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忠烈祠
충남 금산 부추 추정리
정인조(鄭仁祚) 장군의 위폐를 모신 사당
장군의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정인후의 6대손인 정인조(조선 초)는 본관 경주(慶州), 호는 남은
장군은 왜구를 몰아쳐 북쪽으로 도주하는 왜구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석문(石門)벌판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같이 일본장군 아지(阿只)를 죽이는데 공을 세웠다.
의총리 마을회관
의총
음짓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700의병이 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국한 그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 의총이라 부른다.
⑧칠백의사순의탑(七百義士殉義塔)
1976년 칠백의사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지켜가고자 칠백의총과 마주보는 위치이며 전적지인
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13.8m의 탑신 전면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이라
새겼고 탑신 하부는 화강암에 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상부에는 동(銅)으로 만든 창과 방패가
장식되어 있다.
⑥의총문(義塚門)
칠백의총의 외삼문(外三門)에 해당한다.
의총문(義塚門)은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지붕은 맞배 지붕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
⑤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의병장 조헌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임진왜란 11년 후(1603년 4월)당시 해평부원군이었던 윤근수(尹根壽)가
글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의 글씨로 새겨 건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 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 시 그 폭파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세
우고 보존하여 내려왔다. 2009년 9월에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세웠으며, 비의 규모에 맞추어 비각도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하였다.
③취의문(取義門)
칠백의총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문으로 의총문과 종용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취의문(取義門) 역시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으로 철근 콘크리트조 맞배 지붕 초익공 건물이다.
⑧칠백의사순의탑(七百義士殉義塔)
1976년 칠백의사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지켜가고자 칠백의총과 마주보는 위치이며
전적지인 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13.8m의 탑신 전면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이라 새겼고 탑신 하부는 화강암에 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상부에는 동(銅)으로 만든 창과 방패가 장식되어 있다.
⑥의총문(義塚門)
칠백의총의 외삼문(外三門)에 해당한다.
의총문(義塚門)은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지붕은 맞배 지붕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
⑤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의병장 조헌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임진왜란 11년 후(1603년 4월)당시 해평부원군이었던 윤근수(尹根壽)가
글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의 글씨로 새겨 건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 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 시 그 폭파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세
우고 보존하여 내려왔다. 2009년 9월에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세웠으며, 비의 규모에 맞추어 비각도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하였다.
③취의문(取義門)
칠백의총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문으로 의총문과 종용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취의문(取義門) 역시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으로 철근 콘크리트조 맞배 지붕 초익공 건물이다.
②종용사(從容祠)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신 선열들의 영혼을 모신 21위(位)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하여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
사액하셨다. 1940년 일제의 항일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되었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①칠백의총(七百義塚)
1592년 8월 18일(음력) 조국강토를 지키기 위해 의병장 조헌선생, 의승장 영규대사 등
칠백의사가 금산 연곤평에서 만오천여 명의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조헌선생의 제자
인 박정량, 전승업 등이 그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⑦숭의지 崇義池
금산위성통신지구국
錦山衛星通信地球局
우리나라 최초 설립
지구 궤도에 떠 있는 통신 위성과 전파를 송수신하여 한국과 외국 사이에 통신 및 텔레비전 중계가
가능하도록 설치된 통신 중계 시설로, 충남 금산군 금산읍 의총리에 있다.
⑤기념관 記念館
칠백의총의 역사와 시설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풍경을 전하는 로비,
다목적실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영상을 상영하는 4D영상실 및 교육실이 있다.
금성산술래길 들머리
퍼걸러 (pergola)
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나 길.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
뱀실저수지
퍼걸러 (pergola)
사두봉 蛇頭峯
사지봉 사시봉
진악산
금성산(좌)
해너무산(우)
성인망월산&핏재산
장생전후백엽두견화
長生殿後百葉杜鵑花
최승로(崔承老, 927~989)
금성산 錦城山
금성면의 鎭山
충남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 산 1-1
금성산 錦城山
청정계곡
퍼걸러 (pergola)
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나 길.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
금성산 錦城山 정상
금성산 정상
해너무산으로 하산하는 쪽
금성산 정상에서
금성산 錦城山
나침판 측정 고도
금성산 錦城山
위치도
금성산 정상에서
서대산
진악산
금성산 정에서 바라본 주변산
파노라마
핏재산
핏재산 고도
상마수소나무숲
산림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