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날들의 축복 민정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할머니가 울고 있다. 하얀 눈밭 속에서. 검은 연기는 하늘로 오르고, 그 밑엔 떠나간 할아버지의 옷들이 재가 되고 있다. 김광석의 ‘60대 부부 이야기’의 노래가 잔잔히 흐르고 생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조각조각 스쳐 지나간다.
하루 종일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영상 때문이었다. 10년 전 방영된 89세와 98세 노부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강원도 횡성 어느 산골, 6남매의 자녀들은 장성하여 도시로 떠났고 둘만 남은 노부부는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간다. 나무를 때서 구들장을 덥히고 개울물에서 빨래하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다. 둘이 마주 앉아 세월만큼 주름진 손을 만져주는 모습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연민이었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들의 따뜻한 미소는, 삶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함께 나이 들어가며 쌓아온 정과 추억이야말로 행복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이들이 독립해 떠난 집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으로 가득하다.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는 삶의 초점이 그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하루의 일과도, 매일의 식탁도 오롯이 아이들의 시간과 입맛을 위해 존재했다. 나와 남편의 삶은 그 뒷전에 머물렀고, 우리를 위한 순간은 아이들의 웃음 속에 녹아 있었다. 늦은 나이에 자녀를 본 우리는 아이들에 대한 끈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이제 그 중심은 비워진 채로 남아, 이전에 없던 공허한 여백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아이들이 없는 휑한 집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는 우리는, 부부이기보다는 룸메이트에 가깝다.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각 방에서 책을 보거나 컴퓨터와 함께하며, 식사 시간에나 겨우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본다. 그러나 누가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어디 갔나 찾아다닌다. 그런 자신들을 보며 우린 피식 웃음 짓곤 한다. 별로 대화가 없어도, 같이 취미를 공유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일까. 어쩌면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데도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너무 달랐다. 취미도 식성도 성격도 어느 하나 맞는 것이 없었고 공감하는 부분도 달랐다. 작은 갈등들이 모여 한때는 불만으로 가득 차기도 했고, 가끔 볼멘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깊이 자리 잡은 성격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더는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금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은 적당한 포기와 체념으로 다름을 용납했고 그것 또한 익숙하게 되었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우린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에게 길들었는지도 모른다. 두 남녀가 만나 결혼할 때 주례사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해로(偕老)하라는 말을 하곤 한다. 부부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선물이다. 하지만 해로한다 해도 결국 그 끝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한 사람이 남겨지는 이별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떠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일 지도 모른다. 부모 밑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될 때, 그 상실감과 공허함은 떠난 이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빛바랜 페이지 속에 담긴 순간들을 꺼내어 되새기며 남은 날들을 보내게 되리라. 영상 속 할머니의 모습이 내 뇌리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는, 멀리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별이 언제 불현듯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삶의 유한함을 피부로 느끼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우리 부부의 검었던 머리도 백발이 되어간다. 한때 나보다 총명했고 길눈도 밝았던 남편은 눈도 귀도 어두워졌고 운전마저도 서툴러졌다. 지금, 서로의 곁에 함께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때인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미래라는 전제 아래 당연하게 여겨왔던 시간이 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생(生)이라는 것 또한 자각한다. 아이들을 향해 끝없이 뻗어가던 마음의 더듬이를 안으로 거두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너무 익숙해져 무심했던 서로의 관계에 이제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하리라. 공동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남편의 버킷 리스트를 살펴본다. 사소한 일이라도 같이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실행에 옮기리라 다짐한다. 인생이란 숲 가장자리에 잠시 깃든 새와 같다고 했던가. 아침 햇살 속에 “잘 잤어?” 한마디 건넬 때, 감사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보증 없는 내일보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충만한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의 준비이자, 남은 날들을 위한 축복 된 시간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