우리 가족만 제주에서 서울로 이주하였습니다. 밭떼기는 그냥 놔 둔체로 서울행을 택했겠지요.
긴 세월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따라 온 서울
6.25 동란 후니 먹을 것이 제일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하여 둥그런 밥상에다 밀가루를 솔솔 뿌리고 밀대로 밀면, 송송 썰은 칼국수를 만들어 내지요. 한소끔 끓여내면, 온 가족이 달려들어 먹던 어렵던 서울의 달동네! 지금은 우후죽순 높은 아파트 촌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꿈이 있었습니다. 결코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여 내 손으로 일궈내겠다는 포부로 올라오셨지요. 그러나 처음 서울 상경하여서는 허드렛 일부터 남의 집 고쳐 주는 일 등을 하면서 일단은 자식들 배곯지 않게 하려고 수단을 하였지요.
아버지는 14살의 소년일때 부친을 따라서 일본에 갔지요. 식민지시절이므로 4년여의 공장 등에서 나라잃은 갖은 슬픔을 이겨내며 압박의 설음에서도 굳건히 목표를 갖고, 일본 학생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꾹 참아야 했습니다.
시절 공업 기술을 익힌 것을 토대로 서울의 하늘 밑에서 공장을 작으마하게 차려놓고 발품으로 뛰기시작 했습니다.
그 젊음 어깨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 놓고, 지구 만큼이나 돌며, 주문을 받고 내주며 두 세 번의 공장터를 전전하며 지금의 아현동 길가 뒷집에 100평의 집을 장만 하였지요. 길가 담 옆에는, 동력이 흐르는 전봇대가 세워졌고, 직공들이 편히 숙식제공을 하기 위하여 기숙사를 마련하여 놓았고, 주야로 공장 직원들과 일 한 댓가는 서서히 몰려오는 전국의 가난한 청소년들이었지요.
전국에서 모여온 가난한 청년들은 주경야독 공부를 하기위해, 학교를 다니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새 불켜진 불빛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지요. 훗날 경찰 서장도 있고, 교수도 되었고, 철공업 공장 사장도 많이 배출 되었지요.
한 겨울이면
얼마나 손이 시려운지 문고리가 쩍쩍 얼음으로 성애가 꼈고, 밖 마당에 수도가 있으니, 추운 온도에서 배추를 씻던 시절 나는 고등학교때까지도 어머니를 도와 곁에서 2,000포기의 배추를 어둔 새벽부터 함께 씻곧 하였습니다.
메주를 삶을때는 몇가마니를 쑤어서 메달아 두던 15항아리 모두 오지항아리였지요. 키만큼 큰 항아리를 안고 사시던 억척같은 우리 어머니! 그당시 한국의 어머니는 다 억척이셨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계셨으므로 공장은 발전하였고, 어린양 돌 보듯 직공들을 보살펴주었고, 그들은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제일 공업사란 간판 아래 출입구의 문이 항상 열려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저는 그들과 함께 대한민국 그 시절을 살아나간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산전 수전 겪으면서, 긴 날을 아버지 한 분을 믿고, 아들 딸 의지 사랑하며 살아오셨던 어머니는 외가의 외삼촌도 함께 안고 계셨지요
암이란 발병이 있었던. 막내 외삼촌은, 서울 누님댁에 와서 치료를 받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좀 더 잘해 줄걸, 하면서도 많은 식구를 거느리느라고, 아쉬움이 컸겠지요. 나는 그 막내 외사촌과 창경궁을 간적이 있었습니다.
경회루의 고운 연못을 들여다 보며 외삼춘이랑 데이트를 했지요. 그때였어요. 마침 새들이 날다가 하얀 와이셔츠에 새똥을 떨어뜨렸어요. 공중에서 떨군 새똥 외삼촌의 어께 위에 떨어졌지요. 털어내며 쓸쓸하게 입가에 미소를 띄우던 외삼촌은 미래의 시간이 보였던 것입니다.
몇 달 후 멋지게 경찰제복을 입고 외삼촌은 하늘나라로 급히 떠나 가셨지요
남동생 셋을 잃고, 늘 말이 무겁던 어머니는 산전수전 가슴에 안고, 그래도 참 멋이 있었습니다.
가끔 관중속에서 유머를 할때면 웃음바다가 되곤 하는 깊은 유모러스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끔찍히 사랑했으며, 막내딸을 더욱 예뻐해주셨지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온 나는 매사가 감사하여 늘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공손과 미덕을 함께 하고 있지요. 이렇게 놓지 못하고 어머니를 그리워 합니다.
오늘 600만원이란 어머니의 남동생이 4.3사건의 희생양으로 일찍 돌아가신 영혼의 돈을 받았어요
외삼촌의 직계가족이란 보상금이지요. 이제 어머니가 안계시니 우리 삼남매에게 15분의 1씩 받게 되었지요. 신청을 한지 한달 만에 은행으로 부쳐왔습니다. 보상 지급팀에게 깍듯이 전화를 하고 유용히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저는 수필집과 시집을 내는데 2권의 값을 지불할 예정입니다. 어머니의 거룩한 그리움도 쓸 예정이지요.
어머니 아버지는 천생연분이셨습니다. 우리도 부부의 연이 다 할때까지 천생연분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17시집(애월바다는 석양이 아름답다)과 동시집(연꽃으로 받든 섬나라)과 동화집(나는 통나무입니다)을 펴내기 위해 열심히 교정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어머니의 표정이 환하게 내려보고 계시지요. 잘 하고 있다고요. 나는 알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요. 고운 모습이 고운 미소가 보입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202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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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만원 4.3사건 희생자 직계 가족 보상금을 받으며 (23.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