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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코로나 선생의 매운 가르침
주혜(主恵) 김정숙 / 수필가
한해의 연말과 연초가 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시간을 보낸다. 저무는 한 해를 잘 정리하고픈 아쉬움과, 다가오는 새해를 잘 맞이하고 싶은 설렘이 공존하는 시간들을 갖는 것이다.
2021년 연말에 나 역시 그런 시간들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격 까칠한 ‘코로나 선생(!)’이, 아무 예고 없이 우리 가족에게도 불쑥 찾아 온 것이다. 내가 특별히 그 질병을 까칠한 코로나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그 사건을 계기로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여러 가지 매운 교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중순경, 큰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큰 아들이 접촉자에 해당되어 PCR검사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최초 PCR검사를 해야 하는 날부터 대략 일주일동안 내가 운영하는 교습소의 휴원을 결정했다. 학부모님들께도 우리 가족이 자가격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며칠 휴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미리 안내를 드렸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다니던 학원도 일시적으로 모두 중단시켰다.
결국, 1차 PCR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다행히 ‘음성’이었다. 그런데 2일 뒤 학교로부터 2차 추가검사 요청이 와서 재검사를 했다. 그 결과 우리 가족 모두 ‘양성’판정을 받았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싶은 힘든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미리 교습소를 휴원한 것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과, 내 자녀들의 학원수업도 모두 중단한 것 역시 빠르게 결정을 잘 한 것 같았다.
작은 두려움과 공포감, 그리고 갖가지 근심∙걱정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들을 애써 누르며 가족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족 모두의 체온, 산소포화도와 신체 증상까지 하루 3번 매일 기록했다. 우리 가족을 원격진료하기 위한 개인병원도 지정되었다. 그분들과 주기적으로 통화하며 가족들의 상태변화도 계속 통보했다.
두 아들은 하루 정도 고열에 시달리긴 했지만, 해열제를 주기적으로 먹으면서 다행스럽게도 점차 열이 내렸다. 남편 또한 해열제와 감기약 등을 복용하면서 점차로 회복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 평소 기관지 상태가 안 좋았던 나는 겨울 난방기의 건조한 공기 때문에 목 상태가 더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족 중 나만 코로나와 더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코로나 발병 후 처음 3일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하더니, 건강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고열과 어지럼증, 식욕부진, 체력저하, 구토 증세까지 심해지며 갖가지 증상들이 나타났다. 결국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약이나 물을 복용해도 구토로 이어졌다. 발병 7일째에는 결국 산소포화도도 89까지 떨어졌다.(정상 수치는 96~98정도이다.) 아마도 탈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호흡곤란 증세가 좀 더 심해지자, 점점 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나는 가급적이면 재택치료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원격진료 담당자는 병원에 입원할 것을 적극 권했다. 내 생각에도 더 이상은 내 몸이 버티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에 결국 입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앰뷸런스가 집 앞에 도착했으나 나는 운전자들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혼자서 걸을 수 있다면, 나 혼자서 문이 열려있는 앰뷸런스 차량으로 직접 승차해야 했다. 병원관계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집에서 출발하여 구급차를 타고 병실에 입원하기까지 나는 대략 5~6명 정도의 하얀 방역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 6명의 의료관계자분들은 서로 다른 업무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구급차를 운전하는 사람, 지하주차장에서 별도의 방향을 안내하는 사람, 병실입구까지의 길을 안내하는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소독하는 사람, 병실 복도를 소독하는 사람, 병실을 오가며 상황을 체크하는 간호사까지 모두들 하얀 방역복을 입고 일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게다가 나는 그 영화 같은 장면에서 인류가 가장 꺼려하는 전염병 환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나도 모르게 잠시 어린아이처럼 공포감도 느꼈다.
그런데, 그 답답한 방역복을 입고 계속해서 감염병과 사투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을 대면하자니, 괜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저분들의 봉사와 헌신 속에 왠지 나도 이 병원에서 내 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평소 희극 배우처럼 많은 농담과 유머를 잘 하는 나의 남편은, 내가 입원하는 그 상황에서도 (혹시나 아이들이 놀라거나 긴장할까봐 그랬던지) 또 농담을 건네는 것이었다. <엄마를 한참 뒤에 볼 수도 있으니 얼른 사진 몇 장 찍어 둬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웃음으로 넘겼을 그 말이, 이상하게 그날따라 참 서운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은 몸과 마음이 아프면, 마음의 상처도 더 많이 생기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마음이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실에 입원하니 같은 병실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6명의 코로나 환자들이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층 전체는 코로나 환자들을 위한 층이었다. 의료진들은 투명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단지, 환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간호사 1~2명만, 필요시에 흰색 방역복으로 완전무장을 한 후 환자실을 출입했다. 우리 환자들은 의사선생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 인터폰을 이용하여 유리창 너머의 의사선생님과 1~2일에 1회의 전화 진료만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입원을 해서도 처음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여전히 구토 증세가 있었고, 약이나 물을 먹어도 구토가 일어났다. 환자식으로 1회용 도시락이 제공되었는데, 속이 울렁거려서 거의 국물만 한 두 숟가락 겨우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의사선생님에게 포도당주사를 좀 놔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의사를 직접 대면할 수 없으니, 본인의 상태는 가급적 본인이 잘 파악해서 의사와 통화할 때 제대로 보고해야 했다. 거의 7~8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나는, 탈수현상 때문인지 이제는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에게 관련 비용을 청구해도 좋으니 포도당주사를 좀 놔달라고 요청했다. 포도당주사를 맞은 지 하루정도 지나니 그때서야 아주 조금씩이라도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병실에 함께 있었던 우리 환자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몸이 덜 불편한 사람들이 더 불편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힘든 시간들을 겨우 버텼다.
병실 퇴원의 기준은 아마도 전염 가능성이 없어지면 퇴원을 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몸의 체력이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였는데도 병원의 지시에 따라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입원할 때처럼 나갈 때도 혼자서 퇴원했다. 병원 건물 1층의 마지막 현관문을 나갈 때, 병원관계자가 나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 병원 문을 나가신 후에는, 절대로 이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건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면 혹시라도 추가적인 감염이 생길까봐 그런 것 같다는 짐작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도 느껴졌다. 갑자기 내가 인류의 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또 한 번 느껴야 했다.
집에 퇴원해서도 나는 내 몸의 회복을 위해 업무를 중단한 채 1개월 정도를 더 쉬어야 했다. 특히 목의 잔기침이 잘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각종 영양제나 건강보조식품들을 열심히 복용했다. 결국 발병한지 거의 50일 만에 본연의 업무를 정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세월의 시간은 2021년도 연말이 지나고, 2022년도 연초도 이미 지나가 있었다. 또한 신정도 지나고, 구정명절도 모두 지나갔다. 내 인생의 50일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를 탓하랴. 지금 이것이 우리 모두가 힘들게 겪고 있는 인류의 슬픈 현실인 것을∙∙∙∙∙∙.
나는 오히려 이렇게라도 나의 본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 사이 체중도 4~5kg정도 빠졌고, 뇌기능도 훨씬 둔감해진 것 같고 기억력도 더 많이 감퇴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해서, 음식 맛도 잘 느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밥맛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을 생각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수업을 기다리는 교습소의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회복되어야 했다. 시간적 피해, 건강상 피해, 심리적 피해, 그리고 물질적 피해까지 곁들여져 몸도 마음도 참 가난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교습소장’으로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부모님은 나에게 심한 불쾌감을 토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나도 무척 속상했으나, 워낙 민감한 시기라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 학생도 나도 수업을 계속하기를 원했으나 학부모님께서 수업을 중단하셨다. 그분의 마음도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나의 건강을 걱정해주시면서 몸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솔직히 말하자면 몸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주변의 시선 또한 따갑게 느껴졌지만 나 스스로도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됨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이미 검사를 통해 전염성이 모두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의사가 확인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딘가 외출을 하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굉장히 소심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도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 자신도 이 코로나 감염을 절대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염되면서 직∙간접적으로 따갑게 배운 교훈들이 많았다.
우선, 전염병에 걸리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많이 무섭고 두렵고 적지 않은 금전적 손해가 예상되더라도, 가급적 빠른 판단과 적절한 대응이 여러 가지 더 큰 손해를 줄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야 가족과 나의 마음도 덜 다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깨달은 것은, 나와 가족의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마음의 건강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민감한 시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섣부르고 날선 비판을 서슴없이 해댄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너무 크게 상처받지는 말아야 한다. 그 사람들도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 같다.
세 번째로, 진짜 아팠을 때 진정으로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본의 아니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내가 마음을 가득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밀어낸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완전히 격리해제 되자마자 나를 찾아와서 마음을 다해 위로해 준다. 이 극명한 비교 앞에서 사람마다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덕(德)이 다르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의 마음으로, 나도 덕이 많은 사람은 못되더라도 최소한의 덕이라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먼저 회복한 남편은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나의 입맛을 돋아주려 애썼다. 아이들도 가급적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아픈 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파트 윗 층에 사시는 시부모님은 계속해서 음식을 문 앞에 놓고 가셨다. 연로하셔서 혹시나 감염될까 봐 염려되어, 절대로 우리 집에 오시지 말라고 우리가 신신당부 드렸는데도 말이다. 멀리 사는 나의 친정식구들도 하나같이 열심히 안부를 물어오며, 위로금까지 보내주었다. 오래된 고향친구도 몸보신하라며 귀한 음식들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늘 귀한 가르침과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선생님께서도 귀한 음식을 선물해 주셨다. 코로나를 통해 잃은 것도 더러 있지만, 얻은 것은 더욱 많은 것 같다.
코로나 선생은 내게 참 까칠하고 매운 선생으로 다가왔지만, 그 경험을 거울삼아 나를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 같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우리들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시련은 우리 자신의 삶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벌써 3월이다. 최근 전국의 일일 코로나 확진자 수는 35만 명을 넘나들고 있다. 이제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아도, 내가 아프던 그때처럼 ‘왕따’의 시선과 분위기는 훨씬 덜해진 것 같다. 확진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다보니, 이제는 너도 나도 어쩔 수 없이 한번은 지나쳐 가야하는 관문처럼 여기는 듯하다.
코로나 감염으로 힘들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디 몸의 관리뿐만 아니라 마음의 관리도 더욱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간절한 마음이 이 깊은 밤에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유는, 현재의 시류(時流)가 괜한 나의 노파심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