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10호 수필 원고] 억겁의 인연
姜 中 九
며칠 전 중국 양쯔강으로 삼협크루즈를 갔다가 오늘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이웃에 사는 진주사범학교 동기생인 최달성 소장으로부터 정병욱 사장이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다.
건강하던 그가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그래서 사범학교 친구 몇 명이 병문안을 하러갔더니 얼굴이 약간 수척했을 뿐 큰 병 같지는 않아서 빨리 완쾌해서 퇴원하라는 당부를 하고 왔다.
그리고 한 달쯤 전에 병원을 옮겼다고 하기에 다시 병문안을 하러갔더니 지난번보다는 훨씬 수척해 있었는데 부인은 췌장암이라고 하면서 본인에게는 실망할까봐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게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게 된다. 나도 80년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인연이 깊었던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정병욱 사장을 들 것이다.
정 사장과 나는 고향인 합천 쌍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진주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진주사범학교로 함께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졸업을 했으니 그와 나는 고향 동무이자 12년을 동문수학한 학우이다.
성격이 얌전한 그는 착실히 공부하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결석을 많이 하는 바람에 성적은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범학교 졸업식 날 교정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그는 고향의 모교로, 나는 야로초등학교로 발령받아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2년 후에 징집 영장을 받은 그와 나는 함께 논산 육군 제2 훈련소에 입대하여 22연대 16중대 1소대로 배치받아 훈련도 같이하고 식사도 같이했으며 잠자리도 같이했다. 심지어는 화장실도 같이 다녔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교육계를 맡아서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는 모범훈병이었지만 서무계를 맡은 나는 겨우 업무를 수행해나갔을 뿐이다.
제2 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을 수료한 후 후반기에서 박격포와 로켓포 등 중화기교육을 받은 그와 나는 단 두 사람에게만 부여하는 주특기인 작전정보병도 같이 받았다. 그리고 내가 차드 작성을 잘한다고 제2 훈련소 27연대 작전과로 특명을 내려는 것을 마다하고 그와 함께 춘천 제3 보충대대로 갔더니 또 1군 통신단으로 가라는 것을 마다하고, 38선을 넘어서 제3사단으로, 23연대로 함께 갔지만 거기서 나는 연대본부 인사과로, 그는 3대대로 배치되고 말았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그러나 3대대 본부 서무계로 배치 받은 그는 그의 날마다 공문서를 가지고 연대본부로 오는 바람에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하고 주보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술값이 없어서 주보장인 김 하사에게 혼이 나기도 했고.
그리고 어느 날은 그가 근무하는 3대대로 놀러오라고 하기에 20리 길을 찾아갔더니 3대대 본부는 철의 삼각지 휴전선에 가로놓인 오성산 자락 속에 숨어 있었다. 그는 반갑다면서 주보로 가서 술을 사주는 바람에 술에 취한 나는 연대본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의 책상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 몇 달 후에 휴가를 받아 함께 고향으로 갈 때는 차비가 없어서 40리 고향길을 함께 걸어가기도 했고.
그래도 세월은 흘러서 휴전선을 지키던 우리에게도 제대특명이 내려왔다. 그런데 특명을 받아보니 정 사장은 군번이 나보다 빠른데도 제대날짜가 3일이나 늦었다. 이상해서 살펴보니 육군본부에서 제대특명을 발부하면서 정 사장의 군번 10517208의 7자를 9자로 써놓아서 10519208로 발부되면서 2,000번이 늦었고 그에 따라 제대 날짜도 3일이 늦어진 것이다.
하지만 논산훈련소에 함께 입대하여 철의 삼각지 금화전선까지 함께 와서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어찌 그를 혼자 두고 갈 것인가. 그래서 나는 제대 후 3일 동안을 부대에서 더 머물다가 그와 함께 귀향했는데 그는 이 일을 평생을 두고 고마워했다.
학교에 복직한 몇 년 후 내가 모교로 발령이 나자 이번에는 그와 내가 모교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축구와 배구 등 직원체육도 함께하고 방학 때면 함께 가야산으로, 제주도로, 설악산으로 여행을 다녔으니 얼마나 우정이 깊었겠는가.
그런데 1966년 중등학교 교원자격고시검정시험에 합격한 내가 거제고현중학교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났고 다음해 합천농고로 갔다가 사표를 내고 부산시 교원채용순위고사를 거쳐서 경남여고로 발령을 받고 보니 그가 먼저 부산의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와 있어서 우리는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사표를 내고 금성사 계열사인 성요사로 직장을 옮겨갔지만 우리는 여가만 있으면 만나서 정담을 나누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달마다 동창회에서도 만나곤 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그와 나의 두 부부가 함께 그의 승용차를 타고 경주로, 포항으로, 단양팔경으로, 지리산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자 고향의 사범학교 동기생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오늘날까지 즐겁게 지내고 있었으니, 그와 나의 인연은 한이 없다. 그런데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니, 이를 어쩔 것인가.
불가에서는 전생에 천 번을 만나야 이 세상에서 옷깃을 한 번 스친다고 했는데 초, 중, 고교 생활 12년에다 군대 생활과 모교 근무 4년을 함께 하고 다시 부산에서 만나서 80세가 될 때까지 긴 세월을 함께 해온 그와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고향 동무이자 학우이고 전우이며 직장 동료이고 영원한 친구로 평생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던 내 다정한 친구 정병욱 사장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姜 中 九
· 경남 합천 출생, 진주사범학교 졸업, 1990년 『에세이 문학』 추천완료,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원, 에세이부산문학회 창립회장, 수필부산문학회 고문,
· 저서: 『가을에 그린 초상화』, 『징검다리가 있는 마을』, 『고희의 꿈』, 『국토기행문집 산이 있기에 물이 있기에』, 『세계기행문집 몽블랑을 찾아서』, 『그 찬란했던 배낭여행기 인도』,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남아메리카 배낭여행』, 『맨발로 돌아본 일본』, 『야생의 땅 아프리카』, 『고희에 길을 나선 중국 일주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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