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까지 가는 기차나 고속버스에 혼자 타게 되면, 옆자리에 아리따운 여성 분이라도 같이 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품게 됩니다. 물론 그런 환상에 젖어 있을 때, 꼭 옆자리에 앉으시는 분은 후덕하게 보이는 아주머님이거나 구수한 사투리의 중년 신사이신 경우가 대부분이긴 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에게도 이런 환상이 현실화되었던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제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최초로 해외여행을 하게 된 곳은 공교롭게도 스페인의 마드리드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요금이 싼 항공사를 고르다 보니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는 KLM 항공사의 여객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라 나름 긴장도 되고 들뜨기도 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제 옆에 다가와 앉은 승객은 젊은 한국인 여성이었습니다. 무려 9시간 이상을 좁은 공간에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다행히 상대도 좀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결국 탑승한 순간부터 암스테르담에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나눌 수 있었습니다.
환승하는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 라운지에서 작별을 아쉬워하며 이메일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글쎄요, 고국에 돌아와 보니 그 여성은 머나먼 존재처럼만 느껴지고 굳이 이메일로 연락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누구보다도 더 서로의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역시 낯선 이방인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요. 어느덧 그녀를 잊어버리고 제 동료들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어떤 동료들이 계시는지요? 그야말로 속내를 터놓을 만한 친구들이 있으신지요? 부인도 있고, 남편도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얼굴을 맞댄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차 안에서 만난 낯선 이방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쓸쓸한 환상은 참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이러한 심리를 가리켜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평생에 걸쳐 사랑이라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온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이자 변호사인 직 루빈(Zick Rubin)에 의해 기술된 용어입니다. 그는 1975년 발표한 논문에서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심리에 대해 논했습니다. 내 과거에 대해 모르며, 또한 앞으로도 모를 사람에게 나의 비밀과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답이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독백이라 해야 하겠지요.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갈대숲에 들어가 외친 모자장이의 심리와도 비슷한 것입니다.
몇 달 전 신문에는 서울 강남에 문을 연 대화방에 대한 짧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곳이 윤락업소인지 단순한 유흥업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사 내용에 의하면 중년의 기러기 아빠나 이혼하고 싱글이 된 남성들이 이곳에 와서는 젊은 여자 앞에서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고는 돌아간다고 합니다. 왜 이 남자들은 생판 모르는 여자들에게 가서 돈을 내고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요? 가족들이 외국에 나가 있다 해도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부모, 형제들도 이곳에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너무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때문에 할 수 없는 말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 자신이 속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일원이 아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가 더 쉬울 때가 있습니다. 역으로 너무나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혹은 내 비밀이 밝혀지면 체면을 구기게 될까 봐 오히려 더 말을 조심하게 됩니다.
사회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하여 친밀한 사람들로 구성된 긴밀한 인적 네트워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느슨하고 확장된 네트워크 역시 인간의 심리적 건강에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요한 이방인(Consequential stranger)’이라고 표현합니다.
미장원의 단골 헤어디자이너, 헬스클럽에서 가끔 만나는 동료, 매일 아침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씩만 인사를 건네는 청소 아줌마 등은 어찌 보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 갖지만 묘한 애착관계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느슨한 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운 연결고리가 탄생하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가 생성되기도 합니다. 또한 인생의 고비에서 비탄에 젖어 있는 내게 뜻밖의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느슨한 네트워크에 대한 욕구는 인터넷을 통한 광범위한 인간관계 확산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채팅방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의 실제 이름도 모르는 채 로그아웃해버리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아프고 쓰라린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한 그 사람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일종의 보호막 뒤에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을 기다리며 기차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이방인을 기다립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 [Stranger on a Train] - 외치고 싶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2011. 10. 20., 케이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