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타령
스펀지
아직 있지도 않은 아들타령을 하려니... 어색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고민해봐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기에 아들타령을 미리 해보련다. 나의 아들이 크면, 누군가의 남편이 될 것이고, 남편이 되면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원리(이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사람의 삶에 무조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 한 사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그중에서도 가정이라는 1차 환경의 주 양육자인 엄마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으며 아버지와 비슷한 아들이 아닌 엄마와 비슷한 아들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같이 살며 영향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들이 엄마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다른 관계에서 보다 더 큰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미래의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로 인해 고려해 보게 되었다.
아들과 엄마의 관계가 좋았든지 나빴었든지 결정적으로 마지막 순간에는 엄마의 편이 되는 듯 보이는 아들들을 보며 어떤 영향으로 인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도 나의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때 나의 뜻을 따르도록 유도 하려 할까? 장성한 아들과 엄마의 둘 사이에 한명이 더 끼게 되면,-며느리- 엄마의 영향력은 실로 더 커진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관계 속에 내가 있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엄마든, 며느리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의 좋은 모습만 보고 만나기 때문에 그 사람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알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알게 된 후에는 이미 맺은 관계로 인해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랑하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불필요한 에너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 상대에게 그 확신을 얻기 위해 그 기대치를 더 높이게 되며,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해!!’라는 이기심을 이타심이라 착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엄마와 며느리 역할을 할 내가 이때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니 모든 관계에서 상대의 모습에 대한 기준은 내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반응이 나오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 같다. 내가 좋은 행동을 해도 그와 반대되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나로 인해 상대방의 반응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나 며느리라는 역할에 따른 입장에 대해 고려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해 열심을 하고, 할 수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내려놓고 상대방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관계는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며... 마주대한 그 상황에서 먼저 나를 보고 행동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지켜볼 수 있도록 기다리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렇게 된다면 뜻 없는 ‘아들타령’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만 잘살아서는 굴러가지 않는 세상에 작은 등불이 되는 내가 되길 기도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