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哲宗
철종이라는 공식적 이름보다 '강화도령'으로 더 잘 알려진 철종, 이원범(李元範)은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이었고, 은언군은 그 아들 상계군(上溪君) 담(湛)이 반역을 꾀했다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또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고 죽음을 당하고, 은언군 또한 강화도에서 사약을 맏고 죽었다.
또한 철종의 형도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고, 나머지 가족들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그때 철종의 나이는 14세이었다. 이렇게 몰락한 왕족 내지는 양반, 아니 평민으로라도 강화도에서 계속 살았다면 철종 그 자신은 조금 더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 때 헌종이 죽자, 이내 왕통을 물려 받았고,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에 눌려 왕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린다.
용흥궁 龍興宮
용흥궁(龍興宮)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살까지 살던 집이다. 좁은 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또는 골목 사이)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는 이 용흥궁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곳 용흥궁은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이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853년 (철종 4)에 강화 유수(留守)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 지었다. 용이 태어난 곳 이라는 의미의 용흥궁은 그 후 1903년에 청안군 (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으며,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좁은 고샅 (시골마을의 좁은 골목길)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는 이 용흥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 등과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潛邸舊基碑閣)' 1동, 내전 1동, 외전(外殿) 1동, 별전(別殿)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 건물이다. 내전은 전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약 30평이다. 별전은 전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 집으로 건평이 약 30평이다.
잠저구기비각 潛邸舊基碑閣
잠저(潛邸)란,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私邸)를 말한다. 때로는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신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는 '주역(周易)'의 잠룡(潛龍 ... 덕을 닦으며 숨어 사는 성인 혹은 영웅)은 쓰지 말라 .. 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 이를 용이 못에 잠입해 있다가 승천 (昇天 ..즉위)함에 비유하여 잠룡(潛龍)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태조, 중종, 인조, 선조, 철종, 고종 등 왕족이나 왕세자가 아니었던 자로서 혁명, 반정 또는 추대 등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거나 또는 세조, 효종, 영조 등 당초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로서, 궁궐에서 나가 살다가 뒤에 왕이 되어 입궐한 자들의 즉위 전 사저를 지칭하였다. 이들의 잠저는 보통 후에 별궁(別宮)으로 지정되어 원묘(原廟)나 진전(眞殿 ..초상화를 모신 사당)으로 관리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 이성계의 함흥 본궁(咸興 本宮)과 개성의 경덕궁(敬德宮), 인조의 저경궁(儲慶宮)과 어의궁(於義宮), 철종의 용흥궁 그리고 영조의 창의궁(彰義宮) 등이 있었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살았던 집터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쓰러져가는 초가 삼간을 헐어내고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을 지어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철종잠저구기비(哲宗潛邸舊基碑)'를 세워 두었다.
예릉 睿陵
예능(睿凌)은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기간 1849~1863)과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 (1837~1878)의 무덤이다. 3개의 조선 왕릉 (희릉, 효릉, 예릉)과 후궁, 대군, 공주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서삼릉(西三陵)의 경내에 있다.
서삼릉 西三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의치한 서삼릉은 원래 도성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 즉,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을 말한다. 서삼릉의 시작은 본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종의 정릉(靖陵)이 자리를 잡았다가, 강남구의 선,정릉으로 옮겨갔고, 그 아들인 인종의 효르이 조성되었다.
또 왕릉 주변에 왕실의 묘지가 대규모로 만들어지는데, 명종 ~ 숙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 등 수십 기의 무덤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철종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서삼릉이 완성된다.
예릉 睿陵
철종이 죽자, 빈청에서는 철종의 묘호로 철종(哲宗), 선종(宣宗), 장종(章宗)을, 능호로 예릉(睿陵), 헌릉(憲陵), 희릉(熙陵)을 올렸는데, 최종적으로 철종과 예릉으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조선왕실에서는 묘호와 능호를 정할 때 선왕의 품성, 업적 등을 고려하여 3개의 묘호와 능호를 올리면, 신임 왕이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정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丁字閣)은 다른 능에 비하여 웅장하고 크며, 처마의 잡상(잡상)도 기존의 3개에서 5개로 늘었다. 참도 역시 기존의 향로와 어도가 2단에서 3단으로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고종의 홍른과 순종의 유릉에서 3단으로 이어지는데,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가 변화하는과정에서 생긴 형태로 추정된다. 예릉의 비각은 대한제국 융희 2년에 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앞면에는 ' 대한제국 철종장황제 예릉, 철인황후 부좌 (大韓帝國 哲宗莊皇帝 睿陵, 哲仁皇后 附佐) 라고 쓰여 있다.
예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난간석으로 능을 둘러 쌍릉으로 연결하였다. 난간석의 석주(石柱)에는 음각 세로선과 원문을 새기고, 원문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간지(十二干支)를 새겨넣었다.
보통의 능침은 봉분을 상계(上階), 文人石 공간을 중계(中階), 武人石 공간을 하계(下階)로 하여 3개의 계단을 조성하는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인석과 무인석을 같은 레벨에 배치하였다. 이곳 예릉은 하계 앞쪽의 폭이 넓으며, 장명등을 여느 능처럼 중계에 놓지 않고, 하계 끝에 두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한 배치 방법이다.
장명등은 사각 장명등이 아니라 융,건릉의 양식에 따라 팔각으로, 이전보다 다리가 길어졌으며 지붕 위의 상륜도 없이 둥근 파문이 몇 겹 겹쳐 있어 특이하다. 가운데 원형 틀 안에 꽃문양을 새긴 것은 융릉의 예를 따른 것이다.
철인왕후 哲仁王后
본관은 안동이며, 성은 金이다. 영돈녕부사,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1837년 태어났다. 그후 1851년 (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858년에 원자가 되는 아들을 낳았으나 6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은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의해 왕이 되었기에, 당시 안동김씨의 위세에 눌려 대항할 힘이 없었다. 철인왕후 또한 순원왕후의 천거로 왕비가 된 이후 안동김씨 친정을 위한 주청을 계속하다가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게 되었고, 이후 철종은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죽은 15년 후인 1878년 자손 없이 42세로 죽었다.
예릉(睿陵)의 좌향은 정북 방향에서 정남향하고 있으며, 좌측에 희릉, 우측에 효릉이 있다. 이곳은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능선의 평화로운 등선을 이루는 지형에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능역의 좌우 능선과 전면부 능선이 1970년대부터 한국 축산 진흥의 산실로 사용되어 농협과 축협의 목장과 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다.
석물의 재사용 石物의 再使用
철종은 나름대로 ' 애민(愛民) '정치를 하려 노력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고기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가축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권과 세력이 없는 철종은 순원왕후의 안동김씨와 며느리, 익종비의 풍양조씨의 세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三政) 문란이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바졌다.
세도정치에 대항할 방법이 없던 철종은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했는데, 철인왕후와 7명의 후궁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永惠翁主)마저 개화사상가 박영효(朴泳孝)와 혼인한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러써 그의 혈육은 대가 끊겼다. 순원왕후 승하 후 안동김씨와 조 대비의 풍양조씨 간 세력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정국의 혼란 속에 힘 없는 철종은 재위 14년 6개월 만인 1863년 12월 8일 묘시에 33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죽었다. 철종과 철인왕후는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황제국 변경을 할 때 황제로 추존되지 못하고, 순종 때 추존황제에 올랐다.
철종이 죽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조대비 (趙大妃)'는 220년 전에 代가 갈린 인조의 3남 인평대군 (소현세자의 동생)의 후손인 남연군(南延君)을 사도세자의 3남 은신군(恩信君)에게 양자로 입적시키고, 그의 손자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高宗이다. 즉,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고, 그의 아들이 고종이다.
철종 승하일에 맞춰 고종을 즉위시킨 조대비 역시 수렴청정을 했는데, 철종의 예능을 조성하면서 310여 년 전 중종( 제11대 왕)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되었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石物)을 재사용하였다. 힘 없고 손없는 철종에 대한 홀대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일까. 철종의 예릉 석물에서는 거창하고 웅장한 조선 중기 석물 조각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인근 희릉(禧陵 .. 11대 中宗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의 석물과 같은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 특히 문인석, 무인석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조상의 古石物을 재사용한 대표적인 사레이다. 이렇게 선대의 석물을 재사용하는 것은 조선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사례로, 현종의 숭릉과 순조의 인릉에서도 볼 수 있다. 예릉을 조성하면서 광중(壙中 .. 땅을파는 작업) 작업 때 중종의 애책문(哀冊文 .. 제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적은 옥판의 책)과 증옥백(贈玉帛 .. 유택에 넣었던 옥과 비단)이 발견되어, 철종이 묻힌 이곳 예릉이 중종 靖陵의 초장지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지든 / 강화도령님 강화도령님 / 도령님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 / 음 ~ 말도마라 사람팔자 / 두고봐야 아느니라 두고봐야 아느니라
음지에도 해가 뜨고 때가 오면 / 꽃도 피듯이 / 도령님 운수좋아 나랏님 되셨구나 / 음 ~ 얼싸 좋다 졸구 좋구 말구 / 상감마마 되셨구나 상감마마 되셨구나
구중궁궐 삼천궁녀 넋을 잃은 / 강화도령님 강화도령님 / 산골에서 뛰고 놀든 그 시절이 좋았대두 / 음 ~ 상궁 내시 귀찮구나 / 내 맘대로 놀아보자 내 맘대로 놀아보자.
마지막 왕릉
예릉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다. 이후 고종과 순종은 '황제능'으로 그 법식이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능이었다. 고종은 예릉의 석물과 부속 건축물들을 웅장한규모로 하여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영조의 원릉부터 중계, 하계를 구분하지 않고 문무인석을 같은단에 배치하였는데, 무인석은 갑옷으로 층이 나있고, 문인석은 효릉에서 약간 보이기 시작하던 소매 주름의 반전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홑은 턱아래에 붙여서 큰머리를 받치고 잇는 듯하다.
철종 어진 哲宗 御眞
현재 조선 왕의 어진(御眞 .. 초상화)은 극소수가 남아 있다. 여러 전란과 화재 및 일제강점기를거치면서 잃었는데, 太祖 이성계와 英祖 그리고 哲宗과 高宗의 어진 등이 전한다. 그 가운데 철종의 어진은 불에 타서 절반 정도 남았다.
이 그림 자체가 철종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듯하여 보기에 안쓰럽다. 그 시대상 때문인지 얼굴마저도 측은해 보이는데, 눈이 사시(斜視)여서 불안한 상태일 때 그린 것 같은 느낌이다. 화려한 복장에 비해 순진한 표정이 오히려 보는 이를 서글프게 한다.
터럭 한 올까지도 세밀히게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우수성이 하나 더 느껴지는 것은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힘이 없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칫 왕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시(斜視)를 그대로 그려낸 점이 바로 그 것이다.
보물 제 1492 호
철종의 어진(御眞)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이한철(李漢喆)과 조중묵(趙重默)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김하종, 박기준, 이형록, 백영배, 유숙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봉사포본(縫紗袍本)과 군복본(軍服本)을 모사하였으나 현재 군복본만 현존하고 있다.
화면 속의 철종은 얼굴이 갸름하고 눈은 큰 편이고 사시(斜視)이다. 입부분은 손상이 심하여 파악할 수 없고 왼손은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복식은 죽전립을 쓰고 황색 길에 붉은 소매를 덧댄 군복 위에 감은 전복을 입었다. 아랫단에는 화려한 용문석이 깔려 있고, 왼쪽에는 환도가 수직으로 놓여 있다. 임금의 구군복 차림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로서 화려한 색채, 세련된 선염, 정밀하고 자세한 무늬 표현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진 御眞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로 이외에도 진용 (眞容), 진 (眞), 수용 (琇容), 성용 (聖容), 영자 (影子), 영정 (影幀), 어용 (御容), 왕상 (王像), 어영 (御影) 등 그 명칭이 다양하다. 그러나 1713년 (숙종 39), 숙종의 어진을 그릴 당시 '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 ' 이이명(李彛命)의 건의에 따라 '어진(御眞)'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 영자(影子)는 왕이 지칭하는 것이므로 신하로서는 감히 칭할 수 없고, 영정(影幀)은 그 뜻이 회화를 열어 펼친다는 뜻이니 족자(簇子)로 꾸며진 것이 아니면 칭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수용(琇容)이란 단순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니 부를 바가 못되며, 어용(御容) 역시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전신(傳神)이란 사진(寫眞)으로 불려왔으며, 또한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이라고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위의 그림은 불에 타 오른쪽 1/3이 소실된 철종 어진은 근대에 들어와 복원한 것이다. 어진의 제작은 도사 (圖寫), 추사 (追寫), 모사 (模寫)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도사(圖寫)란 왕이 살아 있을 때 그 임금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
추사(追寫)란 왕의 생존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얼굴을 그리는 경우로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몇몇 군왕이나 왕세자의 초상화는 이 방식으로 그려졌다. 모사(模寫)란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眞殿)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본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新本을 그릴 때에 일컫는 말이다.
강화도령 江華道令
출생과 가계 出生과 家系
철종의 어릴 적 이름은 이원범(李元範), 휘는 변(弁), 자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이다.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그가 서출인데다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다고 하여, 철종의 재위 기간 중 반가(班家)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철종, 이원범은 1831년 음력 6월 17일,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絪)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이원경(李元慶)과 영평군으로 추봉된 이경응(李慶應)을 낳고, 후실 부인인 파주염씨에게서 셋째 아들인 이원범(李元範)을 얻었다.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 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후에야 전계군(全溪君)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의 비극적인 末路
강화도에 숨어 살면서 농사나 짓고 나무꾼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떠꺼머리 총각이 하루 아침에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철종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강화도령은 강화도에 숨어서 산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강화도령 '이원범'은 소재가 정확히 파악되고 가끔 그의 동정이 보고되는 유배상태이었기 때문이다.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고, 英祖의 고손자이다. 영조(英祖)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는 어려서 병으로 죽고, 次男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서 죽었다. 그래서 왕위도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정조(正祖)로 이어졌다. 정조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문효세자'가 아려서 죽자, 순조(純祖)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순조에게는 외아들 '효명세자'가 있었지만,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죽었고, 이에 따라 왕위는 '효명세자'의 외아들인 헌종(憲宗)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헌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만 있었다. 그리하겨 헌종이 죽자 직계혈통으로 왕위를 이어 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24대 왕인 '헌종'이 죽자 21대 '영조'의 자손 중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3명을 제외한 모든 혈통이 끊긴 셈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는 22대 왕이 된 正祖 외에 은언군(恩彦君), 은신군(恩信君), 은전군(恩全君)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서자(庶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명의 아들과 그 후손은 모두 사도세자 못지 않은 비극적인 末路를 맞이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세력들이 후환을 우려해 正祖가 아닌 다른 왕자를 추대한 사건에 연루되어, 恩全君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이던 恩信君은 제주도에서 병으로 죽고, 恩彦君은 강화도로 다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언군의 큰 아들 '상계군'은 1779년 '홍국영'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했고, 은언군과 그의 부인 '宋氏' 그리고 큰며느리(상계군의 부인) '辛氏'는 천주교 신자임이 들어나 1801년 사약을 맏고 죽었다. 은언군의 둘째 아들 '이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1844년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이광 (철종의 아버지)'과 그의 장남 '이원경'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둘째 아들인 '이경응'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병으로 죽고, 셋째 아들만 남았는데 그가 바로 이원범, 나중에 철종이 된 사람이다.
헌종(憲宗)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가장 가까운 방계 핏줄은 바로 강화도령 이원범이었으니 그가 왕위를 계승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었다. 흔히 알듯이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떠꺼머리 총각을 그저 데려다 앉힌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 내력을 볼 때 헌종과 철종은 같은 핏줄이면서도 代를 이은 원수지간이기도 하였다. 철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작은 할아버지인 '은전군'은 고조 할아버지인 英祖의 손에 죽었고, 큰아버지인 '상계군'은 작은 할아버지인 正祖 때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또 할아버지인 '은언군'과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철종의 당숙인 순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었으며, 아버지 '이광'과 큰형 '이원경'은 순조의 손자인 헌종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철종은 자신의 집안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집안의 후계자로서 왕위를 계승받은 것이다.
강화도령, 왕위에 오르다
철종,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恩彦君)은 장조(莊祖,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의 서자(庶子)이다. 은언군은 1771년 (영조 47) 상인들에게 진 빚이 영조에게 알려져, 3년 동안유배되었다. 영조가 죽자 유배에서 풀려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정조 때에는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당시 실세이었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였으나 1780년에 죽자, 은언군의 장남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1786년 (정조 10), 아들 '담(湛 .. 후일 상계군으로 추봉됨)'이 모반죄로 유폐당하자, 은언군도 강화도에 이주하였다.
그 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우선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申)씨가 커톨릭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일로 송씨, 신씨와 함께 1801년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아들 즉,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 (全溪君) ' 이광(李壙) '은 그의 부모와 형, 형수의 죄로 연좌되어 강화부 교동으로 ?겨나 불우한 일생을 빈농으로 보내다가 강화도에서 죽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이원경(李元慶), 차남이 이경응 그리고 셋째 아들이 후일 철종이 되는 이원범(李元範)이다.
민진용의 옥 閔晉鏞의 獄
이렇게 철종 일가가 강화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던 도중, 1844년(현종 10), 민진용(閔晉鏞)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급 武人 '민진용'은 서울 동부 흥덕동에 살았는데, 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주로 김유근(金洧根), 김홍근(金弘根) 등이 좌우하다가 1844년 이들이 죽자 권력에 틈이 생겼다. 이에 민진용은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도모한 것이다.
그는 뛰어난 의술(醫術)로 전계부원군 (철종의 아버지)와 큰 아들 '이원경'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는 이원덕(李遠德)을 우선 포섭한 뒤, 뜻을 같이 하는 박순수(朴醇壽), 박시응(朴時應), 이원덕 등 세 사람과 서로 결탁하였다.
그들은 이원경(李元慶 ... 사도세자의 손자 그리고 철종의 형)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한 뒤 은밀하게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그리고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고, 이 일로 인하여 이원경(李元慶)도 사약을 맏고 죽었으나, 그의 동생인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되었다.
세도정치 ...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정조가 죽자 11세의 순조(1790~1834)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순조도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아들이니 방계 출신이다.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가 죽는 바람에 11살 순조는 정조 24년(1800)에 세자로 책봉되고 그 해 6월에 왕으로 등극한다.
순조가 15세에 친정을 하며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자, 이번에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안동김씨' 문중의 세도정치가 꼬리를 물어 이때부터 장장 60년 동안 안동김씨 세상으로 변한다. 독살설이 의심되고 있는 정조 이후, 인동김씨의 화려한 등장으로 조선왕조는 사실상 막을 매렸다고 보아야 한다. 후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안동김씨를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60년 동안 그들이 뿌려놓은 조선 몰락의 씨앗을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후세들에게 조선왕조가 욕을 얻어먹게 되는 원인은 안동김씨 일족이 이룩한 업적(?)일 것이다.
집안이 망하려면 줄줄이 꼬리를 물고 흉사만 일어난다더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리해 안동김씨 세력을 제거하려고 인재 등용 등 선정을 펴고 왕권을 회복하려 안간 힘을 쓴다. 조선왕조의 몰락은 정해진 것인지 3년간 정사를 잘 돌보던 효명세자는 22세의 펄펄한 나이로 갑자기 죽어버리고 세손인 헌종(1827~1849)이 8세에 왕위에 오른다.
조선왕실에서 보면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팔자이고, 안동김씨 가문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춤 출 판이다. 과부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8년간이나 이어졌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 발판이 더욱 굳건해진 셈이다.
김조근의 딸이자 정조의 며느리 순원왕후(1789~1857)는 남편과 손주보다 오래 산덕분에 손자인 헌종이 죽고 나서도 철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는 지대한공로를 남겨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든든한 어깨 역할을 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은 순원왕후에게 딱 들어맞는다. 역설적으로 뒤집어보면, 이 시대의 순조와 헌종은 잘 모를지언정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누구나 알 정도로 조선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켰다는 것은 안동김씨가 조선의 제왕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해답이 도출된다.
천애고아이었고, 학문도없는 농사꾼 강화도령을 왕으로 앉힌 안동김씨의 노련함은, 삼정의 문란과 공공연한 매관매직이 판을 쳐 소수의 명문가만이 잘 먹고 잘사는 시대를 이룩하고 만다. 흥선대원군과 정치밀약을 맺고 고종을 즉위시킨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 조대비 (趙大妃) '는,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헌종대에 펼쳐 조선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로 망해가는 원인을 제공한 왕비 중이 하난이다. 남편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정작 왕비 자리는 올라보지도 못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친정가문을 번창시킨 효녀이다.
조선 왕실 가문의 특징인 긴 명줄을 타고난 조대비는, 순원왕후와 철인왕후의 친정가문인 안동김씨 세력을 쓰러트리고 오래오래 살아남는다. 대원군과 손을 잡고 안동김씨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대원군은 풍양조씨마져 제거해버린다. 결국 안동김씨가 망하고 풍양조씨도 망한데 이어 전주이씨도 망히기에 이른다. 조선의 멸망이다.
수렴청정 垂簾聽政
섭정(攝政)은 왕을 대리하여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는 사람을 말한다. 왕세자에 의한 섭정은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비(大妃) 등과 같이 여자일 경우에는 '수렴청정' 이라 하고 신하일 경우에는 섭정승(攝政丞)이라고 한다.조선 시대 역대 왕조에서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되기까지 일정기간 왕의 어머니 (王大妃) 또는 할머니 (大王大妃)가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다.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신하를 접견할 때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그 앞에 발을 드리운 데서 유래한다.
강화도령, 왕위에 오르다
1849년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강화도령 '이원범'은 19세의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 조차 무시한 처사이었다. 철종이 항렬상 선왕인 헌종의 후사는 될 수 없어도, 헌종의 부친인 익종(翼宗)의 후사가 될 수는 있었다. 철종의 즉위에 즈음하여 순원왕후는 다음과 같은 하교문을 내렸다. 철종실록 1849년 6월9일의 기록이다.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은 영조(英祖)의 혈손으로 지난 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왓으니, 옛날의 제왕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한 이가 있었는데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고 백성 위주의 정책을 펼쳐 끝내 훙륭한 군주가 되었오. 지금의 주상도 이를 본 받아 ' 애민(愛民) '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 날의 공부가 어떠한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가 올바르게 되는 것이오. 정성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 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의 친정 哲宗의 親政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김씨 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에서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民亂)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애민정책 愛民政策
친정을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5만냥 그리고 사영권삼포세(사영권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 주도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하기도 했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들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백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하였다.
삼정의 문란 三政의 紊亂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三政)이 문란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의 세 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나는 현상을 ' 삼정의 문란 '이라고 표현한다.
진주민란 晉州民亂
진주민란은 1862년 (철종 13) 봄, 경상도진주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로 ' 임술농민항쟁 '이라고도 불린다. 진주민란은 '홍경래의 난' 이후 거의 쉴 새 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소규모의 민란 중 가장 두드러진 농민 봉기의 예이며, 당시 경상도우병사로 부임한 백락신(白樂莘)의 극심한 탐학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갖은 명목으로 거액의 세금을 강제 징수하여 사욕을 채워서 민읍(民邑)을 소란케 하였다.
이에 대해 전직의 불평 관리들이 주모가 되어 인근의 여러 읍과 민중을 규합하여 간리(奸吏)를 죽이고, 부민(富民)과 향리(鄕吏)의 집을 불사르는 변란이 일어났다. 유계춘, 이귀재 등이 중심이 되어 철시(철시)를 주도하면서 저항하였다. 조선조정에서는 백낙신과 진주목사 채병원(蔡秉員)을 파직하고 민중을 진무케 하였다. 그러나 난의 주모자들은 지방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보목심에 불타는 그 지방의 향리들에게 가차없이 처형당하였다. 이 '진주민란'의 영향은 매우 심각하여 이후 삼남 일대에는 민란의 큰 홍수가 잇달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철종 代에 최제우가 동학운동을 일으키는 사상적 바탕이되었다.
삼정이정청 三政이政廳
잇달은 민란에 철종은 1862년 삼정의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삼정이정청'이라는 임시 기관을 만들었다. 그해에 일어난 진주민란을 비롯한 삼남지방의 농민봉기와 관련하여 그 수숩방안을 마련하고자 만들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세기 초에는 '홍경래의 난'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조정에서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삼정을 이정하려고 하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그리하여 삼정의 운영에는 여전히 폐단이 많았고, 그 결과 19세기 중엽 삼남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를 수습하고자 조정에서는 안핵사(按劾使), 선무사(宣撫使), 암행어사 등을 파견하여 대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때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朴珪壽)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그 수습책을 삼정의 이정에서 찾았다. 그 방법으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삼정 문제를 연구하고 또 중론(衆論)을 모아서 수습책을 마련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 5월26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정원용(鄭元容), 김재근(金在根), 조두순(趙斗淳) 등 원로들을 이정청의 총재관(摠裁官)으로, 김병익(金炳翼) 등 판서급을 이정청 당상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더불어 철종은 6월10일 시험의 형식으로 전국의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三政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는 교서를 내렸다. 이정청은 여러 의견을 검토한 뒤 군정(軍政)과 전정(田政)은 옛 제도를 기본으로 그 폐단만을 고치며, 환정(還政)은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토지에 부과하는 ' 파환귀결(罷還鬼結) '을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철종의 죽음
한편 1860년 경주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차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누어 지내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33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高宗의 등극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그의 7촌 조카뻘이며,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계승하였다. 철종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안동김씨 세력과 풍양조씨 세력은 서로 옥새를 손에 넣으려고 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미 신정왕후와 미리 밀계를 맺은 상태이었다. 철종의 임조을 지켜본 신정왕후는 재빨리 어보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한다. 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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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