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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4. 4. 5.(금) - 음력(2. 27.), 일출 06:13~일몰 18:58
●산행지: 노성지맥 1구간 졸업
●산행코스: 반송고개-지맥분기점(140m)-반송고개-130.7m봉-194.3m봉-당고개-개코백이산(195.4m)-돔뱅이쉼터-두루봉(169.4m)-수실고개-175.1m봉-말머리고개-삼면봉(156.1m)-161m봉-구야고개-먼장고개-255.2m봉-253.6m봉-노성산(348.9m)-금강대도노성본원-봉우재산(204.5m)-쇠지기/육군항공학교후문-물레고개-23번국도/신당교차로-광석면사무소-서논산나들목-성동면사무소-50.3m봉-월명산(76m)-64.7m봉-장판고개-61.6m봉-55.5m봉-불암산(59.5m)-금강올레길-금강/논산천합수점
●먹거리: 생수1,000cc, 빵4, 사탕5
●준비물: 고아텍스, 조끼, 긴팔(동,하), 반팔, 반바지, 모자, 반장갑, 스틱, 헤드랜턴, 충전지2, 충전짹, 휴지, 물티슈, 우의, 썬글, 안대, 귀마개, 면수건, 손수건, 양말, 띠지10
●거리: 약 39.2Km
●소요시간: 11.1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택시13,200, ktx25,100, 편의점10,300원, 열차19,200
●날씨: 8~18/ 흐리다가 점차 나아짐
●산행경과:
- 06:55~07:10 : 반송고개
- 07:02 : 노성지맥분기점
- 07:27 : 194.3m봉
- 07:55 : 개코빽이산(195.1m)/ 시계/ 삼면봉(공주시 계룡면, 이인면 → 논산시 노성면)
- 08:10~5 : 169.4m봉
- 08:21 : 수실고개
- 08:32 : 175.1m봉
- 08:45 : 말머리고개
- 08:54 : 156.1m봉/ 시계/ 삼면봉(논산시 노성면, 공주시 계룡면 → 논산시 상월면)
- 09:05 : 161m봉
- 09:13 : 구야고개
- 09:20 : 먼잠고개
- 09:34 : 255.2m봉
- 09:45 : 255m봉
- 10:00~05 : 노성산(魯城山, 348.9m)/ 면계(노성면 - 상월면)
- 10:11 : 금강대도노성본원
- 10:17 : 일월당
- 10:23 : 봉우재산(204.5m)
- 10:45 : 쇠지기/ 노성면 송당리/ 육군항공학교 후문
- 11:03 : 노성어린이집
- 11:06~12:06 : 논산평야로
- 11:18~12:01 : 득안대로
- 11:31 : 69m봉
- 11:51 : 삼리봉(70m)
- 12:06~19 : 물레고개(23m)/ 노성면 두사리
- 12:26 : 사월리표지석/ 면계(노성면 - 광석면)
- 12:34 : 잔디말고개
- 12:58 : KSC
- 13:05 : 신당교차로
- 13:09 : 광석면사무소/ 식당
- 13:13~30 : 똥개말랭이사거리/ 편의점
- 13:37 : 광리버스정류장
- 14:00 : 갈산리곰솔/ 갈산리경로당
- 14:05 : 상경말쉼터
- 14:11 : 4번국도 암거/ 서논산IC나들목
- 14:23 : 1번국도/ 높은정 고개/ 면계(광석면 - 성동면)
- 14:36 : 원북교/ 천안논산고속도로 암거/ 변전소
- 14:55 : 원남교/ 천안논산고속도로 암거
- 15:00 : 정지3리/ 화정1리
- 15:10~20 : 32.2m봉/ 금박재
- 15:33 : 성동면사무소/ 일미슈퍼
- 15:50 : 수탕원로
- 16:09 : 안담산(39m)
- 16:19 : 50.3m봉
- 16:33 : 월명산(月明山, 75.9m)/ 3등삼각점(논산301/ )
- 17:01 : 장판고개
- 17:10 : 61.6m봉
- 17:32 : 불암산(佛岩山, 59.5m)/ 4등삼각점(논산401/ 1987 복구)
- 17:37~46 : 올레길/ 정자, 화장실
- 18:09 : 합수점(논산천 - 금강)/ 읍면계(성동면 - 강경읍)
- 18:22 : 옥녀봉(43.8m)/ 4등삼각점(논산 449/ 1980 재설)/ 봉수대
- 19:25 : 논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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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지맥(魯城枝脈) 이란?
금남정맥 안골산갈림봉을 지나 성정산(237.1m) 동남쪽 약 1.5km 지점의 140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논산천과 노성천의 수계를 경계지으며 반송고개, 개코빽이산(195.4m), 수실고개, 175m봉, 구야고개, 256m봉, 노성산(魯城山, 348.1m)에 오른 후 봉우재산(205m)을 지나 쇠지기(645번도로 육군항공학교 후문)에 내려선다. 여기서 부터는 산다운 산은 거의 없고 어디가 마루금 인지도 모르게 얕은 구릉지로 이어지면서 대부분 도로가 맥이 되어 육군항공학교 입구, 23번 국도, 신당교차로, 광석면사무소, 서논산JC, 논산-천안간고속도로, 성동면사무소, 월성리 뒷능선을 지나면서 월명산(75.9m), 장판고개, 불암산(59m)을 지나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북쪽 들녁을 지나서 금강/논산천 합수점, 강경 옥녀봉(44m) 앞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35.5km인 산줄기를 말한다. 논산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어 불암산에서 끝을 맺으며 지맥의 절반 정도는 산이고 절반 정도는 도로를 따라간다.
♤ 노성지맥 개념도
♤ 노성지맥을 지나는 동네
* 공주시(公州市)
충남 중앙부에 위치한 시로 동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 동남으로는 대전광역시와 계룡시, 서로는 청양군, 남으로는 논산시와 부여군, 북으로는 천안시와 아산시, 예산군에 접하며 면적이 충남에서 가장 넓다. 북쪽과 남쪽은 산지를 이루고 중앙부의 하천유역에는 평야가 전개된다. 북쪽에는 금북정맥이 북동에서 서남으로 이어져 국사봉(國士峰, 402m)·차령(車嶺, 200m)·무성산(茂盛山, 613m)·금계산(金鷄山, 575m) 등의 여러 산을 형성하고 있다. 동남부에는 계룡산(鷄龍山, 845m)이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곳곳에 200m 내외의 구릉이 분포한다. 전북 무주·장수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은 시의 중앙부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류하면서, 많은 지류와 합류하고 양안에 비옥한 범람원을 이루어 놓았다. 대개의 지류는 능선들의 방향과 평행하게 흘러 금강과 거의 직교하여 유입하나, 유구천·대교천·용성천·구곡천 등은 사행천이다. 시의 외곽지역이 산지여서 인근 지방과 연결되는 도로에 많은 고개가 있다. 신풍면과 청양의 경계에는 실운리고개·솔치고개, 유구읍과 아산 사이에는 각홀고개, 정안면과 천안을 잇는 장고개·개치고개·이수원고개, 유구읍과 예산을 잇는 차령고개가 있다. 그리고 정안면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데재고개·사기소고개 등이 있다. 공주가 역사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제의 웅진천도가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백제의 한성이 점령당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되자 왕제 상좌평 여도가 즉위해 문주왕(文周王)이 되었는데, 문주왕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의 도움으로 도읍을 웅천 즉 공주로 옮기고 고구려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주변에 많은 산성을 쌓았다. 국력을 회복한 성왕(聖王)은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고립되고 협소한 공주를 떠나 평야지대인 사비(泗沘)로 천도하였다.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자 의자왕(義慈王)은 왕자 부여융(夫餘隆)과 웅진으로 피난했다가 항복하였다(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점령한 당은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으나 당장 소정방이 의자왕과 백제의 왕족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감으로써 폐지되었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웅천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웅천주를 웅주로 고쳐 니산(尼山)과 신풍현(神豊縣)을 영현으로 하였다. 822년(헌덕왕 14)에 무열왕계의 김헌창(金憲昌)이 웅진도독으로 있다가 웅주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충청도 일대에 세력을 떨쳤으나 왕군에 진압되었다. 940년(태조 23)에 공주로 개칭하여 지금의 읍호를 갖게 되었는데 별호는 회도(懷道)였다.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공주목이 되었다. 그리고 995년(성종 14)에 절도사를 두어 안절군이라 하여 하남도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망이·망소이 등이 신분해방을 목표로 난을 일으켜 공주를 점령하자 조정에서 회유책으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해주었다가 탄압하자, 재차 봉기하여 충청도 일대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민심이 불안하였다. 1375년(우왕 3) 왜구가 부여를 거쳐 공주를 침입했을 때 공주목사인 김사혁(金斯革)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공주가 함락되었다. 1376년에 왜구가 공주와 신풍현에 침입했고, 또 왜구가 유성으로 거처 계룡산에 들어온 것을 양광도 원수 김사혁이 패퇴시켰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의 행정구역명을 계승했으므로 큰 변화는 없었다. 조선 초 이 지역의 인물로는 의당면 월곡리 출신인 김종서(金宗瑞)가 있다. 그는 육진개척 및 『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장기면 대교리에는 그의 묘가 있으며, 계룡산 동학사에는 그를 비롯하여, 수양대군에게 화를 입은 인물을 모신 숙모전(肅慕殿)이 있다.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되어 호서 지방의 4개 목, 35개 현을 관할하여 호서의 중심지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오기도 했으며, 1646년에 유탁(柳濯)의 난으로 공주가 공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환원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공주목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권시(權諰)·윤증(尹拯)·유계(兪棨) 등 조선 후기 정계와 학계를 주름잡은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1894년에는 북상하던 동학군이 능치·우금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워 패하였다. 1895년(고종 23) 충청도가 충청남북도로 양분되면서 공주군으로 개칭되고 공주부가 신설되어 충남의 수부로 관찰사가 주재하면서 인근 27개 군을 관할하였다. 1911년 일제의 강점 후에도 충남의 도청소재지로서 종전의 관찰사를 도의 장관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13개 읍·면으로 축소 개편하였다. 1931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32년에는 경부선철도의 개통과 함께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고 군청소재지로 격하되면서 공주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공주시와 공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공주시가 되었다. 2012년 장기면의 금암리·은용리·산학리·봉안리·도계리·하봉리·송정리·송문리·평기리·대교리가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면서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2012년 공주시 의당면의 태산리·용암리·송학리·용현리·송정리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으로 편입되었으며, 공주시 반포면의 원봉리·도남리·성강리·국곡리·봉암리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으로 편입되었다. 공주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닌 교육도시로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중추적 행정의 거점으로서 향교와 서원·서당 등의 설립을 통하여 유교 중심의 학교교육이 활발하게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초기 웅진동에 공주향교가 설립되어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는데, 1623년에 교동으로 이전했다.
* 논산시(論山市)
충남 남부권의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계룡시, 동북방향으로 대전광역시, 동남방향으로 금산군, 서쪽로 부여군, 서남쪽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남쪽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북쪽으로 공주시에 접해 있다. 역사적으로는 강경읍의 수운과 상업 번영이 유명한 곳으로 강경 상인은 송도(개성시)의 송상과 맞짱을 뜰 정도였다고 한다. 현대에 가장 유명한 특산물인 딸기는 1967년부터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무엇보다 군사 분야에서 인지도가 매우 높은 도시인데, 육군훈련소 때문이다. 지금의 시가지 지역은 백제 때 가지내현(加知奈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시진현(市津縣)이었고 9주 소경 중 전주에 속했다. 한편 황산벌로 유명한 연산면 지역은 백제 때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다. 그곳은 신라 경덕왕 때 황산군이었고 9주 중 웅주에 속했다. 백제의 웅진문화권 시절이던 동성왕에서 성왕 때에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으면서도 성을 쌓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화전 양면정책을 썼던 것 같다. 연산의 황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의 산성들이 모두 이때에 축성된 것이다. 660년(의자왕 20) 나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구하려고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황산벌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의 묘가 부적면 충곡리에 있다. 이 지방은 백제시대에는 황등야산군과 덕근군에 속했고,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이산·덕은·석산의 4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황산이 연산으로, 덕은이 덕은으로, 석산이 석성으로 개칭되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으로부터 황산에서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여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치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었다. 968년(광종 19)에 제작한 반야산 밑의 미륵보살석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상일 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불교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러한 예술과 신앙이 고려왕조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지를 논산의 계룡산 신도안에 정하기로 하고 2월부터 역사를 시작했으나 반대의견으로 인해 중지하고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중엽에 와서는 논산 일원이 예향을 이루는 고장이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이 그 선구자로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 아들 김집(金集)은 김현과 아울러 당대의 예학의 연원을 잇는 주자학의 선구자이었다. 한편 노성의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유계(兪棨)와 그 장인 권시(權諰)에게서 배워 예학에 밝았고 당시 소론의 영수로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 그 뒤 후학들이 학통을 계승하여 이 지방에 서원을 세우고 인재를 길러내었다. 강경의 죽림서원을 비롯하여 돈암서원·충곡서원·휴정서원·효암서원·행림서원·노강서원 등이 있었다. 덕은군은 시진현과 합쳐져 세종 때 은진현으로 되었다. 1646년(인조 24)에 이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은진·이산·연산이 폐합되어 평천역 서쪽에 은산현이 설치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세 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한편 덕은현은 가야곡면에 중심지가 있었다. 1397년 시진현이 덕은군에 흡수되고 1419년 은진현이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은진현, 연산현, 노성현, 석성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여러 지역들이 1914년 4월 1일 은진군을 중심으로 연산군, 노성군 및 석성군의 일부가 통합되어 비로소 논산군이 되었다. 이산현(尼山縣)은 영조 때 이성현(尼城縣)으로, 정조 때 노성현(魯城縣)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논산에 남아 있게 된 서원은 연산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뿐이었으나 그 뒤 거의 복원되었다. 1919년 3월 논산읍을 선두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강경읍과 연산면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행진이 계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은진군과 연산군의 전부와 노성군의 소사면을 제외한 전부와 석성군·공주군·진잠군(鎭岑郡) 등의 일부지역이 병합되어 논산군이 설치되었다. 1931년 강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개 읍, 14개 면이 되었으며, 1938년에는 논산면이 읍으로 되었다. 1962년 두마면에 신도안(新都內)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 1월 1일 구자곡면의 7개 리(里)와 전라북도의 익산군 황화면이 합해져 연무읍으로 승격되었고, 구자곡면의 나머지 삼전리·왕암리·야촌리는 가야곡면에, 시묘리는 은진면에 편입되었다. 1966년 7월 10일 마전(麻田) 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3년 가야곡면의 석서리가 양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 가야곡면의 중산리와 양촌리 일부가 양촌면에, 양촌면의 신량리가 연산면에, 은진면의 토량리 일부가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은진면 강산리·내동리·관촉리가 논산읍에, 1989년 1월 1일에는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가 두마면에 편입되었다. 1993년 군간 경계 조정으로 상월면 원오리 일부가 공주군 계룡면 월곡리로 편입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도농복합으로 논산군 전체가 시로 승격되고, 논산읍을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하였다. 2003년 9월 19일 논산시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되었다. 순우리말 관습 지명으로 황산, 누루뫼, 놀뫼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놀 자를 한자 論자로 음차하여 논산이 되었다. 이후 1931년 4월 1일 강경면이 강경읍으로 승격했으며, 1938년 10월 논산면이 논산읍으로 승격되었다. 현 논산 시내인 논산읍보다 강경읍의 읍 승격이 더 빨랐다는 점에서 당시 강경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 영향으로 논산경찰서,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도 논산 시내가 아닌 강경읍에 있다. 1963년에 구자곡면과 전북 익산군 황화면을 통합하여 연무읍으로 승격하였다. 1996년 3월에 논산군 전체가 논산시(도농복합시)로 승격되었다. 2003년 9월에 계룡시가 분리되었다. 논산평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평지가 펼쳐져 있다. 논산천, 강경천, 노성천, 석성천 등이 관내 지역을 흘러 금강으로 합류하며 지류들을 끼고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시역 중앙에는 탑정저수지가 있다. 동쪽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이 있으며, 계룡시가 두마면이라는 이름으로 논산시에 속해 있었으나 도 직할 출장소를 거쳐 2003년 시로 분리되었다. 논산시 읍면동 중 지리적으로 가장 구분되는 지역은 벌곡면이다. 벌곡면을 관통하는 하천은 갑천인데, 대전광역시의 주요 하천인 바로 그 갑천이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은 대둔산-깃대봉-천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논산시 타 지역과 구분되며, 논산 시내보다는 대전으로 교류가 많은 동네이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계속해서 논산에 속했다. 논산의 금융사는 강경에서 시작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금융가는 논산시내로 옮겼으며,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이 많은 도시이다. 단일 부대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신병교육기관인 육군훈련소가 있다. 육군훈련소가 정식 명칭이지만, 논산훈련소라는 별칭이 더욱 귀에 익을 정도로 논산의 상징이 됐다. 대한민국 육군이나 보충역으로 군복무를 수행하게 될 사람 대다수가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비단 육군훈련소 말고도 육군훈련소지구병원과 육군항공학교, 국방대학교도 있어 군사 기능이 상당히 큰 도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술했던 것처럼 논산시도 국방산단 추진 등 방산 인프라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추후 육군사관학교가 다른 사관학교처럼 후방 지역으로 이전하게 될 시 이곳이 전국에서 1순위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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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반송고개-0.4km-지맥분기점(140m)-1.4km-194봉-1.1km-개코빽이산(195.4m)-1.1km-두루봉(171m)-1.1km-175.1봉-1.7km-구야고개-2.3km-노성산(348.1m)-0.8km-봉우재산-2.8km-쇠지기-1.6km-육군항공학교-3.6km-23번국도-3km-광석면사무소-3.5km-서논산나들목-3.7km-성동면사무소-2.7km-월명산(76m)-2.6km-불암산(59.5m)-2.2km-금강/논산천합수점
* 구간거리
- 반송고개 ~ 잔디말고개 18.2km
-. 반송고개 ~ 노성산 10.6km
-. 노성산 ~ 잔디말고개 7.6km
- 잔디말고개 ~ 합수점 21km
-. 잔디말고개 ~ 성동면사무소 10.7km
-. 장판고개 ~ 합수점 4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공주 새숨찜질방: 041-881-8826 (도보 20분, 15,000원)
- 광석면사무소: 편의점, 중국집, 식당
- 갈산리경로당 정자, 상경말쉼터(밀창문)
- 성동면사무소앞: 일미슈퍼
- 월명공원: 화장실
- 금강올레길/ 자전거길: 화장실, 수돗물
※ 도로를 따르는 구간이 많아 편의점, 슈퍼, 식당이 충분하다.
* 서울에서 노성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용산역 ~ 공주역 ktx: 05:07, 06:28, 07:09, 07:46~, 1.03h, 22,600원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공주터미널: 06:45, 07:20, 08:05~, 1.30h, 9,300~16,600원
- 공주역 ~ 반송고개: 206, 207번 버스 석대울정류소 하차 도보 500m
- 공주터미널 ~ 공주교대: 501번 버스, (맞은편 시청버스정류장) 공주교대 ~ 반송리: 202번
- 공주역, 공주터미널 ~ 반송고개: 택시: 6,800원(3.5km)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강경역 ~ 신탄진 ~ 서울역: 15:46, 16:45, 18:19 새마을호, 3.06h, 14,400원
- 강경역(18:44) ~ 서대전(19:32, 20:19) ~ 서울역(22:15): s-train, 2.48h, 12,500원
- 강경읍사무소 ~ 논산역: 101번, 0.25h, 1,500원
- 논산역 ~ 용산역 ktx: 18:33, 1.42h, 28,100원
- 논산역 ~ 용산역 itx마음: 18:08, 19:54, 2.20h, 20,200원
- 논산역 ~ 용산역 새마을호: 18:55, 2.42h,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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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이라는 지명은 조선 효종 때 사계 김장생선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의 성리학 영향으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공자를 데려온 것이다. 그런고로 노성면의 궐리사는 연산면 돈암서원, 강경읍 죽림서원과 일가 친척 관계에 있다. 명재 윤증도 같은 시기의 사람이다. 이와같이 노성지맥은 노성산으로 인해 조선시대에 머물르기 쉬우나 한걸음 더 나아가면 금남정맥을 하며 지난 연산면 개태사에 태조왕건이 있고, 그 이전에 황산벌의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멸망이 있다. 노성지맥은 백제의 사비도성과 논산벌판의 황산벌 사이를 가로지른다. 하여 인근 운주산성, 황산성은 물론 노성산성, 논강평야와 금강의 방어진지로 추정되는 월명산성, 불암산성, 옥녀산성 또한 사비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관방유적으로 보인다. 반은 산이고 반은 도로인 노성지맥을 걸으며 탄현(炭峴)이 무너지자 황산벌과 사비도성을 긴박하게 오갔을 5천 결사대의 말발굽 소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나당연합군의 소정방 또한 황해를 넘어온 군함으로 금강을 거슬러 올랐을 것이다. 분기점인 반송리는 동학군들이 좌절을 겪은 한양진격로상에 있던 공주 우금치와도 멀지 않은 곳이다. 노성지맥의 피날레는 백제 운명의 함지를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우연인지 강경포구의 옛 영화속으로 들어선다. 금강의 하구 기벌포에서 바닷물이 오르내린 강경포구,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지금과 다른 강경 객주의 활발한 발길이 있었다. 지맥을 하며 찾아보는 역사의 숨결은 무궁무진함을 또 한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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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지맥 분기점(140m봉)/ 금남정맥/ 면계/ 삼리봉(공주시 이인면 발양리 → 반송리, 계룡면 향지리)
반송고개에서 왼쪽 밤나무단지로 올라 약 0.8km, 왕복 10분 소요된다. 등로가 양호해 수월하게 금남정맥 노성지맥 분기점을 다녀온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노성지맥분기점 산패가 매어 있다. 노성지맥은 금남정맥 140m봉에서 분기하여 개코빽이산까지 공주시 이인면과 계룡면의 면계를 따른다.
♤ 공주시 이인면(利仁面)
서쪽으로는 우성면과 청양군 목면, 동쪽으로는 계룡면과 논산시 노성면, 남쪽으로는 탄천면, 북쪽으로 금학동과 접해 있다. 이인면에서 이인이란 지세가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마을 앞 하천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그 위에 배가 떠 있는 형국으로 마을 가운데 있는 500년된 은행나무가 배의 돛대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여기엔 왜가리가 서식하고 있어서 가을이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이른 봄이면 어김 없이 찾아오곤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지금은 도나무로 지정 되었으며, 이인역 시절의 면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웅장한 은행나무다. 30~40년 전에 목상들이 상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자르려 하자 나무가 울었고, 피가 나왔다고 한다. 은행나무에는 용이 있어 옆마을의 지네와 싸웠다고도 한다. 은행나무에 예전에는 황새가 많이 찾아왔었지만, 지금은 별로 찾지 않는다고 한다.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 지금의 이인초등학교 자리에 이인역(利仁驛)이 있었다. 조선시대 때 여기엔 이인 도찰방이 있어서 이인, 부여, 용전, 은산, 정산의 유양, 홍산의 숙홍, 남포의 남전, 비인의 청화, 서천의 두곡, 위산의 신곡, 임천의 영유 등 아홉 역을 관할하는 찰방이 있었다. 한양과 남도로 통하는 삼남대로가 지나게 됨으로 상당히 붐볐던 곳이다. 호남일대에서 상인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평양에 가기 위해 도중에 이인역에 들러 하루를 지냈다고 한다. 그 곳을 마방집이라 한다.
반송고개에 배낭을 두고 분기점에 다녀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네요. 다행히 곧 그치는 비였습니다.
♤ 반송(盤松) 고개/ 구부내로/ 697번지방도/ 2차선 도로/ 공주시 이인면 반송리 -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공주시 이인면 반송리(盤松里)는 697번 지방도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북동쪽으로는 계룡면 향지리에, 남서쪽으로는 복룡리에 연결된다. 오래된 소나무가 쭉 늘어서 있다하여 반송(盤松)이라 하였다. 동부 경계에 있는 반송고개는 계룡면 향지리와 경계로 바랑산선배님 '여기가 반송고개입니다' 산패가 철망에 매어 있다. 분기점 방향으로 왼쪽 노란색 시멘트제설모래함 옆으로 진입하여 노성지맥 분기점을 왕복한다. 금남정맥을 하며 또하나의 반송고개를 지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명당터가 많다는 복룡리(伏龍里)에 있는 반송고개인데 현지에서는 복룡고개로도 불린다.
♤ 공주시 계룡면(鷄龍面)
충남 공주시 동남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으로 반포면, 북으로 옥룡동, 서로는 금학동과 이인면에 접하며 남으로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과 상월면, 계룡시 신도안면과 접한다. 백제 때는 웅천, 신라 때에는 웅주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했고,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익구곡면 지역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이 계룡면 계룡산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으나, 정도전이 교통이 불편하다는 걸 깨닫고 도읍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공주시에게 계룡산은 진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계룡산 국립공원의 서쪽 일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명칭 또한 계룡산에서 따온 것으로, 이 때문에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시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계룡산을 포함해 동부지역은 산지이지만, 혈저천, 월암천, 노성천 등의 하천이 면을 중심부를 가로지르고, 그 주위로 평야가 있다. 계룡저수지, 양화저수지 등 비교적 큰 규모의 저수지들이 있으며,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논산으로 향하는 23번 국도와 691번 지방도가 각각 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그 중에는 23번 국도가 서쪽에 있어 면 소재지인 월암리를 지난다. 두 도로는 계룡저수지 부근에서 갑사로를 통해 연결된다. 그 외에도 697번 지방도가 면의 남서부를 지난다. 철도로는 호남고속선이 지나는데, 이용하려면 바로 옆 이인면에 있는 공주역으로 가야한다. 혹은 논산역으로 가서 호남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시외버스의 경우 계룡, 하마루 두개의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서울, 천안, 성남, 논산행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참고로 계룡면에서 공주종합버스터미널을 가는 경우 연계 시내버스가 없으므로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 130.7m봉/ 면계/ 삼리봉(공주시 이인면 반송리,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 죽곡리)
반송고개에서 한고비 올라서서 좌틀하면 130.7m봉이다. 산패는 없고 선답지 띠지가 130.7m봉을 알린다.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노성지맥분기점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는 금남정맥 성정(頂)산/성항(項)산(237.1m)이 보인다.
♤ 194.3m봉/ 면계/ 삼리봉(공주시 계룡면 죽곡리, 이인면 반송리 → 신영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호남선ktx 공주역이 덩그러니 보이고 왼쪽으로 계룡산이 보인다. 최근 건설된 ktx선로가 이 봉우리 아래로 지나간다. 194.3m봉 하산길이 노성지맥 전 구간에서 최고의 잡목구간이다. 벌목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내려간다. 잡목지를 벗어나면 벌목지 가장자리를 따르고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는 인삼밭을 왼쪽으로 지난다.
고개가 당집이 있을 정도로 길거나 높지 않습니다. 왼쪽에 계룡면 죽곡리에 서당리가 있고, 묘지에 정자각 같은 것도 보이고, 학동들이 서당을 오가는 등굣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추론을 해봅니다. 서당고개가 당고개로 변한건 아닌지....
♤ 당고개/ 범복이고개
은행나무 조림지를 내려온 수렛길 안부로 죽곡리 호복(虎伏), 염천동 마을로 넘나드는 비포장 임도이다. 호복은 마을의 산형이 범이 엎드린 형이라하여 범복이라 한다. 오른쪽에 쉼터가 있다. ktx 고속철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 개코빽이산(195.1m)/ 시계/ 삼면봉(공주시 계룡면 죽곡리, 이인면 신영리 → 논산시 노성면 화곡리)
공주시와 논산시의 시계이자 삼면봉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이인면과 헤어지고 논산시 노성면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백두대간 점봉산 곰배령 옆에 호랑이코빼기봉(1,208m)이 있는데 개코빼기라니 멀리서 바라보이는 형태를 말하는지 아니면 풍수 해석이 낳은 이름인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 논산시 노성면(魯城面)
노성면은 논산시의 북부에 위치하여 동부는 상월면과 공주시 계룡면, 서부는 부여군 초촌면과 공주시 탄천면, 남부는 광석면, 북부는 공주시 계룡면과 탄천면에 접하고 있다.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아섰고 남쪽으로는 논산평야가 있어 계룡산에서 발원하는 금강지류들이 노성천을 거쳐 논산천에서 합류하여 논산 곡창지대의 젖줄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노성은 역사적으로도 충청도의 큰 고을이었으며 호남지방에서 한양을 가려면 거쳐가야 했던 삼남대로(三南大路)의 정거장 역할도 담당하였다. 공주시 방향으로 국도 제23호선을 따라 13km에 위치한다. 노성은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다가 신라시대에 이산현(尼山懸)이라 개칭하여 웅주(熊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9년에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 태종 14년에 석성(石城)을 합하여 이성현이라 고치고 현감을 두었고 태종 16년에 다시 분리하여 이산현으로 환원하였다. 그후 영조 52년에 또 이성현으로 부르다가 정조 초기에 노성현이라 개칭하였고 고종 52년에 노성군(魯城郡)이 되었다. 조선 효종때 송시열선생이 이성산에 궐리사를 창건하고 공자를 향사(享祀)하면서 지명이 중국 산동성의 이구산과 비슷하다 하여 노성으로 고쳤다 한다. 노성산 정상에는 국가사적지 제393호이자 논산8경의 하나인 옛 백제의 고성인 노성산성과 노성산 아래 노성향교, 노성궐리사, 윤증고택이 있어 선현들의 위덕을 고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남의 큰 고을인 노성현 또는 노성군의 지역으로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유교사상의 뿌리가 깊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윤증 고택은 조선시대의 상류 양반 가정의 표본이 되는 주택으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봉영당과 고택에는 유품 11점이 남아있어 옛 민속유물을 볼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육군항공학교가 있어 항공훈련의 군사 요람의 산실이기도 하다. 특산물로는 딸기, 토마토, 멜론 등의 특용작물과 사과, 배의 과일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농업용수가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어 미곡생산의 고장이기도 하다.
♤ 176.9m봉/ 돔뱅이쉼터/ 돌뱅이쉼터
수리고개 갈림길을 지나서 오른 봉우리로 장의자 두개가 놓여있고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돔뱅이는 계룡면 죽곡리 돔뱅이마을에서 올라온 이름이다.
♤ 두루봉(169.4m)/ 시계/ 면계/ 삼리봉(논산시 노성면 화곡리, 공주시 계룡면 죽곡리 → 월곡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사방팔방으로 전망이 트인다. 건너편으로 계룡산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 마루금이 한눈에 살펴진다. 대둔산도 희미하게 살펴진다. 전에 맨발대선배님의 171m 산패가 있었는데 교체되었다.
♤ 수실고개/ 월산길/ 포장도로
지장정사 방향으로 급우틀하여 수실고개에 내려선다. 왼쪽 음정이와 오른쪽 수실을 잇는 2차선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오른쪽 아래에 템플스테이 지장정사가 있다. 도로 건너 산으로 올라서니 묘지 옆에 움막같은 상여(喪輿) 집이 있다. 상례 때 쓰이는 운반기구는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靈輿)로 나누어진다. 이 둘을 통칭하여 상여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앞의 것만을 이른다. 상여라는 말은 우리 나라의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며,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여(大輿)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립 춘천박물관에 조선조 숙종(肅宗, 1674~1720)이 그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 1619~1675)의 장례 때 내린 상여(국가 민속문화재 120호)가 현재까지 전해오는 상여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준희선생님께서 특명을 주시더니 상배형님을 통해 산패 하나를 보내셨습니다. 요거 달고 오니라!
♤ 175.1m봉/ 4등삼각점(공주 447/ 1992 재설)/ 시계/ 면계/ 삼리봉(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논산시 노성면 화곡리 → 구암리)
4등삼각점이 있고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일전에 준희선생님의 깨진 산패가 걸려있었는데 아마도 그걸 보고서 교체를 말씀하신듯 하다. 계룡홀산아선배님 코팅지를 비롯 선답자 띠지가 주렁주렁하다. 임도를 따라가며 왼쪽으로 계룡산이 계속 조망된다.
♤ 말머리고개
반바지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는 양회임도 안부이다. 팬스를 두른 평장묘지 경주김공 가족묘로 내려서서 커다란 T자형 관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데 아래에 인가가 있어 개가 짖어댄다. 산 아래에 계룡면 월곡리 말머리마을이 있다.
♤ 156.1m봉/ 시계/ 면계/ 삼면봉(논산시 노성면 구암리,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 논산시 상월면 월오리)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커다란 T자형 밸브관이 있는 약 135m봉 지점에서 지맥의 왼쪽이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 논산시 상월면 월오리로 바뀌는 삼면경계봉 지점이며 지맥의 좌우 모두 완전하게 논산시 내안으로 진입한다.
♤ 논산시 상월면(上月面)
논산시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노성군 월오면, 상도면, 하도면 지역으로, 월오면은 12개리를 관할하였고, 상도면은 8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도면의 11개리와 읍내면의 천재동과 공주군 익구곡면의 5개리, 진두면의 공평동을 병합하여 상도면과 월오면에서 ‘상(上)’자와 ‘월(月)’자를 따 상월면이라 하여 논산군에 편입하였다.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시 상월면이 되었다. 동쪽에는 국사봉(574m)이 높이 솟아 있는 등 금남기맥의 지맥이 뻗어 있어서 서쪽 보다 높게 형성되어 있다. 연천봉·천황봉·국사봉(國師峰, 대명리 소재)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대촌천·대명천 및 주천을 지류로 하면서 상월면·노성면 일대에 젖줄을 형성하고 있다. 노성천은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의 갑사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상월면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노성천의 상류지역으로 맑은 물과 넓은 들을 바탕으로 40%가 산지로 이루어진 동부에서는 밭작물 가운데 뿌리채소를 많이 재배하고, 60%가 평야 지대인 중남부는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 벼농사와 특수작물 재배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딸기·수박·멜론·고추·콩·고구마·감자 등이다. 특히, 딸기를 많이 재배하여 해마다 20억 원 이상의 농가 소득을 올리며, 고구마 재배와 건조누에(동충하초) 사육도 활발하다. 약간의 농가에서 양잠도 하고 있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산양·사슴·토끼 등을 사육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한 논산-상월-공주, 천안으로 직통하는 국도 제4차선이 통과하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이삼장군 고택과 유물 등 많은 문화재와 주곡리 장승제, 대명리두레소리 등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엘리트 정예 교육의 전당인 금강대학교가 있다.
♤ 161m봉
맥길에서 아래로 조금 벗어나 있는 무명봉으로 철탑(NO.124)에서 직진으로 다녀온다. 지맥은 철탑에서 급좌틀 해야하니 알바에 주의해야 한다.
♤ 구야고개(105m)/ 2차선포장도로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龜岩里) 구야골과 상월리 오리골을 잇는 고개이다. 반바지님 코팅지가 철망에 매어 있고 구암리마을 표지석이 서있다. 절개지 오른쪽 묘지로 내려 오르는 것이 편리하다. 오른쪽 양회임도를 따르다가 곧바로 왼쪽 능선으로 진입한다. 오른쪽 아래에 구야마을이 있다.
♤ 먼장고개(135m)/ 먼잠고개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명에 간혹 쓰이는 잠(岑)이란 한자는 원래 산봉우리나 언덕을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먼잠은 아마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잠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듯 하다.
♤ 255.2m봉/ 면계/ 삼리봉(상월면 월오리, 노성면 구암리 → 가곡리)/ 산불감시카메라
임도를 가로질러 노성산으로 올라서며 만나는 삼리봉으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좌틀로 향한다. 맨발님의 256m 산패가 자리를 지켰는데 최근 소수점 산패로 교체되었다.
♤ 253.6m봉
노성산으로 오르는 중간 봉우리이다. 여영대선배님의 255m산패가 떡갈나무에 매어있다. 급경사면을 올라선 노성산 전위봉 약 325m봉 지점에서 지맥의 왼쪽이 상월면 월오리 → 신충리로 바뀌며, 노성산성 성벽과 만나는 약 345m봉 지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노성면 가곡리 → 송당리로 바뀌며 노성면 내안으로 들어서고, 잠시 송당리 내안을 지나 노성산 정상을 내려서다 금강대도 노성분원을 지나며 다시 가곡리와 경계를 따른다.
♤ 노성면 송당리(松堂里)
노성산 동남쪽 자락에 있는 마을로 여기에 있던 산신당을 속칭 속당이라 하였는데, 점차 송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북부는 해발 고도 200여m에 이르는 옥재봉, 옥리봉, 봉우재산이 있는 비교적 높은 구릉성 산지로 곡간에는 월명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다. 서부는 해발 고도 120여m의 구릉성 산지이며, 남부와 중부는 해발 고도 60여m의 평야 지대이다. 중부 평야 지대에도 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다. 주요 산업은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림업으로 구릉성 산지 완사면에서는 밭농사가,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구릉성 산지와 평야 지대 사이의 경사변환선 일대, 곡간과 도로변에는 내촌·소골·쇠지기·소라실·송당·월명동 등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대부분은 가촌(街村)·열촌(列村)·괴촌(塊村) 등의 집촌(集村) 형태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자연마을을 병합하여 송당리라 하고 논산군 노성면에 편입하였고 1996년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함에 따라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가 되었다. 지방도 645호선이 마을 중앙부에서 동서 방향으로 지나는데 동쪽으로 노성면 읍내리, 서쪽으로 노성면 병사리에 연결된다. 문화유적으로는 사적 제393호인 논산 노성산성 등이 있다.
♤ 노성산(魯城山, 348.9m)/ 면계(노성면 - 상월면)/ 이산(尼山)/ 봉수대
논산시의 북쪽, 노성면 가곡리와 송당리, 상월면 신충리, 월오리에 걸쳐있는 노성지맥의 주산이다. 정상석, 팔각정(이산정), 국기봉, 운동기구 그리고 그네 의자도 두개 설치되어 있다. 삼각점은 도엽명과 숫자를 읽을 수 없는 보조삼각점이다. 향적산에서 천황봉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장쾌한 계룡산 산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로 동쪽으로 논산평야, 계룡산, 향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성면은 1656년(효종 7) 때부터 노성현(魯城縣)으로 불렸는데, 노성산은 이 지명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노성산 봉수(烽燧) 유적은 조선시대 제5로 직봉의 37번째 봉수로서 서울에서 전남 순천으로 연결하는 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록상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운영된 봉수이다. 이산봉화(尼山烽火)는 북측으로는 공주시의 월성산에 응하였고 남으로는 은진의 황화산, 강경산 봉수에 응하였다. 노성산 봉수 유적은 정상부 장대지(將臺址)에서 동남쪽으로 6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봉수대는 평면 사다리꼴형 형태이며, 석축으로 축조된 방호벽을 따라 둘러싸여 있다. 봉수대에 있었던 시설이 대부분 유실되어 현재는 일부 흔적만이 남아있다.
♤ 노성산성(魯城山城)/ 사적 393호
논산시 노성면과 상월면 사이에 있는 노성산 산정에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쌓은 테뫼식 석축 산성인 노성산성이 있으며, 공주,논산,연산으로 갈라지는 지점으로 동으로 계룡산, 남으로 논산, 북으로 공주, 서쪽으로 부여가 한눈에 보이는 중요한 위치이고, 연산면 표정리의 황산성(黃山城: 충남기념물 56)과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최후의 방어선에 위치하며 동북방향으로는 양화산성과 대하고 있다. 노성산성을 축조한 경위나 목적은 관련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산성이 황산벌에서 사비도성에 이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백제가 사비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산성을 축조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있다. 산성의 북벽이 노성산의 정상부를 지나는 데 비해 남벽은 산의 중복까지 내려와 있어 북고남저, 삼태기식 형태를 하고 있다. 축성술은 근방의 산성 중에서 보기 드물게 완벽한 형태로 자연의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둘레 약 1km를 석축(石築)으로 쌓은 테뫼형 산성이다. 현재 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지만 몇몇 군데는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성곽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동문과 서문 터를 비롯하여 8개소의 건물지, 4개소의 우물터, 그리고 장대지가 있다. 산성이 있는 곳이 백제 열야산현(熱也山縣, 현재 충청남도 논산) 지역이기 때문에 이 산성을 열야산현의 치소성(治所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성산의 동쪽으로는 남~북 방향의 구조곡이 있는데, 이곳 곡저평야에서 논농사와 지형을 이용한 국도 23호선이 지나고 있다.
노성산에서 주변 경치를 만끽하고 지맥은 우틀로 내려서얍니다. 직진해서 내려서면 옥재봉으로 향합니다.
♤ 옥재봉(256.8m)
봉우재산과 노성산 및 옥재봉과 옥리봉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과 논산시 상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노성산과 봉우재산은 노성지맥의 마루금 능선이 지나가는 산이다. 반송고개 부근에서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로 이어지는 노성지맥이 구야고개를 지나면서 빚어 올린 봉우리가 노성산이다. 노성산을 일군 산줄기는 노성산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 중에서 동남쪽으로 가지를 쳐 빚어 올린 봉우리가 옥재봉과 옥리봉이고,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 빚어 올린 봉우리가 봉우재산과 월명산 및 불암산 등의 노성지맥이다. 옥재봉과 옥리봉을 일군 산줄기는 노성면 교촌리에서 그 맥을 노성천에 넘겨주고 있고, 노성산과 봉우재산을 일군 산줄기는 성동면 개척리에서 그 맥을 금강에 넘겨주고 있다.
♤ 금강대도노성본원
노성산 아래에 절처럼 당우가 몇 채 보인다. 왼쪽이 아닌 정문 앞으로 내려간다. 금강대도는 1874년에 이승여(李承如)가 창시한 종교로, 일제강점기에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민족정신 함양과 독립의 희망을 주창하다 일제에게 혹독한 탄압을 받는 등 민족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민족종교로서, 유·불·선 삼교의 진리를 하나로 합하여 인류의 미래인 후천시대 오만 년 동안 도덕문명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대동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창도한 것이다. 본원 뒤편에 창시자의 묘소가 있다.
♤ 봉우재산(204.5m)
금강도덕문 바로 앞에서 내려가는 좁다란 길이 봉우재산으로 가는 길이다. 좁은 길은 금방 끝나고 일월당 갈림길 지점에서부터 차량 통행이 가능한 널찍한 비포장 임도길로 바뀐다. 마을길을 건너 무명고개를 지나 널찍한 임도에서 올라서자마자 봉우재산 정상이다. 준희선생님 산패와 표지기들이 매달려 있어 금방 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봉우재산의 유래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봉수대 위에 있는 산이란 뜻일까?
♤ 볼못골/ 월명저수지
직진 볼못골 고개 쪽으로 151m봉이 살짝 보여 그쪽으로 가기 쉬우나 등로를 따라 왼쪽 볼못골로 방향을 잡고 노성면 송당리 내안으로 들어서서 월명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도로로 내려선다. 봉우재산에서 쇠지기 645번도로에 내려서고 이후 한참을 도로를 따른다. 도로가 곧 마루금이다.
쇠지기에 내려선 이후론 도로가 맥이 되는 얕은 구릉지를 지납니다.
♤ 노성면 송당리 쇠지기/ 645번지방도/ 육군항공학교후문
쇠지기는 노성면 송당리의 자연마을 중 하나이다. 마루금상에 육군항공학교가 있어 부대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육군항공학교 후문에서 좌틀, 육군항공학교 철망 울타리 옆길을 한동안 따라간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원형철조망을 조심해야 한다. 데이면 찢기고 찔리면 피난다. 목장을 만나 가운데로 지난다. 왼쪽으로 노성면 읍내를 잠시 둘러보고, 조경원을 통과하여 왼쪽 도로로 내려서서 노성어린이집 앞을 지나고 '노성로'를 만나면서부터 도로 투어로 월성2리까지 장장 17km 이상을 진행하기도 한다. 어디가 맥길인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어떤 선답자들은 택시나 버스를 타고 이 구간을 점프하기도 한다.
농협하나로마트 삼거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도로를 따른다 해도 하루에 노성지맥을 계획하는 중이라면 중간에 명재고택을 둘러볼 시간적 여유는 없어 보이네요.
♤ 명재 윤증(尹拯)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제 190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들어가는 길에 열녀문이 있다. 열녀 공주 이씨 정려(烈女 公州李氏 旌閭) 열녀 공주 이씨란 고택의 주인공 명재 윤증(明齋 尹拯) 선생의 어머니다. 명재 윤증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이자 정치인 사상가로 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며, 윤증이 이름이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 등이 있다. 윤증의 아버지는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고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다. 윤황(尹煌)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사위인데, 우계는 서인(西人)의 큰 조상이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 했고, 윤황의 아들-우계의 외손자인 윤선거는 반정 후 공론을 좌지우지하던 서인 산림(山林) 김집(金集)에게 배웠으니, 윤증 집안은 당시 지배 엘리트 핵심 중 핵심이었다. 병자호란 즈음하여 조선 공론은 오랑캐와 결코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윤증의 할아버지 윤황(尹煌)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척화론(斥和論)의 한 중심에 있었다. 1636년 겨울 용골대를 선봉으로 하는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오자 윤황(尹煌)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그 아들 곧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7년 1월 강화가 함락되자 윤증의 어머니 이씨는 남편 윤선거를 불러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뵙고 결별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1681년 (숙종 7년)에 이 정려각(旌閭閣)을 세운 것이다. 논산 명재고택은 윤증선생고택이라고도 하며 마을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뒤로는 노성산 산줄기를 병풍으로 두르고, 앞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을 두었다. 연못 안에는 자그마한 원형 섬이 있고, 그 안에 고택과 함께 300년의 세월을 보낸 배롱나무가 멋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운치를 더한다. 연못을 지나 앞마당의 섬돌을 오르면, 기단 위의 기품 있는 사랑채가 손님을 반긴다. 1984년에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고택에서는 한옥스테이가 가능하며 다례, 천연염색, 전통음악공연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인근 관광지로는 노성산성, 노성향교, 노성궐리사, 노성면소재지 등이 있다.
노성지맥이 남진하다가 서쪽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곳입니다. 논산평야로 항공학교 정문에서 읍내2리 마을표석을 지나 23번국도(득안대로)를 건너 하도리와 경계인 69m봉과 삼리봉을 찍고 다시 23번국도를 넘어 두사교회가 보이는 논산평야로로 나오기 때문에 계속 논산평야로를 따르기도 합니다.
♤ 노성면 읍내리(邑內里)
노성로를 따르다 부대앞 천천히 도로교통판에서부터 오른쪽이 노성면 읍내리로 바뀐다. 옛날 노성현(魯城縣)의 소재지여서 읍내(邑內)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고랭이·둥덩골·상반·옥거리·하반 등이 있다. 노성초교를 지나 노성농협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지나며 읍내리 내안으로 들어서고, 도로를 따르면 농협하나로마트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논산평야로로 들어선다. 원지맥에 충실하려면 부대 후문에서 울타리를 따르다 목장을 지나고, 사유지인 조경원을 통과하여 노성어린이집을 지나고 논산평야로로 나와야 한다. 항공학교 정문 삼거리에서 좌틀로 읍내4길로 들어서서 밭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우틀하여 지맥을 깔아뭉갠 노성특화농공단지로2길을 지나 득안대로(23번도로)를 건너 노성면 하도리와 경계인 동동골 69m봉까지 진행한다.
♤ 70m봉/ 삼리경계면(읍내리, 하도리 → 두사리)
노성면 읍내리와 하도리의 경계인 69m봉에서 23번국도(득안대로)로 내려서고 도로를 따르다 하도교차로 중앙휴게소를 지나 왼쪽의 밭가장자리로 들어서서 하도리, 읍내리, 두사리의 삼리경계면을 찍고 다시 우틀하여 지하통로로 23번국도(득안대로)를 건너서 논산평야로를 만나면 두사교회가 보인다. 오른쪽 두사리노인회관이 있는 물레고개로 향한다.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두사리는 대부분의 지형이 비교적 평탄한 지대로 경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물레 고개, 산정, 중산 마을 등이 있다. 산정 마을은 명재 윤증의 아내 권씨의 묘소가 있다 하여, 큰 산소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중산 마을은 대산 아래 중간 마을이라는 뜻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두사1리 마을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따라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을 또 하나 지나는데 완만한 고개입니다. 그 곳 주위를 통틀어 물레고개라 부르는군요.
♤ 물레고개(23m)/ 두사1리
도로를 따르면, 육군항공학교 정문 입구 등등골사거리와 두사감리교회를 지나 두사1리 물레고개를 지난다. 물레峙는 논산시 노성면 두사리와 광석면 사월리 경계에 있는 반상화강섬록암으로 이루어진 23m의 낮은 고개이다. 물레고개 마을은 옥녀가 물레를 잣는 형국인 물레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주변은 대체로 논산천의 작은 지류 하천들에 의해 개석된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고개의 남쪽으로 논산천의 지류인 노성천이 흐르고 논산시 대교동에서 연산천과 합류하여 논산천에 유입되고 있다. 논산시 시가지로부터 북쪽에 위치해 있고, 노성면과 광석면의 행정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변부는 대체로 밭농사 및 과수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물레치를 통해 국도 23호선이 지나고 있고, 기타 도로가 이 지역의 곳곳을 연결해 주고 있다.
♤ 노성면 두사리(豆寺里)/ 팥절(豆寺)
노성면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노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산리·중산리·소산리와 대동리의 일부, 읍내면 송아리의 일부, 득윤면 사동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두사리라 하여 논산군 노성면에 편입되었다.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시 노성면 두사리가 되었다. 옛날 이곳에 팥절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팥절을 한문화하여 두사(豆寺)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사리의 동부·남부 및 서부는 해발고도 20~40여m의 아주 낮은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고, 북부는 해발고도 20여m의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구릉성 산지의 완사면에서는 밭농사와 과수농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산업은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림업이다. 구릉성 산지와 평야 지대 사이의 경사변환선과 구릉성 산지 사이의 곡간, 그리고 도로변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대산·물레고개·띄약골·대추마루 등이 대표적이다. 국도 23호선이 중앙부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는데, 북동쪽으로는 노성면 읍내리와 남서쪽으로는 광석면 사월리에 연결된다. 시도 1호선이 국도 23호선에 평행하게 중앙부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면서, 북동쪽으로는 노성면 읍내리와 남서쪽으로는 광석면 사월리에 각각 연결된다.
♤ 사월2리/ 월여마을 입구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사월리는 기름진 전답이 많아 논밭에는 곡식들이 풍성하였는데, 새들이 곡식을 먹기 위해 많이 모여들어 서식했다 하여 새들 또는 새롤이라 하였고, 모래가 많은 지역이므로 사동(沙洞)이라고도 하며 자연부락으로는 당산, 새롤, 안산, 월디, 헛골 등이 있다.
오른쪽에 토방이라고 황토방 영업을 하는 건물이 보입니다.
♤ 면리계/ 노성면 두사리 - 광석면 사월리
물레고개를 지나 노성면 두사리에서 광석면 사월리로 들어서고 항월리(恒月里) 입구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원형로타리인 잔디말고개에서 지맥의 왼쪽이 항월리 → 왕전리로 바뀌며 사계로를 따라간다. 줄곧 도로가 곧 마루금인 곳으로 갓길이 없어 위험하지만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노성지맥이 지나는 논산은 전국 생산량의 15%를 생산하는 딸기재배지이다.
♤ 논산시 광석면(光石面)
논산시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노성군 광석면 지역으로서 지역에 넓은 돌이 있어서 광석이라 이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득윤면 8개 리와 장구면 6개 리, 천동면 5개 리와 두사면 6개 리가 병합되었다. 이 외에도 읍내면 송아리, 석성군 원북면 음상·갈산의 2개 리와 부인처면 창리, 화지산면 반월리 등을 병합하고 광석면이라 하여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시 광석면이 되었다. 문화 유적으로는 오강리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인 노강서원, 갈산리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27호인 갈산리 곰솔(쌍군송) 등이 있다. 구릉성 산지의 완사면에서는 밭농사와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평야 지대는 경지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구릉성 산지와 평야 지대 사이의 경사변환선, 구릉성 산지 사이의 곡간, 도로변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천안논산고속도로 25호선이 서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 북쪽으로는 부여군 초촌면과 남쪽으로는 성동면 정지리에 연결된다. 남부의 갈산리와 득윤리에는 서논산 IC가 설치되어 있다. 국도 23호선이 동부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 북동쪽으로는 노성면 두사리와 남서쪽으로는 성동면 원봉리에 연결된다. 지방도 643호선의 중앙부에서 북동~남동 방향으로 지나, 북서쪽으로는 노성면 장구리와 남동쪽으로는 대교동에 연결된다.
♤ 왕전목장/ 논산시 광석면 왕전리(旺田里)
광석면 동부에 위치한 왕전리는 본래 노성군 천동면 지역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꿈 해몽을 해준 무당에게 밭을 상으로 주어 왕전리라 하였다 한다. 그러고보니 태조왕건과 견훤의 아들 신검이 최후의 쟁패를 겨뤘던 황산의 개태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사계로를 따르다 도로 왼쪽에 왕전목장을 지나며 지맥의 왼쪽이 왕전리 → 천동리로 바뀐다. 태성 FRP 공장 뒤로 33.8m 봉이 있으나 굳이 다녀오려 하지 않는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팬션같이 생긴 (주)TC라는 건물이 특이한 회사를 지나는데 선답자님들 후기에 2014년에 건축을 하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KSC회사에서 도로 오른편이 사월리 → 신당리로 바뀐다.
원형교차로인데 지맥은 직진합니다. 신당리는 광석면소재지 입니다.
♤ 신당교차로/ 23번국도/ 643지방도
신당교차로에서 직진하여 광석면소재지를 지난다. 신당리는 노성군 득윤면의 지역으로서 자연부락으로는 골당디, 구당, 당너머, 대당, 덕포, 소당, 월당, 장승배기 등이 있으며 신당(神堂)이 있었다 하여 신당(新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당리, 소당리, 사동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덕포리를 병합하여 신당리라 하여 논산군 광석면에 편입되었다. 1927년 9월 20일 광석면사무소가 사월리에서 신당리26번지(現 양조장)로 이전함에 따라 광석면 소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똥개말랭이 언덕/ 광석면 중앙 사거리
부적에서 광석벌판을 가로질러 면사무소로 향한다. 광석중학교는 좌측으로 빠져야 한다. 오르막길이다. 가파른 이 길의 꼭대기를 똥개말랭이라고 부른다. 대당 남쪽 산마루에 있는 작은 마을로 옛날 이곳에 신당(神堂)이 있었다 하며 이곳은 숲과 잡초가 우거져 똥개들이 숲과 잡초더미에서 사육되었다 하여 똥개말랭이라 부른다 한다. 또한 신당이 있었다 해서 신당말랭이라고도 불러왔는데 똥개말랭이의 어원이 좋지 않다해서 1978년경 광석면 총화협의회에서 신당고개라 이름지었다. 지금도 포장된 아스팔트 이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려면 밑에서부터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페달을 굴려야 한다. 예전에는 비포장였으니 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지금은 산등성을 깎아내려서 그때보다 사람키 정도 낮아졌다고 한다. 거기에 빛돌공원이 있다. 그 사거리에 파출소가 있고 우측으로 빠지면 면사무소, 광석초등학교, 노성쪽이다. 광석면사무소는 3개리의 꼭지점이기도 하다. 논산시 광석면 중앙 사거리에 위치한 똥개말랭이 언덕은 주변 경관을 가리고 도로폭이 좁아 교통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으로 공간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돼 논산시와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으로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빛돌공원 사거리를 기준으로 해서 경찰서쪽은 이사리, 광석중학교쪽은 천동리, 면사무소와 광석초등학교 아래쪽은 신당리이다.
♤ 광석초등학교/ 광석면사무소/ 빛돌공원
광석초등학교와 광석면사무소를 지나며 중국집과 편의점이 있다. 광석면 중앙 사거리에 위치한 똥개말랭이 언덕에서 도로의 왼쪽이 천동리 → 이사리로 바뀐다. 2016년 똥개말랭이 언덕이 사업비 6억을 들여 빛돌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광석면사무소를 지나 갈산경로당까지 직진해 경로당에서 우틀로 꺽어 진행합니다.
♤ 논산시 광석면 광리(光里)
광리 갈림길인 광리버스정류장삼거리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신당리 → 중리로 바뀌고 왼쪽 갈산로를 따른다. 광석면에 있는 광리는 넓은 돌이 있다 해서 광석(廣石)이라 하던 것이 광석(光石)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서당이 많이 생겨 배우는 사람이 많아 마을을 빛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광리(光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안더분들, 밧더분들 등이 있는데 넓은 들이 있어서 너분들이라 하였고, 또 인심이 훈훈하여 이 마을에 가면 더운 물과 더운 밥을 준다 하여 더분들, 더운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너른 밭을 지난다. 한울타리영농조합법인에서 지맥의 왼쪽이 이사리 → 광리로 바뀌고 곧바로 희망블루베리농원 직전 삼거리에서 다시 광리 → 갈산리로 바뀐다. 도로가 지맥인 농로길을 한참 따른다. 길 좌우에는 목장과 묘지 뿐이 없다. 갈산길을 따르다 한우목장(유정 TMR)을 지나 농수로가 지나는 곳에서 좌우 완전하게 갈산리로 들어선다.
♤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葛山里)/ 경로회관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갈산리는 자연부락으로는 갈미, 큰동네, 날근터, 도래뜸, 산정말, 은동골, 쟁미턱 등이 있다. 마을 앞 넓은 들에서는 쌀이 나오고 산에서는 칡이 많이 나온다 하여 갈미(葛米) 또는 갈산(葛山)이라 하였다.
갈산리경로회관에서 급우틀하여 갈산교회 방향으로 향하고, 느티나무 아래 들창이 달린 정자가 있는 상경말쉼터 사거리에서 사잇길인 양회임도로 진행합니다.
♤ 광석면 갈산리 곰솔/ (충남기념물 제27호)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기 때문에 곰솔이라고 부르며,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 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르며,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해일의 피해를 막아주는 방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나무의 나이는 3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동쪽 곰솔은 높이 16m, 둘레 2.63m이고, 남쪽 곰솔은 높이 12.5m, 둘레 2.20m이다. 이 곰솔은 효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권육(權育)이 나이 65세때 관직을 사퇴하고 충청도로 낙향할 뜻을 상소하자 조정에서 이산(尼山: 지금의 魯城) 현감을 제수하였는데 2년 뒤에 67세로 생을 마쳤다. 그 죽음을 애도해서 1655년(효종 6년)에 왕명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는 곰솔의 묘목을 보내어 이곳에 심도록 하고 쌍군송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던 무덤은 문중에서 1996년 4월에 공주선영으로 옮기고 다만 쌍군송만 남아있다. 갈산리 곰솔은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큰 곰솔이며,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송이 내륙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해송이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인 수원에서 옮겨 심었다는 점이 희귀하여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 서논산 IC 나들목
갈산마을 안 삼거리 상경말쉼터에서 왼쪽 언덕으로 올라 4번도로를 지하통로로 지나 우틀하여 서논산IC 교각밑으로 날개를 따라서 크게 돌아서 간다. 지맥 마루금은 왼쪽으로 높은정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호남고속철도와 4번국도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서논산요금소 쪽이라 부득불 우회할 수밖에 없다.
지맥을 하다보니 대한민국 제20대 윤석열대통령의 뿌리가 여기 노성면 득윤리에 있네요. 파평윤씨가 일대를 터반으로 넓게 세를 이룬 곳이군요. 기왕 성군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 면계/ 광석면 - 성동면
논산시 광석면은 충청남도 논산시의 서북부에 위치하는 면이며 북서쪽으로 석성천이 남동쪽으로는 논산천이 흐르고 있다. 조선 초기에 이산현 혹은 이성현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노성현(魯城縣)으로 개칭되었던 행정구역의 광석면 득윤면 천동면 일대에 속했으며 현재 관할 내에 득윤리가 있는데 『여지도서』(이산)에 득윤면(得尹面)이라는 지명이 보이며 관아의 서쪽 20리 거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산)에 등수소(登水所)는 현 남쪽 15리 거리에 있는데 지금의 득윤촌(得尹村)이다 라고 되어 있어 득윤면이 고려시대 특수 촌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일대에 넓은 돌이 있는 지역이라 해서 광석면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논산일반산업단지로 접어들며 광석면에서 성동면으로 바뀐다.
♤ 높은정이고개/ 높은정갱이고개
노성군 득윤면의 지역으로 옛날 등수소(登水所)가 있었으며 파평윤씨 중의 한 사람이 이 마을로 이사해 와 덕을 많이 쌓으며 살아가 선행을 많이 하는 윤씨를 얻은 마을이라 하여 득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윤리, 중리, 지동의 각 일부와 광석면의 갈산리 일부, 석성군 원북면 음상리, 갈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득윤리라 하여 논산군 광석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은 섬말, 돌패기, 동아시, 등수소, 방죽안, 북아시, 용산절, 저너머, 지울, 행랑골 등이 있다. 높은정갱이고개는 득윤2리 섬말 남동쪽에 있는 고개인데 근처에서는 가장 높은 고개로 논산에서 부여로 가는 국도 옆에 있는 큰 무덤으로 옛날에는 둘이 있었는데 국도를 낼 때 하나는 파버리고 하나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에 이여송과 관련하여 맥무덤이라고도 하고 말무덤 또는 맞무덤이라고도 하는데 빈무덤이라 하여 맹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제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패망한 후 백제의 부흥군들이 신라군을 괴롭혔던 지역으로 높은 곳에 있는 고개라 하여「높은정갱이고개」라 부른다.
♤ 소(所)
고려시대 충남 논산 지역에 설치되었던 특수 촌락 집단으로 소는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향(鄕)·부곡(部曲)과는 달리 고려조에 들어와 처음 발생하였다. 향·부곡이 농경에 종사한 반면에 소는 주로 왕실이나 관아에 필요한 수공업, 광업, 수산업 분야의 공물을 생산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의 등신장(登神莊) 조의 기록에는, “고려 때에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 명주 옷)·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 숯)·염소(鹽所: 소금)·묵소(墨所: 먹)·곽소(藿所: 콩)·자기소(瓷器所)·어량소(魚梁所: 물고기)·강소(薑所: 생강)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 종래에는 천민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향·부곡민과 함께 양인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다만 그들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였기에 다른 지역보다도 중앙의 기관이나 권세가의 집중적인 수탈 대상이 되었고, 과중한 공물의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12세기 초 향·소·부곡 가운데 소지역의 주민이 가장 많이 거주 지역에서 도망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12세기 후반 대규모 민중봉기는 향·소·부곡 집단이 해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무신정권시대에 망이·망소이 형제가 고역에 견디다 못해 1176년 공주의 명학소에서 난을 일으켰다 진압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었다. 논산 지역은 고려시대에 공주목의 통제를 받는 위치에 있었는데 공주목 관할 하에는 여러 소가 있었다. 즉 공주목 소속의 명학소·금단소·갑촌소·촌개소·복수소·박산소·금생소 등이 있었으며 한산군 소속의 안곡소, 임천군 소속의 고다지소·소라소·금암소, 회덕군 소속의 침이소, 니산현 소속의 저정소(猪井所)·등수소(登水所), 부여현 소속의 풍지소, 연기현 소속의 연천소 등이 있었다. 이 중 논산 지역의 소로는 저정소와 등수소가 있었다. 저정소는 니산현의 남쪽 14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마본촌(馬本村)으로 개명되었는데,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등수소는 니산현의 남쪽 13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득윤촌(得尹村)으로 개명되었는데, 지금의 논산시 광석면 득윤리가 그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니산현 토산(土産) 조에 보면, “철(鐵)이 현 남쪽 천동(泉洞)에서 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저정소와 등수소는 철을 생산하여 제품을 만드는 철소일 가능성이 많다. 소 역시 상위 군현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만들어진 철 제품은 니산현을 거쳐 공주목으로 수송되고 최종적으로는 중앙에 바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 논산일반산업단지/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면계이자 득윤리와 원북리의 경계인 1번국도 논산일반산업단지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원북리로 들어서고 논산일반산업단지 외곽도로를 지난다. 정지리와 경계인 왼쪽으로 지맥 능선을 따라 논산천안고속도로가 지나가고 호남선ktx 아치형 다리도 보인다. 공단 도로를 따라 내려서다 좌틀하여 원북리 → 정지리로 진입하며 천안논산고속도로 원북교 암거를 통과하면 왼쪽에 변전소가 있다. 성동면 원북리는 논산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한 곳으로 지맥이 우회하는 곳이다.
♤ 논산시 성동면(城東面)
성동면은 논산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금성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성동이라고 하였다. 본래 석성군 원북면 지역으로, 1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병촌면의 6개 리와 삼산면의 7개 리가 편입되었다. 또한 정산면의 4개 리, 우곤면(牛昆面)의 4개 리, 현내면의 2개 리, 비당면의 옥산리, 성본면의 해창리, 노성군 광석면의 입석(入石)·논산(論山)·갈산·구토(舊土)의 4개 리와 임천군 인세면의 중산리를 병합하고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1932년 채운면의 신촌리가 편입되었고,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논산시 성동면이 되었다. 금강하류의 드넓은 평야지대로, 면 전체가 화정들·개척들 등의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고, 면의 서부에는 월명산(月明山)이 있다. 북서쪽에서 내려온 석성천과 남쪽에는 논산천이 각각 금강에 합류하며, 금강하류의 넓은 평야 지대는 토질이 비옥하고 수자원과 일조량이 풍부하여 품질 좋은 쌀을 비롯해서 당도 높은 수박, 딸기, 상추, 방울토마토 등 웰빙 시대에 알맞은 천혜의 조건 속에서 수많은 농산물을 풍성하게 생산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성동지방산업단지가 2004년부터 가동 중에 있으며, 대규모 제2지방산업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경제발전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역이다. 문화 유적으로는 개척리에 충남 문화재자료 제152호인 성동면 은행나무, 원북리에 충남 문화재자료 제383호인 논산 석성 수탕석교 등이 있다. 전국 도로와 연결되는 천안논산고속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고, 북쪽 정지리에는 서논산 IC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 외에도 북쪽에 국도 4호선이 부여군에서 논산 시가지와 연결되고, 서쪽에는 지방도 799호선이 강경읍에서 북쪽 부여군에 연결되어 있는 등 크고 작은 도로가 나 있다.
성동면 원북리에서 정지리로 진입하여 원봉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릅니다.
♤ 논산시 성동면 정지리(定止里)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정지리는 마을이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고 서북쪽으로 황하천이 흐르며 정지리 마을은 동지미란 산이 있어 정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은 정지1,2,3,4리가 있고 자연마을은 견티, 구듬재, 난말, 동라, 동지미, 불뭇골 6개 마을이 있는데 구등재는 정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산이 둘러 있어서 우묵하므로 구등재 또는 구등현이라 하며, 이것이 변하여 구토리라 한다. 동지미는 동지미라 하는 산 밑에 있는 마을이고 동라는 동편나촌, 서라는 서편나촌을 뜻하는 마을이다.
저는 두리봉에 가지 않고 묘지에서 도농농산물류센터로 내려 원남교를 건넜습니다.
♤ 두리봉(38.3m)/ 서라슈퍼
지맥은 직진이지만 왼쪽(남)의 성동면 원봉리에 있는 두리봉을 다녀오기도 한다. 정지(停止) 3리에 있는 서라마을 표지석이 잠시 웃음을 짓게 한다. 파평윤씨묘 4기를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 나가 서라수퍼에서 서쪽 도로 따라 논산~천안간 고속도로 원남교 밑으로 진행한다.
♤ 논산시 성동면 화정리(花亭里)
정지3리인 서라마을을 지나 고속도로 아래 원남교를 건너 화정1리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지맥의 왼쪽이 정지리 → 화정리로 바뀐다. 오른쪽에 정지4리 노인정을 지나고 정지4리를 지나자마자 화정1리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도로를 따르며 왼쪽에 마싯골칼국수수제비를 지난다. 성동면 화정리는 논산천의 지류가 마을 앞에 흐르고 있는데 들 가운데에 통뫼와 홧대벌이 있어 화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연화부수형은 풍수지리학 용어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흡사하다는 뜻으로 풍수지리학상으로 길지에 속하며 행정구역은 화정 1,2리로 되어 있고 백자동, 중리, 평전말, 화상, 화정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자동은 씨아샘 위쪽의 마을인데 씨아샘은 씨아샘고라당에 있는 샘으로 깊고 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중리는 화정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금박재 직전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정지리 → 원남리로 바뀝니다.
♤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院南里)
성동면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지의 완사면에서는 밭농사가,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각각 이루어져 쌀과 고추·콩 고구마·감자 등이 생산되고 있다. 자연마을로 대죽·댓개·성티·소죽·영남촌·원남 등이 있다. 옛날 성동면에 행인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수탕원(水湯院)을 두었는데, 이 수탕원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석성군 원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동리·하서리·중리·소죽리의 각 일부와 우곤면 상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원남리라 하여 논산군 성동면에 편입하였다.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가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20여m의 저평한 평야 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서부에는 석성천이 서쪽으로 흘러서 금강에 합류하고 있다. 기타 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면서 성동면 월성리와 원북리를 연결하고 있다.
금박재 뒤에 32.2m봉에 묘지가 있고, 바로 옆 주택에 사는 천안전씨 73세손이라는 아저씨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습니다. 본인이 금박재 표지판을 만들었다는군요.
♤ 32.2m봉/ 금박재
충남 논산시 성동면 동부에 위치한 정지리에서 금박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성동면 정지리, 즉 지금의 금박재 고개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왜적이 침입하여 약탈까지 하였다. 이 마을은 주위에 농토가 적고 토질도 나빴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항상 가난에 쪼들리며 살았다. 그래서 이웃 마을 사람들이 ‘부황난 고라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씨만은 순진하고 아름다워 한번도 다투는 일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금박재 바로 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렵게는 살지만 항상 남을 돕고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부부가 들에서 일을 하고 막 고개를 넘어오려고 하는데 보지 못했던 박이 탐스럽게 넝쿨을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고개였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더욱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박이 보통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가꾸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더니 잘 익어갔다. 그중 잘 익은 박을 하나 따다가 켜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박씨가 박혀 있어야 할 곳마다 금씨가 박혀 있었다. 노부부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하며 하늘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그 금씨를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왜적이 마을에 찾아와 노부부에게 금씨의 출처를 대라고 고문하였다. 노부부가 끝까지 말하지 않자 이들을 가두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 하나가 왜적들에게 박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왜적들은 그 고개에 열려 있는 박들을 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익지도 않은 박들까지 전부 따다가 박을 탔다. 그때였다. 맑게 개었던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억수같이 비를 뿌리며 천둥번개까지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삽시간에 왜적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박이 열려 있던 그 자리에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는 금박재로 불렸고, 또 바위는 금박바위라고 불렀다.
일미슈퍼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딸기가 얻어걸리면 한다라이 사먹을려고 했는데 코빼기도 안보이네요.
♤ 성동면사무소/ 삼리경계면(원남리, 삼산리 → 월성리)
화정리 버스정류소 직전 '모든철거' 간판있는 곳에서 지맥의 왼쪽이 화정리 → 삼산리로 바뀐다. 화정2리 화상마을과 성동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지맥은 면사무소뒤 원남1리길로 들어서고 원남리와 월성리의 경계를 따른다 . 도로를 따라 약 500m 진행하다가 왼쪽 소로로 들어서고 전주이씨 묘와 태양열판넬 울타리를 지나 수탕원로와 만나 잠시 진행하다가 오른쪽 원남4길로 접어든다.
공원에 혼자 앉아 머우대를 다듬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셔 잠시 담소를 나누고...
♤ 함양 여씨(咸陽呂氏) 연산 종중 공원
함양여씨 연산종중 공원이 인상적이다. 맨 뒤에 서계시는 파시조할아버지 비석에 증통정대부이조참의라고 쓰여 있다. 함양여씨는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당나라 한림학사(韓林學士)로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라로 동래하였고, 이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고 고려시대 전서(典書)를 지냈다. 최초 정착한 곳이 함양(咸陽) 혹은 성산(星山)이라는 설로 인해 함양여씨와 성산여씨로 갈라진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형제를 두었는데,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월성리에서 지겨운 도로 구간이 끝나고 인삼밭 옆길을 들머리로 다시 산길로 바꿔타네요. 고개에서 50.3m봉으로 이어집니다.
♤ 안담산(39m)
함양여씨 연산종중 공원을 지나 도로를 따르다가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에 있는 안담산을 다녀오는데 왕복 약 10분 소요된다. 성동면 원남리 월명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모양이 마치 기러기와 같이 생겼다하여 안담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안담산을 다녀와 이번에는 왼쪽 밭두렁을 가로질러 50.3m봉으로 오른다.
♤ 50.3m봉/ 삼리봉(월성리, 원남리 → 우곤리)
준희선생님 산패를 지나 세종 홀산아선배님 코팅지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원남리에서 우곤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좌틀로 진행한다. 시누대길을 지나 고개에서 능선으로 올라 진행하며 금남정맥의 종착지인 부소산성을 건너 멀리 칠갑지맥의 주산인 칠갑산과 삼형제봉이 조망된다.
♤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牛昆里)
우곤리 마을 동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이 흐르고 있다. 우곤리 마을은 뒤에 있는 산의 형태가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곤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우곤 1,2,3,4리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내우곤, 안소곤, 밧소곤, 다르매, 서당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밧소곤은 소곤 바깥에 있는 마을로 석성천 갯가에 있으므로 포전, 또는 포전리라 불리었다.
인가 안쪽에 수도가 보이니 여름에는 잠시 물을 얻어 갈 수도 있겠어요.
♤ 상리 마을길
논산시 성동면 월성리 상리 마을길을 가로질러 월명산으로 오른다. 월성리(月城里) 마을은 예부터 성벽에 비추어진 달빛의 수려함이 으뜸이라 하여 월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월성 1,2,3리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동촌, 월성, 소란말, 자곡매, 삼성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촌은 월성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소란말은 동촌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자곡메는 소란말 뒤에 있는 마을이다.
해맞이 공원 월명산공원 2층 정자에 올라 황산벌을 살펴보았습니다. 너른 평야에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멀리 연산면과 부적면 뒤로 논산 황산벌종주를 하던 함박봉산줄기가 보이네요. 날씨가 좋으면 대둔산도 볼 수 있으련만....
♤ 월명산(月明山, 75.9m)/ 3등삼각점(논산301/ )/ 삼리봉(우곤리, 월성리 → 병촌리)
등로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강경에서 부여 석성(石城)으로 통하는 지방도 799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논산천이 나온다. 이 논산천을 건너 약 4㎞쯤 올라가면 개척리사거리가 나오는데, 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우회전하여 약 2㎞ 정도 더 나아가면 월성리에 닿게 된다. 월성리 마을의 뒷산이 월명산(月明山)이다. 월명산은 산의 형태가 반월과 같아 반월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성은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월명산 정상석에서 조금 더 가면 월명공원이다. 페르골라, 산신제단, 2층 육각정(심우정), 어린이놀이터, 화장실이 조성되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월성리에서 병촌리로 바뀐다.
♤ 월성리산성(月城里山城)/ 반월산성
논산시 성동면 월성리 월명산에 있는 시대 미상의 산성이다. 월성리 산성이 자리한 월성리 일대는 논산 강경 일대에 펼쳐져 있는 이른바 논강평야의 일부로, 주변 지역이 드넓은 평야로 되어 있다. 이 평야 지대에 월명산 정상부에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월명산은 해발 70m에 불과하지만 주변 지역이 온통 평야로 되어 있어 주변을 손쉽게 내려다볼 수 있다. 현재 월성리 산성은 완전히 붕괴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월성리 산성은 최근에 학계에 알려져 정확한 규모와 현황은 아직 불분명한 상태이다. 더구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성 시기를 알 수 없어 산성의 건립 경위 역시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북쪽으로 1㎞ 거리에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 2㎞ 거리에 금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어, 하천을 이용한 물류의 운송과 관련 있는 시설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고 있다. 월성리 산성은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하고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도 토루의 형태가 밋밋하게 남아 있어 이것이 진짜 토루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하루 빨리 정밀 조사가 이루어져 산성 여부부터 확실하게 판단하고, 뒤이어 축조 배경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논산시 성동면 병촌리(甁村里)
논산시 성동면에 위치한 병촌리는 지형이 마치 병과 같이 생겨 병골 또는 병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병촌 1리와 2리, 자연마을로는 까치말, 대중리, 병골, 삼잿골 등이 있으며 까치말은 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까치와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삼잿골은 중리와 까치말 중간에 있는 마을로 낮은 재가 있다고 한다. 관광지로는 66인 순교 기념탑이 있다. 6.25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양민들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집단학살 했는데 이 때 병촌교회 신자 66명도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는데 성서적이고 성결교회적인 신앙고백을 하면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 64.7m봉
지나치는 능선봉으로 선답자들의 띠지들로 대체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태양열판넬이 있고 산길로 간다.
♤ 장판고개(25m)/ 금백로/ 799번 도로/ 삼리경계면(우곤리, 병촌리 → 개척리)
맨발대선배님의 여기가 장판고개입니다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64.7m봉을 지나 장판골 공동묘지 쪽으로 내려서면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와 병촌리를 잇는 799번지방도로 2차선포장도로가 지나는 장판고개이다. 지맥의 왼쪽이 병촌리에서 개척리로 바뀐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논산천 강경대교가 나온다. 도로건너 축대로 올라선다.
♤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蓋尺里)
성동면 개척리는 개척들에 자리잡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가 마을 옆에 흐르고 있다. 개척리 마을은 물이 흐르고 낮은 산등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개척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개척 1,2,3리로 자연마을은 개자, 금성, 나루개, 새말, 딴펄로 이루어져 있다. 딴펄은 개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펄이 외따로 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불암은 동쪽 신촌리에 불암산이 있고 앞에는 개가 있다고 한다. 기념물로 제 152호 성동 은행나무가 있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전우치가 이 곳을 지나가다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것이 잘 자라면 전씨가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은행나무의 잎이 돋고 가지가 나와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61.6m봉/ 묘지
풍양조씨 가족묘원 맨 위에서 산으로 접어들어 능선에 올라선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묘지가 3~4기 있고 방향을 잘 틀어 왼쪽으로 간다. 능선을 따르다가 왼쪽으로 비닐하우스가 펼쳐진 평야지대 멀리 부적면과 연산면이 바라보이고 그 뒤로 가로로 산줄기가 지나는데 일대가 바로 논산 황산벌이다.
♤ 55.5m봉/ 팔각정
팔각정정자가 잘 만들어져 있다. 기둥에 55.5m봉이라 쓰여 있고 선답자 띠지가 지키고 있다.
♤ 금강 올레길
우리나라 6대 하천인 금강이 흐르는 주변으로 역사가 깊은 병촌성결교회와 개척리, 우곤리 등 인근 마을과 연결하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힐링과 동시에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1.5km 구간의 산책로라고 소개되어 있다.
♤ 불암산(佛岩山, 59.5m)/ 4등삼각점(논산401/ 1987 복구)
강경읍의 북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논산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논산천을 건너 금강 본류를 타고 북쪽으로 2㎞ 정도 올라가면 나지막한 독립 구릉인 불암산이 나타난다. 지맥은 개척리 내안으로 들어서서 개척길을 지나 불암산으로 오른다. 임도를 따르면 지나칠 수 있다. 마루금을 고수해야 한다. 4등삼각점이 있는 불암산은 등로 오른쪽으로 0.03km 떨어져 있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밤나무에 매어 있다. 가까운 곳에는 정자도 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금강이 내려다보인다.
♤ 불암산성(佛岩山城)
불암산 정상부에 위치한 시대 미상의 산성으로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이미 붕괴된 상태이며, 산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길게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동벽과 북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길이가 약 360m 정도 확인된다. 서쪽과 남쪽은 성벽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지형상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이 부분까지 합하면 약 700m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내부를 삭토해서 토루를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성 내부에서는 성문이나 건물지, 우물터 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논산의 산성은 동부 지역에 높고 험준한 산봉(山峰)에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서부 지역에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불암산성은 서부 지역에 속한 산성으로 금강과 접해 있고 드넓은 논강평야를 끼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금강의 방비와 관련되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에 대한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성격은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 금강올레길/ 금강종주 자전거길/ 정자, 화장실, 수도
산길은 끝나고 금강종주 자전거길을 만나는 지점에 커다란 느티나무 두그루가 서있다. 금강올레길을 따라 합수점까지 약 2km를 걷는다. 금강하구둑 38km 이정표가 서있다.
♤ 금강/논산천합수점
합수점을 보려면 갈대숲을 뚫고 오른쪽으로 들어가 왕복해야 한다. 하지만 강건너 옥녀봉에도 올르고 논산천과 금강의 합수점도 확인하는 신박한 방법이 있다. 성동면과 강경읍을 연결하는 논산천 인도교를 건너 옥녀봉으로 오른다. 옥녀봉 오르는 중턱에 '강경산 소금문학관'은 이곳 강경이 고향인 소설가 박범신이 귀향 후에 쓴 대표작 '소금'을 테마로 한 문학관이다. 문학관 옆 계단을 통해 옥녀봉으로 올라간다. 옥녀봉 아래로 금강이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어 이곳이 강경포구였음을 일깨워 주며, 강경의 근대건축물이 존재하는 곡절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강경에서 충남 부여군 세도면으로 금강을 건너가는 황산대교 북쪽에 황산 등대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세워져 수십 년간 강경포구로 드나드는 배들의 밤 뱃길을 밝혀주다가 1987년 철거되었던 등대는 2008년 복원됐다. 강에 등대가 건립되었을 정도로 강경포구는 야간에도 배가 붐비는 선창이었다. 강경 북옥리 옥녀봉 바위에 1860년대에 새겨진 해조문(海潮文) 역시 하항(河港) 강경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보여준다. 밀물과 썰물 시간을 암벽에 음각해 안전을 기원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강경산(江景山)/ 옥녀봉(43.8m)/ 4등삼각점(논산 449/ 1980 재설)/ 봉수대
옥녀봉은 조선시대에 강경산이라 불렸음을 『여지도서(輿地圖書)』, 『택리지(擇里志)』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옥녀봉이란 지명은 근대에 와서 산봉우리가 매우 수려하여 옥녀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유래한 것으로 이름에 걸맞게 옥녀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바위가 많아 이 산을 찾은 이들이 새겨둔 암각문이 여럿 남아 있다. 옥녀봉은 논산8경 중 하나로, 공원이 들어서 있으며 송재정(정자)과 봉수대에서 강경읍내와 금강을 조망하기에 좋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부여와 익산까지 보이고, 평야와 강이 조화를 이룬다. 누구라도 쉽게 보고 고기잡이, 항해, 소금생산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포구에 해조문(밀물과 썰물에 대한 종합정보)을 새겨놓은 것은 전국에서 강경이 유일하다고 한다. 해조문 전망대에서 합수점을 보니 논산천과 금강 합수부가 아주 명확하게 형성되어 있다. 옥녀봉 표지석을 지나서, 범바위 전망대에 선다. 이곳은 낙조 명소로도 유명하다. 요즘 신세대 말로 노을맛집이다. 옥녀봉 봉수대 뒤쪽에 4등삼각점을 확인하고 합수점을 실컷 감상하며 노성지맥을 마무리 한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송재정 바로 아래편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 터가 있어 성지순례를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건너편으로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에 있는 원진지맥 줄기의 마지막 봉우리 봉황산(59.5m)과 합수점도 찾아본다.
♤ 강경읍(江景邑)
강경의 지명은 강경포(江景浦)에서 유래되었는데 금강을 낀 포구의 이름이 이 지방의 지명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은진현 강경호가 있으며 미내교비에도 강경촌이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오래전부터 지어내려온 지명인 것같다. 1914년 군명을 폐합하여 행정구역 재편성 때에 채운면의 성서리(城西里)를 병합하여 강경포의 이름을 따서 강경면으로 하였으며 1931년 강경읍으로 승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옥녀봉에서 강경역까지 도로로 약 2km이다. 『택리지』 저자 이중환은 일찍이 강경의 풍물과 경치에 빠져 이곳에 살면서 '택리지'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읍이지만, 근대문화유산이 상당히 남아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선 2대 포구,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히며 번창하던 곳이어서,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시가지가 크게 발달했다. 강경경제의 중심이었던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강경은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든 도시로 쇠락했지만, 강경시가지를 한두 시간 정도만 자박자박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과거의 역사문화 흔적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곳곳에 남아 있어 금방이라도 100여 년 전의 세월 속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강경이 조선시대 3대 시장과 포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금강에 있었다. 금강이 휘감아 도는 강경은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해 조선시대에 평양, 대구와 함께 다양한 지역의 산물들이 거래되는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만큼 돈이 많이 돌았고, 그런 풍요 속에서 근대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강경은 현재 4,200여 세대, 인구 8,000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지역의 곡물, 포목거래와 중국 상선이 드나들던 충청서부지역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다. 1870년 무렵 강경시장의 점포 수는 900여 개에 달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주인구 3만 명에 유동인구가 하루 1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금강 하류 지역이지만 수심이 깊어 제법 큰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으며, 충청내륙과 호남지방까지 넓은 시장을 배후에 뒀던 덕분에, 지역의 산물이 강경으로 몰렸던 까닭에 하루 100여 척의 선박이 강경을 오갔다고 한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강경은 서해와 중국의 소금을 전국에 공급하면서 더욱 번성했으며, 수백 명의 직원을 데리고 소금을 공급하던 객주들은 대금업과 수산물 도매로 막대한 자본을 형성했다. 인근 군산항 개항으로 수입 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나가면서 수산물, 곡물, 공산품 등을 아우르는 국제중개항의 역할을 했던 항구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일본식 건물을 많이 짓게 되었고 그들이 살았던 그 건물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금강의 포구 도시 강경의 최대 유산은 오늘날의 강경 젓갈시장이다. 내륙 포구로서 강경 사람들은 소금으로 해산물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강경 사람들이 찾아낸 토굴 형 저장창고는 젓갈류를 위생적으로 보관하는데 적합한 시설이다. 연중 섭씨 10~15도를 유지하는 덕분에 강경 젓갈은 신선하고 맛이 좋다. 젓갈이 출하되는 시기 강경읍내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소비자들로 북적인다. 강경의 근대유산을 따라 거리를 산책하다가 옛 부듯가인 염천리 젓갈시장에 들어서면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 하든 헤쳐 나갈 방도를 찾아내는 강경의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 논산천(論山川)
2010년 현재 국가하천의 유로 연장은 57.1㎞이고, 유역 면적은 667.16㎢이며, 금강이 본류이다. 지방1급하천의 유로 연장은 35.65㎞이고, 유역 면적은 198.68㎢이다. 이 하천은 전도 완주군 운주면 왕사봉에서 발원하여 논산시 양촌면 거사리를 지나 강경읍 북옥리와 서창리 사이에서 강경천과 합류하여 금강에 이르는 하천이다. 논산시를 가로지르며, 동쪽의 산지부터 서쪽의 평야에 이르고 있다. 취락은 대체로 논산시 서쪽의 넓은 평야지역에 입지해 있다. 또한, 논산천의 지류인 노성천·마산천·왕암천·왕덕천·방축천 등에 의해 형성된 충적평야의 경지정리가 잘된 농토를 통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곳곳의 구릉지와 산의 사면에서는 밭농사와 과수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논산천은 과거 유량이 적어 금강하굿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조석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았다. 논산천은 원래 곡류하천으로 유로가 불규칙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이르러 유로가 반듯하게 펴지고 양안에 제방이 축조되었다. 과거의 유로는 제방 바깥쪽의 곳곳에 우각호 모양의 구하도로 남아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경지 정리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대부분 매립되었다.
♤ 에필로그
준희선생님이 특명을 주셔서 기럭시로 보면 지맥 마무리 즈음에 올라와야할 예정에 없던 노성지맥을 앞세웠습니다. 검토해보니 노성과 상월면은 논산딸기로 유명하니 벌렁코를 들썩이며 딸기의 계절에 걸어보면 장사가 남을까 생각을 했네요. 상월면은 금남정맥을 할 때 향적산에서 계룡산으로 향하며 금강대학을 찾아보고 간 기억이 있고, 저의 고향은 충남과 연하는 전북 완주군이라 논산의 양촌면, 가야곡면, 연무읍은 익숙한데 이번 노성지맥은 논산의 윗 지방을 관통하여 새로웠구요. 논산은 백제의 수도 부여, 공주에 인접하여 그 영향권에 있었던듯 합니다. 황산벌, 개태사, 노성산으로 대표되니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유서깊은 고장임은 틀림없지요. 논강평야에서 알 수 있듯 강과 평야지대를 낀 기름진 옥토가 있으니 외부와 교통도 쉽고 이합집산이 활발해 상권이 형성되기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노성은 반은 산이고 반은 도로라는데 산길 또한 산책로처럼 더없이 순해서 좋았고 노성산까지 계룡산이 줄곧 동행합니다. 선답자님들은 노성지맥을 걸으며 어떤 감회에 젖으셨을지 파아란 보리싹을 쓰다듬는 봄바람이 부는 시기에(아! 글고보니 이날이 제 생일...) 월명산 정자에서 황산벌을 바라보며 산천은 의구하되 그 옛날 백제의, 고려의, 조선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맥수지탄(麥秀之嘆)이 절로 느껴지더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노성지맥 4월 넷째주 원샷으로 할려고 합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은것 같습니다
잘 포스팅 해서 잘 이요하여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홀로 산행 고생 많이 했습니다
늘 응원하고 늘 안산 즐산 하세요^)^
선배님!
노성지맥은 가볍게 나서셔도 될것 같습니다.
기럭시만 조금 되지 등로 상태는 반은 도로인지라 그닥 어렵지 않네요.
진행하는 내내 멀리 금남정맥 줄기가 바라보이는데요.
노성산까지는 왼쪽으로 계룡산 줄기가 보이고요.
후반은 오른쪽으로 부소산으로 가는 줄기가 보입니다.
중간중간 음식점과 편의점을 지나고 도로를 따르니 물 구하기도 쉽습니다.
해서 배낭도 가볍게 꾸려지네요. 걱정 없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성지맥 원샷마무리를 축하드립니다.
산줄기도 비교적 유순하고 도로따라 걷는 길이 많은 산줄기이기도 합니다.
175.1봉의 깨진 표지판을 회수해 왔던 기억이 나는데 잘 보존되어 있군요.
강경이 고향인 대락님과 함께 하면서 바랑산님, 해피마당쇠님도 만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덕분에 3년이 된 지난 추억을 되살려 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앗! 깨진 산패를 방장님이 회수를 하셨군요.^^
어느 분 산행기에서 깨진 산패를 본 기억은 있습니다.
준희선생님이 잠시 헛갈리셨나봅니다.
부뜰이선배님이 교체를 하셨는데 저보고 교체하라고 산패를 주셔서 서둘러 다녀왔거든요.^^
크게 부담없이 다녀왔습니다.
제가 또 물집이 터져도 도로를 걷는 데는 자신이 있거든요.
딸기가 보이면 한다라이 사먹을려고 했는데 구경을 못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