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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8 (사도행전8:1-8절) 땅끝까지 복음을
오늘은 사도행전8장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성도들의 복음 전파와 빌립의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선교와 전도의 용어를 이해하고 넘어가는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선교는 뭐고 전도는 뭐냐?
선교는 좀 넓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복음전파 사역이고
전도는 단편적이고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전파 사역입니다.
다시말해 선교는 언어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거나 혹은 개인보다는 단체를 이루어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는 걸 선교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아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종족이나 나라에서 복음사역을 전개하거나,
혹은 국내지만, 의료선교, 군선교, 사회문제, 환경문제 인권문제와 같은 집단적인 특수한 영역에서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전개할 때, 선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것은 원초적인 복음 전도로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 같은 국가 안에서
개인과 개인의 접촉을 통해 복음 전하는 것을 전도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도는 선교에 한 부분에 속한다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전도라든지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알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가끔 평신도 선교사라고 하는 말도 쓰는데,
이런 선교사의 용어도 함부러 남용하기보다는 앞서 말씀드렸던 선교지에서
혹은 특수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하는 분에게 선교사의 호칭을 쓰는게 맞습니다.
선교사는 엄밀히 말해 목회자로서 이런 선교적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을 선교사로 부르는게 맞지만, 일반 평신도들은 선교사라기 보다는 전도자로 부르는게 맞습니다.
아무나 선교사라고 불러 그 호칭을 남발해서 선교사나 선교에 대한 이미지를 손상 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사도행전8장을 통해서 혹은 앞으로 전개되는 복음 전파에 대해서 이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는지. 또 복음전파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사도행전8장을 보면, 복음이 점점 예루살렘에서 유대전역과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게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주체가 누구며, 어떻게 복음전파가 확산되어 가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모든 교회의 공통적인 관심은 교회 부흥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의 부흥을 꿈꾸면서도, 우리가 한가지 착각하는게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주체를 우리의 열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스데반의 설교에서 스데반이 유대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가 뭐였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진짜 성전은 인간이 만든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곳,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라는 말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선교나 전도, 교회의 부흥과 성장도 마찬가집니다.
복음전파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다시말해서 복음전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게 왜 쉽지 않습니까?
때론 전도할 때, 말 꺼내기 조차도 쉽지 않죠?
여러분은 주위에 계신분들 직장동료들이나, 이웃들에게 얼마나 복음을 전해 보셨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대부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전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니까,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고, 두려운 겁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고, 나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전도할 때 그 저변에 깔린 배경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내가 전하는 말에 반대하거나 듣지 않거나 공격 받을 때,
속상해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합니다. 쉽게 전도가 안됩니다.
그러면 실망감에 빠지고 자괴감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복음 전파의 배경에는 성령의 역사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해진 핍박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핍박을 피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핍박 속에도 복음전파에 전혀 위축됨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불길같이 일어납니다. 왭니까?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복음을 전했는데 핍박이 와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근데 그게 성령의 역삽니다. 그래서 흩어진 겁니다.
우리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자 하고 흩어진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전파의 주체는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안받아 들이고는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성령에게 달려 있어요.
성령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계획된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어눌한 말로 전도해도 주님 앞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나가자 하나님 믿자 그 한마디 말에도 나옵니다.
그게 힘든 일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전하면
하나 어려울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려고 하니까 힘들고, 실망하고, 핍박에 좌절 하는 겁니다.
보세요. 성령이 하시니까, 핍박 조차도 은혜가 되고, 부흥이 되고, 놀라운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뭐, 친구 초청 잔치니, 무슨 전도부흥사경회니....
우리가 이런 계획을 세운다고 전도가 되는게 아닙니다.
과거에 그런 전도축제 같은 프로그램 많이 계획하고 했잖아요.
그래서 누구 데려오면 선물주고, 전도왕 뽑아서 금반지 주고.....
심지어는 이웃에 멀쩡히 잘 다니고 있는 교회 교인도 데려와......
한참 그게 유행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왔어요.
근데 연말에 가보면, 그렇게 전도해 온 사람 하나도 없고 성도수가 똑같어....
어떤 교회라고는 말 안하겠지만, 수원에 있는 모교회는 교역자 사례를 드릴 때,
자기가 맡은 교구가 얼마나 전도했는지 전도결과에 따라, 성과급으로 정한데요.
웃기지 않습니까?
이게 다 뭡니까? 인위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이죠. 그건 전도가 아닙니다.
사업이고 비즈니스지...
전도는 내가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워서 하는게 아닙니다.
복음전파는 그게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는겁니다.
우리 속에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공급하는 힘과 인도로 해야 진짜 택한 백성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게 그게 진짜 복음 전팝니다.
보세요. 그렇게 인위적인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장한 우리 한국교회가
코로나 기간 동안 싹 허물어져 버렸잖아요.
왜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운 모래성 같은 교회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교회는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사정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더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든 전도든, 우리는 성령의 힘이 필요해요.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달라고 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8장 내용도 보세요. 복음이 확장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유대전역과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이 모든 상황의 주체가 누굽니까? 성령이십니다.
특히9절 이후를 보면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다가 에디오피아에서 큰 권세를 가진 유대인 출신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성경에 이 내시의 정확한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라는 여왕에게 총애와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최고위급 관리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오해하면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내시라고 우리 성경에 표현하고 있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중에 내시로 알면 큰일 납니다.
이게 우리말로 잘못 번역된 좋은 사례인데요.
여기서 내시라는 말의 그리스 원문에 보면 에피스타테ἐπιστάτη로 나오는데
관리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 안에 내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마, 영어성경을 보고 번역하다보니까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유넥크eunuch라고 되어 있는데 이 유넥크가 내시를 뜻하거든요.그래서 아마 우리말로 내시로 번역된 거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보면, 에피스타테, 즉, 관리자, 혹은 책임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내시로 알려진 이 사람은
에티오피아에서 아주 최고위 관리였던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마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이 에티오피아 국민70%가 기독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6.25때도 참전했던 고마운 나라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복음에는 반드시 고난과 핍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누군가의 피 흘림이 없이 복음은 확장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 복음은 더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평안한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사라진 지금 교회는 점점 쇠퇴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희생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섬길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들 자기 살기 바쁘지,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려는 사람 본적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성령에 지배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맘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살려는 이유는 딱 한가집니다. 내가 편안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대로 살면 힘듭니다. 나를 희생해야 하고, 고난을 받아야 하고,
핍박을 감수해야 하고, 남을 섬겨야 합니다.
이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갈수록 어렵습니다.
그런데, 내가 편안하고, 좋을려면 성령대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희생할려고 하겠습니까? 내 만족을 위해 살지.
누가 자기를 희생하면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희생이 따릅니다.
오늘도 스데반 한 사람의 희생이 많은 믿는 이들로 인해 핍박이 시작됩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그 일로 인해 복음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들불처럼 번져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 지역이 나옵니다. 바로 사마리아입니다.
이 사마리아 지역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저주의 땅입니다.
사마리아 출신들은 이방인보다 더 못한 개.돼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출신들과는 상종도 안했습니다. 그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거나, 그 땅을 밟으면 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보다 더 혐오했습니다. 왜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초대왕이 사울왕이었고, 그 다음 다윗이 왕이 되었는데, 그 아들 솔론몬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솔로몬이 죽고 나서,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북쪽은 북이스라엘, 남쪽은 유다....이렇게 두 나라로 갈라서는데
정통성은 남유다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 후 남유다도 바벨론에게 망하는데,
남유다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수많은 포로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갔던 대부분은 고위층 사람, 지식인, 똑똑한 사람들만 골라서 끌려 갔습니다. 포로로 끌려갔지만 바벨론이 이런 사람들을 중용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바벨론의 정복정책에 의해 다른 민족을 이주시켜
강제로 혼혈정책을 써서 남은 자들은 유대인으로 정통성과 순수혈통을 변질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페르시아의 정복정책은 바벨론하고 달라서
정복한 나라의 모든 종교, 문화를 존중하고 대신 총독을 내세워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끌려온 포로들을 전부 자기나라 고향으로 다 돌려보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비록 포로로 끌려갔지만 순수한 혈통과 신앙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이 전부 이방인 여자와 남자와 더불어 결혼해서 다 혼혈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 사람들을 모여 살게 했던 곳이 바로 사마리아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는 차별받기 시작하고, 유대인들과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자, 상종하지 않는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하기 시작한게 예수님 당시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한번 보세요.
거기 보면 붉은 색으로 사마리아로 되어 있죠. 그 위가 갈릴립니다.
유대인들은 북쪽 갈릴리 지역을 갈려면 사마리아 땅을 거쳐가면 빠른데,
그 사마리아 지역을 피해서 돌아다녔습니다.
왜요? 부정한 땅, 저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곳을 예수님도 가셨고, 오늘 전도자들도 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은 못갈 곳이 없다는 겁니다.
왭니까? 성령이 복음의 주체자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이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흩어지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비록 가기 싫고, 복음을 전하기 싫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가야하고 만나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세요. 복음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뜻하지 않는 귀인도 만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보세요.
성령 받기를 기도했다.......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 받기를 기도하세요. 구하세요.
눅11:9-13절에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무엇을?.....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성령을 구하십시오. 거기에서 힘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핍박이 와도 이겨내고,
시험와도 이겨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시험과 핍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그걸 겁내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고, 구원할 만한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복음을 전할 때,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보게 하시고,
내가 가는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전도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어지길 바라며,
매일매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두란노교회와 성도여러분들에게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