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4.30
사도행전 7장 55-56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노라!>"
우리가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의 여행입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가 가는 문자 그대로의 우리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행복한 삶?
죄로부터의 구원?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기초로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다만 저의 설명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고 행복하게 그리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의 가치를 덜 중요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 둡니다.
45년 전, 제가 이 교회에서 독일로 선교사로 파송되던 마지막 주일, 성령 충만한 스데반에 대해 은혜를 많이 받은 저는 고별 설교에서 스데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때 대전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던 서 베드로 님이 독일 선교를 위해 제 이름을 스데반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한국 이름이 좋아서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순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독일에 도착해서 독일 학생들에게 "제 이름은 <명환>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제 이름을 기억하지도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편협한 마음을 회개하고 저를 <스데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Hallo, Stephan!"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제가 충남 예산군 신례원 촌에서 살 때인 초등학교 1학년쯤 저의 셋째 누님께서 저희 가정 최초로 예수님을 믿고 저에게 신약 성경책을 주시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를 폈더니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고 또 그 사람은 누구를 낳고 등등 알지 모르는 외국인의 족보 이야기가 나와 성경을 더 읽을 흥미를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신례원성결교회에 다니던 같은 반의 박연수가 명랑하고 거짓말을 안 해서 신앙인을 좋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 예산중학교까지 통학했는데 신례원 정거장에 내려 집에 가는 길 중간에 살던 가톨릭 신자요 같은 학년의 이재범과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토의를 하였는데, 당시 저의 결론은 하나님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대학 신입생이던 1970년 4월 5일 일요일 식목일에 저의 모교 예산 고등학교 독어 선생님이셨던 이수민 선생님을 충남대 캠퍼스에서 만났길래 어디서 다시 만나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 여쭤보았더니 그날 오후 3시에 대전고등학교 옆 대학생성경읽기 회관으로 오라 해서 갔더니 대학생 주일예배가 있고 서베드로 님의 설교가 있고 그다음 둘씩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간호학교 2학년 조경숙 님과 기도하게 되었는데 목사님 딸이셨던 이분은 제게 기도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하려 할 때 우선 그 사람 이름을 부르듯이 우선 “하나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나서, 부탁드릴 것 등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 말하고 기도를 마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서베드로 님은 다음 날 월요일부터 매일 평일 저녁에 영어 회화 시간이 있다고 초대하셔서 다음 날부터 회화 시간에 나갔습니다.
영어 회화는 그룹으로 반 시간 정도 하고 요한복음 그룹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첫날 저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일 집회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고향 친구 이은춘의 부모님이 관리인으로 있던 대전시 가양동에 있던 가톨릭 고아원의 빈방 하나를 무료로 쓰고 있었는데 친구 이은춘이 군에 입대하게 되어 송별 파티를 해 주려고 계획한 바로 그 주말에 서울지구 UBF학생수양회가 있었는데 서 베드로 님은 저와 대전대 한 자매님이 참석하라고 권유하시며 가장 좋은 것을 취하고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승리하는 비결이라고 저를 설득하셔서 송별파티를 취소하고 그 수양회애 참석 했습니다.
주로 서울대 학생들이 참석한 수양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기쁨에 넘치고 또 저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줘 저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믿는 기쁨에 차서 그다음 주일부터 빠지지 않고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 집에 내려가 고향 앞산 위에 올라가 밤낮으로 학과 공부를 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서 베드로 님이 Time 지 공부를 통해 영어 실력을 높이자 하셔서 대전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Time지 공부는 한 일 주일 하고 서울에서 오신 배 사라 선교사님이 강의하시는 사도행전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초문제를 각자 풀고, 그룹으로 기초공부하고, 강의 듣고, 강의에 대한 소감 쓰고, 그 소감을 모두가 발표하니, 하루 모든 시간을 다 써도 모자를 지경이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시간에 대한 피해의식에 빠져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나 저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고가 바뀌어, 기쁨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다른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성경 공부와 주일예배에 초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 영원한 저주에 대한 경고.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 경고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가는 영광의 천국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옷을 벗어 놓고 스데반에게 제일 먼저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7:58).
그날부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맹렬히"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 사정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활짝 여셨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우리 주님은 스데반을 성령 충만케 하셨고 하늘나라 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주님의 영광과 하늘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7:56).
요한 계시록 14:14에서 사도 요한은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흰 구름이 있더라.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아 계시니,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가졌더라."
스데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문을 열었을 때 스데반은 문자 그대로의 하늘나라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예수님은 그를 천국으로 따뜻하게 맞이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노라!" (56).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은 스데반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죽든 나중에 죽든, 우리가 주님께 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소망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한 우리 삶의 여행 목적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기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용서의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스데반이 돌을 맞았을 때 그는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했고, 소망과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처받지 않고 오히려 살인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미움과 증오를 이고 사랑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만으로 가능합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불의와 증오심과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 신앙과 사랑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죽을 때,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뵙고 주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속죄의 죽음으로 우리 죄의 빚을 다 치르셨고 부활하셔서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의 재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때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외치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거처가 사람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3).
그리고 "하늘의 천사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계 4:9-11) 우리도 천만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슬퍼하는 것이나 애통해하는 것이나 수고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계 21:4).
스데반은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들에게서 돌들을 맞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 가는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그는 또한 살인자들을 향해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로 그들을 벌하지 마소서!" (60).
이 말씀과 함께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육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무덤에서 쉬겠지만 그의 영혼은 즉시 주님께로 갔습니다 (고린도후서 5:8).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 사회의 소수였고 종종 세상으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이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스데반처럼 산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반드시 카타콤을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인 박해 시대에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이었는데 이곳은 종종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타콤의 벽에는 그들의 부활 희망을 나타내는 글과 그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한 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목적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두려움, 걱정, 게으름을 극복하고 기쁨과 희망으로 힘차게 살며 하나님 나라로 멋있는 여행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스데반은 부활 신앙과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확신을 갖고 간증했습니다.
그의 간증은 훗날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이 땅에서의 마지막 고별의 장면을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은 이 장면을 목격했던 바울이 사도행전 저자 누가에게 전해주어 누가가 이를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데반의 예수님 증거는 사울이 바울로 회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천국 가는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7년을 하나님 사역을 섬겼는데 그때 임인섭 형제님과 일대일로 함께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독일에서 최 에스더 선교사와 다른 한국 선교사와 함께 8년을 도르트문트에서 그리고 45년을 보쿰에서 학생 선교 사역을 섬겼는데 두 도시에서의 사역을 요약하면 선교 동역자들과 합력하여 도르트문트에서 루드거 지켈만 형제님과, 그리고 보쿰에서 레나테 북홀쯔 자매님과 성경공부하여 이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수님 제자로 살며 우리 선교사역의 핵심적 역사를 감당한 것입니다.
예로써 루드거 형제가 일대일로 도왔던 발터 네트 형제는 후에 쾰른 UBF 책임 사역자로 오래동안 충성하다 은퇴하였고 그 뒤를 이어 레나테 자매가 도왔던 울리케 브링크만 자매와 결혼한 에버하르트 그로스 형제가 쾰른 UBF 책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루트거 형제는 그 후 보쿰에서 동역하며 많은 독일 학생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현재도 루드거와 동역자 그레이스 선교사는 에센에서 많은 학생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돕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 목적지는 더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곳에 가 주님을 대면하고 기쁨을 나누며 모든 성도들과 교제하며 함께 주를 찬양하는 곳이 우리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새롭게 기억하고 기쁨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이요, 이 동안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거룩한 나그네인 우리 순례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다른 사람이나 세상에 한눈을 팔지 말고 나에게서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부터 새로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독일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부흥은 수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이 본질적인 부흥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을 고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 스스로 우리 신앙의 부흥을 주셔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또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어 우리에게서 남을 미워하거나 정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랑과 용서가 충만하고,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하늘에 계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목적지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매일매일 주님께 나이기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눅 23:34).
스데반은 주님을 본받아 죽어가면서 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세요!"
스데반은 살인자들에 대한 미움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핍박자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적 죽음의 시간은 우리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영접하시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저는 제 아내 에스더의 천국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암에 걸린 에스더에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큰 고통 속에서 에스더는 하나님께 "왜 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여러 번 물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에스더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에스더는 "아빠, 아빠, 아빠!"라고 세 번 정도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에스더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세 번 말했습니다.
에스더는 이 말을 한 후 놀랍도록 평화로운 표정을 짓더니 곧 잠이 들었습니다.
이 말들은 항상 에스더 곁에 있었던 제가 들을 수 있었던 에스더의 마지막 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잠든 후 그녀는 3일 후에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4.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스데반의 이 땅에서의 최후의 장면은 우리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이 어떠할지 보여줍니다.
사울은 처음에 이 장면이 자신에게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한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며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자신도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이 예수님은 사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회개하고 예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자신의 기쁜 이유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맺는말
이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목적지를 생각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으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