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산2-10(마애삼존불길 65-13)
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보원사를 가는 가야산 용현계곡 깊숙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1959년 홍사준 선생에 의해 부각되었다. 이후 국보고적보존위원회에 보고되어 현장 조사를 한 결과 백제시대의 뛰어난 불상임에 밝혀졌고 서산 마애석불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산 마애불은 가운데에 본존인 여래가 서 있고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 반가(半跏)보살상이, 왼쪽에 보주(寶珠)를 받들고 있는 봉주(捧珠)보살이 협시(夾侍)를 이루고 있다.
우선, 가운데 여래상은 전체조각 가운데서 얼굴을 높이 부각하고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츰 낮게 새겼는데 목이 짧아 3도가 없다. 특히 큰 눈과 함께 도톰한 볼과 입술은 전체 조각과 어울려 빛의 방향에 따라 환하게 미소 짓는 것 같은 신비로운 형상을 한다.
보원사지(普願寺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1
사적 제361호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용현계곡을 따라서 더 들어가 보면 비교적 넓은 지대가 나타난다. 그곳이 상왕산 서남쪽 계곡에 자리한 운산면 용현리의 보원사터다. 상왕산과 가야산은 한 자락으로 이어져 있다.
가까이에 있는 백제 시대의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본사라고도 하고, 한때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하나 절의 내력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퍽 널찍한 절터에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고려 초기의 국사였던 법인국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이 있어 고려 시대에는 꽤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이 일대에 아흔 아홉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 버렸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할 뿐이다.
빈 절터에는 당간지주(보물 제103호)가 절터의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 안쪽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고려 시대의 오층석탑(보물 제104호)이 자리한다. 안쪽으로 석조(보물 제102호)와 법인국사부도(보물 제105호), 그 부도비(보물 제106호)와 건물자리의 기둥초석들이 넓은 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발굴 조사 때에 백제 때의 금동여래입상과 통일 신라 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기왓장들은 백제 때부터 고려 때의 것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 법인국사 탄문스님(900∼975)
고려 스님. 자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씨(高氏). 광주(廣州)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에 뜻을 두어 부모에게 청하여 마을 절에서 삭발하였다. 이후 향성산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 동안 수행하여 성사미(聖沙彌)라 불렀다. 북한산 장의사 신엄스님에게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계에 철저하여 고려 태조가 별화상(別和尙)이라 불렀다.
926년(태조 9) 왕후가 임신하자 왕명으로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렸다. 광종이 태어난 후 더욱 총애를 받았다. 구룡산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에는 새가 날아들고 범이 뜰에 엎드렸다는 말이 전해온다. 942년에 메뚜기의 해가 심하자 대반야경을 강하여 물리쳤다. 혜종과 정종도 스승으로 모셨다. 광종은 왕사로 봉하여 귀법사에 있게 하였다.
974년(광종 25) 국사가 되어 가야산으로 옮길 때에는 왕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했다. 이듬해 3월 보원사에서 가부좌하고 죽었다. 탑호는 보승(寶乘)이며, 시호는 법인(法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