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을 겸비한 리더가 미래를 이끌어 간다.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 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이다.
돈 못 벌고 안 풀릴 때는 역사물을 몰-빵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로마인
이야기‘(15권)를 끝내놓고 보니 복잡한 인물 관계만 빼놓고 세계사가
교통정리 되는 것 같습니다. 신형 이어폰을 끼고 달리는 드라이브가
신바람납니다. 저 만큼에서 부르투스가 하이파이브를 해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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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3월 15일은 로마역사의 흐름을 바꾼 날입니다. 로마역사
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에요.
영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줄리어스 시저’라고 발음합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는 3개의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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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509년까지는 왕정시대, 아직 왕정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로물루스를 접할 때마다 에스더의 자화상 ‘늑대’가 금방이라도 화폭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습니다. 18세 때 작업한 100호짜리 자화상이 반드시
빛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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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27년까지 공화정시대,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의 제정시대, 즉 로마제국시대로 구분됩니다. 공화정의 시작은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해전' 정도를 기억해야 할 것이고 제국시대는 석고
상 '카라 굴라'가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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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시대 후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공화정의 전통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제1차 삼두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당시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영토에 해당하는
강대국)와의 전쟁터에서 죽은 후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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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리하여 두 세력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그리스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추격합니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우스는 폼페이우스를 보호했는데 당시 그는 누나인 클레오파트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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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어요. 로마에서 최고 실력자로 자리를 굳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2월 14일에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이 됩니다.
그는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출정하기 3일 앞서 3월 15
일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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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새로운 원로원 건물이 신축 중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세웠던 극장 회랑을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했어요. 그가 회랑에 들어서자
한 원로의원이 무엇인가 탄원하려는 듯 다가왔어요. 그리고는 여러 명의
원로의원들이 그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옷자락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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듭니다.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용맹을 떨쳤던 56세의 사나이의 몸에는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들이 꽂혔습니다. 무려23방이 칼을 맞고 안 죽을 장사가
없을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정적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후에도 그에 대한
예우로 그의 석상은 그대로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아래에서 피범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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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쓰러지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이 거두먹인 핏덩이 조카 부르투스에 의해
말입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신전 유적에서 재현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1808년 로마의 화가 카뭇치니(V. Camuccini 1771-1844)는 상상을
통해 이 격동의 순간을 매우 현장감 있게 화폭에 담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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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야! 미술사를 한번 정리해보는 건 어떻겠니? 이 역사의 현장은 로마 중심
지역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로마공화정
시대 후반기의 신전 유적 터가 보존되어 있는데 유적 터 일부분은 폼페이우스
가 세웠던 로마 최초의 반원형 극장에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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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이 되면 이 유적 터에서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공화정시대의 거물은 카이사르가
분명합니다. 그는 정치인이자 군인, 성직자, 저술가. 무엇보다 서구권에서
황제의 시초가 된 인물로, 본인은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이름은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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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정치적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에게 그대로 전해진 데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네로 이후 오토 때부터
로마 황제 제호 기본 틀로 정착되면서 황제라는 의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독일어권에서 황제를 이르는 ‘카이저’와 슬라브어권의 ‘차르’가 그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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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것입니다. 오늘날 제정 시대라고 하는 기원전 29년 이후 로마인들에게
사실상 황제로 인식됐고, 티베리우스~클라우디우스까지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 황제들에게는 직접 언급이 자제됨에도 그들의 정통성 기반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중시조로 인식됩니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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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직접 황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3대 황제 가이우스시대 일화의
예처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카이사르는 그들 일가의
실질적 시조이자 정통성의 근거로 인정받았고 그의 이름은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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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으며, 갈리아를 정벌하고, 정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켰으나 원로원에서 암살당했어요. 이미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공화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해 로마 제국이 됩니다. 신병 카르사르 리스펙트.
2023.3.25.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