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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시간은 이렇게
I. 경건의 시간 (QUIET TIME : 약칭 Q.T)
유래 및 정의
1. Q.T 의 유래
Q.T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그 바쁜 와중에 서도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Q.T 를 했던 믿음의 선배 대부분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활이 바브다 하더라도 주님과 교제를 최우선적인 일과로 삼았던 것이다. (忙中閑) 흔히 Q.T의 성경적인 예로써 막 1:35을 이용하여 바쁜 사역 중에도 기도하러 나가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들게 된다. (눅 5:16) 그리고 일반적인 Q.T의 유래로 영국 캠브리지 대학생들로 후퍼 (DOUVLAS HOOPER) 와 손톤 (THORNTON)을 손꼽게 된다. 후퍼는 1학년 때인 1882년 캠브리지에서 열린 무디 (D.L. MOODY)의 전도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심히 경건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고 많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서약서에 서약하도록 권유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아침 일찍 최소한 20분, 가능하면 한 시간씩을 기도와 성경연구를 위해 따로 떼어 놓으며, 또한 잠자기 전에도 계속해서 잠깐씩 그러한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가 4년후 대학을 떠나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갈 때 마지막으로 동료 학생들에게 그가 한 말은 놀랍게도 선교에의 권고가 아니라 "「경건의 시간」을 기억하라"는 말이었다.
특히 손톤은 경건의 시간 (Q.T)를 위하여 제 시간에 일어나기가 극히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게으름을 단련으로 전환시키기로 결심하고 게으른 버릇을 바로 잡는 아주 간단한 자동장치를 고안해 냈다. 이것은 그의 침대 옆에 부착된 새로운 장치로써 「자명종의 진동이 낚시대를 튕기게 하고 낚시줄에 달아놓은 담요가 잠자는 사람의 몸을 떠나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도록 한 것」 이다.
그들은 공부와 강의와 각종 경기와 자유토론 등 활동의 압력으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열정적인 활동만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런 그들에게 무디 집회를 통해 자신의 영적 갑옷에 틈이 생겼음을 발견했다. 그 해결 방안으로 하루 중의 얼마를 성경 읽기와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그것을 `경건의 시간 (QUIET TIME : Q.T.)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Q.T로 그 갈라진 틈을 메꾸어 빛을 잃어가던, 매일 재발견되어야 할 진리들을 소중히 간직하게 하여 주었다. 그래서 1882년 캠브리지 대학 구내에서 다음과 같은 슬로우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경건의 시간을 기억하라."
이 제안이 불붙게 되었는데 드디어 탁월한 운동선수들과 부유하고 잘 교육 받은 사람들의 무리인 「캠브리지 칠인」을 선교사로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경건의 시간, 곧 괄목할 만한 영적 축복의 기간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 「부귀와 명예, 영화」을 내어 던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중국으로 가게 되었던 것 이다.
참고자료 : 로버트 D. 포스트, 「하나님과 함께 7분간」, 한국 네비게이토 선교회, 켈리 제임스 클라크, 한화룡 역. 「Q.T 자료 모음」 제 1집, 두란노 서원. P. 11.
2. Q.T의 정의 말씀
(1)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시간 (전 5:1-2) : 하나님 -------- 나(우리)
기도
흔히 `교제' 하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방법은 대화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그 분과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대화에는 일반적으로 독백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듣는 자 (청취자)가 있고 말을 하는 자 (화자)가 있다. 이처럼 하나님과 대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시간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기도는 잘 할 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잘 배우지도 못했고 잘 할 줄도 모른다.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직접 우리에게 말씀 하실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대화는 대답이 없는 독백처럼 되고 만 것이다. 실은 대답이 없는 것이 아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몰라서 듣지 못하는 것뿐이다.
전 5:1-2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너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갈 때에 <요즈음 우리 신약시대로 말하면, 하나님과 사귀려고 만날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은,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 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기도부터 길게 하지 말고 「물론 자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하나님이 이미 아시기에 급급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말고」 성경부터 읽고 묵상한 후에 배운 바에 따라서 겸손히 응답 받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 곧 성경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경건의 시간 (QUIET TIME)을 올바르게 가지려면 먼저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깨달은 후에 우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참고서적 「명상의 시간」, 윤 종하 지음, 성서 유니온 출판사, 1987. 14판.
(2)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자라가는 시간 (벧후 3:18, 벧전 2:2, 골 1:10, 엡 4:15, 골 2:19, 벧후 1:5)
기독교의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 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흔히들 `안다'라고 할 때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어떤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고 「perception : 인지, 마 24:33」. 또 하나는 어떤 인격체와 경험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 (experimental knowlege : 경험적 지식,예 마 7:23, 1:34) 이다. 전자는 지각을 통해 어떤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후자는 인격적인 몰입을 통해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단순히 지적으로 파악하느냐 (knowing about God -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아니면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누리고 있느냐 「knowing of God - 하나님을 아는 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의 비축으로만 대치된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삶의 고뇌와 희열을 아뢰고, 그 분의 인도와 지시를 받는 신앙의 진면목은 영원히 사장되고 말 것이다. 가령 `하나님은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 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외워서 그대로 기술하면 되지만, 후자는 우리의 인격이 몰입되어 그 분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찬양하는 일이 수반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 「about]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랄 「of] 고 명령하고 있다. 「대상 28:9, 호 6:1-3, 벧후 3:1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대 부터 (요 17:3) 계속하여 그 지식 가운데 점차 자라나야 한다. (골 1:10, 벧후 3:18) 이를 위해 우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자꾸만 배우되 단순히 머리지식 (head knowledge) 으로만 그치지 말고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물론 우리 생활의 모든 시간. 장소, 모든 경우가 하나님을 아는 적합한 계기이기는 하지만, 또한 우리는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이 어떤 분인가 배우고 알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제하는 남녀가 일상 생활에서 서로를 알 수 있지만, 특별한 데이트를 통해 단둘이 만남의 시간을 가질 때 더욱 깊어지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과 갖는 만남의 시간 (Quiet Time)을 통해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 처럼 `나는 그 분을 안다' (I know him, 요 7:29)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CF. 하나님을 아는가? - 이에 대한 심도 측정은 지식의 정도가 아닌 인격적인 관계의 정도이므로 남녀 간의 애정에 유추하여 그 심도 측정을 하려고 한다. (렘 3:1, 겔 23:2-21, 호 2:2-7, 마 25:1-13, 계 21:2-4,9등)
그 기준으로 첫째, 부각되는 이미지의 모습에 따라 둘째, 호칭 사용시 절실성에 따라 셋째, 즐겁고 자발적인 사귐의 정도에 따라, 넷째, 홀로 남아 있을 때의 반응에 따라 그 심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은 (ㄱ) 별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서적 : 송인규 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IVP, 1985.2, 재판.
(3) 경건의 훈련으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 (딤전 4:6-8, 벧후 1:4-7, 요 10:34-6)
`경건'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영어로는 Godlyness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필적하는) 것으로 영적인 타락을 의미하나 (사 14:12-15)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온전함 같이 온전케 되는 영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벧후 1:4-7, 마 5:48) 다시 말해서 옛사람에 속한 모든 추악한 죄악과 그 육신의 욕심대로 살아서 죄로 물들어 버린 인간이 그 구습을 벗어버리고 경건의 연습을 통해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해 지는 것을 가르킨다. (딤전 4:6-8, 벧전 1:14-16)
이와 같은 경건의 연습 (훈련)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딤전 4:6-8), 마 22:11-13에 천국의 혼인잔치에서 예복이 없기에 쫓겨나는 장면이 있다. (이 예복은 성도의 거룩한 행실이다. 계 19:8) 밖에 없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에서 거지가 왕궁에 들어가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나오게 된다. 이는 거지에게 있는 거지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왕실에 할 왕자교육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영적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철저히 경건의 훈련을 쌓아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본향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히 11:13-16)
경건의 훈련함에 있어 마귀의 유혹은 철저한 불순종이다. 창 3:4-5에서 「선악과를 따먹어라.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한다. 이것은 성경에 말하는 경건의 방법과는 거꾸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것처럼 (막 1:35)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롬 8:29) 우리의 경건 훈련은 예수를 믿고, 그를 따라서 (본받아) 오직 순종하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다 해도 하루의 첫 시간을 내어 주님과 진실히 나누는 시간 (Quiet time)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전 날에 많은 병자를 고치고 말씀을 전하시어 피곤하시겠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셔서 주님 앞에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막 1:35 - ) 이런 것은 훈련이 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더욱더 철저히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룩하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II. Q.T 의 유익성 (중요성)
Q.T에 대한 태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몇 명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왜 내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해야 되는 걸 알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Q.T를 갖고 싶긴 하지만 현재는 갖지 못하고 있어"
"나는 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 가다가 할 뿐이지"
"나는 거의 매일 하지만 그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야"
"나는 거의 매일 Q.T를 하고 있고 그걸 즐기고 있어"
아무튼 Q.T는 성경 어느 곳에도 지키라고 명한 곳이 없고, 우리가 따라야 할 만큼 제자들이 Q.T를 계속 지켰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다. 그러기에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해도 어떤 영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 규율과 규칙들에 순종했다는 식의 점수를 따는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Q.T는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과된 법적 제도가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자발적이고도 스스로 부과된 훈련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시간과 정력을 들였을 만큼 그 충분한 효과와 가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Q.T의 유익한 점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1. 하나님과의 교제를 발전시켜 갈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볼 때 상대방을 서로 알려고 한다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대 집회에서 만날 수도 있고 (전체 파티). 또 소집회에서 만나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 (까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되기 원한다면 단둘이서 매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이지만 잦은 간격으로 여러 번 만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옳은 말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옳은 말이다.
이처럼 Q.T는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더 깊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하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낙심될 때 그 분의 격려를 맛보게 되고 무기력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능력의 근원이 됨을 경험하게 된다.
2. 경건 생활에 지속적인 훈련을 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디모데에 부탁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이 경건은 육체의 연습같이 약간의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유익이 있고 今生과 來生에 분명한 약속이 있다. 더구나 이 경건에는 그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은 경건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 (연습)을 통해서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고 경건의 훈련에 나가야 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또 하나의 권고를 살펴보면,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라」고 말한다. (딤전 6:4) 그렇지 않으면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로 시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게 된다고 권면한다. 그 결과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딤전 6:5)
물론 경건 훈련의 동기는 우선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함에 있다. 그렇지 않고 경건을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면 다툼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심과 소원에 이끌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의 훈련에서 더 큰 유익을 맛보게 된다. (딤전 6:6)
3.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맛보아 알게 된다.
주님은 우리가 절름발이가 된 상태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연단하여 어그러진 발을 펴서 곧게 걷기를 바란다. 이처럼 더 온전하게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젖만 먹는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자, 곧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이지만 후자는 직접 경험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서 알게 된다. 즉 과거에는 메세지나 성장한 분과 교제를 통하여 (간증)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붙잡고 그 선하심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말씀이 없이는 영혼을 양육할 수 없다. 특히 CAMPUS 사역에서 영혼들을 돕고 세워주는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깊이 맛보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귤을 먹어보지 않은 자가 귤의 맛을 설명으로 대치시킬 수 없듯이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도록 인도할 수 없고 더구나 양육할 수는 더 없을 것이다. 특히 CAMPUS는 4년만 양육을 다 끝낼 뿐 아니라 세워주는 자까지 되기 때문에 더욱더 Q.T 시간은 필요하게 느껴진다. 원래 Q.T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주의 음성을 듣고) 전해주는 것인데, CAMPUS에서 작은 목자로서 일하기 위해서 비록 어린 신앙이라 해도 처음에는 잘 안된다 해도 훈련이 되어야 한다. 목자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면 양들을 온전히 인도할 수 없다. 우리가 먼저 Q.T를 통해서 주님 (참 목자이신)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못 듣는 양들을 잘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요 10:4-5)
III. 경건의 시간 (Q.T)의 원리
흔히 경건의 시간을 `매일의 양식', `일용할 양식', `생명의 양식' 으로 불리어지는데 그 공통적인 특징은 영혼의 양식이라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거에 출애급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먹던 만나와 그 여러 가지 점에서 一脈相通한다고 하겠다. 만나는 홍해를 건넌 후 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곡식을 얻기 직전까지 계속 먹었다. 이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후부터는 적어도 Q.T가 시작될 것을 時事하고 있고 최후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 갈 때가지 Q.T가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에도 또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광야 40년의 생활을 오늘날의 교회생활 처럼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내려주셨던 `만나'는 오늘날 성공적인 경건의 시간 (Q.T)을 위해 많은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다음에서는 만나를 공급받던 과정을 통하여 경건의 시간을 위해 그 원리를 알아보고자 한다.
만나 『 (마나후) - 영 WHAT IS THAT ?』 라는 이름은 `이게 무엇이지'라는 뜻이다. (출 16:15) 처음에는 그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먹었지만 그 것 때문에 생명과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Q.T도 말씀을 매일 매일 상고하며 묵상할 때 그 순간에는 어떤 은혜가 있는지 모르지만 영혼 속에 그것이 깊이 쌓이게 됨을 알 수 있다. 비록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이 미세한 모양이라도 그것이 뭉쳐서 큰 양식이 되듯이 (출 16:14,18) Q.T도 처음에 귀찮고 보잘 것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영적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 시간을 구별시켜라 : 만나가 떨어지는 시간은 구별되어 있었다. (출 16:21) 아무 때 가도 만나를 주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에 갈 때 비로서 자신의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해 뜬 후에는 아무리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었고 만나는 오히려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출 16:21)
이처럼 Q.T도 가능하면 하루의 처음 시간을 드려서 나갈 때 신령한 만나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출 13:1-2). 믿음의 선배들도 이와 같이 이른 아침에 (혹은 새벽에, 미명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교제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 「시편 46:5」, 예수 「막 1:35」
히브리 말로 `부지런히'라는 말은 `이른 아침에'라는 말로 (잠 1:28, 27:14) 또 `간절히'라는 말은 `새벽에'라는 말로 (잠 8:17) 같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Q.T는 분명히 부지런하게 또는 간절하게 이른 아침에 영혼의 신령한 양식을 얻고자 시간을 구분시켜야 할 것이다.
(2) 장소를 구별시켜라 : 출 16:14, 막 1:35, 롬 8:6-7,13
만나는 잠자고 쉬는 장막 안에서 얻지 못하고 자신의 잠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갈 때 얻을 수 있게 된다. (출 16:14). 이는 Q.T 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고 또 무리가 생길 수 없다. 막 1:35 보면 예수님께서도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Q.T를 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행동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경건되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서 그 분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한다. 이 용도 목사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침을 준다. 「육신이 편하면 영혼이 불편해 하고, 육신이 불편해 하면 영혼이 편안해 한다」 바울사도도 우리에게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롬 8:6-7,13) 라고 경계하고 있다.
(3) 매일 같이 지속해서 하라 (출 16:16, 마 6:34)
만나는 1년용 양식이 아니라 일일용 양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얻으려고 나가게 되었다. 만나는 안식일 전 날 것만을 제외하고 이틀 이상 저축할 수 없다. 하루만 기일이 지나가면 썩어져 버리고 냄새가 나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이 일하지 않고는 먹지 못하게 매일 같이 나아가서 줍게 한 것이다.
이처럼 Q.T도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그 음성을 듣고 신령한 만나를 얻고자 해야 한다. 하루 Q.T 해서 얻은 신령한 만나로 일안식일을 지내다 보면 그것이 일안식일 갈 수도 없겠지만, 그 말슴이 어느 덧 당신의 신앙 양심을 둔하게 만들 것이고 지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말씀은 저축해 놓을 것이 아니라 받은 즉시로 움직이며 나가야 한다. 그 말씀을 모아두게 되면 섞어버리게 된다. 냄새가 나서 그 말씀이 오히려 자신을 어렵게만 만든다. 절대로 저축하지 말라. 말씀을 !
(4) 순종해서 하라 : 출 16:20.21, 16:27, 삼상 15:22-23
Q.T는 처음에는 `훈련'이다. 저절로 잘되어 지면 Q.T에 대해 강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매일같이 체크하지도 않을 것이다. 훈련이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움직이지 말고 인도자의 말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순종과 복종이 없는 훈련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처음에 따분하게 느끼고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도 훈련이기에 그대로 따라가면 당신에게 큰 유익이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릴 때 그들이 순종치 않아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모세는 그것을 (만나)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의 말에 청종치 않게 되자 남겨 두었던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출 16:20-21). 또 안식일에는 만나가 안 내리니까 그 전날에 이틀 분을 주어다가 다음 날까지 먹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성은 안식일에도 혹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나갔지만 얻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으로 부터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려느냐 ?" 고 책망만 얻게 된 것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불순종은 사술 (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사술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당신을 버려서 못 먹게 한다』 는 삼상 15:22-23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5) 나누라 : 출 16:16-18`영적으로 한 오멜 씩 같은 은혜를 주신다'
Q.T 를 나눈다고 할 때 자신이 은혜 받은 것이 많고 깨달은 것이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자신이 받은 말씀이 은혜가 안 되고 깨달아 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나눌 때 이적이 있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비록 자신이 받은 것이 적게 보여도 적지 않고 많아 보여도 많지 않다. 그 날은 그 날 한 것으로 족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다. 또 자신이 조장이라면 자신이 받은 양식은 돕는 조원들에게 나누어 주기에 충분하다. 스스로 생각하여 포기하지 말고 나누어 보라. 그리하면 그 가족이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조그만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만나를 통하여 그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거둔 것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으로 거두었더라」고 했다. 그러기에 사람의 눈대중으로 자신의 얻은 것을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감정과 이성은 영적인 것을 체크하고 잴 수 없다.) 또 만나는 각 사람의 식량대로 한 오멜 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를 위해 취하였다. 즉 조장과 팀장의 Q.T 는 그 만큼 더 중요하다. 자기 장막에 있는 자 (조원 OR 팀원)를 위해 충분한 말씀을 받아야 한다. 부족하지 않도록 Q.T 를 통해 주님께서 풍성케 한다. 즉 적은 듯하지만 적지 않고 많은 듯하지만 많지 않게 한다.
IV. 경건의 시간의 방법
Q.T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이 방법론에 있어서는 우선적으로 자기에게 맞게 개발 해나가야 한다. 성경에 규범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기에 자기에게 알맞도록 개발하고 지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이 개발한 방법도 계속해서 변화되고 수정되어 간다. 때로는 쉽게도 또 어렵고 복잡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Q.T는 방법이 어떻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거르지 않고 계속하여 주님의 말씀을 대하고 기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 있고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자신을 살릴 수 있고, 그 영혼에게 생명을 풍성케 하지 못하는 가치 없는 것이다. (필자도 방법적으로 3-4회나 바꾸어 가면서 온전한 Q.T의 방법과 적용하는 요령은 알게 되어 정리한 것까지 ㅇ있으나 정리한 후부터는 이상하게 1년 이상 Q.T를 지속하지 못했다. 그 때 필자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 하고 있고 그 한 것에 의해 얼마나 순종하여 변화 되고 있는 것이냐가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대체로 Q.T를 하여 왔던 선배들의 방법은 세부적으로 볼 때 실은 다양하지만 크게 생각해 볼 때는 일반적으로 기도, 말씀상고, 적용, 마침 기도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간다. 다음에 한 부분씩 나누어 생각해 보려 한다.
1. 기 도 : Q.T 전에 주께 맡기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자신이 Q.T를 임하기 전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자세와 마음을 가다듬고 그 분께 나아가라. 그 위대하시고 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Q.T 시간에 당신과 함께 있음을 믿고 시인하라. 그러면 그 분은 당신과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실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신을 인도하여 진리가운데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은 그 분과 어떤 관계인지를 주님 앞에 진실하고도 상세하게 고백하라. 당신에게 향하신 특별한 축복을 감사하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을 변화시켜 주시고자 함을 감사하라. 그리고 이 Q.T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주시고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그 분의 뜻을 계시해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아뢰라.
다시 말해 자기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잠 3:6, 16:3) 그 분께 자기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마 6:1) 그리고 무슨 말씀이든지 그 말씀대로 먼저 순종할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시 119:33-34)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함을 시인하여 보이라 (시 107:9, 시 37:9)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도해 보라.
- 첫째 : 하나님을 인정하라 (잠 3:6, 합 2:14, 왕상 8:33-34, 롬 1:4)
- 둘째 : 하나님께 맡기라 (시 37:5-6, 시 55:22, 잠 16:3, 벧전 5:7)
- 셋째 : 하나님을 기대하라 (시 37:9, 시 107:9, 시 69:3, 시 33:18-20, 시
42:5, 시 62:5, 시 27:14, 시 25:3-5, 시 5:3, 히 11:1, 롬 8:24-25)
- 넷째 : 하나님을 찾으라 (렘 29:13-14, 대하 15:2.1.15, 시 9:10, 시 22:26, 암 5:4-6, 마 7:7-8, 히 11:6, 골3:1, 벧전 3:21, 시 34:10, 잠 8:17, 잠 28:5 시 55:6, 렘 10:21, 호 10:12)
2. 말 씀 :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상고 하십시오.
성경을 상고하는 시간에는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그 성경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생생한 교훈을 주신다. 이것을 깊이 인식하고 겸허한 자세와 긴장된 자세로 엄숙하게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매일 정해서 읽되 단순히 이성으로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열린 마음과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읽으라. 또 그날 상고한 말씀 가운데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상황대로 하나님께 아뢰어라. 그리고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말씀을 사모하되 (시 119:20, 131, 벧전 2:2) 그 말씀에 대한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 107:9),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는 결심을 먼저하고 읽어보라. (시 189:33) 그리하면 뭔가 다른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될 것이다.
다음은 성경을 읽을 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다.
(1) Q.T에서 이 시간은 우리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이시다. - 즉 Q.T는 PBS 곧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이 아니다.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영혼은 처음에 신약부터 통독하기를 시작하라. 학기 중이라면 3-5장식 지속해서 읽으면 신약 한번은 충분히 통독할 것이다. 그 후 방학이 되면 조금만 시간을 내어 3배의 노력만 들이면 (매일 15장 이상씩 읽을 때) 방학이 끝날 때는 신구약 전체를 읽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이런 속도와 꾸준함으로 2년쯤 지내게 되면 적어도 구약 4회 신약 8회는 넉넉히 읽게 된다. 물론 처음 읽게 될 때는 무슨 얘기인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늦어도 세 번 읽을 때는 즉 1년이 지나게 되면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 사이에 맨투맨 성경공부가 병행된다면 안성마춤으로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상태 곧 성경을 4-5회 정도 읽게 되면 이제부터 통독을 계속하면서 부분 부분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줄 필요가 있다. 그 한 가지 방법 중에 하나가 정독이다. 정독은 현미경으로 사물을 관찰하듯 말씀을 깊이 있게 음미하여 읽는 것이다. 즉 성경의 전체를 어느 정도 알았다면 건성으로 넘어가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하는데 목표가 있다. 이 정독에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과 요령에는 그리 알려진 것은 없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문맥 파악이 전부가 아니라 전체에 입각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있다. 전체보다는 각 책을 깊이 있게 보고 각 책에서도 각 장을 각 장에서도 각 단락의 내용을 하나씩 하나씩 뜯어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각 사건마다 좀 더 깊이 있게 관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각 사건을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정독과 함께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찰 할 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집중'하는 능력이다. 성경공부에 있어서 관찰하는 훈련은 소홀히 다루기 쉽다. 그냥 대충 (그리고 좀 세밀하기는 하지만) 보고 넘어가는 것이 되기 쉽지만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성경공부의 기초가 좌우된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저히 그리고 깊이 있게 관찰할 때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로인해 다음 단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허술히 관찰하여 읽게 되면 그만큼 깊이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없다.
관찰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주된 말 (단어)을 찾으라. 이것은 항상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찾되 아주 쉬운 과정 중에 하나같이 보이나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나 그 다음에 상세한 내용을 찾으라. 즉 교훈과 이유. 의문형의 사용. 대조. 비교. 예화. 접속어. 사상의 반복. 강조하는 말 등에 대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일반적인 구조를 분석하라. 일반적인 구조란 각 절과 절 사이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즉 말씀을 연구하며 같은 생각에 초점을 모으는 것에 같은 구절들을 묶고 각 부분의 주된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도 한다. 끝으로 이야기 형식의 책에서는 5W 1H 원칙을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중심으로 관찰하라.
V. 경건의 시간의 적용
1. Q.T의 적용의 정의
경건의 시간에 있어 온전한 승리를 위해서 적용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반적으로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여 증거할 때나 권면할 때 이용 (UTILIZATION) 하는 것을 적용 (APPLICATION) 이라고 오해하여 왔다. 적용과 이용은 엄연히 그 목적부터가 다르다. 적용은 자신이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재기 이전에 순종 자체 목적이 되어 자신의 모든 것 (옛 사람) 버리고 포기해 가는 것이다. 반면에 이용은 이익추구를 하나의 목표로 하여 자신을 위하여 남이나 어떤 것을 부려서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적용 (APPLICATION)은 자신이 주체가 아니고 말씀이 주체가 되어 그 말씀에 자신이 맞추어지나 이용 (UTILIZATION)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말씀이나 다른 것을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용에는 악용 (ABUSE, MISUSE) 과 활용 (PRACTICAL USE) 이 있으나 이것들도 동일하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불신자들이 말씀을 악용하여 기독교를 핍박하거나 이단자들이 그렇게 행하고 (MISUSE-오용) 후자는 믿는 신자들이 말씀을 통하여 삶에 지혜와 지식을 얻게 되는 경우이나 이때는 말씀이 지식이 될 뿐 생명이 되지 않는다. (적용에는 규칙성과 객관성이 있고 자신은 객체로써 순종이 목적이다. 이용은 비규칙성과 주관성이 있으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추구해 나간다)
적용 (APPLICATION) 이란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이 주체가 되어 자기 영혼에 상처를 내어 말씀 (예수)에 의한 흔적을 만드는 것이다. (히 4:12, 엡 6:17) 적용에 있어서 자신은 객체로서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는다. 즉 순종이 목적으로 (갈 6:17) 저절로 이루어지는 맹종이 아니라 자신은 하기 싫어도 하려는 의지로써의 복종이 있어야 한다. 만일 적용하려는 그 말씀에 의해 지금 적용되지 (깨어지지) 아니하면 (곧 당신이 그 말씀위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적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당신 위에 떨어져서 가루로 흩으려 뜨리게 되고 말 것이다. (마 21:42-44) 그렇다면 당신은 하늘나라의 건축 재료로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깨어진 돌조각은 쓸 수 있지만 가루된 돌가루는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엡 2:20-22) 더구나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은 그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는 요긴한 모퉁이 돌로써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말씀이 되어질 수 있다.(롬 9:30-33) 왜 똑같은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잘 성장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제 자리 걸음을 한단 말인가 ? 왜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사람은 승리해가면서 사는데, 다른 사람은 실패를 맛보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 또 한 자리에서 QT 하면서 이 사람은 풍성한 지식을 갖고 논리적으로 증거하나 저 사람은 비록 어리석은 듯하나 삶이 변화되고 있다. 이것은 적용을 어떻게 했느냐에 위와 같은 차이로 벌어지게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적용치 못하여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삶을 산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 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8-48)
가?
2. Q.T의 적용의 원리
(1) 하나님의 말씀은 서술이 아니라 명령이다 : 요 12:50, 잠 10:8, 벧후 2:21 눅 17:10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다. 영이신 말씀을 우리 영혼이 먹게 하기 위하여 명령으로 주신다. 그러기에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명령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리라"고 솔로몬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잠 10:8)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 말씀을 입에서만 재잘거리는 사람 (LIPSERVICEMAN) 은 어리석어 패망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술이 아니다. 그 말씀이 설명이나 묘사로써 그치고 만다면 대단히 잘못된 적용이 되고 만다. 즉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적용하고 만다면 그에게 있어 이성과 인력에는 영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살찌게 되겠지만 진정 그 영혼은 빈사상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계속될 경우에 그 영혼은 점점 더 메말라 갈 것이고 생명이 고갈되어 그의 영과 혼과 육에서 심한 갈등을 야기 시키게 되리라 여겨진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고까지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대할 때 (특히 Q.T에서는 더욱)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그 분의 음성과 명령을 받으려고 하여 보라. 그리고 그 명령 앞에 겸손히 순종하여 그 명령이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하여 보라. 그렇지 않고 명령이신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아 지식화한다면 빛나게 드러내고 나타내야 할 말씀 (곧 등불)을 등경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평상 아래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막 4:21-25) 이에 대해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지금도 경계하고 있다.
(2) 하나님 말씀은 항상 현재성을 갖고 있다. (히 13:8, 벧후 3:8)
우리는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히 13:8)과 하나님의 영적인 시간개념 (즉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이 한 가지) (벧후 3:8)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약 1:17) 그러기에 과거에 있었던 모든 능력과 이적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며, 과거에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들이 지금도 그 약속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얼마든지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 더구나 십자가의 보혈도 동일한 효력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분이 베푼 은혜도 지금도 계속해서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베풀어 주시고 계신다. 또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영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초월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표현한 베드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6천년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6일 밖에 안 되었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이틀 전에 얘기에 불과하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예수께서 무덤 속에 3일 동안 있었는데 하나님의 시간개념으로 볼 때는 3천년 동안이나 죽음 (사망)에게 지배당하셨고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6천년 동안 창조하고 계심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벧.후 3:8절의 말씀은 꼭 천년이 하루이고, 하루가 천년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세계에는 시간이 없기에 이것보다 더 크게 말할 수도 있고 작게 말할 수도 있음을 가르친다고 하겠다. 이는 더 쉽게 말해서 영적 세계는 역사도 없고 과거와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의 안목으로 볼 때 천지창조. 율법주심. 예수님의 초림. 고난. 죽음. 부활. 성령강림. 재림 등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몇 일부터 시작하여 몇 천 년 (몇 만 년)까지 차이가 있지만, 영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이 모든 사건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 옆에서 천지가 만들어지고 있고 동시에 예수가 오셔서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하고 계시며 또 동시에 그 분이 우편에 가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동시에 재림하시는 역사들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 그런 것을 보지 못하기에 위기의식이 없고 깨어있지 못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의 말씀을 2천 년 전에 상황만 들어서 얘기한다면 그렇게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 속에 묻어 두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의 사건도 역사 속에만 묶어둘 수 없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역사에만 매어놓을 수 없이 지금 볼 수 있고 겪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역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그 말씀대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옛날 얘기가 아니라 오늘의 얘기로 적용하고 그 말씀에 따라 근신하고 깨어 있자.
(3) 하나님 말씀은 항상 보편성이 있다. (요 17:17, 요 14:6)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란 초월의 법칙이요. 초자연적인 법칙이요. 우주 밖의 법칙이다. 진리 앞에서 모든 만물들은 특수한 것이 없다. 물론 진리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는 각기 특수성이 있었고, 개별성이 있었고 지역성이 있었었다. 그러나 아들 (진리, 요 14:6) 이 세상에 오신 후에는 그 진리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되었다. (엡 1:10) 그 후로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 앞에 지역 차이나, 성별차이나, 연령차이나, 개인차이나 모든 것에 있어 특수성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진리를 떠나서는 그런 특수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세상에서는 개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진리 앞에서 어떤 환경이나 여건이나 그 분위기가 모두 무너져 갔고, 어떤 특수한 병도 특수성이 인정되어 예외가 되지 않고 치료가 되었으며, 어느 지역과 시대와 상관없이 진리 앞에서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홍해 도강과 요단강 도강 /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그러므로 진리 앞에 지역에 관계없이 보편성이 있다. 이에 어느 지역이나 어떤 상황이든 간에 주님의 진리는 역사하게 되어 있고, 주님이 행하던 동일한 표적과 능력과 기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더우기 영적으로 보면 장소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골고다의 현장이 지금 우리 옆에 펼쳐지고 있고 오병이어의 현장이 앞마을에서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외 모든 성경에서 나타난 역사들의 현장이 우리가 처해있는 그 곳이 되어야 하고 그 곳에서 주의 진리의 역사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시던 그 현장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되어 주님의 처절한 모습을 봐야 할 것이다. 그 분이 부활하신 아리마대 무덤이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서 목격하고 `할렐루야 !' 하고 승리의 개가를 불러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써 적용하여 나아가자, 그렇지 않고 이해하고 깨닫는 지식으로 생각한다면 각 지역과 환경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주 밖의 법칙인 진리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이 우리의 현장에 있게 하고, 중공땅이 일어나는 능력이 바로 이곳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진리의 보편성이라 하겠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가 아닌 개인 중심적이다. (개체성) : 요 5:39, 마 7:1-5, (겔 18:2-4), 렘 31:29)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든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 5:39 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에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즉 성경에 어디를 보더라도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나 다윗을 발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이 오실 예수의 표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 개인적인 삶으로만 끝나느냐 하면 결코 그것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심히 타락 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간음과 탐욕과 살인 등으로 더럽혀진 사람인가 하면, 또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한 사람도 있고,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파는데 저 사람처럼 하나님을 위해 죽기를 구차이 여기지 않고 불 못과 칼 앞에 담대히 서는 자도 있다. 그 외에도 수천 (아니 어쩌면 수 만 가지) 이상의 사람들이 성경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들이 각자 사적인 삶으로만 우리가 평가해야 된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드러내는 표상으로 있고 또 그 표상을 받드는 조연 역할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당신이 아닌 바로 `나'의 삶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수 천 수 만 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 속에는 선하고 의로운 것부터 시작해서 간음과 음탕과 사기와 살인과 탐욕이 있고 또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팔 수 있는 분명한 소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 죄가 하나님 아들을 죽일 만큼 엄청나게 크다고 할 때 무슨 일을 못하겠는지 거꾸로 생각해 보라. - 그 큰 죄 속에 겉보기에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 속에 악한 생각. 곧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이 다 포함되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성경의 인물을 볼 때 자신과 바꾸어서 똑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똑같으니까) 자기에게 있어 그런 점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모르면 깨닫고 회개하고 그런 것들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이천년 십자가에 못박던 그 사람이 바로 `나'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던 군인이 바로 `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어 넘기고 조용하던 제사장이 바로 `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버린 유다가 바로 `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무덤 속에 끌어넣은 아리마대가 `나'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이고 어떻게 할 수 없어 울고 있던 예루살렘 여인이 `나'이고, Jx 가 죽을 때 무덤 속에서 일어나던 그들이 바로 `나'의 분신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우리 또는 백성, 민족, 나라에 크게 적용될 것이 있겠지만 대부분이 우리가 아닌 `나' 중심적으로 개인에게 집중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QT 시간에 `사랑하라'는 말씀을 대하게 될 때 `나' 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한 얘기요. 우리에게 한 얘기요. 이민족에 한 얘기로 생각하여 넘겨 버린다면, 그 사람은 한 말씀이라도 자신에게 적용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설사 적용하려 해도 이해하는 것만으로 그치기 쉬울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과 내가 속한 모임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나' 부터 먼저 그 말씀 앞에 적용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 성경에 모든 말씀이 나를 중심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적당히 도매금으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말씀을 대할 수 없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버지의 이가 실뿐이지 아들의 이가 신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개체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그 말씀을 적용하여 맛보게 하였다. 그 경험한 맛은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하나님 안에서 분명히 다르다.) (또 잘못하면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적용이 되고 개인주의적이기 쉬우니 서로 깊이 나누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상대적인 것임을 알고 주 안에서 자신을 낮추고 섬겨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가 아닌 나 중심적으로 적용하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한 것이, 유다에게 한 것이 내게 말씀한 것이고, 도마가 말한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 것임을 알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적용하자. (이중적인 나, 아니 삼증... 천중적인 `나'를 발견하고 온전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3. Q.T 적용시 주의할 점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깊이 있게 묵상하고 깨달음 (영감 있는)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또 성경공부의 시간으로 전환할 위험성도 없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하나님을 바로 내 앞에 모시고 분부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한 예로 요 11장을 살펴보면 마르다를 통해서 실제적인 적용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마르다는 교리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으로 온전히 적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1-22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굉장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그 믿음이 지식적이고 교리적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 줄을 압니다.) 예수의 도전하는 질문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믿나이다."(25-26) 라고 대답하지만 역시 교리적인 신앙고백을 알 수 있는데 이는 39절에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므로 벌써 냄새가 납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고 책망 겸 도전을 하자 비로소 실제로 믿고 순종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온전히 적용되지 않은 교리적이고 지식적인 믿음에는 무기력함을 변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적용에서 주의할 점을 살펴보자.
(1) 시간적으로 현재 필요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Q.T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일용할 영적인 양식이지 미래를 위해 저축할 양식이 아니다. 만일 일용할 양식을 당장에 먹지 않고 미래를 위한 양식을 저장해 두기만 한다면 영적인 구두쇠와 같이 비참하게 될 것이다. 오늘 바르게 살아야만 내일이 있을 수 있다. (더우기 말씀을 저축해 둔다면 이것은 지식에 불과하다. 오늘이라 하는 날 동안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움직 일 때 생명이 되고 실제적인 양분으로 된다. 배고프다가 먹게되면 배탈 날 때가 있다.)
Q.T에서 상고하는 말씀은 현실적으로 지금 이 시간 나에게 관계가 있도록 삶의 현장에서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Q.T에서 막 1:15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은 그냥 이해만 할 수는 없다. 「아! 하나님 나라가 가깝구나. 그러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되겠구나」 이것을 깨닫기만 하고 지나치지 않고 지금 나에게 회개할 부분이 어디에 있는가. 또 나에게 있어 복음을 믿지 못하는 부분은 어느 것인지? 또 어느 것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있고 믿지 못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아무 가식 없이 그냥 자신의 삶의 현실에 적용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오늘 아침에 말씀 하셨다면 오늘 아침에 나에게 필요한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며칠 전에나 한 주간 전에 있었던 걱정을 가지고 지금 말씀 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지금 현재 당면한 걱정을 다루실 수도 있고 아니면 오늘이나 내일에 닥칠 걱정을 내다보시고 미리 주으리를 주실 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 그 말씀을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 할 수 도 있다. (만일 10살된 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때 움직이라고 하는 얘기이지 그냥 지나쳐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되겠구나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말씀은 다시 생각해보고 또 기도해 보고 그 다음의 인도를 꾸준히 받아가야 하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그 경우에도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잘 판단하여 결정하고 나가야 할 것이다.
(2) 다시 듣고 적용할 기회가 있다.
하나님은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교훈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같은 교훈을 수없이 반복해서 대하게 된다. 만일 적용하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내일이나 모레나 아니면 얼마 후에 다시 들려 주식기도 한다. (그래도 듣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보자.)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애매하게 적용했다면 다음 날오 미루어 가면서 인도를 받을 수도 있다. 다만 내 삶의 현장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때로는 그 말씀이 공동으로 받아들여 적용할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한 모임이나 교회)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한 구절만이 아니라 여러 구절을 통하여 공동체 속에서 다양하게 인도하신다. 또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몇 일 내지 몇 달 동안 인도되면서 적용하기도 한다. 이때에 다음으로 적당히 적용할 것을 미루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적용할 때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적용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게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적용은 그 삶의 현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도깨비 방망이 같다.) 자신의 현실에 맞게 지혜롭게 적용하라.
(3) 남에게 적용하지 말고 나에게 적용하라.
구약 사무엘 하 12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이 죄를 일깨우려고 어떤 부자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때 다윗은 그 부자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라고 말하면서도 다윗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단 선지지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고 말하자 다윗은 비로소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나단의 얘기가 부자가 아닌 다윗에게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신 것이지만, 제삼자에게 적용될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적용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로 엡 5:22-23을 보면서 적용한다는 것이 남편은 아내에게 필요한 말씀을 아내는 남편에게 필요한 말씀을 찾아내고 열을 올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적용이 아니라 완전한 이용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주 남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듣는 나쁜 버릇이 있다. 즉 이 말씀은 우리 교인이 들어야 할 말씀. 내 친구가 이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야 할 텐데.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하면서 남에게로 쉽게 옮겨 적용시키려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다. 또 성경을 대할 때도 이 말은 초대교회 때의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사람에게 대한 말씀 (마 27장) 유다와 베드로에게 한 얘기로 그냥 이해하고 어물 쩡 넘어가고자 한다. (마 23장을 보면서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한 얘기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얼마 안가서 말씀에 대한 재미가 없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속한 교회나 단체에도 적용해야 하지만 나를 제외시키거나 하면 잘못된 적용이다. 내가 속한 교회의 문제점을 깨달았을 때 내게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잘 듣고 내게 적용해야 한다.
우리의 적용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상적이고 상식저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느냐 한다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표현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이루고 있다. 또 그 성경 말씀은 인간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전달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지혜와 사상을 초월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더라도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이론이나 설명이 정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입학시험에 응시할 학생이 있는데 어느 과에 원서를 낼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다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읽고서 경쟁이 심한 학교에 응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한다면 너무나 엉뚱한 적용이라 할 것이다. 또 자매는 어떤지도 모르고 짝사랑하고 있는 형제가 QT 시간에 `행하라'는 말씀을 받고 주님께서 응답하셨다고 나가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적용이 되기가 쉽다. 이럴 때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우리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서 나간다면 오히려 악한 자에게 이용되기가 쉽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기계적으로 모든 말씀을 억지로 내 생활에 적용하려고 해서만은 안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듣고서 나도 꼭 고아를 입양해야 하고 또 과부를 부모처럼 우리 집에 모시라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한 명씩 입양한다면 내 집은 고아원이 되고 양로원이 될 것이다.)
(5) 자기 합리화의 과오에 빠지지 말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심 때문에 성경을 곡해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에게 주시는 교훈을 상대방에게 적용시킨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가령 교회에 분쟁이 있을 때 한 사람은 엡 6:12 말씀을 읽고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화롭게 문제해결을 하려 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롬 12:21 말씀을 받고 더 과격하게 분쟁을 일으킬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Q.T는 나 자신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듣는 시간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만 적용하다 보면 자기 합리화나 이기적인 착각에 빠질 때도 있고 반대로 너무나 자기학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지나친 욕심에 빠진다든지 완전주의에 빠지는 위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가족이나 교인이 잘못하는 것만 눈에 띄어 고민에 싸이고 비관주의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같이 앉아 깨달은 것과 적용한 것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 나누므로 자신의 적용 스타일이 개인주의적이고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인 적용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4. 적용의 방법
적용하는 데 있어 쓰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 어떤 방법을 고집하거나 주장할 문제가 아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Q.T를 지속해서 꾸준히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적용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현장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깊숙이 새겨지고 있는 지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적용하는 데는 크게 묵상하므로 적용하는 것과 경건의 일기를 쓰므로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원리적인 면에서 적용하는 방법에는 대체로 네 가지로써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째로는 `해석' (이해) 이라는 부분으로 QT 할 때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해된 것이나 깨닫게 된 것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온전한 깨달음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생각하면 좋은 점도 있다. - 본문에서 내가 알아야 할 진리는 없는가 ? 본문에서 내가 따라야할 명령은 무엇인가 ? 또 내가 믿고 주장할 만한 약속은 무엇인가 ? 본문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고 알게 된 말씀은 무엇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는 시간이다.
둘째로는 `관찰'로써 이해되고 깨달은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말씀이란 빛 앞에서 모든 어두운 부분과 더러운 부분을 비추어 빛 앞에 들어내 놓는 시간인 것이다. 이 때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본문에 비추어 내가 그만두어야 할 일은 없는가? 본문에 따라 내가 변화되어야 할 행동은 없는가? 본문에 말씀대로 내가 새로이 시작해야 할 습관이나 태도는 없는가?) 빛 앞에 벌거벗듯이 자신의 인격과 영혼을 온전히 드러내 놓고 샅샅이 들쳐봐야 한다.
세째는 `계획'이다. 이는 자신이 관찰한 부분 중에서 변화되어야 할 행동이나 그만두어야할 죄악을 어떻게 하면 변화되고 그만둘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다. 관찰 할 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너무나 많이 찾을 수도 있으나 그것 전부를 고치려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다 보면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많은 죄악 중에서 한 가지 (내지 두 가지) 정도만 골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큰 타이어에 조그만 가시 하나가 전체를 못 쓰게 하듯이 한 가지만 집중해서 공략하면 전체 죄악이 펑크 나게 되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떤 때는 계획만 세우고 실천을 하지 못할 경우가 있게 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행해야 하겠지만) 계획까지 세울 만큼 적용이 이우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기도 시간으로 자신에 대한 관찰한 것을 온전한 회개와 아울러 주님 앞에서 그 중에 한 두가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가는 것이다. 그 계획 위에 주님이 역사하도록 주님을 찾고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묵상과 일기에 대해서 나누어 보자
(1) 묵 상
우리는 QT를 통해 체계 있게 말씀을 배워나갈 때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며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와 동행할 수 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진정한 영적 성숙에 이르고자 한다면 성경을 그저 맹목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읽도록 노력하거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다 깨달을 테니까 무조건 기도만 많이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로써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고 의미 있게 묵상할 때에야 비로소 그 말씀을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영적 양식이 되며 나날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근원적인 능력을 공급할 것이다.
(ㄱ) 묵상이란 ?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묵상은 이방종교 (불고의 선. 요가의 명상. 도교의 단전호흡) 의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흔히들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어 왔기에 시편만 해도 17번 이상이나 나오는 묵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 우리 마음에 쓰레기 장으로 보내졌던 것같다. 어원적으로 보면 히브리어의 「하구트」, 「히가욘」, 「시하」라는 세 단어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속삭이다」 「곰곰히 생각하다」 「중얼거리다」 「한숨쉬다」 「귓속말 하다」 「신음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그리스도인의 묵상의 독특성을 세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하나님의 진리에 뿌리박고 있으며, 둘째는 하나님의 사람에 반응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훈련이라는 것이다. 또 J.J. PACKER 는 "묵상은 하나님의 역사와 방법과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기억해 내고, 사색하고, 곰곰히 생각하여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활동이다. 이는 하나님의 ㅇㅁ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으로 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첫째, 묵상은 말씀을 반추하는 작용이다.
소와 양을 비롯한 반추 동물은 처음에 섭취한 음식물을 다시 입으로 끌어 올려서 처음과는 달리 차근 차근 씹고 되씹는데 섭취한 음식물에 간직되어 있는 영양분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통해 소화 및 흡수되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읽고, 기록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분석해 보고, 적용해 보고, 우리 마음 속에 이리 저리 비춰봄으로써 그 영적 자양분이 우리의 사고와 인격 깊숙이 영혼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둘째, 묵상은 말씀이 성육되는 과정이다.
요 6:65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는 말씀처럼, 우리가 기록된 말씀을 우리 영혼 몸에 나타나게 하는데 묵상이 너무나 중요하다. 묵상을 통하여 영혼 깊숙이 심비에 새기게 되고, 그것이 생명이 되어 우리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헨리 노웬은 묵상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묵상은 단순히 성경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는 것, 비유의 뜻을 풀고자 힘쓰고 복잡한 의미의 말들을 분석하는 것 정도가 아니다. 이는 말씀하신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이하며 끝내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도록 그 분께 점차 자아를 열어놓는 일이다. 따라서 참된 묵상은 말씀이신 그 분이 우리 안에 성육하시도록 진정으로 허락하는 것이다.
세째, 묵상은 말씀에 대한 실존적인 개입이다.
묵상은 또한 기록한 말씀 속에 자신이 개입해 보는 것이다. 때로는 내가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방문하여 "잔잔하라" 하심으로 풍랑의 위세를 꺾으신 주님의 음성을 제자들과 함께 듣는 일이다.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 핍박과 혼란의 현장에 함께 처하는 것이다. 또 디모데 입장에서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서 아슬아슬한 장면에 이를 때 손에 땀을 쥐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현장에 실존적으로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불행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고 같이 비참해 지는 것은 그 여주인공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 뿌리와 사실성을 가진 것으로 믿을 진대 더 우리는 현장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묵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깊고 동적인 사고 작용을 통해 마음을 채우는 것』
하나님의 말씀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획일적이거나 일률적인 고정방식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참고적으로 몇 가지 묵상하는 방법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 귀절의 분석을 통해 - 묵상할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고 각 낱말이나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익혀나간다. (암송에도 적용)
- 먼저는 이 귀절에 나타난 중요한 낱말을 정의해 본다.
- 그리고는 이 귀절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답해 본 다 다. (이 때 질문은 6W 1H 형식으로 이용해도 좋다.)
- 끝으로는 귀절의 내용이 명확해지고 새로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각 단어를 강조해 본다. (ONLY를 삽입해 본다. 주어부터...)
둘재, 적용 원칙에 대입을 통해 -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 우리가 QT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여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 교훈 : + 본문에서 내가 알아야 할 진리는 없는가?
+ 본문에서 내가 따라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 본문에서 내가 믿고 주장할 약속은 없는가?
+ 본문을 통해 새롭게 깨닫고 알게 된 말씀은 무엇인가 ?
- 책망 : + 본문을 비추어 보아 내가 그만두어야 할 일은 없는가?
+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내가 버려야 할 죄악은 무엇인가 ?
- 바르게 함 - 본문에 따라 내가 변화되어야 할 행동은 없는가?
- 의로 교육
+ 본문이 보여 주는 바,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인 ?
+ 본문대로 새로 시작해야 할 습관이나 태도는 없는가?
세째, 실존적 개입을 통해 - 묵상하고자 하는 본문의 역사적 상황 속에 자신을 대입시킴으로써 본문이 주는 진리를 더욱 통감하게 된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가운데 풍부한 상상력과 심원한 성찰이 가능하다.
- 당신이 그 제자들 틈에 끼여 있었다면 ?
- 그 분의 처참한 현장 속에 당신이 있었다면 ?
- 상처투성이의 바울이 당신에게 찾아온다면 ?
* 그 외에 묵상하는 데는 `적용의 방법'에 따른 「해석-관찰-계획」의 순서로 활용하는 것도 좋다.
(2) 일기 - 기록
성경을 체계적으로 상고해 나가려면 거의 필수적으로 따르는 일은 QT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바를 기록해 나가는 일이다. 여기서의 기록은 공식적이고 틀에 박힌 서류 작성이나 강의 들은 것을 깨끗하게 꼼꼼히 정리해 두는 일과는 다른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도중 혹은 그 전후에 깨닫게 된 생각, 감격스런 내용, 고민거리, 성경의 사실을 자기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서 자그마한 영적 성장의 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신에게 알맞게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기록이란 것은 번거롭고 귀찮을 수도 있고 훈련한다는 의미로써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ㄱ) 기록의 유익
- 기록하는 일은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더 깊은 생각을 촉발시키며, 배운바 교훈이 우리 영혼에 깊이 박히도록 도와 준다.
- 깨달은 바를 기도하는데 구체적이 될 수 있게 해준다. 또 시험에 들어서 기도가 안 될 때 그 기록을 읽어 가다 보면 기도가 뚫린다.
- 배운 바 진리를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물론 QT의 목적이 남에게 전달할 메세지 준비하는 시간은 아니지만, 진실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것이 자연히 밖으로 표현되게 마련인데 이 때 기록해 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 자신이 깨달은 영감을 보존할 수 있다. : 기록이 없으면 영적 감격이나 영감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망각의 그늘로 사라지기가 십상이다.
- 일단 기록으로 남은 것은 얼마 후 자신의 성장을 살펴보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는데 중요한 재로가 된다. : 비록 그 기록이 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철자도 틀리고 문장도 엉터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지루하고 불쾌하다 해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ㄴ) 기록할 때의 주의 사항
- 기록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기록 자체가 목적이 되어 하나님께 온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자기의 개성과 취향에 맞게 개발하도록 해야 한다. 너무 형식에만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어 번거로움을 일으킬 수 있다.
- 기록이 다양하다고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 방법은 있어야 한다. 그냥 낙서하듯이 끄적 끄적 할 수 없다. 나름대로 체계를 가지고 하되 때때로 한 두 번 씩 특별한 기록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또 보통하고 있는 기록의 방법도 자신이 성장함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바뀔 때 재미도 있다.
- 기록은 남에게 보이거나 남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목적이 달라지면 위선과 허영이 개입되기 쉽다.
- QT를 위해 기록을 정책적으로 할 수도 있다. (체크까지 한다.) 그런데 이때 형식주의와 체면, 획일적인 틀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주의해서 실시하되 좋고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쉽사리 바리새적인 굴레와 짐으로 변화되지 않게 해야 한다.
경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갖기 위해서는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비례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자라 가듯디 (골 1:10), Q.T를 효과적으로 하는 것도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점점 나아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나아지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때로는 극복하고 때로는 잘 피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장애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1. 성경 읽기와 관련된 사항
1) 매일 QT를 갖는데 성경을 꼭 정하지 않고 이 곳 저 곳 되는 대로 읽는다: 비록 성경 말씀이 한 주제를 집중하여 기록하였다 할지라도 쓰여진 배경 저자의 의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알고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미리 읽을 분량이나 책을 정해놓고 그런 계획표에 따라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더우기 경건의 훈련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주의적인 습성을 버리고 계획을 따라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낫다.
2) QT 에 대한 말을 듣고 실행하기는 했지만, 성경의 내용이 너무 생소하고 어려워 포기했다.: 만일 당신이 처음으로 Q.T를 시도한다면 직접 성경을 대하기보다는 보조 자료를 (영생의 길, 삶에의 초대, 매일 성경, 등불,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생명의 양식, 오늘의 만나 등) 사용해서라도 QT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료에는 이미 하루에 읽어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고 그에 따른 해설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편리하다. 그러나 이런 보조 자료를 읽는 것이 당신 스스로 성경 읽는 것과 대치되어서는 안된다. 먼저 성경을 자신이 읽고 묵상한 후 그 뒤에 보조 자료를 활용하도록 하라. QT의 목표는 우리가 성경을 직접 대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기에 할 수 있다면 성경을 사용하라. 처음에는 지루하더라도 끈기가 있게 해보라.
3) 성경을 몇 번씩 통독했기 때문에 특히 신약을 QT 하면, 다 아는 내용이 나와서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고민은 사실상 어느 정도 성경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먼저 매일의 QT에서 우리는 성령께 간구하기를 비록 아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다시금 새롭게 깨닫고 `주의 법의 기이한 것 (WONDROUS THINGS)'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입관만큼 QT의 기대감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 성경을 조금 안다고 하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성경 속에 자신을 넣어서 생각하라. QT 는 내용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말씀에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야 한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여 체험한 것이 아는 것이기에 순종할. 방법론적인 제시로는 한이 없고 사탕발림 같겠지만, 성경 번역판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개역 번역 성경을 새 번역 성경으로)
4) 본문의 의미가 난해하여 영적 교훈을 받는 데 걸림이 된다. : 가끔 지적인 의문은 QT 의 부드러운 진행을 방해하며, 계속 그런 귀절이 던지는 문제에만 신경이 써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D.L. 무디의 말처럼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나오면 가시를 발라 내고 살만 먹으면 된다. 이는 지적 나제를 한 면으로 치우고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어떤 사람은 성경 사전. 원어 사전 또는 다른 번역판을 찾아보느라 귀중한 QT 시간을 다 보낼 수도 있다. 물론 위와 같이 찾아보는 작업이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주님과 교제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문점들을 적어 두었다가 나중에 시간을 내어 알아보는 것이 좋다. (PBS 시간에 활용하라.)
5) QT 시에 꼭 노트에 기록하기가 귀찮다.
: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노트에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QT 노트 정리를 해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요약해서 노트에 적다보면 그 내용이 정리되고, 문득 깊은 뜻이 깨우쳐지기도 하며, 묵상 자체에도 큰 도움을 준다. 또 그날 말씀에서 깨달은 것을 기도할 때, 구체적인 기도거리가 제공된다. 물론 기계적인 기록 행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록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려 들지 말며, 반면에 기록한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6) 그 날의 말씀을 묵상할 때 새로운 생각, 버릴 죄, 약속, 교훈 (모범), 명령의 항목에 따르다 보면 너무나 적용할 거리가 많아진다.: 묵상에 도움이 되는 질문은 하나의 수단이지, 너무 그 틀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 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나 일단 익숙해지면 오히려 이런 질문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틀이 중요하나 융통성을 잃어서는 더욱 안 된다. 매일 이 5가지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날의 QT 말씀에서 그 질문들이 꼭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버려야 할 죄에 묵상과 적용이 총 집중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새로운 생각 일 수도 있다. 그 때에는 다른 질문의 항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7) 매일의 적용점이 며칠간 쌓이다 보니 QT 시 하나님의 말씀 깨닫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된다.: 한 날의 적용은 한 가지로 한정하라. 그리고 그 다음 날에 주신 적용점이 있으면 그것에 집중하되, 감당하지 못할 적용점을 가지고 끙끙 대는 것보다 하루에 하나씩 새롭게 생활해 나가는 것이 좋다.
8) 말씀을 읽을 때는 큰 깨달음과 감격이 있어 적용할 점으로 적고 기도까지 하는데 하루 생활 하다보면 깜깜하게 잊어버린다.: 그 날의 적용점을 의도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라. 가령 하루에 3번을 정하여 이침에 깨닫고 결심한 바를 그 순간 재음미 하는 것도 좋은 시도이다. 적용점에 대해서 실천을 위한 계획을 세위라. 하루를 그 계획에 맞추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계속하여 말씀 가운데 있게 된다.
9) PBS (PERSONAL BIBLE STUDY) 하는 식으로 하니까 QT 시 성경공부에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QT 시 성경 읽는 것은 PBS 때만큼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자세하게 할 필요가 없다. 가능하면 PBS의 방법이 익숙해져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QT 는 무엇인가. PBS 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QT는 PBS 시간과 구분하여 활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10) 처음 QT 할 때는 감격적이었는데 얼마하다 보니까 강렬한 깨달음이 없는 것 같다. : QT 시 성경 읽기가 늘 처음과 같은 감격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너무 감격해 그 말씀이 마음에 사무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흡사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은 무미건조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QT 시 성경읽기는 우리의 감격에 생명이 있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분별하고 그에 맞게 삶이 조정되느냐에 있는 것이다. 감격은 왔다가 사라지나 생활의 열매는 항상 필요하다. 따라서 성경읽기는 인내심과 꾸준한 연구 자세가 동반 되어야 하며, 이러한 꾸준성이 불발탄으로 끝나곤 하는 한 두 번의 감격보다 낫다.
11) QT 때 꼭 성경만 읽지 않고 경건 서적 등을 읽으면 어떨지 ?: 가끔 경건한 글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이다.) 그러나 먼저 성경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묵상한 다음에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신앙이 장성한 자가 되고 자라기 원한다면 성경으로 들어가라. (히 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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