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은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고 논쟁을 벌인 사람은 주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한통속이었고, 굳이 둘 사이를 구별할 필요도 없이 율법학자들은 거의 바리새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처음으로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사두개인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들로서 거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두 집단은 서로 성격이 달랐고 신앙관도 달라서 서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수님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복음서는 묘사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게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어디서 들으신 것 같지 않습니까? 12장에서도 나왔던 말씀입니다. 12장 38~3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38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16장 4절과 12장 39절, 그러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 양쪽의 기록이 거의 똑같습니다. 다른 것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12장에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인데, 16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괄호 안에 있는 본문, 그러니까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라고 되어 있는 본문은 사본에 따라, 있는 사본도 있고 없는 사본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내용이 없는 사본이 더 오래된 사본이고 원본에 가까울 가능성이 큽니다. 필사하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경우는 많아도 빼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꾸짖는 듯한 이 말씀은 후대에 첨부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같은 본문에 있는 내용이 어느 사본에는 있고 어느 사본에는 없기도 하고, 여기 있는 내용이 저기에도 중복되어 실려 있기도 합니다. 이게 성서의 진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성서는 완전무결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이 저 책을 보고 베낀 부분도 많고, 베낄 때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실수로 잘못 베끼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내용 자체를 바꾼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기 공동체의 입장을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라고 기록된 말씀 중에서, 정말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절반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절반이 아니라 20퍼센트도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하셨다는 말씀 중에 진짜 예수님의 말씀은 거의 없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비평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런 설명을 교회에서 담임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서의 진실을 바로 알 수 있고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목사들 가운데 강단에서 제대로 설교하는 목사들은 많지 않습니다. 조직에 속한 사람은 조직이 싫어하는 말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종교인이 아닌 일반 교우님들이 성서의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제가 이 쉽지 않은 작업을 하는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담겨있는 13~16절을 보겠습니다.
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을 예언자의 반열로 이해하는 백성들의 반응에 대해 별다른 말씀이 없었던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는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라고 하시면서 교회의 탄생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8~19절을 보겠습니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넓고 평평한 형태의 큰 바위라는 말이지요. 이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서, 또는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본문에 근거해서 베드로를 천국열쇠를 받은 초대 교황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해석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열쇠를 주신 것은, 베드로라는 인물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주신 것이기에,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제자들도 천국열쇠를 받은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개혁자들은 마태복음 18장 18절을 제시했습니다. 해당 본문을 보겠습니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 라는 말은 베드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너희’라는 말이 열두 제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열둘이라는 근거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큰 사람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천국의 열쇠를 누구에게 주셨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가톨릭은 ‘베드로와 그의 지위를 잇는 교황에게’, 개신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해석이 맞느냐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본문 몇 군데를 근거로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하는 것은 여전히 성서무오설에 머무는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과 개신교 뿐 아니라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그리스도교 형제교단 모두의 전통과 해석을 그대로 존중해주고 싶습니다. 다만 그 전통과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신자들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1~23절을 보겠습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예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실제로 하셨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부활신앙을 받아들인 서기 70년대 이후의 복음서 기자들이, 그랬다고 전해져오는 전승 자료를 인용했거나, 예수님의 입을 빌어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사탄이라고 가혹하게 말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4~26절을 보겠습니다.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일반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내용의 훈시는 중요한 전투를 앞둔 병사들에게 총사령관이 출정명령을 내리면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하는 연설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출정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연설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자신들의 사명을 악한 세상과의 전쟁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병사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세상과 싸워 정의와 선을 이루겠다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그 의지는 높이 사되, 세상을 오직 악과 선으로 나누고, 자신들만이 정의롭고 옳다는 배타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시는 본문의 예수께서 하신 연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27~28절입니다.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죽기 전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인사를 나눌 때마다 ‘마라나 타!’ 라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주께서 곧 오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렇게 기대했지만, 초대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다 죽을 때까지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들의 기대를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고대인들이 당시의 세계관 아래서 기대한 애달픈 희망사항일 뿐이지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