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동 169-40 현대백화점 서쪽 인도에 조악한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첫 문단을 읽어본다.
“현진건은 1900년 9월 2일 대구 중구 계산동2가 169번지 일원(추정)에서 우체국장을 지내던 아버지 현경운과 어머니 이정효 사이에서 4형제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외부(외교부) 통신원 국장 현경운의 후속 관직은 ‘우체국장’이 아니라 ‘대구전보사장大邱電報司長’이다. 司가 붙은 데서 짐작되지만 대구전보사는 우편물 취급소가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이었다.
“1908년 대구노동학교, 1916년 도쿄 세이소쿠 예비학교, 1918년 상하이 후장 대학 독일어 전문학부에서 공부했으며, 《개벽》에 〈희생화〉로 등단하여 박종화, 나도향, 이상화 등과 문예지 《백조》의 창간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둘째 문단도 오류가 상당하다. 대구노동학교는 현경운이 교장을 맡았던 야학이다. 현진건은 8세 무렵 야학이 아니라 서당에 다녔다. 그 후 “1916년 도쿄 세이소쿠 예비학교”가 아니라 ‘1915년 서울 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현진건은 보성 중퇴 후 도쿄 세이죠 중학에 유학했다. 도중에 중학 편입 준비차 세이소쿠 예비학교에 다녔다. 안내판은 보성과 세이죠 중학은 누락하고 학원격인 세이소쿠 예비학교만 소개했다.
“《백조》의 창간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라는 소개도 틀렸다. 현진건은 1921년 1월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빈처〉로 “문단적 명성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을 얻어 “문단의 총아윤장근, 《대구문단인물사》”가 되었다. 《백조》 1호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22년에 나왔다. 현진건은 《백조》 창간 전부터 이미 “본격적인 문학 활동” 중이었으므로 안내판의 소개는 잘못이다.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손기정 선수가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세계를 제패하자 손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던 현진건은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청빈과 양심을 지키며 빈곤하게 만년을 보내다가 1943년 4월 25일 결핵으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장기 말소 의거’로 정의해야 옳다. 이 의거를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각이다.
“고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라는 기술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현진건은 자신을 화장해서 한강에 뿌려달라고 유언하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진건은 화장해달라고 유언했고,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 안장되었다. 뒷날 서울 개발 때 묘소는 없어지고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가 된다.
마지막 문단 “현진건의 주요 작품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할머니 죽음〉 〈불〉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무영탑〉 〈불국사 기행〉 〈적도〉 등이 있다”는 분류 기준과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 〈불국사 기행〉은 〈고도 순례-경주〉의 오기이다. 거론한 단편 수가 7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원식이 〈현진건 소설에 나타난 지식인과 민중〉에서 “현진건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평가한 〈신문지와 철창〉도 추가하는 것이 좋을 법하다.
마지막 문단을 분류 기준과 발표 순서에 맞게 기술하려면 ‘현진건의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에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 죽음〉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신문지와 철창〉, 장편소설에 〈적도〉 〈무영탑〉, 기행문에 〈고도 순례 - 경주〉가 있다’로 밝혀야 옳다.
안내판 제목 아래에 “가까운 문인들과 함께”라는 설명을 달고 게시되어 있는 사진의 소개문도 옳지 않다. 이는 현진건이 ‘가까운 문인들과 함께’가 아니라 ‘기자 문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현진건과 가까운 문인이라면 어릴 적 벗 이상화 ‧ 백기만 ‧ 이장희, 《백조》 동인 나도향, 사돈인 소설가 박종화 등이 대표적인데, 이 사진에는 그들 중 아무도 없다. 단체 사진의 인물들 가운데 최서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촬영 시기는 그가 타계하는 1932년 7월보다 이전이다.
안내판에 현진건 초상화가 실려 있다. 초상화는 사진이 없던 시절 왕의 얼굴을 그린 어진御眞 등 매우 귀한 영정이었다. 하지만 사진 발명 후에는 현창 시설에 (국가보물급 초상화라면 다르겠지만) 작자 미상 초상화를 쓰는 것은 고인은 물론 대중에게도 기본 예의에 미치지 못하는 결례가 되어버렸다. 현진건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작자 미상 초상화를 쓸 까닭이 없다. 현진건에 대한 예의를 전혀 갖추지 않는 ‘우리’의 정신사가 너무나 각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