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산책 2>
환국과 신시 / 김붕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 때 일연 스님 당시에 간행된 진본 <삼국유사>는 전하지 않고 ‘정덕본(正德本)’이라 하는, 1512년(임신년, 중종 7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 것이 완질로 된 최고본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옛날에 환국(桓國)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계시어[昔有桓國]......”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정덕본에는 ‘나라 국’ 자를 ‘입구 속에 王’ 자로 표기했고 손보기 박사가 소장했던 파른본에도 입구 속에 흙 토자로 표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때 조선사 편찬 위원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새로 영인본을 만들면서 입구 속의 ‘王’자를 ‘大’자로 고쳐 ‘昔有桓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해석됩니다. 이것을 광복 후 학자들이 답습하여 교육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고 우리 역사를 잘못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환국’과 ‘환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昔有桓因”이라 할 때는 그저 단군의 할아버지뻘 쯤 되는 한 분이 옛날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환인, 아버지 환웅, 손자 단군 3대의 이야기로 격하됩니다. 그러나 “昔有桓國”이라면,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이미 ‘환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뜻이 되어 다음과 같이 고대 조선을 삼국의 역사 체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昔有桓國> <桓雄。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謂之神市> <壇君王儉。都平壤城 始稱朝鮮> 즉 우리 역사 속에는 첫째 환인이 세운 <환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둘째 환웅이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었으며, 셋째 단군이 건국한 <조선> - 이렇게 고대 3국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중에 유통되는 <삼국유사> 중에는 ‘석유환인’이라는 구절이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 또한 극복되어 ‘환국’이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환국’의 설정 없이는 교육법 제1조에 있는 ‘홍익인간’의 개념을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교육법 제1조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지었는데 여기 나오는 ‘홍익인간’은 단군조선을 훨씬 상회하는 환국을 다스리던 환인의 치국 이념이었고 그 아들 환웅을 ‘삼위태백’으로 내려 보낸 이유가 그곳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弘益人間] 할 만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환국을 다스렸던 환인의 사해동포가 함께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 휴머니즘의 극치인 것이 ’홍익인간‘의 이념입니다. 이는 단군 조선과 신시의 역사를 훨씬 상회하는 환국의 건국이념이고 그 연대도 BC 2333년의 단군 건국 훨씬 이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대승적인 포용력이었던 것입니다.
환국 다음에 탄생한 나라가 신시(神市)입니다. 환웅이 환국으로부터 무리 3천을 데리고 인간 세상으로 하강했다는 기록은 부족 사회의 이동으로 해석됩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부터 점차적으로 기온이 하강하기 시작했는데7) 이런 기후 변동이 환웅으로 하여금, 생활하기에 적합한 지역(인간 세상)을 찾게 한 것(무리 이동의 필요성)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환인이 환웅에게 널리 세상을 편안하게 해 줄 길지(吉地)로 점지해준 곳이 태백산, 바로 신시입니다. 본래 ‘산’이란 인간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성소이며 그 꼭대기의 ‘신단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중간 매개체입니다. 신단수가 있는 성소는 소도(蘇塗)이며 정신적인 지도자가 거하는 장소입니다. 환인은 천상의 질서를 주관하는 분이고, 단군은 지상의 국가를 다스리는 제왕이니 그 양자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로서 환웅의 <신시>가 열린 것입니다. 천상의 환인과 지상에 하강한 환웅, 그리고 천상적인 환웅과 지상적인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 단군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민족 태초의 신앙인 천, 지, 인 삼신 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런 역사가 처음 이루어 진 곳이 바로 <신시>입니다.
이 신시의 터전인 태백산을 일연 스님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주를 달아 놓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 국한했던 고려 당시의 영토(천리장성 이남) 개념의 소산이라며 현재 많은 학자들은 백두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백두산은 고래로부터 우리 민족의 성소임은 백두산이 ‘희다’는 뜻과 ‘밝다’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데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환인 환웅의 ‘환’이 환하다 밝다의 뜻이며, 해모수의 해, 박혁거세의 ‘붉음’ 고주몽의 ‘높음’과 상통하는 우리 민족 광명사상의 발현일 것입니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에 하강한 것을 지배 계층의 이동으로 본다면, 동굴 속에 있었던 곰과 범은 토착세력입니다. 이들이 사람이 되고자 원했던 것은 우세한 능력을 갖춘(천손족) 이주 세력에 대해, 열세한 토착 세력이 동맹을 맺고자 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곰이 사람이 되고 범이 사람이 되기에 실패한 것은 웅족만이 신지배층과의 동맹에 성공했다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 단계로 볼 때 부족연맹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부족 간의 동맹 관계는 종종 결혼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중국 역사서 <사기>에 등장하는 상나라 시조 설(契)이나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부계는 모두 황제의 혈통이고, 모계는 신농씨의 혈통인 것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고구려 유리왕이 아내로 취한 송 황후도 부족 동맹이 성공한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고조선은 조선족을 중심으로 맥, 예, 진번, 임둔, 발, 숙신, 청구, 구리, 고죽, 옥저 등의 대부족 연맹으로 출범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8)
환웅이 신시에 도읍한 나라를 ‘배달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2002년부터 국사 교과서에서는 ‘배달’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한글날이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그 노래의 뜻도 ‘배달’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아직 우리 역사가 되찾아야 할 과제는 참으로 많은 곳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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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일지사, 1986, 149쪽
8) 앞의 책 346쪽
첫댓글 배달의 민족 인것은 틀림 없을 텐데요? 세계 지구촌 한 자리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로 알아지는 순간입니다 늘 교수님의 글앞에 감사를 올립니다 _()_
이제부터 원고 정리에 정신이 없겠습니다.
청랑한 가을하늘아래서
멋진 편집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