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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본문: 잠16: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옛날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볼품 없고,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이에 수도원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해질 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의 시체가 쌓였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환히 보고 아십니다.(잠20:27)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낱낱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며,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잠언 5장 21절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리라' 또 욥기 34장 21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 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시편 94편 9절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살피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10)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의 문명과 함께 발전되어온 것 중의 하나가 거울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거울을 동판이나 철판을 잘 갈고 닦아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사람의 얼굴의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서 말해 내려 가다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오늘날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서를 쓴 바울 당시만 하더라도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볼 때마다 희미하게 보인 줄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대개 유리로 거울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아주 분명하게 보입니다. 문명할수록 거울이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호텔이나 상점이나 가정에도 대문짝만한 거울을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 같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 좋아하고 이것만 가지고 부족하니까 몸 전체를 보려고 그렇게 큰 거울을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보통으로 자기가 잘 생긴 줄 압니다. 그리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에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잘 치장을 하고 나갔을 때 보는 사람이 칭찬을 해주면 하루종일 기분 좋아합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국민의 여론을 때때로 조사합니다.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에 보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 잘난 줄 알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에 칭찬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사람이면 오래가지 못 합니다.
옛날 바벨론 왕 벨사살이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와 온 국민이 그를 높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청년은 천여 명의 귀한 손님들을 청해서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담벽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란 글을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왕이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그리고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와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서 바벨론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이 높이 평가하는 것도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요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중량이 있느냐?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도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떤 눈입니까? 여호와는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보십니다. 높은 데, 낮은 데, 먼 곳, 가까운 곳이 없습니다. 어디나 보십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잘 때나 깰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여행할 때나 언제나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현재만 보시는 것이 아니고 과거도 보시고 미래까지도 보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모태에서 내 형체가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나이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하는 일을 살피십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기름을 부어 장차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이새의 집에 갔더니 키가 크고 용모가 잘 생긴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이 왔습니다. 사무엘이 보니까 아주 잘 생겼습니다. 아, 이 사람이 왕이 될 사람인 모양이다. 그래서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속삭이는 말씀이 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는 이미 이 사람을 버렸노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보통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람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데 심리학의 용어대로 하면 Complex obsession, 즉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람, 그 욕망, 야심 사상, 심리의 증상을 보십니다. 에스겔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를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큰 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있어요. 그 구멍으로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잘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벽을 헐라! 그래서 에스겔은 구멍을 크게 만들었고 그 벽을 헐었습니다. 그랬더니 큰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라 해서 그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안에는 온갖 더러운 짐승, 벌레, 그리고 그 벽에는 우상을 그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깜짝 놀란 것은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에게 분향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면서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을 알지마는 내가 이렇게 분명히 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담으로 쌓고 문을 꼭 닫은 다음에는 내 속을 누가 알겠는가? 합니다. 사실 사람이야 모르지요. 그러기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가운데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숨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39편에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에 계시나이다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노아 때의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보셨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죄를 보셨습니다. 또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세계 역사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눈으로 무솔리니를 보셨고 히틀러를 보셨고 모든 독재자들을 보셨고 보신대로 달아보신 대로 갚으셨습니다. 전에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에서 남이 모르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깨닫고 시편 51편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시여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한 일을 하였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습니다. 전에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는 남몰래 감추었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작은 죄나 큰 죄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과 밖을 꼭 같이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행동과 꼭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 마음 속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죄 가운데서도 외식하는 죄를 특별히 미워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곁은 깨끗이 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너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 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모든 죄가 가중하지마는 외식하는 죄는 두 가지 죄가 겸했습니다. 속에 있는 더러운 죄,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눈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땅에서 무고하고 압박을 받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민족의 곤고한 것, 슬프고 억울한 사정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그 민족을 구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오늘 우리 한국 민족의 사정을 다 보시고 계실 줄 믿습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사정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형편과 사정도 보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눈이십니다. 전에 나오미와 룻, 외로운 두 여인을 보셨습니다. 도와 줄 사람 없는 불쌍한 이 여인들을 보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가다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과 물을 주어 새 원기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습니다. 이달리야 대 백부장 고넬료가 은밀히 기도하며 남모르게 다른 사람을 돕는 자선사업을 많이 했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군인으로만 보았지만 하나님은 고넬료의 은밀한 생활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하게 되고 온 가정이 처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행 10:1- 35)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행하시며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는 이를 찾아서 그를 지켜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같아서 우리의 속마음을 헤쳐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은 혹시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우리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면서 우리 양심에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렘16:17)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참새 하나가 떨어지는 것까지도 아신다”(마태10:29)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인간에게 적용하시며 “하물며 참새보다 더 귀한 너희일까보냐”라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영적인 세계를 아십니다. 욥은 “스올도 당신 앞에 드러나 있나이다”(욥 26:6)라고 고백했습니다. 스올은 죽은 사람이 가는 세계인데 그곳도 하나님의 감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도 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그 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인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도다"(시편 33:12∼15)고 하였고, 요한 1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범한 죄를 모르기 때문에 자백하란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십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죄로 인정할 때, 이 죄 때문에 가슴 아파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새가 알을 품고 있듯이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죄사하려고 십자가에서 이 시간 그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보시고 알고 계신데 우리가 어리석어 아직도 죄를 품고 있으면 이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지체하지 마시고 주님께 와서 모두 내 놓읍시다. 주님은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기다리십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께서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편 13:1∼4).
제가 유럽의 어느 교회에 갔다가 참 좋은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정면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지만 내가 방문했던 교회의 예배당 정면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2)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교회에 갈 때마다 고민이 앞섰습니다. 교회의 한 선생님이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이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가능하면 그 선생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좁은 교회 안에서 번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이야 어떠하든지 자신이 한 주간 지은 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은 노력하면 의도적으로 몇 번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하여도 피할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하시며 살펴보십니다. 한 인간 앞에서도 한 주간의 삶 때문에 걱정하며 떤다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에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거룩하게 서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존귀와 위엄이 있는 곳,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 서도록 합시다.(시96:6)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구약학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구약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입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교수님 댁을 찾아가 잠깐 만나 뵙고 나왔지만, 그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방에 붙어 있던 라틴어로 쓰여진 짧은 문구였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한참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이라 그 문구는 유별나게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하나님 앞에’ 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진지한 삶의 자세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고 체면에 관심을 갖게 돕니다.‘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삶의 자세에 비교한다면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사는 생활은 얼마나 귀합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를 항상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온전히 의지하여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을 넉넉히 극복하여 승리의 삶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기도: 빛으로 오신 주님,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안에 아직도 숨겨져 있는 어두움의 영역에 빛을 비추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변화되고 영적인 빛을 소유함으로써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전도자 무디
세계적인 전도자요 설교자인 무디(Moody)는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교회학교 생활도 엉망이었다. 그는 요한복음을 찾기 위해 창세기부터 침을 묻혔다. 무디는 성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독교교육이 미흡하고 학교생활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디는 그래서 친구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다. "너처럼 희망 없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사용될까? 네가 우리의 친구라는 것이 부끄럽다." 친구들은 무디를 향해 놀려댔다. 무디는 그래서 늘 고독했다. 그래서 그는 고독한 시간들을 하나님께 드렸다. 무디는 미약하나 겸손한 마음으로 매일 기도를 올렸다. 결국 무디는 세계적인 전도자가 됐다. 하나님은 작고 미미한 것을 놀랍게 사용하신다. 무디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존재로 비쳐졌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희망의 재료'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식과 상상을 초월한다.
2. 묵상 및 토의
0 늘 당신의 영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0 나는 지금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0 나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믿는가?
0 나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살고 있는가?
0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은 은밀한 곳에서 더 바른 행동을 하는가?
0 나는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합니까? 또한 내 삶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갑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하나님이 보신다.
어떤 아이가 길을 가는데 전공구 또 철사 전기줄 그리고 여러 가지 철품이 있어서 웬 홍자인가 하여 주어서 가져 갈려고 하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기를 "이놈 두고 가거라"하여 아이는 이상하다 생각하고 주위를 보아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소리가 들리는데 위에서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위로 쳐다 보았더니 전기기사가 전주대 위에서 전기를 손보면서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누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도적질하고 악을 행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면 이 땅의 삶은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경건하게 날마다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가을 달밤에 어떤 사람이 어린 아들과 같이 바람 쏘이려 들판에 나갔더니 무우 밭에 무우가 먹음직하게 보여서 아들보고 망을 보라 하여 아버지는 밭에 들어가서 무우를 잡고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하니 아버지는 누가 보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주일하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아이는 무릇 두 번이나 번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에이! 아무도 없지 않니! 하면서 세 번째 밭에 들어가 무우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버지 봅니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또 나와서 "야! 보기는 누가 보느냐?" "아버지! 하나님이 보십니다“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9:4)
* 예화(2): 눈동자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한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만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나다. 이 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특별히 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 예화(3): 우리를 지켜보시는 아버지
어느 미식축구 팀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가 한 명 있었다. 하루는 코치가 그에게 다가가, “나 좀 보게, 여기 전보가 한 통 왔네” 하고 말했다. 코치가 전보를 뜯자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사망했으니 속히 귀가 바람”이라고 써 있었다. 코치는 그에게 가서 “얼마 동안 쉬었다 오게”하고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며칠 뒤 경기 시간이 되어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달려 나오고 있는데, 그 말썽꾸러기 선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자 그는 “코치님, 제발 경기에 뛸 수 있게 해주세요. 경기를 꼭 하고 싶거든요”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코치는 거절했다. 제1쿼터는 코치가 맡은 팀이 일방적인 점수 차로 패했다. 제2쿼터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어 갔다. 코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게으름쟁이 친구가 다가와 다시금 코치에게 요구했고, 코치는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그가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팀이 활기를 찾았다. 그는 종횡무진 경기장을 뛰어다니며 상대팀 선수를 막고, 태클을 했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경기의 마지막 순간에 코치의 팀이 승리했다. 그는 순식간에 영웅이 되었다. 경기를 마친 후 코치는 그에게 다가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코치님,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시각 장애자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신 거죠.”
* 예화(4):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초나라에 장 왕이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 그를 곁에서 지켜 본 신하들은 그가 왕이 되면 무언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음날부터 장 왕은 술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달거나 반대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왕이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초나라는 국력도 쇠퇴해갔고, 사회 곳곳이 썩게 되었다. 이를 본 소종이라는 신하가 왕에게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목숨을 건 그의 충정어린 발언에 왕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왔소. 내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시오.”
초나라의 장 왕도 그러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의 눈은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렇다면 왜 충성된 사람을 찾으실까?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이 땅을 두루 살피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 예화(5):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서
개신교 전통 안에서 자란 나는 가톨릭 신부와 사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가까이 접해 사귀게 된 신부님이 한 분 있었는데 대학 4년, 대학원 2년 동안 내게 라틴어를 가르치셨던 파울로스 신부님이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학과 친구와 함께 혜화동 기숙사에서 살고 계시던 신부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으나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방 벽에 붙어 있던 짧은 라틴어 문구였다. "Me Vidit Deus"(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진지한 신앙인의 자세일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늘 긴장하며 신경 쓴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고 체면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사람의 눈치 보며 불필요한 긴장 속에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싶어서 경건하고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갖는다면 이것이 진정 우리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김득중
4. 찬송: (420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1.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나 슬픈 일 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합소서 오 주여
[후렴]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 주랴 영광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